Chapter: 제 36화 비파 덕후 가주를 위한 두 무사의 선물제 36화 비파 덕후 가주를 위한 두 무사의 선물연가의 집무실, 오늘도 어김없이 괴이한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뚱땅, 뚱땅, 콰광!비파의 선율이라기보다는 전장에서 방패를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었다. 월린은 비파 위에 밥주걱을 세워 쥔 채, 온몸으로 락 스피릿을 불태우며 비파의 현을 사정없이 뜯고 있었다.하지만 가주의 독특한 방식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악보까지 구상했던 예음조차 눈가에 미세한 실룩거림이 일었다.'그래... 내가 가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맹세했거늘... 저것 또한 저분만의 깊은 뜻이 있겠지...'머리로는 이해하려 애썼지만, 귓가를 강타하는 이색적인 타격음 앞에서 도저히 성자의 경지에 오르기는 힘들었다.그녀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이 웅장한(?) 연주가 끝나기만을 경건하게 기도할 뿐이었다.연가 집무실 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고요하고 우아한 비파의 선율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연무장에서 땀을 식히며 지나가던 연호와 유현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창호지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흡사 징을 치거나 전장에서 방패를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소리였다. 두 무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가주께서 즐거워하시는 그 '음악'이, 비록 세간의 미학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두 사람의 눈에는 그저 눈부신 광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월린의 기행을 깎아내리려는 연가의 외부 세력이나 시기하는 눈초리들이 언제 어디서 혀를 찰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형님."유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무뚝뚝한 그의 말투에는 가주를 향한 맹목적이고도 처절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가주님께서는 가주님만의 세계를 구현하시는 중입니다. 허나, 저 밥주걱이 월린님의 고귀한 손을 더럽히고,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가주의 체통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손끝은 이미 검집을 꽉 쥐고 있었다."옳은 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가주님의 그 열정을 가장 완벽하게 뒷
Last Updated: 2026-09-23
Chapter: 제 35화 현의 선율과 검의 궤적 제 35화 현의 선율과 검의 궤적 정자 위에 자리를 잡은 월린은 그 광경을 보며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사실 월린의 머릿속은 현재 연가의 훈련장이 아니라, 과거 웹소설 작가 시절 밤을 지새우며 써 내려갔던 무협지의 한 장면 그 자체였다.'그래, 바로 저거야. 연호가 왼쪽에서 공격을 흘리면 유현이가 오른쪽 빈틈을 완벽하게 커버하며 들어오는 저 흐름! 저건 단순히 검술이 아니야. 두 무사 간의 관계성이 쌓인 서사지, 서사! 서로를 믿지 않는 척, 무심한 척하면서도 실상은 위기의 순간에 등을 맞대고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저 묵묵한 브로맨스! 이게 바로 무협의 낭만 아니겠어? 현실에서 직관하는 맛은 차원이 다르구나!'월린의 눈동자가 오타쿠 광기로 번뜩였다. 뇌내에서는 이미 연호와 유현이 겪을 험난한 고난과, 그 과정에서 피어날 끈끈한 유대, 그리고 비극적인 서사까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월린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망상을 이어갔다."캬, 좋다! 저 찰나의 눈빛 교환! 저게 바로 '쌍벽'의 진수지. 연호의 검이 호랑이라면 유현의 검은 용이라. 둘이 합쳐지면 가히 천하무적일 것이야. 저 조합이라면 독자들 반응은 무조건 폭발인데... 하필 이 세계엔 웹소설 플랫폼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월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무장 아래에서 두 무사는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합을 맞추고 있었다. 유현은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예리한 눈빛으로 연호의 등 뒤를 살폈다."형님, 셋을 셀 때 공중으로 도약하십시오. 제가 하단을 휩쓸겠습니다.""알았다."단 세 마디의 대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호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내리찍자 유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회전하며 상대의 하단을 쓸어버렸다. 연호의 검이 회전할 때 유현은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빈틈을 채웠다. 둘의 검이 맞물리며 발생하는 금속음은 규칙적이고도 위협적이었다. 제 형님의 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었다. 월린은
Last Updated: 2026-09-22
Chapter: 제 34화 ‘어머니’라는 어두운 그늘 제 34화 ‘어머니’라는 어두운 그늘 연가의 정문 앞, 평화롭던 공기가 소란에 휩싸였다. 정문 수문장들이 문 앞의 여인과 사내들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서 연가를 올려다보던 은교는 비단옷을 걸치고도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내가 연호의 어미다! 왜 가주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 거냐!"연호가 연가에 들어간 뒤로 은교의 삶은 통째로 변했다. 연호가 매달 부치는 돈으로 집안은 살만해졌고, '연호의 본가'라는 소문 덕분에 침선가는 손님들로 붐볐다. 하지만 은교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녀에게 연호는 가문을 일으킬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훈련 중 소란을 듣고 달려온 연호는 정문 앞의 은교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꺼이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악몽이 현재의 평온을 침범하고 있었다."연호야!"은교는 아들을 보자마자 계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대박이 났다. 이제는 옷감뿐만 아니라 상단들도 우리를 찾더구나. 연호야, 이젠 엄연히 차기 가주의 남첩 아니냐? 대상단이라던 정실 남편 분은 육촌까지 특혜가 있다던데, 우리가 연가의 인맥을 빌려 무역권을 따내면 우리도 금방 대상단이 될 거다. 당장 가주에게 말해라!"연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흉터가 남은 손바닥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곁에서 유현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은 연호를 걱정하면서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어머니,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일 수 없습니다.""허락? 내가 네 어미다! 네가 내 덕에 사람 구실하고 사는 거 아니냐? 그까짓 가주가 뭐 대단하다고 유세냐!"분을 못 이긴 은교가 연호의 뺨을 치려 손을 번쩍 치켜올렸다.그 찰나, 유현이 움직였다."악!"은교의 손목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다가온 유현이 은교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의 눈빛은 서늘했다."어머니라고 하셨습니까."유현의 말투는 건조하고 딱딱했다. 그는 은교를 보지도 않은 채 손목을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제 33화 흉터를 들여다보는 시선제 33화 흉터를 들여다보는 시선연가의 식사 자리는 늘 북적였다. 가문의 세력만큼이나 식탁 위는 풍성했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온기를 채워주는 것은 차기 가주인 월린과 좌우에 나란히 앉은 연호와유현이었다. 그들은 월린의 가장 든든한 방패이자, 차가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안식처였다.월린은 양옆에 앉은 두 사내의 커다란 손을 하나씩 덥석 잡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자, 오늘 반찬은 태원 씨가 특별히 보내준 고기 요리야! 우리 대장님들, 이 넓은 저택과 나를 지키려면 덩치 유지하는 데 이 정도는 당연히 먹어줘야지."월린의 엉뚱하면서도 다정한 행동에 연호와 유현은 익숙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녀의 밝은 표정 이면에 문득 멈춰 선 시선을 눈치채곤 눈빛을 가라앉혔다.월린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연호의 왼쪽 손바닥이었다. 젓가락을 쥔 손바닥 한가운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하얗게 뒤틀린 흉터가 유독 도드라져 있었다. 훈련 중 스치듯 생긴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아주 깊고 무자비한 무언가에 강하게 짓눌렸던 처절한 흔적이었다.유현은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을 지켜보았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말없는 아픔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밤이 깊어가고, 월린은 결국 연호를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달빛이 창호지 문을 비추는 고요한 방 안. 월린은 달콤한 설탕 과자가 담긴 접시를 연호에게 밀어주었다. 연호가 긴장한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자 하나를 집어 그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연호, 이거 먹어봐. 오늘 시장에서 가장 달콤한 걸로 구해온 거야."자연스럽게 과자를 먹여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커다란 왼쪽 손을 펼쳤다.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바닥,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흉터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월린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났다."이거... 옛날에 엄청 아프지 않았어? 무사 훈련 중 생긴 흔한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제 32화 [연호 과거]버려진 자식의 기억제 32화 [연호 과거]버려진 자식의 기억바람을 가르는 칼날은 연무장의 적막을 찢어 놓았다. 연호의 상체는 쉼 없이 흐르는 땀으로 젖어, 햇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결이 살아있는 탄탄한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남성적인 매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했다. 연가의 모든 무사들이 그를 보며 감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에게 연호는 정점에 선 대장이자, 완벽한 신체의 소유자였으니까.하지만 그 화려한 근육 속에 깃든 깊은 골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매일의 루틴은 단련이 아닌 생존이었고 맹목적인 인정 욕구의 결과물이었다.연호의 과거 기억 속에서 친 어머니 이은교는 ‘가문의 서열'을 먼저 쥐고 있었다.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차녀였던 은교는 대대로 정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박복한 집안'의 징크스를 안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해 비슷한 수준의 귀족과 혼인했으나 자식 하나 없이 남편마저 병으로 일찍 여의고 말았다. 가문이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급박하게 남첩을 들였다. 그가 바로 침선가(針線家)를 운영하던 중소 상인, 연호의 아버지 재우였다.어머니에게 이 결혼은 애정이 아닌 수단이었다. 그녀는 재우의 손재주를 이용해 침선가를 일으켰다. 재우가 밤낮으로 옷을 짓고 기물을 수선하면, 은교는 그 옷감을 들고 귀족가를 돌며 영업을 했다."너는 귀족인 아들이다. .. 네가 정녕 평생 옷감이나 깁다가 죽을 셈이냐?"어머니의 히스테리는 매일 밤 집안을 울렸다. 귀족의 혈통을 가졌음에도 '상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귀족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 은교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귀족가의 품위’를 갉는다며집안 등급에 막혀 큰 상단이 되지 못한다는 열등감은 고스란히 연호에게 투사되었다. 맛있는 간식이 생기면 은교는 한 살 위 누나인 수빈의 입에 먼저 넣어주었다. 연호는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는 아버지 재우를 도와 수선하는 기물을 만들며 상인으로서의 기술을 익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제 31화 청연(淸延)의 위계 그리고 연가(連家)의 무인들제 31화. 청연(淸延)의 위계 그리고 연가(連家)의 무인들청연국(淸延國)은 철저히 계급과 직업이 명시된 나라였다. 이 땅에서 사내들이 택할 수 있는 삶의 궤적은 대개 그들이 발붙인 땅의 비옥함과 가문의 뿌리, 그리고 타고난 기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기생으로 화려한 막을 올리거나, 시종으로 평생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거나 상단에 몸을 실어 부를 쫓거나, 혹은 무인으로서 칼을 쥐는 것.그중에서도 무인이라는 직업은 단순한 힘의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았다.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해서 전장에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지적 능력, 전술적 전투 센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구의 칼이 되어줄 것인가’라는 가문빨이 뒤섞인 복합적인 체계였다.월린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서적들을 정리하며 청연국의 사회를 분석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계급도는 명확했다. 황실 전속 무사가 정점에 있고, 그 아래로 귀족 가문의 호위무사들이 있었다. 중소 상인 그 이하 집안에서 올라온 이들은 흔히 ‘문지기’라 일컬어지는 하급 무사의 범주에 묶였다.하지만 연가는 달랐다. 본래 무사양성기관에서 하급 무사로 키워졌으나 연호와 유현은 월린의 어머니, 즉 전대 가주에게 무인대회에서 발탁되어 간택받았다. 그들은 연가 라는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뼈를 깎는 훈련을 견뎌냈고, 마침내 실력을 인정받아 무사들의 우두머리, ‘대장’의 위치에 올랐다.‘이세계는 설정이 되게 복잡하네…. 강한 무사들이 왜 그토록 귀족이나 부유층의 첩으로 간택당하길 바라는지 이해가 돼.’가민은 망원경으로 멀리 시장을 살폈다. 황실의 전속 무사가 되어 쳇바퀴 돌듯 궁을 지키는 것보다, 세력 있는 귀족 가문의 남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른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무사라는 계급은 첩으로서 간택당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재료였다. 튼튼한 체구와 단련된 정신, 그리고 복종이라는 가치를 체득한 이들이니까. 연호와 유현은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귀족 호위무사라는 정점에 도달한 산증인들이었다
Last Updated: 2026-09-14
Chapter: 제 34화 안개 너머의 기만, 무너지는 오감(五感) 제 34화 안개 너머의 기만, 무너지는 오감(五感) 영주의 거처를 감싼 안개,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숨결처럼 무사들의 폐부로 파고들어 예민한 신경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마당 한복판에서 영주의 화려한 예복을 걸친 쿠로기리는 기괴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자리 주위로 안개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일렁였다.“어찌하여 그리 경직되어 있습니까? 영주를 뵙고자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렌이 즉각 반응했다. 요기를 정화하는 단검을 고쳐 쥔 그녀의 몸이 바람을 갈랐다. 정면을 파고드는 무사의 일격은 허공을 가르는 찰나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예리했다.렌의 배후에서 솟구쳐 오른 가란이 거대한 도끼를 내리꽂았다. 지면을 박차고 도약한 가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 대지를 뒤흔들 파괴력이었으나 쿠로기리는 연기처럼 흩어지며 자취를 감췄다.가란은 허공을 가른 도끼를 땅에 짓이긴 채, 안개 너머 어딘가에 숨어 있을 쿠로기리를 향해 차갑게 읊조렸다.“영주의 예복을 걸치고 영주를 사칭하는 요물같은 자식이,경비병들은 어디에 있지? 숨어있지 말고 당장 기어 나와라.”안개 속에서 쿠로기리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저는 그저 이곳의 주인이 사라진 자리를 지키는 관리자일 뿐입니다.”가란은 도끼날 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끼가 안개와 맞닿을 때마다 날의 강철이 마치 녹슨 고철처럼 미세하게 부식되고 있었다. 저 녀석은 대상을 갉아먹는 술법을 쓰고 있다. 자신의 전력을 다 보여주었다간 이 도끼가 형체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를 스쳤다. 가란은 이를 악물었다.이 간보기식 대치는 렌과 시온이 정체를 파악할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쿠로기리 또한 가란의 힘을 경계하며 안개 속에서 교묘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때였다. 숲 어딘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울렸다.슈슈슉—!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든 수리검이 렌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렌은 반사적으로 몸을
Last Updated: 2026-09-21
Chapter: 제 33화 안개 속에 잠긴 고풍스러운 기와집제 33화 안개 속에 잠긴 고풍스러운 기와집벽류진을 떠나 영주의 영역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도와 다를 바 없었다. 험준한 산세와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뚫고, 세 무사는 마침내 영주 거처의 뒷문 앞에 도달했다. 그곳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성 전체가 흐린 먹구름 같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보초를 서야 할 경비원들은 온데간데없었다.무사라면 본능적으로 오감이 예민하고 반사신경이 뛰어나기 마련이나,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만약 시온의 극도로 발달한 청각과 시각 탐지 능력이 없었다면, 렌과 가란은 보이지 않는 함정에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시온은 허공을 떠도는 미세한 요기의 파동을 읽어내며 렌과 가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왼쪽이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공기의 흐름이 뒤틀려 있어.’시온의 속삭임에 렌은 요기를 정화하며 은밀하게 움직였고, 가란은 거대 도끼의 묵직한 존재감을 숨기며 그림자 속을 파고들었다. 성은 겉으로 보기엔 흔적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마치 유령들이 깃든 듯 스산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안개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무사들의 발밑을 감아쥐고 그들의 기운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끈적한 저항감에 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안개… 평범한 게 아닙니다. 기척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어. 시온, 계속해서 주변 기류를 살펴주시죠.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알려주세요.”렌이 낮게 읊조리며 정면을 주시했다. 가란은 언제든 도끼를 휘두를 준비를 하며 묵직한 돌파구를 확보했다. 렌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요기를 정화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진입했다. 바로 그때였다.“누구시죠?”낮고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다. 마당 한가운데, 영주들이 입는 화려한 예복을 걸친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180센티미터의 큰 키에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 육안으로는 2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빼어난 용모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
Last Updated: 2026-09-18
Chapter: 제 32화 변질된 생명과 어둠의 예고제 32화 변질된 생명과 어둠의 예고신지로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아래, 비릿한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에는 죽은 까마귀 요괴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핀셋을 든 신지로의 손은 분주했고, 야츠키는 그 곁에서 조용히 관찰하며 보조를 맞췄다. 조명은 사체의 기괴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 소리가 정적을 깼다.“이 장기들의 위치를 봐. 분명 까마귀의 생태와는 전혀 달라.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고, 군데군데 부식된 흔적이 있어. 게다가 이 끈적한 약물… 대체 무엇을 섞은 거지?”신지로가 메스를 깊숙이 찔러 넣자,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인 그에게는 맡기 힘든 짙은 비린내였다. 분석을 거듭할수록 까마귀의 내부에서 기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사체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안개는 연구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고, 등불의 빛마저 왜곡시켰다. 그때, 야츠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순식간에 손을 뻗어 신지로의 코와 입을 단단히 막았다.“숨을 쉬지 마세요.”야츠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통해 전달되는 기운은 불쾌할 정도로 오래된, 썩은 늪과도 같은 고대의 요기였다.“이건 보통의 요기가 아니에요. 저보다 훨씬 오래된 기운이죠. 도깨비의 혈통을 타고난 자들이라면 정신력이 흐려지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일반적인 생물이나 평범한 무기라면 이 까마귀의 장기들처럼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질 거예요. 인간인 당신에겐 더 치명적일 테니 조심하세요.”신지로는 야츠키의 손을 부드럽게 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사체를 응시했다. 메스를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의학자로서 이토록 뒤틀린 생명체를 마주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았다. 사체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받은 기운은 단순한 독이 아니라 생명의 근간을 갉아먹는 침식에 가까웠다.“까마귀가 무언가 잘못 먹은 게 아니야.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 연구와 융합의 산물이지. 그쪽에도 나 같은 의학자가 있는 모양이
Last Updated: 2026-09-17
Chapter: 제 31화 누군가의 ‘도구’가 된다는 것제 31화 누군가의 ‘도구’가 된다는 것벽류진의 하늘 위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테츠잔의 독수리가 긴 비행 끝에 지친 날개를 접으며 연무장 한가운데로 곤두박질치듯 내려앉았다. 테츠잔이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오른팔을 뻗자 독수리는 익숙한 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발목에 묶인 서신 매듭은 이질적일 정도로 매끄럽고 차가웠다.테츠잔은 매듭을 푸는 손끝에서 묘한 떨림을 느꼈다. 종이에서는 평소와 다른 기분 나쁜 향이 났고 서신을 펼친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영주들의 회의를 거쳐 정리된 글감은 빈틈없이 빽빽했다. 하지만 테츠잔은 영주들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자신들의 가문과 유복함만을 내세우며 무사들을 그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피 흘리는 방패로만 여기던 자들이었다. 도깨비가 마을을 짓밟고 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그들은 가장 먼저 하늘로 도망칠 궁리를 하던 비겁한 자들이 아니었던가. “이게… 영주들의 서신입니까?” 곁을 지키던 미츠키가 다가와 서신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도 테츠잔과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너무도 완벽했다. 테츠잔은 과거, 영주들이 무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들의 성벽을 높이 쌓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무사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위로 대신 '대체할 인력은 없는가'를 먼저 물었다. 그런 자들이 '공생'을 운운하다니 이 서신은 독이 든 사탕과 같았다. 그는 독수리의 깃털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이 서신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이 희생되었을지 짐작했다.벽류진과 떨어진 또 하나의 무사들의 거처 훈련장 한쪽에서는 일반 무사들이 땀범벅이 된 채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그들은 영주가 보낸 서신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오늘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렌은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무사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한 무사가 힘겨운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훈련으로 인해 바닥에 파
Last Updated: 2026-09-14
Chapter: 제 30화 붉고 선명하게 피어날 정원제 30화피비린내가 잦아든 벽류진의 마당은 다시 기묘한 정적에 잠겼다. 괴물 까마귀들이 남긴 검은 깃털과 파괴된 잔해들 사이로, 야츠키가 정성껏 키워온 꽃들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붉고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야츠키는 손에 든 지우산을 털며,전투의 여파로 엉망이 된 화단 앞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살육의 전율 대신에 짓밟힌 꽃잎을 향한 안타까움만이 서려 있었다."이 꽃들은... 다 제가 직접 피워낸 것들인데."그녀의 시선은 놈들의 흉측한 사체보다 꺾여버린 줄기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야츠키에게 이곳은 자신을 가둔 요새였지만, 동시에 매일 아침 함께 꽃향기를 나누고 정원을 가꿔온 무사들과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웠고 그것은 그녀에게 지배가 아닌 '생존'과 '정(情)'이라는 이름의 유대감이었다.야츠키는 전투 중에 렌의 팔에 깊게 패인 상처와 놈들의 공격을 받아내느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시온을 번갈아 보았다. 시온은 방금 전까지 참월도를 휘두르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그 모습 그대로, 피비린내가 밴 칼날을 쥔 채 야츠키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 곳곳에는 놈들의 끈적한 체액과 잿빛 먼지가 가득했지만, 그들의 눈은 오직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다. "시온님, 괜찮아요? 렌도요. 다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야츠키의 말투에는 어떠한 권위도 전략적인 계산도 없었다. 그저 함께 정원을 돌보던 이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묻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순수한 걱정만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렌의 상처 입은 팔을 조심스럽게 살피려 하자 렌이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레말했다."야츠키님,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피가 묻습니다. 당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두렵습니다."가란은 도끼를 땅에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평소 야츠키를 '가둬야 할 위험한 도깨비'라고만 정의해 왔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위험을 감수했던 그녀의 등을 보았던 기억이 뇌리에 박혀 있
Last Updated: 2026-09-11
Chapter: 제 29화 잿빛 하늘의 흉물스러운 침입자제 29화 벽류진은 이제 더 이상 삭막한 요새가 아니었다. 며칠 사이, 요새의 돌담과 틈새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했다. 야츠키가 정원을 거닐 때마다 그녀의 숨결과 손길이 닿은 자리에 은빛 가루가 흩날렸고, 잿빛이었던 돌바닥은 어느새 향기로운 정원으로 둔갑했다. 놀라운 것은 이 기이한 변화를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테츠잔은 침묵했고, 무사들은 홀린 듯 그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이것이 요새를 침식하는 요기임을 눈치채고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그녀의 향기에 깊이 잠식되어 있었다.렌과 가란은 오늘도 보초를 서며 야츠키를 관찰했다. 그녀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허공을 매만질 때마다 꽃봉오리가 톡톡 터지며 피어났다. 그 아름다운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사들의 핏속에 흐르는 흉포함이 조금씩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시온은 야츠키의 곁에 머물며 열병을 앓던 중이었으나 마치 신이 그녀의 곁에 있는 그를 질투라도 하듯 급격히 호전되었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묵묵히 밀린 업무를 처리하며 야츠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야츠키가 손끝으로 허공에 은빛 선을 그을 때마다 발생하는 미세한 요기의 파동이, 시온의 심장박동을 불규칙하게 흔들어놓고 있었다. '저토록 무해해 보이는 존재가,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가.' 시온은 참월도 자루를 꽉 쥐며 속으로 삼켰다.그때였다."까악, 까아악-!"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하늘을 찢었다. 맑던 하늘이 순식간에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나타난 것은 까마귀 다섯 마리였다. 놈들은 일반적인 새의 형상을 비웃듯 날개 폭만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깃털 사이로 썩은 살점과 쇠붙이가 뒤틀려 융합된 마치 누군가 저주받은 욕망으로 재창조한 흉물들이었다. 놈들이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요새 상공에는 불쾌한 악취와 함께 검은 깃털 가루가 비처럼 쏟아졌다."전원 전투 준비! 저건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유우가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그는 최전방에서 직접 검을 휘두르지 않았으나, 적의 움직임을 읽고 무사들의 위
Last Updated: 202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