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 5화 망원경 너머의 수상한 세계제 5화.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진홍빛 장막을 투과해 붉은 광침처럼 눈꺼풀을 찔러왔다. 가민은 자단나무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탈출은 삼엄한 경비망 덕에 물 건너갔고, 절세미녀의 육체는 거울을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며, 얼굴도 모르는 남편은 글씨체마저 유죄다. 이쯤 되니 대한민국에서 구르며 다져진 짠내인생 방구석 작가의 짬밥과 고질적인 직업병이 서서히 도지기 시작했다.‘안 되겠다. 무작정 들이받는 건 머리나쁜 하수나 하는 짓이지.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자. 독자들도 개연성 없는 멍청한 주인공 전개는 싫어하니까, 이 세계관의 스펙터클한 스케일부터 샅샅이 분석하는 게 순서야.’가민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 부드러운 붉은 우단 천에 싸여 있는 기묘한 물건으로 향했다.얼핏 보아도 이 시대의 순수한 동양적 기술력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한, 구리와 금박으로 장식된 원통형 기물이었다. 서역의 대무역상인 집안의 장남인 남편 태원이 바다 건너 이국땅에서 들여와 선물했다는 최고급 수입산 ‘망원경’이었다.가민은 호기심 어린 손길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겉면에 새겨진 정교한 태엽 문양을 만지작거리며 한쪽 눈을 감고 렌즈에 눈을 대자, 놋거울을 볼 때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는 광경이 망원경 너머로 펼쳐졌다.“……와, 진짜 이건 뭐, 집이 아니라 거의 민속촌을 통째로 산 수준이네.”연가의 본가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대륙풍의 웅장한 기와지붕과 조선식의 단아한 회랑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중정의 정원에는 청연국에서도 보기 드문 기이한 남방의 화초들이 만발해 있었다. 가민은 서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망원경의 초점을 조금 더 아래로, 서쪽 연무장 쪽으로 조심스럽게 돌렸다.스각-. 파앗!서슬 퍼런 검기가 망원경의 둥근 프레임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저번 밤, 그녀의 눈물겨운 야반도주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빛의 속도로 막아섰던 미남 호위무사 중 한 명인 ‘유현’이었다. 유현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휘날리며 마치 한 편의 예
Last Updated: 2026-08-08
Chapter: 제 4화 탈출은 지능 순……이 아니었네제 4화. “자, 임(壬), 계(癸), 축(丑), 인(寅)…… 아, 옘병. 이순서가 아닌가?”침상 안쪽, 두꺼운 황금빛 비단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가민은 희고 가녀린 손가락을 바쁘게 꼬며 헛손질을 해댔다. 과거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골방 작가 생활에 이르기까지, 온갖 액션 판타지 만화와 연재 소설을 섭렵했던 유서 깊은 오타쿠로서의 이력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차원 이동이나 영혼 빙의 같은 장르소설 속 진부한 설정이 아니라 엄청난 내공을 가진 무림 고수가 자신에게 걸어버린 지독한 환술이나 흑마술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남았던 탓이다.“파병(破兵)! 해(解)!육체의 영혼이 명한다 해체!이것도 아닌가?왜 인술이 안 풀리냐고, 왜!”어릴 적 화면으로 보며 밤새 따라 하던 고전 닌자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마디마디 관절이 뚝뚝 꺾이도록 야무지게 인(印)을 맺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냈을 때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화려함 극치를 달리는 대륙풍 자단나무 침상과 조선의 선비 방처럼 정갈하게 짜인 문창살이었다. 환술 브레이크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가민은 제 처지가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이불 속에서 허탈하게 헛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대한민국에서 스물 아홉해를 버티며 진상들과 싸워온 차가운 이성은 이제 잔인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꿈도 아니고 연출도 아니며 백 퍼센트 순도의 현실이었다.“아씨! 또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묘한 수신호를 하시며 흐느끼시면 어찌합니까!지은 의원님이 낙상으로 인해 뇌수가 세차게 흔들려 그러는 것이니,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사옵니다!”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불을 홱 걷어낸 전담 시녀 채담은 얼이 빠져 있는 가민—아니, 이제는 연월린이 된 그녀를 향해 속사포 같은 잔소리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채담은 주인의 머리가 아주 깨끗하게 포맷되었다고 굳게 믿는지, 빗질을 해주는 내내 가문의 계보와 청연국의 정세를 쉴 새 없이 귀에 주입했다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제 3화. 네? 제가 '부인'이라고요? 제 3화. 네? 제가 '부인'이라고요? “……가민아, 아유..우리 귀여운 똥강아지.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맨날 그렇게 모니터만 보고 밤을 새우니까 몸이 축나지.어여 일어나”멀리서 들려오는 다정하고 투박한 목소리. 분명 외할머니였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가 저승 입구에서 손녀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생각보다 무덤덤했고, 사후 세계는 전설속 이야기보단 훨씬 따뜻했다. 가민은 눈을 뜨기도 전에 습관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러움을 토로했다.“할머니…… 나 이번에 현대물 연애 웹소설 유료 연재 중이었단 말이야. 이제 겨우 중반부인 60화 고지 넘어서 완결까지 성실하게 타이핑만 하면 됐는데, 그거 마무리도 못 짓고 와서 어떡해. 안 그래도 조회수 미적지근해서 독자들한테 미안해 죽겠는데…… 나 능력없어서 지옥 가려나 봐.”그런데 이상했다.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분명 세월의 무게가 서린 묵직한 음성이어야 했는데,지금 귓가에 사정없이 꽂히는 소리는 맑고 청아하다 못해 앳된 10대의 얇은 음색이었다.“아씨! 아씨, 정신이 드시옵니까? 제발 눈 좀 떠보시옵소서! 이대로 영영 안 깨어나시는 줄 알고 이 채담이의 수명이 십 년은 단축되는 줄 알았사옵니다!”‘아씨? ..채담? 그건 또 무슨 삼류 고전 소설 같은 이름인데…….’가민은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는 어둠을 헤치고 번쩍 눈을 떴다.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대신, 은은한 침향 냄새가 깊게 배어든 화려한 진홍빛 비단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자 대륙의 황궁에서나 볼 법한 거대하고 화려한 자단나무 침상과 조선의 서원처럼 단정하게 짜인 문창살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방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금박 실로 정교하게 백호랑이가 수놓아진 대형 케노피 장막까지, 그야말로 대륙과 조선의 미감이 화려하게 섞인 독특한 공간이었다.“미친…이거…… 실화냐? …나 지금 퓨전 사극 세트장까지 날라간거임..?”가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침
Last Updated: 2026-08-06
Chapter: 제 2화 갑분 킥보드라니? 엔딩요정은 바로 나 제 2화“2만 7천 원입니다. 현금영수증 필요하세요?”오전 11시 50분. 알바 교대 시간을 딱 10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가민은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다 말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사내를 본 순간, 소멸해 가던 가민의 동태 눈깔에서 작가적 영혼이 번쩍 눈을 떴다.육안으로도 키가 180센티미터 정도 될거 같고, 베이지 색 셔츠를 소매까지 단정하게 걷어 올린 남자였다. 아침부터 들짐승처럼 들이닥치던 무지성 진상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범접할 수 없는 단아한 백마탄 신사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물건을 고를 때도 매대를 어지럽히지 않고 조용히 정돈하며 고르더니, 계산대 앞에서도 정중하게 지갑을 열었다. 가민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는 그의 미소 한 자락에는 은은한 예의와 친절함이 묻어났다.“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가민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빅뱅이 일어났다.‘잠깐만. 저 비주얼, 저 아우라…… 야…이거다. 내 차기작 남주 스킨은 무조건 저거야!’남자가 남기고 간 잔상이 가민의 뇌 세포를 사정없이 자극하기 시작했다. 가민은 포스기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요즘 가민의 최대 고민은 ‘다음 작품’이었다. 현재 연재 중인 현대 로맨스 판타지는 전체 분량의 중간 정도인 60화 고지를 넘어서며 슬슬 중반부 타이밍에 접어들고 있었다. 스토리의 뼈대는 다 짜두었으니 매일 밤 성실하게 타이핑만 하면 완결까지는 무리가 없겠지만, 출판사없이 나홀로 전업 작가의 삶을 유지하려면 물이 들어올 때 세차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었다. 지금부터 차기작의 소재와 장르를 치열하게 고민해 두지 않으면 완결 후 공백 기간만길어질 터였다.‘지금 쓰고 있는 오피스연애는이제 독자들도 좀 식상해하는 것 같고……감성BL은? 아냐..’‘이 순간 막다른 길에 새로운 인풋이 필요해. 그래, 장르를 완전히 틀어보자. 이세계물!, 나도 이젠 동양 퓨전사극으로 가자.’방금 다녀간 친절한 훈남 손님의 잔상 위로 장르적
Last Updated: 2026-08-05
Chapter: 제 1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제1화“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은 무슨?억까 당해도 절대 안 들키는 표정 관리다. 옘병.”올해 29살 최가민은 바코드 스캐너를 고사리만한 손으로 꽉 쥔 채 속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155센티미터에 45킬로그램. 편의점 카운터 아래에 서 있으면 간신히 머리통만 내밀고 있는 것 같은 이 작은 체구의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방어기제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민은 눈앞의 인간을 향해 영혼을 완벽히 소거한 동태눈과 투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손님, 증정품은 교환이 불가능하십니다.” -최가민(주)“아니, 씨 아니 ,이사람아 내가 2플러스1 상품을 너한테 샀잖아! 근데 난 딸기맛은 존나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이 증정품 딸기우유를 저기 있는 바나나우유로 바꿔 달라는 게 왜 안 된다는 거야? 진짜 일머리가 없네 …그러니까 여기서 알바나 하지! 답답하니까 너말고 대신 사장 나오라그래!”오전 9시 52분. 출근길의 전쟁터가 한 차례 휩쓸고 간 편의점 내부에는 이른 아침부터 당 수치가 한계치까지 떨어진 게 분명한 ‘증정품 빌런’이 불결한 침을 튀기고 있었다. 육안으로 봐도 쉰 고개를 훌쩍 넘긴 배만 불쑥 나온 지저분한 잠옷차림,남자는 가민의 작은 체구를 만만하게 본 것이 분명했다. 목청을 돋우며 카운터를 탁탁 두드리는 손가락에는 손톱에 때가 거뭇하게 껴 있었다.극단적인 내향인(I)인 가민은 타인과 대치하는 매 순간마다 수명이 5분씩 단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고, 당장이라도 카운터 아래로 기어 들어가 갈등을 어떻게든 숨고 싶다는 회피형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의 가민이었다면 그저 입술을 깨물며 타인의 화난 표정에 멘탈이 털려 눈시울을 붉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가민은 2026년을 살아가는 어엿한 자린고비 프로페셔널이자, 플랫폼 단독 계약으로 데뷔작을 연재하기 시작한 신인 웹소설 작가였다.가민은 남자의 이목구비, 짓이겨진 운동화 뒤축, 억지를 부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왼쪽 눈썹의 움직임을 뇌내 메모장에 정밀하게 박제했
Last Updated: 2026-08-04
Chapter: 제5화: 늑대들의 포획, 사내의 등제5화"비켜라, 렌. 그게 네놈이 150년이 걸린 전쟁터에서 배운 유일한 재주냐?"가란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20대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징검다리의 삭막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렌은 쌍단검을 쥔 손에 하얗게 힘을 주며 버텼다. 가란의 도끼가 렌의 어깨 근처를 위협하듯 호를 그리며 맴돌았다. 렌의 발밑으로는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야츠키의 얕은 숨소리는 그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그 뒤에서 야츠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잘려 나간 손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는 그녀가 태어나 처음 느끼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뼈가 끊어지는 통증과 낯선 인간들의 광기,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사냥감으로 응시하는 저들의 눈빛이 그녀를 짓눌렀다. 야츠키는 렌의 넓은 등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칼날을 겨누던 무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방패가 되어준 사내.‘왜…… 어째서 저 인간은 나를 지켜주는 거지?’야츠키는 억울함과 공포가 뒤섞인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흑, 흑 하며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징검다리의 무사들이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가련한 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잘린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상처 부위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한 작열감은 그녀가 꿈꿔왔던 안온한 낙원의 기억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신지로는 조용히 그 광경을 관찰했다. 그는 안경 너머로 야츠키의 요기를 세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피의 색과 요력의 밀도가 달라. 보통의 도깨비가 비린내를 풍기는 짐승이라면, 이 녀석은 안개 그 자체를 몸에 두르고 있어. 징검다리위 생존을 위해 공존해 사는 도깨비들의 얕은 요기와는 격이 다르지. 꽤나 오랜 세월 동안 하늘 위에서 홀로 존재해 온 모양이야.’분석을 마친 신지로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150년을 넘게 산 듯한 고결한 요기를 가졌음에도, 정작 전투 능력은 갓 태어난 도깨비보다 못했다. 습격당해 당황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살생을 거부해온 탓인가.
Last Updated: 2026-08-08
Chapter: 제4화 붉은 비의 눈물제4화 벽류진(碧流陣)의 공기는 렌이 떠난 직후에도 여전히 탁하고 무거웠다. 신지로는 자신의 침통을 꼼꼼히 점검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약초가 다 떨어졌어. 경계선 너머, 안개가 짙은 곳까지 가봐야겠어."그의 말에 가란이 말없이 묵직한 도끼를 챙겨 들었다. 가란은 FM(Field Manual)대로 움직이는 무사였고, 도깨비 척결을 위해 태어난 자였다. 둘의 정찰은 지극히 건조한 업무였으나, 그 뒤를 밟는 렌의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를 걷는 것 같았다. 렌은 숨을 죽인 채,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제발 그곳만은 들키지 않기를.'안개는 신지로와 가란 같은 강자들에게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들이 안개의 핵심부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거짓말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매화 향기가 진동하는 작은 계곡, 그곳에서 야츠키가 막 목욕을 마치고 얇은 기모노를 걸치고 있었다."……저게, 도깨비라고?"가란이 도끼를 고쳐 쥐며 나직이 읊조렸다. 신지로는 침통에서 침을 꺼내려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모노 틈새로 언뜻 드러난 야츠키의 등과 매끄러운 엉덩이 선은, 그들이 갈라지는 지상위에 봐온 흉측한 도깨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 이상의 관능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가란의 눈은 곧바로 요기를 감지했다."전투가 가능한 놈이다. 즉시 베어야 한다."가란이 도끼를 들어 올리는 순간, 신지로가 그의 팔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은 관음증적인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야츠키가 무방비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뇌리에 새겼다. 그때,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던 야츠키가 멈칫했다. 도깨비 특유의 감각으로 이질적인 기운을 알아차린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녀린 손끝에서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노랑꽃들이 순식간에 피어났다. 관상용으로 보일 만큼 화려한 꽃잎들이 흩날리며 안개를 타고 무사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 꽃들이 내뿜는 매혹적인 향기는 인간의 오감을 즉각적으로 마비시키는 강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제3화 안개 너머의 낙원 그리고 붉은 꽃의 회상제3화구름 너머,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하늘의 끝단에 그곳이 있었다. 짙은 안개가 일 년 내내 요새처럼 성벽을 두르는 곳. 그 안쪽으로 걸음을 들이면 징검다리의 삭막함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낡았으나 정갈하게 닦인 기와집 한 채가 매화나무 숲에 둘러싸여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당에는 계절을 잊은 꽃들이 만개해 묘한 단향을 풍겼고, 기와지붕 위에는 바람에 실려 온 분홍꽃잎들이 비단처럼 내려앉아 있었다.그 모든 풍경은 그곳의 주인인 야츠키의 숨결을 닮아 있었다. 안온하고, 조용하며,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 야츠키는 그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야츠키는 도깨비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하의 진흙탕 속에서 서로의 살점을 뜯으며 서열을 다투는 여느 도깨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하의 도깨비들에게 성(性)이란 그저 힘의 논리였다. 강자가 약자를 굴복시키고 취하는 약탈의 의식. 그들에게 사랑이나 교감 같은 단어는 사치였다. 그저 요력을 섞어 더 강한 개체를 낳거나, 힘을 갈취하는 것이 도깨비들의 삶이었다. 서열 높은 도깨비가 낮은 도깨비를 혀로 핥아주는 행위는 애정이 아닌, 철저한 지배와 굴복의 확인이었다. 야츠키는 그런 짐승 같은 굴레를 혐오했다.그녀는 지우산(紙雨傘)을 타고 하늘을 유랑하며, 꽃의 향기로 오감을 자극해 환각을 만들어 적을 따돌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녀의 요력은 파괴가 아닌 은닉과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다. 지상에 남은 동족들이 인간의 땅을 탐내며 징검다리를 무너뜨리고 멸망의 씨앗을 뿌릴 때, 야츠키는 홀로 구름 위로 도망쳤다.그녀의 기억 속 지상은 언제나 피비린내와 비명으로 얼룩져 있었다.‘인간은 왜 저토록 나약하면서도 독한 걸까.’야츠키는 회상했다. 인간은 도깨비보다 훨씬 나약했다. 팔이 잘리면 재생하지 못했고, 날카로운 발톱 한 번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인간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깨비의 심장 위치가 오른쪽이라는 사실을, 체내로 파고드는 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Last Updated: 2026-08-06
Chapter: 제2화 벽류진(碧流陣) 의 회의제2화벽류진(碧流陣)의 회의실, 구름 사이로 스며든 희뿌연 습기가 눅눅한 비린내와 섞여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대지를 찢어 놓았고, 인류의 기억 속에서 ‘땅’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한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남은 건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징검다리와, 굶주린 늑대처럼 날이 선 8명의 최정예 무사들뿐이었다.총대장 테츠잔의 육중한 존재감 아래, 무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모여들었다. 막내 렌은 떨리는 손으로 정찰 보고서를 건넸다. 보고서에는 경계선의 이상 징후와 지형적 변화만이 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렌의 뇌리 속에는 보고서에 담지 못한, 안개 너머의 낙원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붉은 기모노,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 그리고 매화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짓던 그 몽롱한 표정.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도깨비였다. 렌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으나, 펜을 쥔 손은 끝내 그 사실을 적지 못했다. 그 존재를 털어놓는 순간, 이 짐승 같은 선배들이 그녀를 사냥감으로 삼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렌. 보고서가 평소보다 빈약하군. 사각지대에서 정녕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테츠잔의 묵직한 물음이 정적을 깼다.“지상을 벗어나 하늘까지 도망쳤지만, 이제 한계다. 요기가 거의 없는 남은 도깨비들과 손을 잡든, 아니면 씨를 말려 그들의 살을 취하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식량도, 약초도 바닥났어. 우리를 버린 영주들이 하늘 위에서 호의호식하는 동안, 우리는 여기서 썩어가고 있지.”가란이 검은 갑옷을 삐걱거리며 냉혹하게 읊조렸다. 그는 지난달 전투에서 동료 '키바'가 굶주림과 부상으로 헛것을 보며 비명을 지르다 죽어갔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분노가 끓어올라 가란의 목소리에는 150년 전쟁의 잔혹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남은 놈들을 다 찢어 죽여야 합니다. 우리 식량이 부족한 이유도 놈들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저 하늘 섬 밑바닥 지하에 놈들의 비축 식량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
Last Updated: 2026-08-05
Chapter: 제1화 구름 위의 도망자들제1화150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짧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땅’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상을 요괴들에게 내어준 그날 이후, 인류가 기워 붙인 하늘 위 징검다리는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악력으로 짓이겨! 도깨비의 가죽은 바위보다 단단하다!”전장은 승리를 향한 진군이 아니라, 그저 죽지 않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본디 지하의 어둠 속에서 태어나 햇빛조차 보지 못하던 괴물들은, 겁도 없이 지상을 집어삼킬 야욕으로 기어 올라왔다. 놈들은 인간의 살점을 씹어 삼킬수록 뱀처럼 허물을 벗고 더 단단해졌다. 머리를 잘라도 재생했고, 낮이 되어도 죽지 않았다.무사들은 피로 물든 칼자루를 놓지 못했다. 철퇴가 뼈를 으스러뜨리는 둔탁한 소리, 시퍼런 칼날이 도깨비의 살점을 파고들 때 나는 비릿한 파열음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도깨비의 이빨과 손톱이 갑옷을 긁어대며 내는 ‘끼이익-’ 하는 금속음은 무사들의 고막을 찢어 놓았다. 그것은 지키기 위해 들었던 칼이었으나, 결국 인간의 숨을 갉아먹는 저주받은 대가였다.지키다가 손목이 잘려 나가는 것은 차라리 양호했다. 동료의 피와 내장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무사들은 멈출 수 없었다. 물러서는 순간, 우리가 쌓아 올린 징검다리는 무너지고 뒤에 남은 가족들은 놈들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땅이 갈라지고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무사와 도깨비는 서로의 목을 조른 채 끝까지 추락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광기에, 도리어 도깨비들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기이한 풍경조차 연출되었다.참혹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동료가 죽어 있었고, 매일 저녁에는 새로운 어린 동료가 빈자리를 채우러 칼을 잡았다. 비릿한 피 냄새는 하늘 위 대기 속에서도 가시지 않았다.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막사 안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잘린 팔을 동여매며 내일의 칼을 갈았다.끝내 도깨비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지상
Last Updated: 202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