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황후를 죽이기로 한 날, 서련은 독배를 받으며 물었다. “이것도 폐하의 뜻입니까?”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마지막 대답으로 받아들인 황후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이제,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View More독배를 가져온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
여섯 해 동안 서련의 잠자리를 묻고, 저녁상을 물리고, 황제의 거둥을 알리던 최 내관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평소처럼 고개를 숙였다. 다만 은쟁반 위에 놓인 것이 따뜻한 배숙이 아니라 입구를 붉은 실로 봉한 백자병이라는 점만 달랐다.
“폐하의 뜻이옵니다.”
서련은 병보다 그의 손을 보았다. 오른손 엄지가 쟁반 밑에 숨겨져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손톱을 뜯던 버릇이었다.
“조서는.”
최 내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마마. 조서를 보셔도 달라지는 것은 없사옵니다.”
휘장 너머에서 단비가 숨을 삼켰다. 서련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아이가 자신 대신 쟁반을 엎을 것을 알았다. 이 궁에서는 충성스러운 사람부터 죽었다.
사흘 전, 귀비 윤소하가 쓰러졌다. 서련이 보냈다는 석류청을 마신 뒤였다. 어제는 황후의 인장이 찍힌 약재 주문서가 발견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중궁의 궁인들이 끌려갔다. 심문에 불려 간 사람은 있었으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해가 지기도 전에, 독배가 왔다.
“읽어 보아라.”
최 내관이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국모의 자격을 저버린 죄. 귀비와 황실의 혈통을 해하려 한 죄. 황후 서씨를 폐하고 죽음을 내린다는 짧은 글이었다.
서련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 멈췄다.
붉은 어새 아래로 익숙한 붓끝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겸은 글자의 마지막 획을 왼쪽으로 당겼다. 혼례 전 그녀에게 보내던 편지에서도 그랬다.
서련은 그 획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누군가 황제를 속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속았다 해도, 아내의 말 한마디 듣지 않고 제 이름을 쓴 사람은 황제 자신이었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연화전이옵니다.”
귀비의 처소였다.
“깨어난 귀비를 돌보고 계시겠구나.”
최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섯 해 전 이겸은 서련에게 말했다. 황궁에서 믿을 사람은 너뿐이라고. 그 말이 얼마나 외로운 부탁인지 알 것 같아, 그녀는 밤마다 대신들의 이름을 외우고 궁인들의 불만을 들었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을 설득했고, 그가 약속을 잊은 사람에게 대신 머리를 숙였다.
그 모든 밤을 지나 남은 것은 이 잔 하나였다.
서련이 웃자 최 내관의 얼굴에 안도와 두려움이 함께 스쳤다.
“마마, 부디 편안히—”
“단비야.”
휘장이 들렸다. 단비는 벌써 울고 있었다.
“함에서 흰 비단을 가져오너라. 혼례 때 받은 것으로.”
“싫습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명을 거역했다.
“수의를 마련하라 하시면 싫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수의가 아니다.”
서련이 손을 뻗었다. 단비가 입술을 깨물며 그 손을 붙잡았다. 너무 차가웠다. 서련은 아이의 손을 한 번 힘주어 눌렀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쓸 것이다.”
궁중의 오래된 규정은 누구보다 서련이 잘 알았다. 황후가 된 뒤 궁중 의례를 배우며, 황후의 의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만 밤새 베끼게 했던 문서들이었다. 황후의 폐위에는 황제의 조서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국모였던 사람의 사형에는 종친의 재심을 청할 길이 남아 있었다.
그 길을 밟은 여자는 지난 삼대 동안 없었다.
없었던 까닭은 규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죽음을 명받은 여자가 자신에게 아직 청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 잔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서련은 비단을 펴고 먹을 갈았다.
최 내관이 물러서며 문을 보았다.
“이미 폐위되셨사옵니다. 그 청은 황후의—”
“그래서 조서에 폐위와 사형을 함께 적었겠지.”
붓끝이 흔들렸다. 서련은 숨을 고르고 첫 획부터 다시 썼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이 아니었다.
종친의 재심을 청한다. 심리 전까지 처형을 멈추고, 중궁에 소속되었던 궁인들의 생사를 확인하게 하라.
끝에 황후라는 호칭 대신 이름 두 자를 적었다.
서련.
최 내관이 비단을 받아 들지 않았다.
서련은 백자병의 붉은 봉인을 살폈다. 봉인의 끝에 검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어약방에서 왕실의 약을 내보낼 때 쓰는 검수점이었다. 병에는 점이 있었으나 잔에는 없었다. 내용물을 누가 옮겼는지, 그 자가 왜 자신 앞에 서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네가 이것을 받지 않으면, 내가 오늘 죽은 뒤 황실에 남는 것은 조서가 아니다.”
서련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황후가 재심을 청했는데 내관이 막고 독을 먹였다는 증언이지.”
단비가 눈물을 훔쳤다. 최 내관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서련이 일어섰다. 비녀를 모두 빼앗긴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흘렀다.
“아이를 건드릴 생각이면 네가 직접 칼을 들어라. 두 사람의 시신을 옮기면서도 폐하께 평소처럼 문안할 수 있을지 보자꾸나.”
한동안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은 최 내관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비단을 받았다. 서련은 독배를 쟁반 한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백자와 은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텅 빈 전각에 길게 번졌다.
그때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재심 청원은 내가 가져가겠소.”
문이 열렸다. 젖은 검은 장포 아래에서 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 남은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남자였다.
변방에서 돌아왔다는 진왕 이현.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동생이, 황제가 버린 아내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봄은 대답 없이도 왔다가, 대답 없이 가고 있었다.백연전 뜰의 살구나무에 잎이 두꺼워졌다. 그 그늘 아래에서 혜주는 문서를 읽었다. 예관의 인장이 찍힌 정식 문서였다. 책봉 준비 중지. 후보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은 열흘 뒤. 그날까지 정혜주는 후보로 남는다.“후보로 남는다.”혜주가 그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책봉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겁니다. 그 차이가 여기 적혀 있군요.”“적히게 하셨지요. 가마에서 내리신 날부터요.”“넷째 물음은 없습니다. 부채 이야기요.”“그건 답이 안 온 게 아니라 못 본 척한 겁니다. 날짜와 함께 적어 두십시오.”혜주는 문서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그리고 서련을 마주 보았다. 할 말을 미리 정해 온 얼굴이었다.“서련 님. 하나 정하고 싶습니다.”“말씀하십시오.”“빚지지 않겠습니다.”단비가 마루에서 고개를 들었다.“서련 님이 제 일을 도우셨으니 제가 갚아야 한다면, 갚는 날 저는 서련 님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서련 님이 제게 갚을 게 생기면 서련 님이 제 사람이 되고요. 둘 다 싫습니다.”“좋습니다. 그럼 갚을 것도 없겠군요.”“그럼 무엇으로 합니까.”“각자 물은 것에 각자 답하는 걸로요. 같은 방에서.”혜주가 손을 내밀었다. 시위 굳은살이 있는 손이었다. 서련이 그 손을 잡았다. 바늘 자국이 있는 손이었다. 단비가 혼잣말을 했다.“이게 무슨 동맹이람. 서로 안 갚는 게.”“제일 오래가는 동맹이야.”서련이 대답하자 단비가 입을 막았다. 들으라고 한 혼잣말은 아니었다.“동맹이라는 말은 안 쓰겠습니다.”혜주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동맹은 깨지니까요.”“그럼 뭐라 부릅니까.”“같은 방이요.”서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비가 또 무어라 하려다 이번에는 제 입을 먼저 막았다.정오에 태후전 상궁이 왔다. 위임장이었다. 왕실 연회는 명선공주가 맡는다. 준비 자리에 전 황후 서씨를 둔다. 태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마마께서 전 황후의 살림 솜씨를 높이 사신답니다.”상궁이 웃었다. 매향
아직 신부도 없는데 의장대가 연습했다.중궁 앞뜰에 마흔 명이 줄을 맞춰 섰다. 깃발은 아직 없었고 악사들은 악기 없이 손으로 박자를 짚었다. 신부가 걸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를 향해 마흔 명이 절을 했다.혜주가 서련 옆에 서 있었다. 부르지 않았지만 왔다.“저 자리에 서라는 거군요.”“비어 있으니 아무나 세울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아무나가 아니라 저를요.”“후보께서 안 서시면 아무나가 되지요. 그게 태후전이 제일 싫어하는 그림입니다.”명선은 마루 끝에 서서 그것을 보다가 시종에게 말했다.“의장 책임자를 불러라. 악사장도.”“공주마마, 태후전에서 내려온 일입니다만.”“내려온 것과 승인된 것은 다르오. 내가 도장을 찍은 지출은 하나도 없어.”의장 책임자가 왔다. 명선은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보였다. 지출 승인 난이 비어 있었다.“연습을 멈추라는 게 아니오. 연습은 하고 싶으면 하시오. 다만 오늘부터 이 행사 이름으로는 한 푼도 내 도장을 못 받소. 행사가 정해지면 그때 찍지.”“그럼 이미 나간 사흘 치는…”“그건 다른 이야기요.”명선이 서련을 보았다. 서련이 나섰다.“사흘 동안 나오신 분들 이름을 적어 오십시오. 의장, 악사, 침방까지. 일한 날과 시각만요. 행사 이름은 적지 마세요.”“행사 이름을 안 적으면 어디서 돈이 나옵니까.”“일한 사람 품삯은 행사가 취소되어도 나갑니다. 그건 행사 값이 아니라 사람 값이니까요.”늙은 악사장이 손을 들었다.“악기도 없이 손뼉만 쳤는데 그것도 품삯이 됩니까.”“나오셨으니까요. 나오라 한 사람이 악기를 안 준 겁니다.”“나오라 한 사람 이름은 어디 적습니까.”“맨 위에요. 청구서는 위에서부터 읽으니까요.”악사장이 웃으며 손뼉을 한 번 쳤다. 의장병 몇이 따라 웃었다. 빈자리를 향해 서 있던 마흔 명이 처음으로 사람처럼 보였다.“왜 품삯부터 하오.”돌아오는 길에 명선이 물었다.“품삯이 안 나가면 저 사람들이 후보를 원망합니다. 네가 답을 안 해서 우리가 못 받는다
시험은 질문 하나였다.“조건을 묻는 후보에게 황후 자격이 있느냐.”이겸은 그 말을 혜주에게 했지만 눈은 서련에게 두었다. 종친들이 양쪽에 앉아 있었다. 태후, 조윤식, 정현우, 명선. 이현은 문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다. 서련은 혜주의 두 걸음 뒤에 섰다. 교육 담당의 자리였다.혜주가 절을 했다. 후보의 절. 일어나서 답했다.“거절할 자격이 없다면 승낙에도 뜻이 없습니다.”“황후는 거절하는 자리가 아니다.”“그럼 승낙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앉는 자리지요.”혜주는 숨을 고르지 않았다. 활을 놓은 뒤의 손처럼 말이 곧게 나갔다.“앉는 자리에 사람을 시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오늘 시험하시는 건 제 자격이 아니라 제 입입니다.”조윤식이 입을 열었다. 느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여자가 조건을 따지면 혼인이 아니라 흥정이오.”“흥정은 혼서에 병사 수를 먼저 적으신 분들이 하셨습니다. 저는 그 아래 제 이름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뿐입니다.”종친 줄이 술렁였다. 정현우가 일어섰다.“폐하. 정씨 가문은 후보를 세웠지 후보의 조건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누이의 오늘 태도는 가문의 뜻이 아닙니다. 정씨는 여기서 손을 뗍니다.”혜주는 오라비를 보지 않았다. 서련은 혜주의 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았다.조윤식이 헛기침을 했다. 느리게, 종친 전체가 듣게.“정씨가 손을 뗀 후보를 강행하면 그 짐은 황실이 혼자 집니다. 종친은 나눠 질 수 없습니다. 마마, 강행은 값이 비쌉니다.”태후의 찻잔이 상 위에서 멈췄다. 동생을 보는 눈이 잠깐 차가워졌다가 도로 조용해졌다. 명선이 부채를 폈다.“폐하. 시험이라 하셨으니 답은 나왔습니다. 자격은 폐하께서 정하시고, 값은 종친이 셈했군요.”“짐이 아직 정하지 않았다.”이겸이 말했다. 그리고 서련을 불렀다.“서련.”“예, 폐하.”“너는 그때 묻지 않았다.”편전에서 끊겼던 말이 이제 끝까지 나왔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명선이 부채를 내렸고 이현의 손이 옆구리에서 굳었다. 종친 줄에서 누
열쇠를 받으면 문이 생긴다. 문이 생기면 나갈 수 없다.혜주는 열쇠 고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상자 뚜껑을 닫지도 않았다. 열어 둔 채로 밤을 넘겼고, 아침에 서련을 불렀다.“밤새 뚜껑을 열어 두셨군요.”“닫으면 제 것 같아서요.”“받아 두면 어찌 됩니까.”“받아 둔 것이 됩니다. 나중에 돌려드려도 한 번 받은 사람이 되지요.”“그럼 돌려드립니다. 오늘.”“누구 앞에서요.”혜주가 잠깐 생각했다.“…보내신 분 앞에서는 안 되겠군요.”“보내신 분은 안 받으실 겁니다. 받은 적이 없다 하시겠지요.”내수고 담당 궁인과 명선의 시종이 왔다. 내수고 담당은 상자 앞에서 한 번 물러섰다.“태후전에서 보내신 것을 제가 받아도 됩니까.”“내수고는 물품을 받는 곳이지요. 열쇠는 물품입니다. 사람이 아니라서요.”내수고 담당이 잠깐 웃을 뻔했다. 두 사람 앞에서 혜주는 열쇠를 세게 했다. 스물세 개. 종이에 그 수와 고리의 모양과 놋쇠 패의 흠집까지 적었다.“열쇠를 돌려드립니다. 문서로요. 나중에 받았다는 말이 안 나오게.”“문서로 돌려드린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처음 들으셨으니 잘 적어 두십시오. 두 번째 사람이 편하게요.”“태후전에서 물으시면 뭐라 합니까.”“물품을 받았다 하십시오. 열쇠 스물세 개. 수를 세신 건 후보시고, 담당께서는 받으신 것뿐입니다.”“…그러면 제 이름은요.”“받은 사람 자리에요. 보낸 사람 자리도, 돌려보낸 사람 자리도 아닙니다.”내수고 담당이 그제야 붓을 받았다. 시종이 웃음을 삼켰다. 문서에 세 사람의 이름이 올랐다. 혜주는 상자를 내수고 담당에게 밀었다. 그가 상자를 들고 나가자 방이 조금 넓어졌다.시종이 나가기 전에 서련에게 낮게 말했다.“공주마마께서 그러셨습니다. 서련 님이 그 열쇠를 다시 쥐면 태후가 바라는 대로 되는 거라고요.”“무엇을 바라시는데요.”“옛 황후가 옛 자리를 탐낸다는 그림이요. 그리고 적자는 쥔 사람의 것이 되고요.”“그래서 안 쥡니다. 공주마마께 그리 전해 주세요.”열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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