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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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황후를 죽이기로 한 날, 서련은 독배를 받으며 물었다. “이것도 폐하의 뜻입니까?”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마지막 대답으로 받아들인 황후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이제,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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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화. 황후의 잔

독배를 가져온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

여섯 해 동안 서련의 잠자리를 묻고, 저녁상을 물리고, 황제의 거둥을 알리던 최 내관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평소처럼 고개를 숙였다. 다만 은쟁반 위에 놓인 것이 따뜻한 배숙이 아니라 입구를 붉은 실로 봉한 백자병이라는 점만 달랐다.

“폐하의 뜻이옵니다.”

서련은 병보다 그의 손을 보았다. 오른손 엄지가 쟁반 밑에 숨겨져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손톱을 뜯던 버릇이었다.

“조서는.”

최 내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마마. 조서를 보셔도 달라지는 것은 없사옵니다.”

휘장 너머에서 단비가 숨을 삼켰다. 서련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아이가 자신 대신 쟁반을 엎을 것을 알았다. 이 궁에서는 충성스러운 사람부터 죽었다.

사흘 전, 귀비 윤소하가 쓰러졌다. 서련이 보냈다는 석류청을 마신 뒤였다. 어제는 황후의 인장이 찍힌 약재 주문서가 발견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중궁의 궁인들이 끌려갔다. 심문에 불려 간 사람은 있었으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해가 지기도 전에, 독배가 왔다.

“읽어 보아라.”

최 내관이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국모의 자격을 저버린 죄. 귀비와 황실의 혈통을 해하려 한 죄. 황후 서씨를 폐하고 죽음을 내린다는 짧은 글이었다.

서련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 멈췄다.

붉은 어새 아래로 익숙한 붓끝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겸은 글자의 마지막 획을 왼쪽으로 당겼다. 혼례 전 그녀에게 보내던 편지에서도 그랬다.

서련은 그 획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누군가 황제를 속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속았다 해도, 아내의 말 한마디 듣지 않고 제 이름을 쓴 사람은 황제 자신이었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연화전이옵니다.”

귀비의 처소였다.

“깨어난 귀비를 돌보고 계시겠구나.”

최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섯 해 전 이겸은 서련에게 말했다. 황궁에서 믿을 사람은 너뿐이라고. 그 말이 얼마나 외로운 부탁인지 알 것 같아, 그녀는 밤마다 대신들의 이름을 외우고 궁인들의 불만을 들었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을 설득했고, 그가 약속을 잊은 사람에게 대신 머리를 숙였다.

그 모든 밤을 지나 남은 것은 이 잔 하나였다.

서련이 웃자 최 내관의 얼굴에 안도와 두려움이 함께 스쳤다.

“마마, 부디 편안히—”

“단비야.”

휘장이 들렸다. 단비는 벌써 울고 있었다.

“함에서 흰 비단을 가져오너라. 혼례 때 받은 것으로.”

“싫습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명을 거역했다.

“수의를 마련하라 하시면 싫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수의가 아니다.”

서련이 손을 뻗었다. 단비가 입술을 깨물며 그 손을 붙잡았다. 너무 차가웠다. 서련은 아이의 손을 한 번 힘주어 눌렀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쓸 것이다.”

궁중의 오래된 규정은 누구보다 서련이 잘 알았다. 황후가 된 뒤 궁중 의례를 배우며, 황후의 의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만 밤새 베끼게 했던 문서들이었다. 황후의 폐위에는 황제의 조서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국모였던 사람의 사형에는 종친의 재심을 청할 길이 남아 있었다.

그 길을 밟은 여자는 지난 삼대 동안 없었다.

없었던 까닭은 규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죽음을 명받은 여자가 자신에게 아직 청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 잔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서련은 비단을 펴고 먹을 갈았다.

최 내관이 물러서며 문을 보았다.

“이미 폐위되셨사옵니다. 그 청은 황후의—”

“그래서 조서에 폐위와 사형을 함께 적었겠지.”

붓끝이 흔들렸다. 서련은 숨을 고르고 첫 획부터 다시 썼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이 아니었다.

종친의 재심을 청한다. 심리 전까지 처형을 멈추고, 중궁에 소속되었던 궁인들의 생사를 확인하게 하라.

끝에 황후라는 호칭 대신 이름 두 자를 적었다.

서련.

최 내관이 비단을 받아 들지 않았다.

서련은 백자병의 붉은 봉인을 살폈다. 봉인의 끝에 검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어약방에서 왕실의 약을 내보낼 때 쓰는 검수점이었다. 병에는 점이 있었으나 잔에는 없었다. 내용물을 누가 옮겼는지, 그 자가 왜 자신 앞에 서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네가 이것을 받지 않으면, 내가 오늘 죽은 뒤 황실에 남는 것은 조서가 아니다.”

서련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황후가 재심을 청했는데 내관이 막고 독을 먹였다는 증언이지.”

단비가 눈물을 훔쳤다. 최 내관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서련이 일어섰다. 비녀를 모두 빼앗긴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흘렀다.

“아이를 건드릴 생각이면 네가 직접 칼을 들어라. 두 사람의 시신을 옮기면서도 폐하께 평소처럼 문안할 수 있을지 보자꾸나.”

한동안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은 최 내관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비단을 받았다. 서련은 독배를 쟁반 한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백자와 은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텅 빈 전각에 길게 번졌다.

그때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재심 청원은 내가 가져가겠소.”

문이 열렸다. 젖은 검은 장포 아래에서 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 남은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남자였다.

변방에서 돌아왔다는 진왕 이현.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동생이, 황제가 버린 아내의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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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황후의 잔
독배를 가져온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여섯 해 동안 서련의 잠자리를 묻고, 저녁상을 물리고, 황제의 거둥을 알리던 최 내관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평소처럼 고개를 숙였다. 다만 은쟁반 위에 놓인 것이 따뜻한 배숙이 아니라 입구를 붉은 실로 봉한 백자병이라는 점만 달랐다.“폐하의 뜻이옵니다.”서련은 병보다 그의 손을 보았다. 오른손 엄지가 쟁반 밑에 숨겨져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손톱을 뜯던 버릇이었다.“조서는.”최 내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마마. 조서를 보셔도 달라지는 것은 없사옵니다.”휘장 너머에서 단비가 숨을 삼켰다. 서련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아이가 자신 대신 쟁반을 엎을 것을 알았다. 이 궁에서는 충성스러운 사람부터 죽었다.사흘 전, 귀비 윤소하가 쓰러졌다. 서련이 보냈다는 석류청을 마신 뒤였다. 어제는 황후의 인장이 찍힌 약재 주문서가 발견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중궁의 궁인들이 끌려갔다. 심문에 불려 간 사람은 있었으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그리고 해가 지기도 전에, 독배가 왔다.“읽어 보아라.”최 내관이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국모의 자격을 저버린 죄. 귀비와 황실의 혈통을 해하려 한 죄. 황후 서씨를 폐하고 죽음을 내린다는 짧은 글이었다.서련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 멈췄다.붉은 어새 아래로 익숙한 붓끝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겸은 글자의 마지막 획을 왼쪽으로 당겼다. 혼례 전 그녀에게 보내던 편지에서도 그랬다.서련은 그 획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아침까지만 해도 누군가 황제를 속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속았다 해도, 아내의 말 한마디 듣지 않고 제 이름을 쓴 사람은 황제 자신이었다.“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연화전이옵니다.”귀비의 처소였다.“깨어난 귀비를 돌보고 계시겠구나.”최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여섯 해 전 이겸은 서련에게 말했다. 황궁에서 믿을 사람은 너뿐이라고. 그 말이 얼마나 외로운 부탁인지 알 것 같아, 그녀는 밤마다 대신들의 이름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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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살아 있는 청원
이현은 문턱을 넘기 전에 검을 풀었다.호위가 칼집을 받아 들었다. 뒤따르던 궁문 병사가 창끝을 내렸지만, 남자는 그 작은 양보에 감사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봉인을 확인하시오. 독병과 잔 모두.”최 내관이 쟁반을 뒤로 물렸다.“전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옵니다.”“그렇다면 내 이름을 적으시오. 오늘 이 시각, 진왕이 재심 청원을 받았다고.”이현은 비단에 손대지 않고 서련을 보았다. 받아도 되겠느냐는 물음이 말없이 닿았다. 서련은 최 내관의 손에서 비단을 거두어 직접 건넸다.“제가 이 글을 썼다는 증인도 필요합니다.”“곧 올 것이오.”“전하의 사람이라면 소용없습니다.”“내 사람은 아니오. 나를 몹시 귀찮아하는 분이지.”바깥에서 가마가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명선공주가 휘장을 걷고 들어왔다. 장신구를 갖출 겨를도 없었는지 머리에는 옥비녀 하나뿐이었다. 공주는 바닥의 방석, 비녀 없는 서련의 머리, 독병을 차례로 보았다.“사형은 내일이라 들었는데.”최 내관이 고개를 숙였다.“폐하께서 오늘 안에 마치라 하셨사옵니다.”명선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이 사라졌다.“나는 종친회의에 내일 참석하라 통보받았다. 죽은 사람의 재심을 하라는 말이냐.”서련은 그제야 이현이 혼자 오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칼을 들고 자신을 구하면 황제의 동생이 폐후를 빼돌린 사건이 된다. 누이를 불러 함께 독배를 보게 하면, 황제는 누이 앞에서 선제의 규정을 짓밟아야 했다.명선이 청원 끝의 이름에 손을 댔다. 먹이 아직 덜 말라 손끝이 검어졌다.“전하, 제 말을 믿어 달라는 청이 아닙니다.”서련이 말했다.“죽이기 전에 들어 달라는 청입니다.”명선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수건으로 비단 아래를 받쳤다.“이현. 너는 나와 함께 가자.”“여기 남는 사람이 필요합니다.”“내 시종을 남기겠다. 황제가 누이의 시종까지 치우면서 독을 먹이겠다면 내일 대신들 앞에서 이유를 들을 것이고.”공주의 말은 약속이라기보다 황제에게 보이는 계산이었다. 서련은 그 계산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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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첫 번째 문을 열다
새벽에 단비를 데리러 왔다.병사는 손목에 걸 쇠고리를 숨기지 않았다. 폐후의 시녀도 석류청에 손댔을 가능성이 있으니 따로 묻겠다는 말이었다. 서련은 밤새 작성한 궁인 명단 위에 벼루를 올려놓았다.“누구의 명이냐.”“심문을 맡은 내관의 명입니다.”“황제의 집행 유예는 보았느냐.”“유예는 폐후께만 해당합니다.”맞는 말이었다. 서련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문가에 밤새 머무른 명선의 시종을 불렀다.“이 아이는 어제 독배와 청원을 함께 본 증인입니다. 지금 데려가는 시각, 데려가는 자의 이름, 심문 장소를 적어 주십시오.”병사의 손이 멈췄다.“저희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그래서 네 이름을 남기라는 것이다. 명을 내린 사람까지 적으면 네가 혼자 책임질 일이 없어지지.”병사는 마침내 쇠고리를 내려놓았다. 명을 다시 확인하겠다는 말과 함께 물러났다. 단비는 문이 닫힌 다음에야 숨을 쉬었다.“저 때문에 시간을 버리시면 안 됩니다.”“너를 잃는 것이 시간을 버리는 일이다.”서련은 단비에게 빈 종이를 내밀었다.“석류청을 만든 날, 네가 직접 본 것만 적어라. 남에게 들은 말은 따로 표시하고.”단비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항아리를 본 때와 봉인을 묶은 궁녀의 위치를 적었다. 글씨는 삐뚤었지만 지워 쓴 곳이 없었다. 다 쓰고 나서 한참 종이 모서리를 만졌다.“마마께 유리하게 쓰지 않아도 됩니까?”서련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를 지키려는 충성이 거짓말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제대로 했다.“내가 하지 않은 일을 네가 했다고 해도 안 되고, 내가 한 일을 없애도 안 된다.”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햇살이 창살을 넘어올 무렵 명선이 방문했다. 공주는 어젯밤보다 차가운 얼굴이었다. 청원에 서명한 종친 둘이 황제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며 발을 뺐다고 했다.“사흘 안에 말뿐인 억울함보다 나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중궁 주방을 봉쇄해 주십시오.”“증거를 없애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그래서 제 손이 아닌 전하의 사람에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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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도장을 가진 손
정온은 항아리의 청을 작은 그릇에 나누었다. 한 그릇은 살피는 데 쓰고, 나머지는 명선의 시종이 보는 앞에서 봉했다.“마시면 독이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단비가 묻자 의녀가 고개를 저었다.“사람의 몸으로 증거를 만들지는 않습니다.”서련은 그 말을 오래 바라보았다. 황후로 살 때는 시식하는 사람의 입에 먼저 들어가는 숟가락을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 자신 앞에서 그 당연함을 거절하는 여인이 있었다.“어디까지 말할 수 있습니까?”“남은 두 항아리에서는 귀비마마께서 앓으셨다는 증세를 일으킬 위해 성분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보내진 항아리도 봐야 합니다. 이것만으로 그분의 잔에 무엇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확실하지 않은 말을 하지 않는 사람. 서련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주문서는 어떻습니까?”“적힌 것은 몸을 심하게 해치는 약으로 분류됩니다. 실제 귀비마마께 드린 처방에는 없습니다.”정온이 접힌 종이를 가리켰다. 궁의 어의가 작성한 진료 기록이었다. 귀비의 구역질과 열이 적혀 있었으나 위험한 약을 먹었다는 단정은 없었다. 그 단정은 의술을 모르는 내관의 보고에서 처음 생겼다.서련은 보고 말미를 짚었다.최 내관의 이름이었다.늦은 밤 인장함이 들어왔다. 자물쇠는 깨지지 않았고 비단 안감에도 흠집이 없었다. 단비는 그 때문에 낙심했지만 서련은 안쪽 모서리의 짧은 붉은 실을 꺼냈다.“원래 이 함은 어느 손으로 여느냐.”“제가 열쇠를 갖고, 마마 앞에서만 열었습니다.”“지난달에는?”단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련이 몸살로 누웠던 날, 황제의 하사품 목록을 정리한다며 최 내관이 열쇠를 가져갔다.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었고 달라진 것이 없어 서련에게 길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죄송합니다.”서련은 실을 종이에 싸면서 고개를 들었다.“그때 내가 뭐라고 했느냐.”“폐하의 일이니 서두르라 하셨습니다.”자신이 열어 준 문이었다.황제가 보낸 사람에게 황후의 물건을 보이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서련 자신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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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귀비의 병상
연화전은 약 냄새보다 꽃향기가 짙었다.창가에는 철을 잊게 하는 흰 꽃이 놓였고, 화로 위 은주전자에서는 물이 잔잔하게 끓었다. 서련은 그 온기를 밟고 들어갔다. 어젯밤 단비와 나누었던 차가운 밤 한 알이 혀끝에 되살아났다.윤소하는 비단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있었다. 얼굴에는 창백한 분을 발랐고 입술만 옅게 붉었다. 그녀가 손을 뻗자 상궁 금옥이 재빨리 팔을 받쳤다.“언니.”서련이 멈췄다.귀비는 황제가 없는 곳에서 처음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다정함은 관객이 있을 때 가장 알맞게 꺼내졌다. 명선의 시종이 문가에 서고 정온이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호칭은 서씨면 됩니다. 폐위 조서가 이미 내려왔으니까요.”윤소하의 손이 이불 위로 내려갔다.“제가 폐하께 몇 번이나 청했어요. 언니께서 그런 무서운 마음을 품으실 분이 아니라고.”“그렇다면 그 말씀을 글로 주시겠습니까.”“예?”“재심에 필요합니다. 귀비께서 제 결백을 믿으신다는 말씀.”윤소하가 금옥을 보았다. 금옥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옮겼다. 서련은 앉으라는 말이 없었지만 빈 의자를 당겼다. 상궁의 눈썹이 꿈틀했으나 명선의 시종 앞에서 의자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믿고 싶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알겠습니다. 믿는다는 말과는 다르군요.”서련은 정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녀가 가져온 문서를 펼쳤다. 귀비가 마셨던 석류청 항아리를 확인하고 남은 내용물을 보존해 달라는 명선의 요청이었다.금옥이 앞으로 나섰다.“병중이신 마마 앞에서 꼭 이러셔야겠습니까?”“그래서 병세를 묻지 않고 항아리를 찾습니다.”서련의 대답에 윤소하가 작게 기침했다. 금옥은 곧바로 물을 올렸다. 서련은 그 물을 받는 귀비의 손을 보았다. 떨림은 있었으나 잔의 손잡이를 찾는 동작은 정확했다. 그것만으로 거짓 병을 밝힐 수는 없었다. 서련은 관찰한 것을 마음속에 넣고 입을 다물었다.“항아리는 버렸어요. 그런 흉한 물건을 곁에 둘 수 없어서.”금옥이 너무 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정온이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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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기억하는 사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하사품을 운반했던 궁인은 같은 말을 세 번 했다. 손에는 그날 썼다는 빈 나무궤짝이 들려 있었다. 무릎 옆으로 내려놓으라 해도 놓지 않았다. 무언가를 붙들어야 버틸 수 있는 얼굴이었다.서련은 궤짝의 긁힌 자국을 보았다.“어디서 다쳤느냐.”궁인이 숨을 들이켰다.“궤짝 말이다.”“중궁으로 들일 때 문고리에…….”“문턱 오른쪽이 높아졌지. 수리를 청했는데 아직 손보지 않은 모양이구나.”운반 궁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서련은 손을 다쳤느냐고 묻지 않았다. 손등의 붉은 자국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지금 그것을 물으면 여자는 다시 입을 닫을 것이었다.단비가 따뜻한 물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명선의 시종은 붓을 내려놓았다. 서련은 물품에 관한 쉬운 질문부터 했다. 궤짝을 어디서 받아 어디로 가져갔는지, 어느 문에서 쉬었는지.궁인은 처음에는 한마디씩, 나중에는 짧은 문장으로 답했다.연화전에서 비단을 보탰다. 금옥이 물품이 맞는지 살핀다며 뚜껑을 열었다. 최 내관은 중궁에서 받아 온 인장함을 궤짝 옆에 두고 황제의 부름에 나갔다.“얼마나 비웠느냐.”“차 한 잔 식을 만큼은 되었습니다.”“금옥이 함을 열었니?”여자의 손이 궤짝을 다시 움켜쥐었다.“그것은 못 보았습니다.”서련은 고개를 끄덕였다.“못 본 것은 쓰지 않겠다.”“하지만 돌아왔을 때…….”입술이 떨렸다. 단비가 다가가려다 멈췄다. 여자는 제 손바닥을 비비며 소리를 낮췄다.“금옥 상궁님이 붉은 손가락을 닦고 계셨습니다. 도장 인주인지, 다른 것인지는 모릅니다.”명선의 시종이 받아 적었다. 서련은 그 문장을 읽어 주게 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도장을 찍으려 하자, 서련은 먹물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먼저 네가 여기에 남아도 되는지 알아보자.”“제가 증언하면 밖에 있는 어머니가 쫓겨납니다.”마침내 진짜 두려움이 나왔다.연화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족은 귀비 친정의 점포에서 삯일을 받았다. 여자가 입을 열면 그녀 하나의 품삯이 끊기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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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폐하의 이름
황제의 서재에는 익숙한 향이 피어 있었다.서련이 혼례 뒤 처음 골라 준 향이었다. 이겸은 밤에 잠들지 못했고, 그녀는 여러 향 가운데 가장 옅은 것을 찾아 작은 향로에 넣어 주었다. 그는 그때도 고맙다는 말 대신 내일부터 계속 쓰자고 했다.서련은 향로에서 시선을 거두었다.황제는 앉아 있었고 그녀 앞에는 의자가 없었다. 문가에는 명선의 시종이 섰다. 사적인 대화라며 물리려던 이겸에게 서련이 먼저 말했다.“죄인의 말은 남기는 편이 좋겠습니다.”이겸은 불쾌한 듯 붓을 내려놓았다.“언제부터 누이의 치마 뒤에 숨었느냐.”“제 청원을 읽으셨습니까?”황제는 책상 옆 흰 비단을 보았다. 아직 말려 있었다. 서련은 풀어 보라는 말까지 하지 않았다. 그 한 번의 시선으로 충분했다.“바빴다.”“제 사형 조서에는 직접 이름을 쓰셨지요.”“그 일은 이미—”“맞는지만 답해 주십시오.”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걸음이었다. 서련은 늘 그가 세 걸음 가까이 오면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책상과 같은 거리를 유지했다.“짐이 썼다. 명백한 증거가 있었으니.”“석류청을 살핀 의녀에게는 그런 명백한 증거가 없었습니다.”“주문서에 네 인장이 있다.”“제 인장함을 최 내관이 가져간 날, 연화전에 두고 자리를 비웠다는 증인이 있습니다.”황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망설임이 스쳤다. 서련은 그 망설임에서 애정을 찾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을 처음 들은 사람의 표정일 뿐이었다.이겸은 목소리를 낮췄다.“그렇다면 조용히 확인하면 된다. 왜 진왕을 끌어들여 일을 키우느냐.”“제가 청원을 쓰는 동안 최 내관은 독병을 열려 했습니다.”황제의 눈이 잠깐 문가로 갔다. 시종은 붓을 멈추지 않았다.“오늘 안에 죽이라고 하신 분도 폐하이십니까?”오래 침묵한 끝에 이겸이 대답했다.“더 소란이 생기기 전에 끝내라 했다.”말은 다듬어져 있었으나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련은 배 속으로 찬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서늘했다. 누군가 황제의 명을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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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사흘을 넘기는 법
회의가 열리는 작은 정전 앞에는 죄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서련은 그 자리에 섰다. 앉은 사람들은 그녀가 황후일 때보다 정중하게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서가 아니라, 어느 쪽이 이길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명선이 첫 발언을 했다.“폐후 서씨가 사형의 재심을 청했다. 오늘은 그 청을 정식 심리로 넘길지 정한다.”늙은 종친이 헛기침했다.“황실의 안주인이 다른 후궁과 다툰 일을 대신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옳습니까.”“죽음을 내린 일입니다.”서련의 목소리에 눈길들이 모였다.“다툼이라고 하시면, 독배도 말다툼의 한마디가 됩니다.”종친의 얼굴이 붉어졌다. 명선은 제지하지 않았다.서련은 흰 비단을 펼쳤다. 여섯 해 전 황제가 보내온 혼례 비단이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만 무거운 사정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것은 그녀의 슬픔이 아니라 판단의 빈틈이었다.“석류청은 검사되기 전에 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약을 끓인 궁인은 읽지도 못하는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제 동생은 증거를 확보하기 전에 감금되었습니다.”대신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무죄를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제 말 한마디로 무죄를 선포해 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확인할 길이 남았으니, 그 전에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서련이 의녀를 불렀다. 정온은 확인한 범위만 말했다. 남은 두 항아리와 연화전 항아리의 청에서 주장된 위해 성분이 확인되지 않았고, 귀비가 청을 먹기 전 다른 약을 먹었다고 직접 진술했다는 것.“그 약이 병의 원인입니까?”“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누군가 코웃음을 쳤다.정온은 흔들리지 않았다.“모르는 것을 안다고 쓰는 일이 처음 심문의 잘못입니다. 저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명선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비웃음이 멎었다.다음으로 운반 궁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최 내관이 인장함을 연화전에 두고 나갔다고 증언했다. 금옥의 손가락에 붉은 것이 묻었다는 말은 덧붙이되, 무엇인지는 몰랐다고 분명히 했다.“공주의 장원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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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훔치지 않은 증거
서련은 약 봉투를 바로 펼치지 않았다.“어디서 받았니.”단비의 표정이 굳었다.“주방 궁녀가 빨래를 맡는 사람에게 받았답니다. 금옥 상궁의 겉옷 소매 안에 있었다고…….”“그 사람은 누구에게 허락받아 가져왔고?”단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련은 봉투를 탁자 위에 두었다. 어렵게 손에 넣은 물건을 기뻐해 주지 않자 아이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마마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허락 같은 것을 받지 않았습니다.”“알아.”“그런데 저희만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서련은 단비에게 앉으라고 했다. 아이는 앉지 않았다. 서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물건을 누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면, 금옥은 네가 넣었다고 할 것이다. 그럼 네가 심문받아야 한다. 네 손을 숨겨 줄 힘이 지금 내게는 없다.”단비의 눈에 고인 것은 눈물보다 화에 가까웠다.“저도 마마를 도울 줄 압니다.”“그래서 네가 직접 시작한 일을 끝까지 확인하자는 것이다.”서련은 빈 종이를 가져왔다. 봉투가 건너온 손을 차례로 적었다. 단비는 처음엔 성난 글씨로, 나중엔 생각하며 천천히 이름 대신 직책과 얼굴의 특징을 썼다.마지막에 세탁을 맡는 궁인이 남았다. 낮에 들어와 빨랫감을 받아 나가는 궁 밖 일꾼이었다. 오늘도 같은 시각에 북쪽 작은 문으로 나온다고 했다.명선의 시종에게 사정을 밝히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봉투를 폐기하지 않고 증언 경위를 남기는 데 동의했다. 단비는 시종 둘과 함께 북쪽 문으로 갔다. 서련은 동행할 수 없었다. 재심 중인 폐후가 증인을 직접 찾아다니면 겁을 주었다는 말이 붙을 터였다.문이 닫힌 뒤 기다림이 시작되었다.서련은 같은 문장을 읽다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직접 움직일 수 없을 때 사람은 최악의 일부터 상상했다. 단비의 손에 쇠고리가 채워지고, 자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아이가 먼저 벌받는 모습.정온이 찻잔을 밀어 주었다.“지금도 좋은 주인이 되려고 하십니까?”서련이 고개를 들었다.“저 아이를 보내 놓고 괴로워하시는 것이, 아이가 위험해서인지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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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최 내관의 엄지
최 내관이 문 앞에서 버틴 것은 반 각이 채 되지 않았다.명선의 시종이 세 번째로 이름을 부르자 그는 안으로 들어왔다. 서련은 탁자 위에 빈 잔 하나만 놓았다. 독배로 쓰려던 잔은 봉인된 상자에 있었다. 눈앞의 것은 오늘 아침 물을 마신 평범한 잔이었다.그런데도 최 내관은 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앉아라.”그가 무릎을 꿇으려 하자 서련은 의자를 가리켰다.“내 앞에서 벌받는 모습을 만들지 마라. 네가 한 일을 묻겠다.”방 안에는 명선의 시종과 정온이 있었다. 이현은 문밖에 머물렀다. 황제에게 약속한 대로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최 내관을 끌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궁 안의 사람들은 진왕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을 함부로 바꾸지 못했다.서련은 그 힘을 쓰되 자신의 권한으로 착각하지 않으려 했다.“인장함을 놓은 적이 없다고 했지.”“잠시 바깥에서 황명을 들은 일은 있사옵니다.”“오늘은 기억이 났구나.”최 내관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손이 소매로 들어가자 서련이 말했다.“손을 꺼내라.”엄지의 손톱 옆이 붉게 벗겨져 있었다. 여섯 해 동안 익숙했던 버릇이었다. 이 작은 버릇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서련에게 뜻밖의 슬픔을 주었다. 그녀는 이 사람의 어머니가 앓을 때 의원을 보냈고, 겨울이면 발이 시리다는 말을 기억해 솜신을 내주었다.그것들이 아무 계약도 아니었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죽이러 올 때만큼은 얼굴을 피할 줄 알았다.“금옥에게 열쇠를 맡겼느냐.”“물품 확인이 끝나면 함을 닫아 달라 부탁했을 뿐입니다.”“그러면 함은 열려 있었구나.”최 내관의 등이 굽었다.명선의 시종이 문장을 읽어 확인했다. 그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서련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네가 귀비의 병세를 보고하면서, 위해 약을 먹었다고 처음 썼다. 의원은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는데 왜 썼느냐.”“상궁이 주문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황후마마의 인장이 있으니…….”“네가 놓고 나온 바로 그 인장이지.”최 내관이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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