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진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 마마… 신이 3년 전,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무슨 일이지?” 이육진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대체 어떤 사안이기에 두 사람이 이토록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소우연 또한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진규가 천천히 말했다.“신이 경성으로 돌아온 후 진우와 나눈 대화 중, 황후 마마께서 아령의 죽음에 의심을 품고 계시며,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지골들을 찾지 못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신도 의심이 들었습니다. 혹시 아령이 정말로 죽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이육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소우연 역시 입을 떼었다가 닫았다. 이 일은 과거 그녀가 진우에게 직접 물었던 적도 있고, 이씨 가문 주변을 몰래 감시하도록 지시한 바도 있었기에 더욱 충격이었다.진우도 진중하게 말했다.“신이 난장골로 사람을 보내 확인했으나, 소씨 가문 사람들의 손가락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과 진규는 3년 전 그날 밤, 분명히 아령의 허리에 그것이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그 목소리는 무겁고 어두웠다.“그게 난장골로 보내지는 도중에 떨어진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그녀를 도망치게 도운 셈입니다.”진규는 시선을 낮추며 덧붙였다.“게다가 그 아령 곁에 있던 측근 내관 이복 말입니다. 지금껏 살아 있는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난리통에 죽었을 수도 있지만… 혹여 숨어서 아령의 탈출을 도운 건 아닌가, 그런 의심도 듭니다.”소우연의 손이 조용히 떨렸다.사실 이 모든 가능성에 대해 미리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치니, 역시나 쉽지 않았다.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하필이면 아령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집이, 다름 아닌 이복의 형이 속한 가문이라니.“폐하, 마마… 이복의 형을 직접 불러다가 심문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규가 조심스럽게 제안
“그래. 게다가 좌측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히 맞았는데, 살아있을 리 없지.”진우는 반찬을 한 숟갈 집어 먹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웃기는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땐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시신을 처음 묻었던 자리까지 다시 파보게 했죠. 옷가지는 이미 썩어 문드러졌지만… 그래도 확실히 알겠더군요. 거기 묻힌 건 분명히 이지윤과 아령, 그 둘이었습니다.”“그래?” 진규는 어딘가 석연찮은 얼굴로 턱을 만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마마께서 왜 아령과 이지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시는 건지 모르겠소.”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다만… 아령의 몸에서는 손가락뼈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뭐라?”진규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반사적으로 긴장했다.진우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그렇게 긴장하진 마십시오. 제가 말한 건… 아령이 소씨 가문의 사람들을 죽였을 때 가져갔던 손가락뼈를 말한 것였습니다. 저희가 그 시신을 수습했을 때, 그 손가락뼈들을 못 찾았다는 뜻이죠.”진우의 말에 진규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그날 밤 그 둘이 서로 죽이려 하며 싸우던 때, 분명 아령 허리에 그 뼈 목걸이가 걸려 있지 않았던가. 그때 분명 똑똑히 봤었는데…”진우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한참을 머뭇거리다, 힘겹게 말했다.“설마… 그럴 리가…”그의 기억 속 어렴풋한 장면이 떠올랐다. 진규를 찾으러 갔을 때, 아령 허리춤에 걸려 있던 그 손가락뼈 목걸이가… 분명 있었다.쾅!탁자가 갑자기 울렸다. 진규가 주먹으로 내리친 것이었다.“설마… 정말로 그년이 살아 있다는 건가?”진우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 여자는 뭐, 삼두육비라도 달렸다는 건가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을 치겠습니까?”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명백한 동요가 스쳤다.“만약… 폐하나 마마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이미 마마께선 의심하고 계시네. 숨길 수 있는 일도
임세안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좋습니다. 그럼 장군님께서 사막국 공주를 포기하십시오. 제가 그 성격 나쁜 공주를 감내하도록 하죠.”그 말투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었지만, 말속엔 진심이 느껴졌다.사막의 공주를 타국으로 시집보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안한 일이었다. 적국 출신이라는 점에서, 눈앞에 두고 지켜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식이었다.아마도 황제가 두 사람만을 따로 불러 직접 말한 것도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으리라.그제야 진규도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소. 그럼 각자 실력으로 승부를 보도록 하지.”“좋습니다. 장군님, 살살 부탁드립니다.”“흥, 내가 할 소리!”그렇게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장군부로 돌아갔다.진규가 장군부에 막 도착하자, 마침 진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랜만에 마주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맞대고 함께 장군부 안으로 들어섰다.“오랜만입니다, 장군. 어느새 대장군이 되었군요.”진우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진규는 웃으며 말했다.“현명한 자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법이지. 자넨 사랑을 택했으니, 출세에는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진우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는 정연을 포기할 수 없어, 차라리 경성에 남아 어전 호위무사로 있는 길을 택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금은 정이품 유수 도독 지휘사까지 올라 있었으니.진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자네와 나는 어릴 적부터 폐하 곁을 지켜왔지. 오늘날 이 자리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고비가 있었던가.”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 말입니다.”두 사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궤도에 오른 인물들이었다.잠시 후 진우가 물었다.“폐하께서 장군을 따로 불러 만나셨다고 하던데,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진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전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기밀은 아니었기에 감추지 않았다.진우가 듣고 나서 말했다.“정연이가 말하길, 폐하께서 약속하셨다고 하더군요. 장군께서 경성으로 돌아온 뒤,
마침내 그 명단은 후희진 곁을 지키고 있던 시녀 선옥에게 전해졌다.“폐하의 뜻은 분명합니다. 공주께서 머나먼 길을 오시느라 심히 고생이 많으셨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신 뒤 마음에 드는 낭군을 천천히 고르시라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폐하께서 친히 공주마마의 혼사를 정해주실 것이라 전하셨습니다.”후희진은 이육진 쪽을 향해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폐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표면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낭군을 ‘고른다’는 말이었지만, 실상은 상운국 남자들에게 ‘품평’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조정을 떠나기 전, 후희진은 황제가 두 장군의 공로를 치하하며 위로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진규와 임세안의 쪽을 한 번 돌아본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다.……어전.이육진은 진규와 임세안을 불러들였다.두 사람은 공손히 큰절을 올린 후, 황제의 분부를 기다렸다.“두 장군은 공이 크고 짐이 깊이 신임하는 인물들이다. 이번에 사막국에서 공주가 화친을 위해 찾아왔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임세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사막은 땅은 넓지만 인구가 적고, 사계절 내내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 다스리기에 번거롭습니다. 가능하다면 신은 그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변방을 어지럽히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진규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이육진은 이미 그들의 본심을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금은 잠시라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상운국도 숨을 고르고 국력을 쌓아야 할 때다.”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그 사막국 공주 말이다… 너희 둘 중 마음에 들어 하는 자가 있느냐?”임세안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폐하가 자신의 혼사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대상이 사막의 공주라니…비록 마음속으로 품던 이상적인 아내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공주라면 자신을 억울하게 만들 일은 없을 터였다.결국 진위 장군의 말이 옳
한 달 후.위진규, 임세안을 비롯한 사막 공주의 화친 사절단이 드디어 경성에 입성했다.성 안은 전에 없던 열기와 환호로 가득했다.이날 소우연은 황후 조복을 갖춰 입고, 이육진과 함께 나란히 용좌에 앉아 있었다.붉고 초록이 어우러진 전투복 차림의 후희진은 긴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채, 예를 갖춰 두 손을 모아 절했다.그러자 대리사경 성세가 조용히 경고했다.“사막에서 오셨다 해도,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 앞에선 몸을 낮춰 예를 올리는 것이 도리입니다.”후희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그녀는 사막의 공주였다. 사막의 피를 이은 이들은 누구에게든 쉽게 무릎 꿇지 않았다.그녀는 정면에서 용좌 위의 황제와 황후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존경하는 황제 폐하, 제가 이번에 이곳에 온 것은 화친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귀국의 손님을 대하는 태도입니까?”그러자 좌승상이 부드럽게 웃으며 나섰다.“상운국이 받은 것은 화친을 청하는 국서였습니다. 즉, 사막이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이지요. 공주께선 화친을 위한 사절단의 일원이라면, 우리 폐하께 마땅히 배례를 드려야 합니다. 아니면 온 곳으로 돌아가시면 되겠지요.”“아니…!”후희진은 눈썹을 찌푸린 채 다시 황제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이육진은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하게 앉아 있었고, 곁의 소우연과 눈빛을 주고받기까지 했다.두 사람 모두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그때 곁에 있던 궁녀가 소리 없이 후희진의 소매를 끌었다.“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상운국에 도착하면, 이곳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고요.”후희진은 깊은 숨을 들이쉬더니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그래. 그녀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과거처럼 배상금을 요구하고, 거부하면 국경을 위협하던 그런 사막국이 아니었다.“사막국 공주 후희진, 폐하와 황후마마께 인사드립니다. 두 나라가 오늘을 계기로 우호를 맺고,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랍니다.”이육진은 짧게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곧 손을 들었다.“머나먼 길을 와주었으니, 노고가 많았겠
“나는 원래 혼자 다니는 자니, 이만 물러가거라.”조 장군은 덤덤한 말투로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가에 있던 병사들에게 교대로 보초를 서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이복이 조용히 아령 곁으로 다가왔다.“제가 먼저 상대해 봤지만, 저 사람은 잘 달래도 소용없고, 강하게 밀어붙여도 안 먹혔습니다.”아령은 잔잔하게 웃었다.“그런 이들이야말로 겉으론 단단해 보여도 틈을 보이면 무너지게 된다.”“그 틈을 찾아야 해.”“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이복은 아령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살짝 감춰진 감정이 어른거렸다.아령은 그 손을 가만히 잡았다.“지금은… 때가 아니다.”“네.”겉으로는 남매였지만, 하지만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의 그 관계는 남매 이상의 것이었다.잠시 뒤, 이복이 조용히 말했다.“경성에 도착하면… 먼저 아이를 보러 갈 생각이십니까?”그가 말한 '아이'는 바로 소우희와 이지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그 이름이 입에 오르자, 아령의 눈가에 미세한 빛이 일었다.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밤하늘엔 무수한 별이 총총했지만, 그 어떤 별빛도 그녀의 눈에 머문 눈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응, 가야지. 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특히 너 말이다. 절대 멋대로 행동하지 말거라.”“네? 무슨 일이라도…”아령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그때 내가 짰던 계획은 완벽했다.”“제야의 밤에 술잔에 독을 타 죽은 척하고 사라질 생각이었지.”“그런데 위 장군 쪽에서 무슨 일인지, 마치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응하였다.”“이해가 안 되더구나.”“그럴 리가 없습니다.”“마마가 혼자 세우신 계획이 아니덥니까.” “이지윤도 그걸 누설할 사람이 아니야.”“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눈 밖에 있었고, 내 쪽에서 흘러나갔을 리도 없고.”“그래서 더 이상한 것이다.”이복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생각해도 정말 간발의 차였습니다.”아령은 한숨을 쉬고 웃으며 말했다.“맞아. 하마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