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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임공
비틀거리던 시연은 하마터면 똑바로 서지 못할 뻔했다.

방금 고상훈의 검사를 마친 의사가 유건을 향해 말했다.

“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고 어르신께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십니다만, 조금 허약하셔서 충분한 영양 섭취와 휴식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르신께서 자극받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좋은 기분을 유지하도록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의사는 이 말을 마치고 병실을 떠났다.

고상훈은 반쯤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

“유건아, 그리고 시연아, 너희는 오늘 혼인신고를 했잖니... 행복한 신혼 밤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이 할아버지를 보러 오면 어쩌겠다는 게야.”

“어르신.”

시연이 손에 땀을 쥐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상훈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야? 그리고,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게야?”

“저는...”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

“할아버지께서 아직 입원 중이신데, 저희 두 사람이 행복한 신혼 밤을 즐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시연 씨는 할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밖에 없어서 죄송하다는 거고요.”

시연은 매우 놀랐다.

‘왜 나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으려는 거지?’

“하하, 역시 시연이는 참 착한 아이구나.”

고상훈이 활짝 웃었다.

“얼굴 봤으니 됐다. 의사 선생도 괜찮다고 했고... 여기에는 의사 선생과 간호사들이 있을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라. 너희 둘만 괜찮다면 나는 너무 기쁘단다. 유건아, 오늘은 네가 좀 주동적으로 행동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그럼 푹 쉬세요.”

시연의 손을 잡은 유건이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다정한 모습은 잠시일 뿐, 유건은 병실을 나오자마자 시연을 뿌리쳤고, 두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충분한 안정이 필요하시니까 당분간은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어.”

‘할아버지께서 결혼을 종용한 여자가 이런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당장이라도 화병이 도지고 마실 거야.’

유건이 말하지 않아도 시연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유건이 음침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독이 서린 말을 내뱉었다.

“네 이름이 우리 고씨 가문의 등본에 조금이라도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역겹고 더러워 죽겠어.”

‘겉치레인 계약 결혼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여자는 안 돼!’

“!”

놀란 시연이 두 손을 꽉 잡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처럼 모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팔린 몸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팔려도 한참 잘못 팔린 거지! 나는 이제 남한테 보이기 부끄러운 사람이 된 거야! 더러운 여자가 된 거라고!’

유건이 더는 시연을 상대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이혼부터 해야겠어.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가정법원으로 가.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회복하기 전까지는 순순히 손자며느리의 역할을 다하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시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몸을 돌려 떠나는 유건의 뒷모습에서는 자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서서 씁쓸하게 웃었다.

‘저렇게 화낼 만 해, 다 내 잘못이지, 뭐.’

‘그래도... 억울하고 분한 건 참을 수 없어.’

‘어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마다하겠어? 나도 한때는 나를 보물처럼 여겨주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번 생에... 그런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야.’

병원을 나선 지시연은 유건이 살고 있는 SKY전원주택단지로 가지 않았고, 곧장 강울대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을 죽도록 싫어하는 유건과 함께 살 필요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저녁에 시연은 주지한의 전화를 받았다.

[유건 형님께서는 다음 주 수요일에만 시간이 있으십니다. 그날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할 수 있으십니까?]

“네, 가능해요.”

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시간 맞춰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연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계약 결혼일 뿐이었잖아? 전혀 슬퍼할 거 없어. 그저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을 뿐이지...’

며칠 간의 피로와 정신적인 부담을 느끼던 지시연은 모처럼 편안함 잠을 잤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했다.

세수를 마친 시연은 강울대학교병원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강울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 임상의학 전공의로 공부한 사람이었으며, 현재는 강울대학교병원 외과에서 실습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오늘 낮에 외래 진료가 있었는데, 모처럼 환자가 많지 않아서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의사 가운을 갈아입은 시연이 한식당 ‘맛나리’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진성빈과 임진아는 이미 도착한 상황이었는데, 그들 셋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임진아와 지시연은 모두 의대를 다녔지만 전공이 달랐고, 성빈은 경영학을 전공하여 그녀들보다 1년 일찍 졸업했다.

그들은 각자의 바쁜 일로 인해 한동안 모일 수 없었다.

하지만 성빈이 얼마 전에 귀국하자마자, 함께 밥을 먹자고 그녀들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시연아, 왔어?”

시연이 탁자로 다가서자, 이미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이 보였다.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임진아가 말했다.

“성빈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분명 성빈이 혼자서는 다 못 먹을 텐데, 우리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 얘는 늘 이런 식으로 우리를 괴롭힌다니까?”

“그래, 괴롭혔다, 어쩔래?”

그는 제멋대로 한쪽 눈썹을 올리며 시연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나는 우리 시연이만 신경을 쓸 거야. 우리 예쁜 시연이가 많이 먹으면 그만이라고. 진아 너는 먹든 말든 상관없어!”

“너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

두 사람이 웃고 떠들자, 시연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시연아.”

성빈이 시연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시연이 밥을 한입 먹으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

진아와 성빈이 눈을 맞추며 그녀의 밥그릇에 갈비를 집어넣었다.

“그게... 노은범이 돌아왔대.”

순간, 시연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몰랐어.”

“톡방에 모두 모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라고.”

성빈이 말한 톡방에는 한 때 시연도 있었지만, 예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노은범과 헤어진 시연은 곧바로 노은범의 번호를 지우고, 톡방을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성빈이 또 물었다.

“시연아, 그럼 그때 너도 같이 갈 거야?”

시연은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즐거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가서 뭐 해?”

“그게... 동창 모임인 거지! 모처럼...”

진아가 말했다.

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더러 전 남자 친구를 만나라고? 나는 노은범이랑 헤어진 그날부터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시연아, 화내지 마.”

진아가 황급히 성빈을 노려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시연이가 싫다잖아! 하긴, 누가 그런 나쁜 X을 좋아하겠어?”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잠시 생각하던 성빈은 약간 짜증이 난 듯 시연을 향해 애교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때 노은범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시연이랑 나는 진작에 연인 사이로 발전했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 자식은 아직도 우리 시연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잖아.”

“풉...”

진아는 하마터면 물 한 모금에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

“성빈 도련님, 거울이나 좀 보고 말씀하세요.”

“저는 제 얼굴에 정말 만족합니다만?”

성빈이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또 한 번 시연에게 물었다.

“시연아, 요즘도 마귀할멈이 괴롭혀?”

‘마귀할멈’이란 그들이 장미리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시연의 집안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연은 이번 일을 두 사람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내 얼굴도 괜찮아 보이지 않아?”

“응, 그래 보여.”

성빈은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이 오빠가 있잖아.”

“나도 있잖아!”

진아가 조급하게 손을 들었다.

“그래, 알았어.”

시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이었는데, 두 사람 또한 그녀의 또래이며,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나에게 헌신을 다 하는 건 사실이지만... 절대 내가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돼.’

‘게다가... 이 일은 이미 해결된 셈이잖아?’

식사를 마친 성빈은 다른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떠났고, 시연은 진아를 따라 그녀가 세 들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날 밤, 시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이따금 준수한 얼굴이 스쳐서 잠을 뒤척인 것이었는데...

‘은범이가 돌아왔다고?’

‘우리 두 사람이 못 만난 지 얼마나 된 거지?’

‘와, 벌써 3년이나 지났구나.’

...

주말에 시연은 월차를 쓴 후, 태산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매주 지우주를 돌보는 데 온갖 노력을 쏟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우주가 그녀에게 대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버스에 앉은 그녀에게 ‘친구 추가’ 톡을 보냈다.

하지만 알림을 힐끗 확인한 시연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냥 무시할 뿐이었다.

태산 요양병원에 도착한 시연은 우주에게 선물할 물건을 들고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울어봐! 더 크게!”

“쓸모없는 물건 같으니라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여자가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찰싹’하는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여자는 미친 듯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멍청한 자식! 너는 맞아도 울 줄 모르잖아! X신, 그렇게 살아서 뭐 해? 하하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낀 시연이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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