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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마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마
作者: 은하수

1 화

作者: 은하수
유난히 추운 예성의 올해 겨울, 아직 11월이지만 우중충한 하늘에서 벌써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 남친을 만나러 가는데 날씨가 뭔 대수랴.

차에서 내린 권희연은 한 손으로 A4용지만 한 박스를 안고 문을 쾅 닫은 다음 클럽 루비의 맨 끝 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곽태민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헐렁한 흰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이미지가 한층 더 부드러워 보였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매정한 짓을 했으리라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곽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야.”

권희연이 가까이 다가갔다.

곽태민은 문득 목이 잠겼다.

“뭐 마실래? 난...”

하지만 권희연이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이거 돌려주러 왔어.”

그녀는 박스를 책상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물건조차 건네줄 시간이 없었다.

곽태민의 시선이 누런색 상자를 향했다. 아마 그녀에게 줬던 선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게.”

“괜찮아.”

권희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난 이미 결혼했어.”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곽태민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래서?”

무심한 말투는 마치 대수롭지 않은 듯싶었다.

권희연의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너랑 확실하게 선을 긋기 위해 온 거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남편이 싫어하거든.”

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곽태민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주 잘해주나 본데?”

“당연하지.”

“그래?”

매서운 눈빛은 그녀를 꿰뚫어 볼 기세였다.

권희연은 더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이때,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하지만 넌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잖아.”

곽태민이 앞을 가로막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날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해?”

권희연이 흠칫 놀랐다.

곽태민은 그녀의 첫사랑으로 대학교 다닐 때 처음 사귀었다.

다만 졸업하고 나서는 집안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당시 곽태민은 가난한 학생에 불과했고 그녀는 이미 정략결혼 상대가 정해져 있었다. 다름 아닌 차광 그룹의 후계자 차승혁.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권희연은 가족과 연을 끊고 도피를 택할 정도였다.

약속 당일, 공항에서 날이 어두울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코빼기는커녕 연락도 없었고 휴대폰은 먹통이었다.

저녁이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허탈한 심정으로 공항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렸다. 매서운 추위에 어깨를 움캬잡고 떨며 온몸이 굳어가기 직전, 차승혁이 나타났다.

“베일리지에 갔대요. 20억과 희연 씨 중에서 돈을 선택했죠.”

그리고 얼마 후 집안 부동산 사업의 자금줄이 끊겼는데 차광의 투자를 받은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결국 그녀도 자연스럽게 차승혁과 결혼하게 되었다.

4년이 지나 베일리지에서 스타트업으로 대성공을 이룬 곽태민은 시가 총액 몇십조가 넘는 회사의 오너로서 금의환향했고, 갑자기 3일 전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사실 만나면 안 된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결혼할 때 차승혁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오로지 그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권씨 가문을 돕는 조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당시 말없이 헤어진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치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끊겨 결말이 미궁 속으로 빠진 것처럼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여자란 원래 그런가? 확실한 이별에 대해 묘한 집착을 가졌다.

오늘 그동안 받은 물건을 돌려주고 깨끗이 털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런 소리를 하지?

권희연은 남자의 손을 홱 뿌리쳤다.

“미우나 고우나 내 남편이야. 게다가 널 만나는 게 눈치 볼 일도 아니고.”

곽태민이 표정 하나 놓치지 않을 기세로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떳떳하면 내가 전 남친이라는 것도 남편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

그녀는 묵묵부답했다.

이내 문을 벌컥 열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나갔다.

복도 천장 구석에 있는 CCTV에서 빨간 불빛이 반짝거렸다.

...

눈이 어느덧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차에 올라타자 권혁재가 연락이 왔다.

“희연아, 승혁이 출장 가서 언제 온대? 둘이 같이 밥 먹으러 와. 집에 다녀간 지도 꽤 되잖아.”

“모레요.”

권희연이 시동을 걸며 무심하게 말했다.

“언제 시간 있는지 물어볼게요.”

권혁재의 잔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남편한테 관심 좀 가져. 자꾸 출장 보내면 어떡해? 얼른 아이 낳아야지?”

벌써 4년 동안 주야장천 듣던 레퍼토리인지라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대충 얼버무리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는 차승혁한테 달렸다.

하늘이 어두컴컴해졌고 어느덧 폭설로 변했다.

4년 전 차승혁이 공항에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도 눈이 내렸다는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크리스탈 베이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은 깜깜했다.

하지만 공기 중에 희미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권희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점이 깜빡였다.

이때, 불빛이 훤히 켜졌다.

통유리창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네이비 슈트를 차려입고 금테 안경을 썼다. 셔츠 단추를 풀어 옷깃이 헐렁했으며 손가락에 낀 담배는 절반 정도 타들어 갔다.

차승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놀라죠? 나쁜 짓이라도 했어요?”

싸늘한 목소리는 농담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권희연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니요.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비서가 모레 온다고 해서.”

“맞아요.”

차승혁이 걸음을 옮기더니 허리를 굽혀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고 나서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었다.

“이리 와요.”

비록 하루 일찍 돌아온 이유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묻지도, 물어볼 자격도 없었다.

단지 차승혁의 아내로서 항상 비위를 맞춰주며 매사에 복종하는 척해야 했다. 그래야만 권씨 가문이 체면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이내 차 키를 내려놓고 신발을 갈아신으려던 순간 또다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고 있어요.”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하이힐을 신은 채 소파로 걸어갔다.

곧이어 남자의 손에 이끌려 품에 안겨 무릎에 앉게 되었다.

대체 몇 개비를 피웠는지 몸에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시선은 저도 모르게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로 향했고 삐쭉삐쭉 튀어나온 담배꽁초만 해도 열 몇 개는 되어 보였다.

“기분이... 안 좋아요?”

이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묵묵부답하는 남자를 보자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후회막급했다.

차승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전형적인 미인형 얼굴에 백옥처럼 맑고 투명한 피부, 매력적인 눈동자는 한 마리의 요염한 여우를 연상케 했고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어디 갔어요?”

권희연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동창 만나러...”

“남자? 여자?”

권희연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당연히 여자죠.”

결혼 4년 차, 다른 건 잘 몰라도 소유욕이 굉장히 강한 남자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곽태민과 만났다는 말은 좀처럼 꺼내지 못했다.

차승혁의 목소리가 무미건조했다.

“그래요?”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잘록한 허리를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려 소파에 무릎을 꿇게 했다. 이내 목덜미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끝이 피부에 닿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권희연의 부탁은 단 하나, 바로 불을 끄는 것이었다.

차승혁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물론 권희연도 속으로 뻔했다.

왜냐하면 사랑을 나눌 때마다 굴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몸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기분이 별로라서 그런지 오늘 유난히 거칠었다.

절정이 지나고 차승혁은 소파 옆에 있는 스탠드를 켰다. 그리고 버건디색 담요를 집어 들어 그녀의 몸을 가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차림은 아까와 별반 차이가 없었고, 단지 외투만 벗었을 뿐이었다.

반면, 권희연은 발가벗은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늘씬한 어깨가 공중에 훤히 드러났고, 매끈한 종아리는 반쯤 삐져나왔다.

사지는 으스러질 것 같았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체력도 소진했을뿐더러 불편하기도 했다.

방금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참아야 했다.

고개를 돌리자 엉망진창인 바닥에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아이를 가지는 건 불가능했다. 차승혁의 사후 조치는 늘 완벽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장점이지 않을까 싶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

최소한 피임약을 먹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차승혁은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와 거실의 샹들리에를 켰다.

권희연은 여전히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이내 그녀를 힐긋 쳐다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씻어요?”

결국 마지못해 담요를 두른 채 소파에서 일어났다.

짐승 같은 놈, 이렇게 매정할 수가! 쉬는 꼴조차 보기 싫다는 건가?

그녀는 뒤뚱거리며 욕실로 걸어갔다.

차승혁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그녀가 앞을 지나치는 순간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윽한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아팠어요?”

권희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장난해? 보면 모르나?

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차승혁은 갑자기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권희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곧이어 무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씻겨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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