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챙겨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볼일이 끝나면 먼저 씻고 자느라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부부 생활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차광 그룹은 부동산, 호텔,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기에 잦은 출장으로 몇 달 만에 한 번 볼까 말까 했다.
따라서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는 욕구 해소에 가까웠다.
하지만 계약은 준수해야 하므로 도움을 받은 이상 신세는 갚아야 하기에 몸을 사릴 필요는 없었다.
20분 동안 반신욕을 하고 욕실에서 나오자 차승혁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서재에 간 듯싶었다.
그는 지독한 워커홀릭이다. 첫날밤에도 아내를 내팽개치고 일하러 갈 정도인데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권희연은 피곤한 나머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하지만 밤새 잠을 설쳤다.
꿈속에 4년 전 눈이 내리는 밤이 떠올랐다.
곽태민에게 버림받아 홀로 폭설에 덩그러니 서 있던 그 날.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가녀린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저 멀리 누르스름한 전조등이 흐릿한 시야에 문득 나타났다. 곧이어 검은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눈을 뚫고 다가왔다.
곽태민? 그럴 리가.
지금까지 꿈에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몇 년 동안 반복되던 악몽이 비로소 끝을 맺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간절히 원하던 순간을 놓치고 나니 나중에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들 이미 성취감이 사라진 뒤였다.
단지 아이가 없었을 뿐이다.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지? 곽태민에게 더는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고 결과에 대한 집착도 어제부로 내려놓게 되었다.
잠시 후, 마침내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바로 차승혁이었다.
굳은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대뜸 뒷좌석으로 끌고 가서 차에 올라탄 다음 그녀의 양손을 붙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는 꿈속에서 더 잔인했다.
다행히 여기서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결국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개자식!”
...
서재에 있는 차승혁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때, 비서 김훈이 연락이 왔다.
“대표님, CCTV 영상 확보했습니다. 사모님께서 오후 6시 37분에 들어가서 6시 49분에 나왔어요. 12분 동안 룸 안에 계셨는데 감시 카메라가 없어서 곽태민과 나눈 대화 내용까지는 몰라요.”
불과 십여 분 사이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약속에 응하고 거짓말한 건 사실이었다.
차승혁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김훈이 조심스레 한마디 보탰다.
“그리고 곽태민과 사모님이 잇따라 클럽에 들어서는 모습을 찍은 파파라치가 있는데...”
“입 막아.”
이내 전화를 끊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고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옆 스탠드가 켜져 있었고, 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살포시 감은 눈 위로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이 드리워져 정교하게 빚은 도자기 인형을 연상케 했다.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볼에 붙어 있었고, 차승혁이 다가가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 넘겼다.
남편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잠이 들다니.
이내 침대에 올라가 불을 끄려는데 들썩이기 시작하는 가녀린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잠들어 있지만 눈가에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항상 현명하고 순종적인 편이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자를 달래본 적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시 후, 뒤늦게 휴지를 가지러 가서 눈물부터 닦아주었다.
악몽을 꿨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개자식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문득 들렸다.
차승혁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내 손에 든 휴지를 구기고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곧이어 괴로운 듯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승혁 씨, 잠깐만요. 아파요...”
순간,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설마 그를 욕한 건가?
...
권희연은 휴대폰 벨 소리에 깨어났다.
온몸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아직 잠에 취해 비몽사몽 했다. 눈을 반쯤 뜬 채 화면을 보자 프로듀서로 일하는 친구 허가인의 연락이었다. 이내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는 목이 꽉 잠겨 있었다.
“아직 자는 거야? 10시 반인데?”
허가인이 의아하게 물었다.
권희연은 항상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유일한 이유는...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설마... 어제 남편이 돌아온 건 아니지?”
차승혁을 언급하자 권희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허가인은 혀를 차며 농담을 건넸다.
“정력이 좋나 보네.”
그러게.
친구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그녀를 놀려도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허가인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나무 엔터에서 투자를 철회했어. 담당자가 평가해보더니 손익분기점을 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어. 다시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야 해.”
권희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고민 좀 해볼게.”
최근 영화 산업은 침체기에 집어 들었다. 작년에는 투자액 대비 수익이 낮았기에 다들 신중하게 작품을 물색하고 있다.
권희연은 퍼스트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상을 받았지만 상업 영화를 제작한 적이 없었기에 신인 감독에 속했다. 따라서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기 어려웠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샤워하고 잠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잠이 들었다. 이내 차승혁이 덮어주었던 버건디색 담요를 집어 들어 가슴만 가린 채 거실에 물 마시러 갔다.
차승혁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그녀는 스피커폰 모드로 바꾼 다음 탁자에 올려놓고 물컵에 생수를 부었다. 주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도우미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다른 투자자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야. 나도 이제 여유 자금이 다 떨어졌어.”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허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희연아, 네 남편한테 투자해달라고 하면 안 돼?”
권희연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응.”
“왜?”
허가인은 어리둥절했다.
“몇십억은 그분한테 껌값일 텐데 시도는 해봐야지 않겠어? 게다가 나중에 돈 벌고 갚으면 되잖아.”
권씨 가문의 생사가 차승혁에게 달린 이상 지금보다 더 비굴하게 살 수는 없었다.
이런 말을 어찌 입 밖으로 꺼내겠는가?
권희연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주방 문이 열리더니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뒤돌아선 채 식탁을 가리키며 도우미에게 아침밥을 내려놓으라고 손짓했다.
휴대폰 너머로 허가인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접 말하기 어려운 얘기는 침대에서 하면 되잖아. 하룻밤 자고 나면 다 해결이 될 텐데?”
어제 있었던 일만 떠올려도 가슴이 철렁했다.
“과연 한 번으로 족할까?”
등 뒤로 귀에 익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모르죠. 한 번 시도해봐요?”
권희연은 화들짝 놀라 뒤돌아서 차승혁을 바라보았다.
“회사에 안 갔어요?”
회색 실크 잠옷 차림의 남자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기분이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응. 피곤해서 오전에 쉬려고.”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허가인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
권희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겨울 햇살이 창문을 통해 어깨를 비추자 괜스레 후끈거리는 듯싶었다.
담요 아래는 무려 알몸이었다.
아무리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고 해도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감정을 얼마든지 숨길 수 있지 않은가?
훤한 대낮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눈빛을 마주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의식적으로 물컵을 옆에 두고 몸을 감싼 버건디색 담요를 추켜올렸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차승혁이 힐긋 쳐다보더니 방어적인 태도에 불만을 느꼈다.
이내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뻗어 눈 깜짝할 사이에 담요를 빼앗아 갔다.
권희연은 곧바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차승혁의 목소리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가리긴, 어차피 구석구석 다 봤는데.”
권희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 변태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