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문제는 역시 집 안에 있는 걸까.’“대표님, 사모님. 도착했습니다.”윤하경이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민진혁이 차를 매끈하게 세웠다.“네.”윤하경이 짧게 답했다.저택으로 돌아오자 오건우가 다정한 체하며 윤하경을 침실까지 안내했다.“푹 쉬어.”이마에 입을 맞추려 고개를 기울이는 눈빛까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윤하경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약간 틀어 피하자 오건우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윤하경이 얼른 그의 팔을 잡으며 말을 잇는다.“또 나가세요?”오건우가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응. 금방 다녀올게.”그러고는 아이를 달래듯 낮게 속삭였다.“기다려.”“다녀오세요. 조심하고요.”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건우는 문턱으로 걸어가다 멈춰 서서 멀찍이 눈을 맞췄다. 잠깐의 침묵 뒤, 의미를 읽기 힘든 미소를 띠고 문을 닫았다.문이 ‘딸칵’ 닫히는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윤하경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방 안을 훑었다.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의도적으로 느린 동작으로 움직였다. 혹시라도 카메라가 있다면 그저 방안을 거니는 정도로만 보이게.한편, 오건우가 1층 차고로 내려오자 민진혁이 차 문에 기대 휴대폰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손끝에는 반쯤 태운 담배가 걸려 있었지만 오건우를 보자마자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끝으로 재빨리 껐다.“대표님.”민진혁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휴대폰은 자연스럽게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가자.”오건우가 스스로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탔다.민진혁의 눈빛이 짧게 번뜩였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백미러로 뒷좌석을 보며 물었다.“어디로 모실까요?”오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동공이 어두워지더니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청림원.”“청림원...”지명을 듣는 순간, 민진혁의 손이 잠깐 굳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백미러 너머로 오건우를 한 번 훑어봤다.청림원은 낡은 주공단지였다. 남쪽 구도심에 붙어 있고 철거 공문이 내려간 지도 오래됐다. 주민은 거의 빠져나가 빈집만 줄지어 서 있었다.
배 속 아이만 무사히 있어 준다면 지금 겪는 일도 아직 최악은 아니라고 윤하경은 마음을 다잡았다.오건우는 옆에서 모니터 화면을 차갑게 응시했다. 어금니를 세게 물고 있었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시트 끝을 꼭 쥐었다. 매끈하던 천이 손끝에서 잔주름으로 구겨졌다. 오건우의 눈빛이 지나치게 어두워 배 속 아이까지 해칠 듯하여 미간이 저절로 모였다.의사가 진료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강 대표님, 사모님과 아기는 아주 건강합니다. 오늘 검사도 이상이 없습니다.”말은 끝마친 의사는 오건우를 본 순간, 싸늘한 표정에 눌려 축하한다는 말은 삼키고 머쓱한 미소만 지었다.“두 분 모두 별다른 문제 없으시면 이제 돌아가서도 됩니다.”윤하경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아이에 관하여 더 묻고 싶어 입을 떼려는 순간, 오건우가 먼저 말을 잘랐다.“가자.”집에서는 그나마 다정한 체했지만 오늘의 눈빛은 전혀 달랐고 기분이 몹시 상한 듯했다.윤하경은 의사가 건넨 검사지를 받아 들여다보았다. 초음파 사진 속 작은 손발이 또렷했고 윤곽도 분명했으며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눈가가 뜨거워지려는 것을 억누르며 문을 닫는 순간, 진료실 안에서 의사의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역시 재벌가 살림은 바깥에서 보던 것처럼 만만치 않네요. 오늘 보니 정말 그렇네요.”의사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TV와 뉴스에서 보던 얼굴이라서인지 오건우가 낯익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의사 머릿속에는 어느새 ‘재벌가에 시집가 홀대받는 아내’ 같은 장면이 그려졌다.문을 닫으려던 윤하경의 손이 잠깐 멈췄고 이유 없이 서러움이 치밀었다.진짜 강현우가 곁에 있었다면 오늘만큼은 분명 기뻐해 줬을 텐데.“뭐해?”앞서가던 오건우가 윤하경이 따라오지 않는 걸 보고 성급히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윤하경은 고개를 들고 낯선 기색이 어린 눈과 마주했다.“가요.”‘하경아, 조금만 더 버텨.’윤하경은 이를 꼭 깨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병원을 나오자
오건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윤하경이 먼저 결론을 내렸다.“진혁 씨, 그냥 돌아오세요. 오늘은 아예 여기 계세요.”그녀는 곧장 말을 이었다.“이따 임신 검진이 있어요. 같이 가 주시면 든든하겠어요.”민진혁이 반사적으로 오건우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의 얼굴에는 금세 그늘이 내려앉았고 불쾌함이 선명했다.윤하경은 민진혁에게 가볍게 미소를 건네고 고개를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그렇죠, 현우 씨?”칼과 포크를 잡은 오건우의 손등에 푸른 혈관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윤하경의 눈웃음을 마주하자 그는 마지못한 듯 한마디로 정리했다.“네가 그러자면 그렇게 하지.”아무 일 아니라는 듯 과일을 집어 입에 넣었지만 내려앉은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쳤다. 잠시 후 포크가 과일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울려, 공기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럼에도 윤하경은 민진혁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마음이 조금 놓였다.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였다.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오늘 검진을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고 그 사이 오건우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이끌어 차고로 데려갔다.이번에는 운전석에 민진혁이 앉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틈이 나지 않았다. 차는 곧장 병원 주차장에 들어섰고 민진혁이 먼저 내려 문을 열었다.그때, 차 안에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내가 여기 오자고 했나?”도착한 곳은 강한 그룹 계열의 지분을 가진 개인 병원이었다. 윤하경도 몇 번 다녀온 곳. 민진혁은 이 반응을 예상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아, 여기가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예전에는 문제 생기면 늘 여기로 왔고 우리 회사가 지분도 있지 않습니까.”말을 멈춘 그는 자연스럽게 윤하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윤하경은 곧바로 눈치를 채더니 민진혁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그래요, 현우 씨. 예전에도 늘 여기서 검사받았잖아요. 이미 도착했으니 오늘도 여기서 보면 되겠죠.”윤하경과 민진혁이 주고받듯 말을 맞추자 오
엘리베이터에서 오건우가 말을 꺼내는 순간 윤하경의 등이 싸늘해지며 식은땀이 맺혔다.‘혹시 들켰나?’그래도 표정에는 미소를 걸고 가볍게 한숨을 보탰다.“무슨 특별한 얘길 하겠어요. 여자들끼리나 하는 이야기죠, 뭐.”윤하경은 톤을 가볍게 유지한 채 살짝 핀잔도 얹었다.“그리고요, 지연 씨 다시 와도 그렇게 쉽게 내쫓지 마세요. 겨우 친구가 와서 말 친구 해 주는데요.”겉으로 보기에는 다정한 부부의 일상 대화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속은 저마다 다른 계산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오건우가 한동안 윤하경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네 말이 맞네. 다음부턴 분위기 망치지 않게 조심할게.”사과하는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부드러웠다.“네.”윤하경은 짧게 대답하며 속으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서로 떠보는 말이 오간 뒤 식당에 도착했다. 오건우는 예의 바르게 의자를 빼 주었고 윤하경은 앉으면서도 머릿속으로 오늘 검진을 어떻게 피할지를 쉼 없이 굴렸다.‘절대 안 돼.’그때 현관 쪽이 술렁였다.“대표님.”익숙한 목소리에 윤하경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민진혁은 안으로 들어오며 윤하경을 향해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놓였다. 윤하경이 더 확인하려 눈을 맞추려는 순간, 민진혁은 금세 얼굴을 다잡고 오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윤하경과 달리, 오건우의 표정은 곧장 어두워졌다. 날카로운 눈길이 민진혁에게 꽂혔다. 그는 식탁에 기대앉은 채 건조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지?”민진혁은 억울함을 꾹 누른 얼굴로 다가와 섰다.“대표님, 지방 프로젝트 쪽이 너무합니다. 저를 낙하산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뒷문으로 들어가 총괄을 맡았다느니...”말은 분통이 터질 듯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얘기만은 아니었다. 동시에 그가 미리 준비해 둔 명분이기도 했다. 아래쪽에서 반발이 있었던 건 사실이나, 이미 현장은 그의 손에 꽉 들어와 있었다.오건우가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비스듬히 올렸다.“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벌써 아침이에요?”윤하경의 물음에 오건우가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아침이야.”오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자 큰 그림자가 침대 위로 드리웠다.“일어나서 아침 먹고 병원 다녀오자.”병원’이라는 말에 윤하경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굳었다.“병원은... 왜 가요?”경계가 어린 눈길이 저절로 오건우를 향했다.오건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숙였고 날카로운 인상이 잠깐 누그러졌다.“잊었어? 오늘 산부인과 정기 검진 있는 날이잖아.”“정기 검진이요?”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분명 얼마 전에 검사를 받았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은 안개 낀 것처럼 몽롱했고 시간 감각도 흐릿했다.“바보야.”오건우가 윤하경의 머리를 다정한 척 쓰다듬었다.“나 없이 어떻게 하려고 그래.”윤하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조금 빼다가 의심을 살까 봐 억지로 멈춰 섰다.그녀가 바로 움직이지 않자 오건우가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힘들면 내가 안아서 욕실까지 데려가 줄까?”“아니요.”너무 빠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싶어, 윤하경은 숨을 한번 고르고 말끝을 다듬었다.“괜찮아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먼저 아침 드세요. 금방 내려갈게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오래 누워 있었던 탓인지 발걸음이 허공을 디디는 듯 가벼웠다.욕실로 가는 동안, 윤하경의 머릿속은 방금 오건우가 한 말을 끊임없이 되감았다. 오늘이 정말 검사 날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단 하나 분명한 건,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오건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점점 선명해졌다.거울 앞에 서자 핼쑥한 얼굴과 마주했고 깊게 찌푸린 이마가 먼저 답을 내렸다.‘가면 안돼. 절대로 안 돼. 우리 아이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즘 들어 머리가 유난히 무겁고 흐렸다. 오건우가 뭔가를 먹인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서서히 부풀었다.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아랫배에 손을 얹었고 앳된 얼굴 위로 먹구름 같은 근심이 드리웠다.“다 했어?”갑자기
우지원도 속이 씁쓸했다.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지만 방금 소지연의 말을 듣고 나니 퍼즐 조각이 한꺼번에 맞아떨어졌다. 그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우지원이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진혁이 급히 올라왔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셋을 훑어본 민진혁은 본능적으로 눈살을 모았다.“무슨 상황이야?”우지원이 소지연을 향해 눈짓했다.“아까 그 얘기,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소지연은 민진혁을 잠깐 바라보며 망설였다. 애초에 윤하경이 찾아 달라고 한 사람은 우지원 한 명뿐이었으니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우지원이 그 표정을 읽고 말끔히 정리해 줬다.“걱정하지 마세요. 민진혁은 우리 사람이에요. 사실이라면 반드시 알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사람이 엉뚱한 지시를 내릴 때, 민진혁 쪽도 위험해져요.”민진혁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했다.“그러니까, 정확히 무슨 얘기를 하는 건데?”소지연은 숨을 고르고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우지원에게 말했던 내용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전했다.끝까지 들은 민진혁의 표정이 굳었다.“뭐라고? 대표님이 아니라고?”민진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에요?”기대한 반응이 아니었기에 소지연은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삼켰다. 그때 우지원이 다시 나서서 자신이 겪은 일들까지 보태 또 한 번 차분히 설명했다.오랫동안 강현우 곁을 지켜 온 민진혁은 멍청한 편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터무니없게 들리긴 했지만 우지원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윤하경이 쉽게 입 밖에 낼 사람도 아니었다.그동안 그 옆에서 겪어 온 크고 작은 일들이 민진혁의 머릿속을 차례로 스쳤다. 우지원이 겪은 일까지 따져 보니 믿는 쪽으로 마음이 크게 기울었다.민진혁이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을 모으더니 입을 열었다.“사모님이 아니라고 했다면 저는 믿어요.”그는 어금니를 살짝 물고 우지원을 바라봤다.“지금 당장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