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홍미수가 두 번이나 부르자 윤하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멋쩍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죄송해요, 방금은 못 들었어요.”“괜찮습니다.”홍미수는 쟁반을 윤하경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도련님 말씀으로는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심한 건 아니죠?”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별일 아니에요. 심각하지 않아요.”“그럼 다행이네요.”홍미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상 위에 반찬을 차려주었다.“우선 저녁 드세요. 혹시 밤에 출출하면 말씀만 하세요. 제가 뭐든 해드릴게요.”윤하경은 눈앞에 놓인 일곱, 여덟 가지 음식들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양은 적지만 가짓수가 많아, 합치면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그녀는 원래 야식은 거의 먹지 않는 습관이 있어 고개를 저었다.“알겠습니다.”홍미수는 더 권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편히 드세요. 조금 뒤에 와서 치우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나간 뒤, 방 안은 조용해졌다.윤하경은 입맛이 없어 몇 젓가락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침 그때 강현우가 밖에서 들어왔다.윤하경은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 소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다친 발이 문제였다. 발끝으로만 겨우 디뎌 걸어도, 몇 걸음 가지 않아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눈빛을 가라앉히더니 곧장 다가와 윤하경을 안아 들었다.예고 없는 행동에 윤하경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화가 난 듯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노려보았다.그러자 윤하경은 차가운 눈매로 스치듯 바라보고는 담담히 말했다.“그렇게 보지 마. 내일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데 너 때문에 체면 구기고 싶진 않아. 오늘 밤에는 발을 잘 쉬게 해야 해.”윤하경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품에 안겨버린 마당에 더 반항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적어도 그가 말한 대로, 더 이상 선을 넘을 일은 없을 테니까.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올려다보았다.그녀의 시선에는 각이 또렷한 턱선과 어슴푸레 드러난 그의 옆
강현우가 고개를 숙여 윤하경을 내려다보았고 그 눈빛에는 짙은 장난기가 번졌다.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은 끝내 내뱉지 못했다. 그러자 강현우는 갑자기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버렸다.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지는 듯해, 바닥에 그대로 부딪칠 걸 각오하고 눈을 감았을 때, 강현우의 팔이 다시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윤하경은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올려다보았다.“재밌어요?”강현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나쁘지 않은데.”그러더니 낮게 목소리를 이어갔다.“하지만 또 한마디라도 군소리하면 다음번에는 정말 받아줄지 장담 못 한다.”말이 끝나자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와 소파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윤하경이 상처를 확인하려 몸을 움직이는 순간, 발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카펫 위에 스며들었다.강현우는 소파 앞 탁자에 걸터앉아 그녀와 마주했다. 그의 긴 손이 발목을 집어 올리자 깊게 베인 발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고통을 참아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강현우는 잠시 그녀의 발을 살펴보다가 얼굴을 굳혔다. 하얗고 여린 피부는 깊게 갈라져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장식장을 열고 의료 상자를 꺼냈다. 소독약과 연고 붕대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고 손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능숙했다.솜에 요오드를 묻혀 상처 부위를 닦고 약을 바른 뒤 단단히 붕대를 감아 마무리했다.거친 손바닥의 굳은살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묘하게 간지러운 감각이 일었지만 윤하경은 내색하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모든 동작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고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처럼 조금도 서툴지 않았다. 윤하경은 말없이 그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여긴 병원이 멀고 의사도 부르지 않았어. 혹시 사람을 시켜 병원에 가고 싶어?”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러자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닌데요.
“하지만 그때 주인어른께서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길에 사고를 당하셨지요. 도련님은 불과 이틀 사이에 증조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한꺼번에 잃고 말았어요. 그때부터였어요. 하루아침에 도련님이 완전히 달라졌죠. 더는 우리랑 장난치거나 웃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1년쯤 지나 부인께서 도련님을 데리고 경성으로 올라가 키우셨지요.”홍미수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그리고... 들은 얘기지만 회장님과 주인어른의 죽음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고 하더군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큰 집안의 일이란 원래 단순치 않다. 가문의 핵심 인물이 잇따라 세상을 떠난다면 그 속사정이 어떠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역시 고난은 사람을 단숨에 어른으로 만든다. 윤하경은 이제껏 강현우가 사는 세상이 늘 풍요롭고 아무 근심도 없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결코 그렇지 않았다.대가문의 속사정은 더 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괜히 엮였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법이다. 윤하경은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려 산장의 구조나 다른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물어보았다.오후 내내 걸어 다녔지만 산장의 절반도 보지 못했는데 벌써 다리가 퉁퉁 붓고 아려왔다.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홍미수가 그녀의 발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사모님, 오늘은 이만 둘러보시는 게 어떠세요? 며칠 더 계실 테니 그때 나머지를 보셔도 돼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럼 제가 가서 저녁상을 준비하겠습니다.”홍미수는 웃으며 그녀를 안채 앞까지 모셔다드리고서야 발길을 돌렸다.윤하경은 종일 걸어 다닌 탓에 마치 장시간 쇼핑이라도 한 듯 지쳐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답답한 구두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시원하게 안채로 들어섰다.그런데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연못가에 서 있는 강현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무심하게 물고기 밥을 뿌리고 있었는데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희고 가냘픈 맨발 위로 흘러내렸다.가장 가까운
“네? 밤에 오줌을 쌌다고요?”윤하경은 홍미수의 말을 듣자 놀란 듯 입을 틀어막고는 무심코 강현우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하지만 보이는 것은 닫힌 대문뿐이었다.홍미수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지금은 늘 차갑고 도도한 얼굴만 하고 계시지만 사실 우리 도련님 어릴 때는 정말 장난꾸러기였어요.”사람의 어린 시절이 곧장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강현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윤하경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고고하고 가까이하기 힘든 강현우가 사실은 평범한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게 의외였다.윤하경은 순간, 어린 시절의 강현우가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적어도 지금처럼 늘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만 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호기심이 발동한 윤하경은 홍미수 곁으로 조금 다가갔다.“제가 아는 강현우 씨랑은 영 다르네요. 어릴 땐 그렇게 밝고 명랑했다면 지금쯤은 분명히 온화하고 신사다운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걸까요?”마지막 말은 끝까지 잇지 못했지만 홍미수는 그 뜻을 단번에 이해한 듯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 말이에요. 그때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우리 도련님은 틀림없이 훌륭하고 따뜻한 분으로 자라셨을 텐데... 이렇게 차갑게 변하지도 않으셨겠죠.”아무리 이혼을 결심한 처지라지만 남의 속 이야기는 누구라도 궁금하기 마련이다.윤하경 역시 모른 척할 수 없어 귀를 기울였다.홍미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를 흘끗 보았다.“원래는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사모님은 이제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말씀드려도 되겠지요.”그녀의 시선은 멀리 향하며 마치 기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듯했다.“우리 도련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어요. 그래서 특히나 어르신께 사랑을 많이 받았죠. 구 회장님께서 경성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시다 고향으로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을 때, 함께 데려온 분이 바로 도련님이에요. 그땐 겨우 두세 살밖에 안 됐는데 어
“그럼 저는 가서 두 분 식사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준비한 건 전부 다 도련님이 어릴 적 좋아하시던 음식이에요.”홍미수는 싱글벙글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부리나케 나가버렸다.안채에는 강현우와 윤하경 둘만이 남았다. 윤하경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아직 여자를 억지로 붙잡아야 할 만큼 굶주리진 않았어.”그는 담담히 이어 말했다.“안방은 네가 써. 난 서재에서 잘 거니까.”윤하경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봄볕이 내리쬐는 정원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경성보다 남쪽이라 날씨가 온화한 탓에 꽃들이 이미 활짝 피어 있었다.윤하경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건 동쪽 화단에 흐드러지게 핀 치자꽃이었다. 짙은 초록 잎 사이에서 순백의 꽃송이가 고개를 내밀며 그윽한 향을 퍼뜨리고 있었다.윤하경은 무심코 다가가 꽃 한 송이를 따서 코끝에 가져다 댔다.“향기 정말 좋네.”그녀의 얼굴에 순간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원 한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강현우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윤하경의 옆얼굴은 피붓결마저 투명하게 드러났고 그 고운 모습은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눈부셨다.강현우는 무심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지만 시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그때 윤하경이 돌아보다가 강현우의 깊은 눈빛과 마주쳤다. 순간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지려던 찰나, 홍미수가 다시 들어왔다.뒤에는 여러 하인들이 음식을 가득 담은 쟁반을 들고 따라왔다. 강현우의 입맛을 너무 잘 아는 듯, 상에는 그의 취향대로 준비된 요리들이 줄지어 놓였고 이상하게도 그중에는 윤하경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도 몇 가지 함께 올라왔다.식사를 마친 뒤, 윤하경은 정원을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새로운 곳에 오면 반드시 발길을 옮겨보고 싶어 하는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이곳저곳 곡선이 살아 있는 처마, 다리와 연못, 수려한 조각들이 가득한 건물들,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웠다.하지만 여기는 강현우
홍미수는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다가왔다. 눈가에 감격이 어려 있었고 목소리까지 살짝 떨렸다.“도련님이 오늘 오신다고 해서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마 진짜 오실 줄은 몰랐네요.”강현우는 그녀를 향해 잠시 시선을 주더니 담담하게 짧게 대답했다.“그래.”홍미수는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차가운 태도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는 옆에 서 있는 윤하경을 바라봤다.“이분이 사모님이죠? 정말 고우세요. 꼭 배우 같으시네.”진심 어린 칭찬과 따뜻한 미소를 마주하자, 윤하경도 굳이 차갑게 굴 수는 없었다.윤하경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물었다.“저희는 어디서 묵으면 될까요?”그제야 홍미수가 손뼉을 치듯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내가 정신이 없었네. 어서 들어오세요. 주인채는 다 준비해 놓았답니다.”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줄지어 서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도련님, 사모님, 환영합니다!”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윤하경은 놀라서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다.강현우는 잠시 미간을 좁혔고 홍미수는 재빨리 눈치를 채며 웃음 띤 얼굴로 사람들을 흩어지게 했다.“어서 점심 준비해라. 도련님이랑 사모님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거다.”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홍미수가 두 사람을 안내해 산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산장은 규모가 상당했다. 경성의 강씨 가문 저택 못지않은 위세를 풍겼고 전체가 고풍스러운 한옥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정자와 누각, 작은 다리와 연못까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자욱한 안개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 같았다.윤하경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며 둘러봤다. 수많은 풍경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고즈넉하고도 아련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주인채는 삼합원 구조였다. 응접실과 침실, 서재, 다실까지 다 갖춰져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 자리한 연못에서는 값비싼 비단잉어가 유유히 헤엄쳤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오길 잘했네.’윤하경은 잠시나마 그런 생각이 스쳤다.강현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