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아시아 지역 캠페인은 소율의 ‘각자의 빛’으로 확정됐고, 양측은 브랜드 사용 범위와 수익 배분까지 대부분 합의했다. 남은 것은 출시 행사의 형식과 계약서의 일부 문구뿐이었다.“오늘 저녁 제 저택에서 메종 벨루아의 겨울 살롱이 열립니다.”이자벨이 마지막 자료를 덮으며 말했다.“본래 사교 행사지만, 주요 주주와 유통 파트너들이 모두 참석하죠. 그 자리에서 합작 브랜드의 첫 티저를 공개한다면 이사회 승인도 빨라질 겁니다.”사업적으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그런데 이자벨이 초대장을 한 장만 꺼내 도현의 앞으로 밀었다.“차 본부장님을 제 파트너로 모시고 싶군요.”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태성 임원들은 일제히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누구도 두 여자 사이에서 눈에 띄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도현은 초대장을 보지도 않았다.“한 팀장이 참석하지 않는 자리에 저도 가지 않습니다.”“실무 책임자까지 동반하는 행사는 아니에요.”“그 실무 책임자가 이 프로젝트의 아시아 전략 책임자입니다.”“공적인 이유인가요, 사적인 이유인가요?”이자벨이 도발적으로 물었다.도현은 대답하기 전에 소율을 바라보았다. 거절은 자신의 몫이지만, 참석 여부는 프로젝트 책임자인 소율의 판단까지 들어야 한다는 듯한 시선이었다.소율은 잠시 계산했다.메종 벨루아의 주주와 유럽 유통사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 감정 때문에 포기한다면 이자벨에게 ‘연인의 자격으로 사업을 방해했다’는 명분만 줄 뿐이었다.소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참석하겠습니다.”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대신 초대장은 두 장이어야 합니다. 차 본부장은 태성그룹의 대표로, 저는 합작 프로젝트의 공동 책임자로 참석하죠.”“제가 차 본부장님의 파트너를 요청한 건데요.”“그분의 파트너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소율이 차분하게 웃었다.“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요.”잠깐의 정적 끝에 이자벨이 초대장 한 장을 더 꺼냈다.“좋아요. 파리의 밤에도 그 자신감을 유지하실
“명품은 설문조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이자벨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소비자가 미처 원한다고 말하지 못한 욕망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고, 그 욕망에 가격을 붙이는 것이 명품이죠. 숫자가 창작자의 직관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동의합니다. 하지만 직관이 시장을 모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소율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래서 저희는 원안을 폐기하는 대신, 메종 벨루아의 미학을 살린 대체안을 준비했습니다.”화면이 바뀌었다.서로 다른 피부색과 나이를 지닌 여성들이 파리의 새벽, 서울의 야경, 교토의 햇살 속에서 각자의 얼굴을 드러냈다. 빛의 색은 모두 달랐지만 마지막에는 하나의 향수병 같은 유리 용기 안으로 모였다.[각자의 빛은, 각자의 방식으로 완성된다.]“‘창백한 순수성’이 아니라 ‘각자의 빛’입니다. 제품의 핵심 성분이 피부를 인위적으로 하얗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장벽과 광채를 회복시키는 데 있다는 점도 더 정확히 전달합니다. 세 국가에서 구매 의향이 기존 안보다 평균 24.2퍼센트 높았습니다.”메종 벨루아 측 마케팅 이사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영상 원본과 세부 수치를 받아볼 수 있겠습니까?”“최종 권한 배분에 합의하는 즉시 공유하겠습니다.”소율의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단단했다.이자벨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그때 도현이 입을 열었다.“태성 측 입장은 한 팀장의 제안과 같습니다. 아시아 지역 캠페인의 최종 승인권은 태성이 갖고, 브랜드 고유 자산을 변경할 때는 메종 벨루아의 동의를 받는 상호 승인 방식으로 정리하죠.”“차 본부장님은 한 팀장님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시는군요.”“신뢰가 아니라 검증입니다.”도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한 팀장의 제안은 소비자 조사와 매출 예측으로 검증됐습니다. 더 나은 근거가 있다면 지금 제시하십시오. 없다면 개인적인 감상으로 회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고요.”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소율은 테이블 아래에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혜민 회장이 한소율의 옷깃에 태성가의 루비 브로치를 직접 달아준 날로부터 두 달이 흘렀다.파리 생활 9개월 차.차도현과 한소율은 이제 태성그룹 유럽 총괄 지사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식 연인이자, 가장 강력한 업무 파트너로 자리 잡아 있었다.출근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냉철한 본부장과 유능한 기획팀장으로 돌아갔다. 회의 중에는 사적인 호칭을 삼갔고, 상대의 기획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가차 없이 지적했다. 대신 퇴근한 뒤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닫히면, 하루 종일 눌러두었던 애정과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다.공과 사의 경계는 분명했다.적어도 두 사람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오전 9시 50분.라데팡스에 자리한 태성그룹 유럽 지사 대회의실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오늘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명품 뷰티 브랜드 ‘메종 벨루아(Maison Belloy)’와 합작 사업의 조건을 확정하는 날이었다. 태성그룹의 바이오 기술과 아시아 유통망에 메종 벨루아의 브랜드 가치와 조향 기술을 결합해, 글로벌 프리미엄 스킨케어 라인을 출시하는 대형 프로젝트.예상 연 매출만 3억 유로에 달했다.이미 기본 합의는 마쳤지만, 브랜드 콘셉트와 아시아 지역 마케팅 권한을 두고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오늘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연말 생산 일정은 물론 내년 봄 동시 출시까지 차질이 불가피했다.소율은 회의 자료의 마지막 장을 확인한 뒤 노트북을 덮었다.딥 네이비색 테일러드 슈트와 단정하게 묶은 머리. 왼쪽 옷깃에는 이 회장이 건넨 붉은 루비 브로치가 고고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중요한 협상 날마다 반드시 착용하라는 말은 없었다.그럼에도 소율은 오늘 아침 망설임 없이 브로치를 골랐다. 그것은 태성가의 이름을 빌리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도 도현의 뒤에 숨지 않겠다고 이 회장 앞에서 했던 약속의 증표였다.회의실 문이 열리며 메종 벨루아 측 대표단이 들어왔다.그 선두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창업주 가문의 후계자인 이자벨 드 벨루아 백작 부인이 있었다.
"당신은 이미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한국에서 내 밑을 3년이나 버텼고, 파리에 와서는 4억 유로짜리 벨에포크 계약을 따냈어. 내가 폭주할 때는 멱살을 잡아서라도 멈춰 세웠고, 회장님마저 수치와 논리로 설득했지."도현의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깊게 번졌다."태성그룹 안주인 자리에 당신보다 완벽한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보라 그래. 내가 직접 기안서부터 검토해 줄 테니까.""또 일을 그런 식으로 비유하죠?"소율이 웃으며 도현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하지만 도현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소율의 허리를 더욱 깊이 끌어안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버렸다."그런데 한 가지는 정정해야겠어.""뭘요?""회장님이 당신을 태성가의 안주인으로 먼저 낙점한 건 기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았잖아."도현의 짙은 눈동자가 소율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아직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가느다란 손가락.그의 시선에 담긴 뜨거운 의미를 알아차린 소율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도현 씨….""브로치는 회장님 방식의 승인이고."도현이 소율의 왼손을 들어 올려 네 번째 손가락 마디에 아주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내 방식의 계약은 내가 직접 준비할 거야."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손끝을 타고 소율의 심장까지 스며들었다."이번에는 14일짜리도 아니고, 누가 갑이고 을인지 따지는 웃기지도 않는 계약도 아니야. 당신이 도망칠 기한도, 내가 놓아줄 만료일도 없는 완벽한 종신 계약으로."소율의 눈가에 남아있던 물기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그 계약, 조건이 너무 독한 것 같은데요.""당연하지. 계약 당사자가 차도현인데 허술할 리가 없잖아."도현이 오만하게 웃으며 소율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조건은 평생 내 곁에 있을 것. 대가는 내가 가진 모든 사랑. 계약 기간은 무제한. 중도 해지는 절대 불가능.""아직 정식으로 제안한 것도 아닌데 벌써 조항부터 정해요?"
소율은 걱정으로 일그러진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회장님께서 저한테 헤어지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신 것도 아니에요.""그럼 왜 나한테까지 숨기고….""그건 이게 도현 씨를 사이에 둔 협상이 아니라, 회장님과 제가 직접 나눠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소율이 옅게 웃으며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그제야 도현의 시선이 소율의 왼쪽 옷깃으로 향했다.베이지색 재킷 위에서 타오르듯 빛나는 붉은 루비 브로치.그것을 알아본 순간, 도현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이건…."태성가에서 태어나 자란 도현이 그 브로치를 모를 리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이혜민 회장이 중요한 이사회나 그룹의 명운이 걸린 행사 때마다 반드시 착용하던 물건. 태성가의 실질적인 안주인에게만 전해진다는, 그 어떤 지분 증서보다 상징적인 가문의 증표였다."회장님. 설마…."도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할머니를 바라보았다.이 회장은 지팡이 손잡이에 두 손을 포갠 채 못마땅한 눈으로 도현을 게슴츠레 쏘아보았다."쯧쯧, 그래. 네놈이 파리 시내를 뒤집어엎으며 찾아다니려한 그 여자에게 내가 직접 건넸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정말… 소율이를 태성가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신 겁니까?""어제부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소율이 네 옆에 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미 충분히 봤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 같은 놈에게 과분할 정도로 훌륭하더구나."도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이 회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앞으로 소율이가 너를 버리고 도망갈까 봐 파리 한복판을 미친놈처럼 헤집고 다니지 마라. 그 아이가 달아난다면 네가 부족해서 달아나는 것이니, 그때는 이 할미도 네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소율이가 절 버릴 일은 없습니다."도현이 즉시 단호하게 받아쳤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질려 있던 남자가, 루비 브로치 하나를 확인하자마자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회장님."소율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저와 도현 씨는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런 귀한 물건을 받을 자격은….""자격을 판단하는 사람은 너냐, 나냐?"회장의 한마디가 소율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반지를 건네고 무릎을 꿇는 건 도현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놈 몫까지 내가 빼앗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 브로치의 주인을 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걸 지켜온 내 몫이다. 그리고 후엔 너의 몫이 되겠지."이 회장은 케이스에서 브로치를 꺼내 소율 쪽으로 내밀었다."나는 네게 차도현의 아내가 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니다. 도현이가 무너질 때 붙들어주고, 그놈이 오만함에 눈이 멀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멈춰 세우며, 태성이라는 이름이 잘못된 길로 가면 가장 먼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되어달라는 게야."회장의 서늘했던 눈빛에 처음으로 깊은 온기가 스며들었다."그 고집불통 손주의 목줄을 쥐고도 권력에 취하지 않을 사람. 제 실력으로 도현이 옆에 서고도 필요할 때는 그놈의 품에 기대 쉴 줄 아는 사람.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런 사람은 너밖에 없더구나."소율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차올랐다.3년 동안 도현을 홀로 바라보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그의 연인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히 욕심이라 여겼다. 14일의 계약이 끝나면 모든 마음을 정리한 채 파리로 도망치듯 떠나려 했다.그런데 이제 도현은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사랑을 고백했고, 태성그룹의 절대 권력자는 가문의 미래와 책임을 상징하는 보석을 소율의 손에 직접 맡기려 하고 있었다."내 손주를 부탁하마, 소율아."회장이 처음으로 직함도 성도 떼어낸 채, 소율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렀다.그 한마디에 소율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소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회장을 향해 깊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네, 회장님."떨리지만 분명한 음성이었다."도현 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