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눈을 꼭 감은 채 누워 있는 수아의 온몸에 뱀이 기어가는 듯한 극심한 섬뜩함과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수아는 눈물 흘리는 것조차 참아내며 완벽하게 죽은 듯 숨을 죽였다.
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재킷을 벗어 던지고,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헤치며 와인 잔에 술을 따르려던 그 순간, 조용하던 실내에 요란한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수의 스마트폰 화면에 찍힌 발신자는 다름 아닌 한서희였다. 인상을 찌푸린 민수가 전화를 받았다. "약혼식 마치고 차도윤이랑 뜨거운 밤을 보내야 할 예비 신부께서, 이 시간에 웬일이실까?"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서희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민수 오빠, 그 여자 처리 했어?”"지금 내 손아귀에 있어."<수아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대답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떨기만 하자, 의사는 조금 더 쉽게 질문을 바꿨다.“그럼…… 지금이 몇 년도인지 기억나세요? 며칠 전에 큰 교통사고가 났는데, 사고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거 있으십니까?”질문이 거듭될수록 수아의 가슴은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져 왔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가족이 누구인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와 수아의 목을 조여 왔다.수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머리가…….”그녀는 힘겹게 말했다.“너무…… 아파요.”“네. 사고로 머리를 다치셨습니다.”수아의 눈빛이 흔들렸다.“사고……?”의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네.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수아는 눈을 깜빡였다.교통사고.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수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내 이름이…….’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이렌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지는 굽은 국도변.“여기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119 불렀습니까?”“네! 지금 오고 있대요!”굽이진 산길에 다급한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마산에서 고성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평소라면 차량 몇 대가 조용히 오갔을 길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도로 한쪽에는 커다란 화물트럭이 비스듬히 멈춰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앞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진 택시 한 대가 가드레일에 걸쳐 있었다.차량의 보닛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도로 위에 흩어져 있었고, 사고를 목격한 운전자들이 차를 세운 채 구조를 시도하고 있었다.“안에 여자 손님이 있어요!”한 남자가 택시 뒷좌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움직이지 않아요!”잠시 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삐뽀, 삐뽀.119 구급차와 구조차가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뒤이어 경찰차도 도착했다.“모두 뒤로 물러나 주세요!”소방대원들이 신속하게 차량 주변을 통제했다.경찰관들은 도로 양쪽에서 접근하는 차량을 막고 사고 현장을 확보했다.구조대원 두 명이 택시 앞으로 달려갔다.“운전자 상태 확인!”“의식이 있습니다! 다리 쪽이 끼어 있습니다!”“뒷좌석 승객은?”“여성 한 명! 의식 저하 상태입니다!”구조대원이 깨진 창문 사이로 몸을 숙였다.뒷좌석에는 젊은 여자가 안전벨트에 몸이 붙잡힌 채 비스듬히 기대어
“손님, 종점입니다. 이제 내리셔야 해요.”누군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수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낯선 풍경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버스 앞쪽에는 중년의 운전기사가 서 있었다.“아가씨, 마산에 도착했어요.”“아…….”수아는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고성으로 가기 위해 내린 경상도의 작은 도시, 마산. 차창 밖의 낯선 풍경은 그녀가 세상에 홀로 남겨졌음을 잔인하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 잠이 들었네요.”기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짐 잘 챙기고 천천히 내리세요.”“네. 감사합니다.”수아는 옆자리에 놓아둔 작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아가야…….’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는 정말 혼자서 살아내야 한다.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바닥에 발을 디딘 수아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길을 잃은 사람처럼 정류장 앞에서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묵직한 가방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무엇이라도 입에 넣고 기력을 차려야 했지만, 온몸의 에너지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마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의 작은 도시.그녀가 최종 목적지인 고성으로 가기 위해 잠시 들른 곳이었다.수아
서재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도윤은 소파에 앉은 채 아버지 차태하와 어머니 이명희를 바라봤다.이명희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분노 대신, 태하그룹의 안주인으로서 가문의 체면과 후계 구도를 철저히 지켜내겠다는 차가운 결심이 서려 있었다.차태하 회장 역시 이번에는 도윤의 아버지이면서 태하그룹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냉정한 판단을 해야 했다.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윤아. 네가 그 여자를 그렇게까지 지키고 싶다면…… 좋아. 펜트하우스에 두고 보호하는 건 허락하마. 그러나 이번 약혼은 파기할 수 없다. 너희의 약혼은 단순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그리고 네가 서희와 약혼을 유지하는 한 다른 여자를 네 집에 두고 같이 지내는 것은 현성 쪽에도 기업의 이미지에도 좋지 않다. 그러니 네가 정 그 여자를 네 집에 두고 싶다면 너는 본가로 들어오너라.”순간 한서희가 차태하 회장을 바라보았다.“아버님!”서희가 다급하게 불렀으나, 이명희는 손을 들어 서희를 제지했다.그리고 도윤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빛내며 도윤에게 차태하 회장의 말에 또 다른 잔인한 조건을 뱉어냈다.“차도윤, 명심해라. 첫째, 대외적인 네 약혼녀는 오직 한서희야. 기업 행사든 가족 모임이든, 태하그룹 후계자 옆에 설 여자는 서희뿐이야. 이수아는 네 사적인 영역에 숨겨둘 뿐, 공식적인 관계로 절대 인정받을 수 없어.”도윤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둘째, 이수아와 결혼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해. 그 여자가 네 아내의 자리를 꿰차는 일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없다.”차태하 회장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도윤아, 네 어머니 말이 맞다. 개인적 감정으로 두 거대 기업의 판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도윤은 자조 섞인 웃음을 삼켰다.“그러니까…… 수아는 사랑해도 되지만 결혼은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그래.”이명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마지막 칼을 뽑아 들었다.“그리고 한 가지 더. 이수아와의 사이에서 절대로 아이를 가져서는
서재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도윤은 서희의 애원 어린 눈빛이나 이명희의 매서운 시선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무심하게 던졌다.탁자에 부딪힌 USB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그게…… 뭐예요?”한서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도윤은 대답 대신 서재 구석에 놓인 노트북을 가져와 탁자 위에 펼치고 그 USB를 연결했다.차태하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도윤아, 지금 뭘 하려는 거냐?”“아버지께서도 직접 보셔야 할 자료입니다.”이명희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도윤아, 지금은 네가 서희에게 사과해야 할 자리야. 감히 네 약혼녀를 호텔에 버려두고…….”“사과요?”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에는 온도가 전혀 없었다.“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지, 자료를 보신 뒤에 판단하십시오.”노트북 화면 위로 건물의 CCTV 영상, 정민수의 개인 밀실에서 확보된 영상, 그리고 수아가 민철에게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차례로 떠올랐다.화면 속에서 민수가 수아의 팔을 붙잡자 수아가 거칠게 뿌리쳤고, 이어 민수의 손이 매섭게 올라갔다.짝—!영상 속 수아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이명희가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고, 차태하의 얼굴이 시커멓게 굳어졌다.도윤은 잠시 화면을 멈췄다. 수아가 맞는 장면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눌렀다.“이
태하그룹 본가로 향하는 검은색 세단의 뒷좌석.차도윤은 차창 밖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수아로 가득 차 있었다.부어오른 뺨, 찢어진 입술, 붉은 결박 자국.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며 '제발 저 좀 놓아주세요'라고 울부짖던 그 목소리.‘내가 널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비서 김민철이었다.도윤은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김 실장! 수아는? 어떻게 됐어?”“전무님, 방금 담당 의료진과 상담을 마쳤습니다. 현재 수아 씨는 안정제 주사를 맞고 잠들어 있습니다.”“……상태는 어때?”“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과거의 외상 경험이 이번 사건으로 자극되면서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PTSD)와 관련된 급성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정민수 대표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공포를 보인 것도 그 영향입니다.”도윤의 손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갔다.“치료는…….”“최소 2주 이상 입원하며 상태를 관찰해야 합니다. 다만…….”민철이 말을 잠시 망설였다.“의료진은 당분간 불필요한 방문이나 신체 접촉을 피하고, 수아 씨가 안정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나도……?”“수아 씨가 의식을 회복한 뒤 반응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누구와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단정하기 어렵다고…….”도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병원에 누워 있는데, 자신은 곁에 갈 수도, 손을 잡아줄 수도 없었다.“수아가…… 잠들기 전에 많이 힘들어하던가?”“잠들기 전에도 계속 불안해하며 누가 다가가면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다…… 잠들기 직전에 아주 작게 전무님 이름을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