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태산그룹 본사.
27층 전무실.시계는 어느새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대부분의 사무실은 불이 꺼졌지만, 전무실 안만큼은 형광등의 차가운 백색빛이 적막한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거대한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이진성의 얼굴은 창백했다.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손에 쥔 만년필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며칠 전 회계팀장이 했던 말이 또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이번 분기 자금 집행 내역은 회장님께 직접 보고드릴 예정입니다.'그 한마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목을 조여 오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다.공금에 생긴 구멍은 이미 자신의 힘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처음에는 잠깐 빌려 쓰는 돈이라고 생각했다.곧 주식으로 손실을 만회하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시장은 그의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병원 응급실의 자동문이 열렸다.재혁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평소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접수대로 곧장 다가간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조금 전에 교통사고로 들어온 김민성 환자 어디 있습니까?"간호사가 모니터를 확인했다."김민성 환자분 보호자세요?"재혁은 잠시 멈칫했다.가족은 아니었다.하지만 민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었다."...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입니다.""병원에서도 제게 연락을 주셨고요."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응급 처치는 끝났고 지금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간호사를 따라가는 재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커튼으로 나뉜 응급실 침대들이 차례로 지나갔다.그리고 마침내,침대에 누워 있는 민성이 보였다."...민성아."민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팔에는 고정 장치가 되어 있었고 머리에는 치료받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재혁의 얼굴이 굳어졌다."야."민성이 힘없이 웃었다."왔냐?"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친구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본 뒤에야 굳어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민성이 피식 웃었다."안 죽었잖아."재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지금 농담이 나오냐?"그때 담당 의료진이 다가왔다.재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상태가 어떻습니까?""팔에 골절이 있고 머리 쪽도 치료가 필요한 상처가 있습니다. 다행히 현재 검사상 크게 걱정되는 소견은 없지만 가벼운 뇌진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섰을 때, 서울의 밤공기는 이미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극장 앞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고,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주연은 아직도 재혁의 손끝에 남아 있던 따뜻한 온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조금 전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던 순간.재혁은 놀랐지만 끝내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 짧은 시간이 주연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행복이었다."배고프시죠?"주연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재혁도 미소를 지었다."영화를 보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네요.""근처에 괜찮은 한식집이 있는데...""같이 가실래요?""좋습니다."두 사람은 조용한 골목 안쪽에 자리한 작은 한식당으로 들어갔다.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실내에는 잔잔한 국악 선율이 흐르고 있었고, 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에는 따뜻한 차가 먼저 놓였다.잠시 후 정갈한 한정식이 차려졌다.주연은 한동안 말없이 음식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아이들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재혁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우가 웃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기분이 좋더군요."주연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건...""재혁 씨 덕분이에요."재혁은 작게 웃었다."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주연 씨와 지혜 씨가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계시잖아요."주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건물을 새로 고쳐 주시고.""책도 사 주시고.""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 주시고.""재혁 씨가 오신 뒤부터...""행복나무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잠시 말을 멈춘 그
지혜가 민성과 함께 약속이 있다며 먼저 보육원의 문을 나서자, 남겨진 재혁과 주연은 아이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낸 뒤 오후 늦은 시각에야 비로소 보육원을 나섰다.겨울의 끝자락에 부는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중, 주연은 문득 며칠 전 재혁이 지나치듯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일하느라 극장에서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이 없네요.’주연은 걸음을 멈추고 문득 고개를 돌려 재혁을 바라보았다."재혁 씨." "네~?" "오늘 영화 보러 가요."재혁은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영화관이요?""네.""영화관이 어떻게 생겼을까요!...""기억도 안 납니다."주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설마.""정말요?"재혁은 어깨를 으쓱했다."회사 시작하고 나서는.""극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주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럼...""오늘 제가 알려 드릴게요.""극장이 어떤 곳인지."재혁도 따라 웃었다."좋습니다.""오늘은 선생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두 사람은 함께 차에 올랐다.종로.오래된 대형 영화관.주말이라 그런지 극장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팝콘을 들고 있는 연인.사진을 찍는 커플.팔짱을 끼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그 사이를 함께 걷는 재혁과 주연도 누가 보아도 연인처럼 보였다.주연은 매표소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오늘 영화는...""'왕의 그림자'래요.""조선 왕실을 배경으로 한 사극인데.""요즘 정말 인기 많대요."재혁은 티켓을 받아 들며 말했
행복나무 보육원.따뜻한 봄기운이 조금씩 겨울을 밀어내고 있었다.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보육원 안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스며들었다.주연과 지혜는 김미숙 원장을 도와 사무실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낡은 서류철을 새 파일에 옮겨 담고, 후원 물품 목록을 다시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지혜야.""이건 2월 후원 내역 맞지?""응. 그건 새 파일에 넣으면 돼."두 사람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일을 이어 갔다.잠시 후에는 아이들 방으로 올라가 이불을 개고 책장을 정리했다.주연은 바닥에 흩어져 있던 장난감을 하나씩 제자리에 올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이 방도 많이 달라졌네.""공사하기 전보다 훨씬 밝아졌어."지혜도 창가의 커튼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도 요즘 표정이 훨씬 좋아."두 사람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미숙 원장은 조용히 웃었다.'참 예쁜 아이들이다.'그 시각.보육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재혁 아저씨!""패스!"재혁은 편안한 니트와 운동화를 신고 아이들과 함께 공을 몰고 있었다.회사에서의 냉철한 대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아이들과 함께 뛰고, 넘어지고, 크게 웃는 그의 얼굴에는 순수한 즐거움만 가득했다.그때였다.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운동장 앞에 멈춰 섰다.차에서 내린 사람은 민성이었다.오늘의 그는 평소와 달랐다.몸에 꼭 맞는 정장 대신 활동하기 편한 캐주얼 셔츠와 면바지, 흰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었다.재혁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왔냐!"민성이 웃으며 다가왔다."늦었지?"재혁은 공을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토요일 오전.주연은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잠시 후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재혁 씨도착했습니다.문자를 확인한 주연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지혜야.""재혁 씨 왔대.""내려가자."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줄 과자와 과일, 음료가 담긴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현관을 나섰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지혜는 슬쩍 주연을 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오늘은 아주 작정을 했네."주연은 괜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뭘.""평소랑 똑같거든?""거짓말."지혜가 웃으며 말했다."평소 같으면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나갔을 사람이.""오늘은 크림색 니트에 플레어스커트까지.""누가 보면 데이트 가는 줄 알겠다."주연은 얼굴이 붉어졌다."...토요일이잖아."그 한마디에 지혜는 더 크게 웃었다."그래.""토요일이라 나도 오랜만에 꾸며 봤다."평소 청바지와 후드티를 즐겨 입던 지혜 역시 오늘만큼은 따뜻한 베이지색 원피스에 롱코트를 걸치고 있었다.평소와는 또 다른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났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아파트 입구에는 검은 SUV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재혁은 두 사람을 보자 잠시 말을 잊었다.겨울 끝자락의 햇살 아래 서 있는 두 사람은 평소보다 훨씬 밝고 따뜻해 보였다.잠시 시선을 머물던 재혁이 미소를 지었다."오늘...""두 분 다 유난히 아름다우시네요."주연은 순간 귀까지 붉어졌다."갑자기 그런 말씀을..."지혜는 장난스럽게 웃었다."재혁 씨.""칭찬은 주연이한테만 하셔도 되는데요?"재혁은 웃
토요일 아침.햇살이 거실 창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주연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세탁을 마친 옷을 정리하고,보육원 아이들에게 줄 간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현관 앞에 가방까지 미리 가져다 놓았다.오늘은 재혁이 지난번 서점에서 함께 고른 책들을 행복나무 보육원으로 가져오는 날이었다.생각만 해도 괜히 마음이 설렜다.욕실 문이 열리며 지혜가 머리를 말리며 나왔다.거실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주연을 바라보던 지혜가 피식 웃었다."아침부터 왜 이렇게 바빠?"주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책도 챙겨야 하고.""아이들 간식도 확인해야 하잖아."지혜는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주연을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래서.""재혁 씨랑은 어디까지 진도 나갔는데?"주연이 놀란 듯 뒤를 돌아봤다."뭐?""왜?""키스도 했잖아.""이제 손도 잡고 데이트도 하고.""다음은 뭐야?"주연은 얼굴이 붉어지며 쿠션을 집어 던졌다."김지혜!"지혜는 웃으며 쿠션을 받아 안았다."농담이야, 농담."잠시 웃음이 이어졌다.하지만 지혜의 표정은 이내 조금 진지해졌다."주연아.""...언제 말할 거야?"주연의 손이 멈췄다."뭘?""네가...""...재혁 씨 아내라는 거."거실 안이 조용해졌다.주연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도.""이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지혜는 조용히 친구를 바라보았다.주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처음에는...""재혁 씨가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