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기념일, 나는 집 안 청소를 하다가 앨범 하나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 내 남편은 매년 이맘때쯤 자기의 첫사랑과 웨딩 촬영을 하고 있었다. 40살부터 60살까지,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될 때까지 장장 20년간 한 해도 빠짐없었다. 심지어 사진 뒤에는 남편의 유창한 필체로 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영원한 내 사랑.]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도 남편을 위해 빨래하고 밥하고 아이와 손자를 길러줄 필요가 없어졌다. 어쩌다 보니 벌써 반평생을 함께 보냈지만, 지금 모든 걸 바꾸는 것도 늦지 않았다.
View More남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져 말을 잇지 못했다. 눈 밑에 드리운 고통은 너무나 선명했다.아들 역시 넋이 나간 제 아버지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엄마.”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아 세 사람과 나를 격리했다.그 뒤로 남편의 소식을 들은 건 3개월 뒤다.그때쯤 나는 외국어 기초를 다 익혀 겨우겨우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아들이 갑자기 나에게 전화해 남편이 입원했다는 걸 알렸다.가스 중독이라고 했다.주완선이 요리를 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갑자기 다툼이 있었고, 결국 가스를 끄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다행히 관리사무소에서 마침 전기 수리를 하러 도착한 덕에 두 사람을 제때 구조되었다.중독이 심하지 않았던 주완선은 치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하지만 신호섭에게 마음이 식은 건지 짐을 챙겨 떠나갔다.떠나기 전 심지어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그쪽이 이겼어요. 현실이 사랑보다 더 큰 게 문제였어요. 난 현실에 진 거예요.]나는 한 번도 주완선과 승부를 겨룰 생각이 없었다. 남편의 마음이 누구한테 있을지 관심 갖지도 않았다.사랑은 내 나이에 좇을 게 아니었으니까.나는 답장을 하지 않고 주완선을 차단했다.아들은 계속 나더러 병원에 가보라고 부탁해 왔지만 여전히 그 변명이었다.[완선 이모가 떠났어요. 아버지도 많이 아프시고요. 계속 엄마 이름만 되뇌여요.][마음의 병인 것 같아요. 엄마가 보러 온다면 그 어떤 약보다 더 효과 있을 거예요.]나는 외국어책을 덮고 가볍게 대답했다.“내가 의사도 아닌데, 뭐 하러 나를 찾아? 네가 잘 보살펴줄 거라고 믿어.”내 말에 말문이 막혔는지 전화 건너편에서 내 말에서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한숨소리가 들렸다.대체 뭘 후회하는 건지....나는 떠나는 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막 비행기에 오르려고 할 때, 아들이 남편을 부축한 채로 나에게 걸어왔다.남편은 손에 든 봉투를 힘겹게 건넸다.분명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온 힘을 다
시온이는 주완선의 이상한 사랑 관념에 세뇌되었던 거였다. 내연녀의 신분이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인터넷에서 연애를 하고 있었다.며느리는 너무 어이없어 그날 밤 바로 아들에게 전화해 그를 볼러냈다.“당신 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좀 봐!”며느리는 시온이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과 연애하면서 나눈 대화를 자기 남편에게 보여주었다.핸드폰을 쥐고 보면 볼수록 아들의 미간은 찡그러졌다.그러다가 끝까지 읽은 뒤 바로 시온을 훈육했다.그러자 시온이 울며 빽 소리쳤다.“다 완선 할머지가 가르쳐줬단 말이에요. 완선 할머니는 배운 분이라고 완선 할머니를 선생님처럼 대하라고 했잖아요!”아들은 흠칫 놀라 주완선을 바라봤다.“완선 이모, 우리는 이모를 믿어서 아이를 맡겼던 거예요. 전에 엄마가 대신 봐줬을 때는 이런 일 없었다고요.”주완선은 뻘쭘해서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옆에 있던 남편이 테이블을 탕 치며 언성을 높였다.“그만해. 쪽팔리지도 않아?”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은 각자의 생각을 했다.나중에 며느리는 시온을 데리고 떠났고, 아들도 주완선에 대한 필터가 없어져 버렸다.시아버님도 그 상황 때문에 골머리를 알았다고 며느리가 말해줬다.그 일이 있고 나서 며느리와 아들이 잔뜩 선물을 들고 찾아와 시온이를 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어머님, 이제야 누가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알겠어요. 어머님이 집에 있을 때, 우리는 항상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집과 아이한테 관심을 주지 못했어요. 그때마다 어머님이 모든 걸 적절하게 안배해 주셨던 거였더라고요.”며느리가 나에게 차를 다르며 내 아들에게 눈치를 줬다.요 며칠 집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신경을 쓰고 낮에는 또 출근까지 해서인지, 아들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 섰다.나를 보는 아들의 눈빛은 더 이상 예전처럼 거만하지 않았다.마치 서러운 일을 당한 작은 새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뉘우쳤다.“엄마, 저 정말 힘들어요. 한식구끼리 원한 지고 살 필요 없잖아요. 전에는 제가 복에
그날 나와 남편 그리고 주완선이 가정법원 앞에서 나눴던 대화를 누가 촬영했는지 인터넷에 올라온 거다.나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노출됐다.[백년해로는 무슨, 쓰레기와 세컨드가 늙어서까지 붙어먹은 거네!][그날 목격한 사람 꽤 있음. 저 할아버지가 조강지처랑 이혼하는데, 세컨드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비 걸었음. 정말 늙어서까지 저러고 싶을까? 어떻게 저 나이 먹도록 상도덕이 없을까?]이 일은 인터넷에서 불거져 사진관마저 불륜을 선전한다는 질타를 받아 마지못해 해명에 나섰다.본인들은 그저 사진만 찍었을 뿐이라고. 게다가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꾸준히 찍어 당연히 부부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이다.그 해명에 네티즌은 더욱 분노했다.[저 할아버지 내가 다니던 대학의 외국어학과 교수였음. 정말 빈틈없는 분이셨는데, 사적으로 이런 사람일 줄이야.][바람피운 것도 모자라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붙어 먹었다니.][젊었을 때 인성도 답 나오네.]...주완선은 일이 이렇게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대체 누구인지, 주완선더러 신호섭과 먼저 함께 살다가 나중에 두 사람이 젊었을 때부터 사랑했는데 겨우 다시 만나 어렵게 함께 있는 거라는 해명을 하라고 했다.내가 떠난 후로 남편의 생활은 점차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밥해주는 사람도, 청소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매일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옷과 양말, 심지어 속옷까지 세탁기에 함께 넣고 돌리는가 하면, 물건은 여기저기 버려져 있어 찾지 못하는 상황이 허다했다.게다가 마침 여름방학 때라 아들과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아이까지 맡겨버렸다.집안일을 할 여자가 필요하기도 했고, 밖에서 도우미를 구하는 것도 싫었던 남편은 주완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그리고 주완선이 집에 들어온 첫날, 주완선은 내 남편과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가족사진을 찍은 뒤 인터넷에 올렸다.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구구절절 써 내려갔
이웃집에 사는 혜자 언니가 문을 벌컥 열더니 버럭 소리쳤다.“뭔 개소리여? 나이 60이 늙은 건 맞지만 죽지는 않았잖여? 아직도 20년은 거뜬히 살 수 있을 텐데! 너 같은 아들놈과 같이 살면 1년 사는 것도 고통이여! 무슨 낯짝으로 여기서 지랄이여, 지랄은! 내가 다 부끄럽구먼.”혜자 언니의 파이팅 넘치는 샤우팅에 아들은 말문이 막혀 슬그머니 떠나버렸다....3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나와 남편은 결국 가정법원에서 이혼 판결문을 받았다.이혼 판결문을 받는 순간처럼 홀가분했던 적이 없다.반평생의 부담을 단번에 내려놓은 기분이었다.하지만 남편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미간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남편은 이혼 판결문을 손에 구겨 쥐고 할 말 있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호섭 씨.”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남편을 불렀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완선이었다.내가 이혼을 번복할까 봐 걱정됐는지 주완선은 아침 일찍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혼증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주완선은 천천히 나에게로 걸어오더니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주완선이라고 해요. 호섭 씨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이에요. 그때 비 오던 날, 내가 감기에 걸릴까 봐 호섭 씨가 설명도 못 하고 나 데려다줬어요. 젊었을 대 결혼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아 서로를 놓지 못하고 웨딩 촬영으로 아쉬움을 만회하려고 한 거예요.”나는 주완선이 내민 손을 바라봤다. 궂은일 한 번 안 해본 데다 관리도 잘 받은 손이었다.그에 반해 내 손은 이미 쭈글쭈글 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투성이였다.나는 그저 예의상 싱긋 웃고는 악수를 받앋 주지 않았다.“알아요. 그동안 쥐새끼처럼 몰래 만나느라 고생했어요. 이제 우리가 이혼했으니 꿈을 이룰 수 있겠네요.”굳이 내 앞에 와서 위세를 부린다면, 나도 상대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내 말에 지나가던 젊은 행인들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주완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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