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 40년 차 남편이 첫사랑과 욕조에서 무드를 잡다가 감전사를 당하게 되었다. 가족밖에 모르던 나는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결국 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예령아, 네 아빠랑 안정미가 감전되어서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하지만 들려오는 거라고는 지예령의 호통 소리뿐이었다. “엄마, 징그럽게 왜 그래요?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아빠랑 정미 이모는 평생을 떳떳하게 살아온 분들인데 왜 헐뜯지 못해 안달이죠? 엄마 때문에 선우가 회사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딸은 전화를 끊었고, 다시 연락했을 때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욕조에서 꼭 끌어안고 기절한 두 남녀를 바라보자 당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보,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지성 그룹 같은 대기업을 물려받으면 긴장한 마음에 잠도 못 이룰 것 같은데 말이야.
View More나중에 별장을 헐값에 팔고 방을 치우면서 그동안 지현석과 안정미가 사랑을 나눴던 흔적을 끝도 없이 발견했다.40년 전, 어떻게 보면 지씨 가문 덕분에 기사회생한 셈이라 나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당시만 해도 살뜰히 챙겨주는 지현석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착각마저 들었다.하지만 첫사랑 안정미가 돌아오면서 모든 게 변했다. 아들을 데리고 집까지 찾아온 그녀는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한다며 지금 너무 힘들다고 서럽게 울었다.지현석은 안 그래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당시 짝사랑하던 여자가 다시 찾아오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나는 손에 든 비행기표를 펼쳐보았다. 둘이 전 세계를 통틀어 안 가본 곳이 없는 듯싶었다.하지만 평소에는 마트에 같이 가자고 해도 질색하던 남자였다.“너랑 결혼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알리고 싶지 않아.”그리고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나를 보자 한마디 보탰다.“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부처럼 비칠까 봐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괜스레 당신 체면만 깎이잖아.”사실 그때부터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적어도 푸대접은 받지 않으려고 친구에게 부탁해서 이화 그룹과 거래했던 회사에 연락을 돌렸다. 다들 우리 부모님의 체면을 봐서 흔쾌히 지성 그룹의 협력사가 되어주었다.물론 지현석은 꿈에도 몰랐다. 지성 그룹의 핵심 역량이 진작에 바뀌었다는 것을......별장이 팔렸을 때 나는 기분이 좋아서 모든 직원에게 유급 휴가를 하루 주었다.희한하게도 이사한 이후로 지예령과 강선우는 마치 인간 증발한 것처럼 감감무소식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밤, 지예령이 뜬금없이 새로 이사한 집을 찾아왔다.그녀는 피가 묻은 하얀색 원피스 차림으로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얼굴에 멍까지 들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엄마... 제발 용서해주세요...”문을 닫으려는 찰나 지예령이 갑자기 달려들어 검은색 박스를 내밀었다.“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겉보기에 평범했지만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이내 떨리는
지현석이 살아있을 때 내가 과묵해서 싫다고 하면 옆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엄마, 아빠는 집에서 애만 보는 여자보다 말이 통하고 함께 미래를 그려 나갈 수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하거든요?”만약 꼬치꼬치 캐묻는 걸 귀찮아하는 눈치라면 질세라 말을 보탰다.“아무 생각 없이 우리 집에 기생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요?”그게 왜? 하루하루 마음 편히 남편 돈 쓸 때도 떳떳하기만 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창피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그렇다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내가 체면 때문에 부모님이 일궈낸 백년 기업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마냥 지켜보다가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노래방 도우미라도 해야지 그나마 덜 쪽팔린다는 건가?지예령은 묵묵부답하는 나를 보자 테이블을 대뜸 내리쳤다.“내 말 못 들었어요? 아빠는 어디 있죠? 얼른 대답하세요.”결국 참다못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너 같은 딸을 둔 적이 없으니까 썩 꺼져.”갑자기 얻어맞은 탓에 지예령은 넋을 잃고 말았고, 오히려 강선우가 혈안이 되어 손가락질하더니 고래고래 외쳤다.“그럼 우리 엄마를 죽인 사람도 아줌마겠네요? 내 말 맞죠? 옛날부터 눈엣가시 취급하더니 유언비어나 퍼뜨리고 다니고, 아줌마가 바로 범인이죠?”이때, 눈치 빠른 비서가 재빨리 지성 병원 입구의 CCTV 영상을 플레이했다.곧이어 스크린에 제발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내 모습이 나타났고, 경비원은 지예령이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지예령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입술을 덜덜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이럴 수가...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요?”어쨌거나 미리 언질 준 사람으로서 너무 억울했다.그리고 사건 당일 저녁에 보낸 문자 메시지를 가리키며 말했다.“분명 사진 찍어서 보여줬잖아. 대체 왜 의심하는 거야? 게다가 다른 사람 번호로 두 번이나 연락했는데 끝까지 믿지 않았잖아. 이 불효녀야! 너 때문에 아빠가 죽었는데 감히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와?”지예령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지현석이 유언을 따로 남기지 않았기에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억대 재산과 회사는 자연스럽게 나한테 상속되었다.이에 긴장한 나머지 며칠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그러나 미처 한숨 돌리기도 전에 지성 그룹이 발칵 뒤집혔다.비서가 황급히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회장님, 큰일 났어요. 얼른 뉴스 확인해 보세요.”이내 느긋하게 휴대폰을 켜고 기사를 읽어보는 순간 손에 힘이 풀릴 뻔했다.다름 아닌 지현석과 안정미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담요에서 굴어 나오는 영상이 실검 1위를 차지했다.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왜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을 생각을 못한 거지?물론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었다. 일이 터지면 구경꾼이 모여들기 마련이니까.이제는 온 국민이 알게 된 셈이다.온갖 댓글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별의별 내용이 다 있었다. “이 사람 지성 그룹 회장님 아니야? 외모는 엄청 유식해 보이던데 사생활이 꽤 문란한가 봐.”“영상 속에서 손수레를 끌고 온 여자가 지씨 가문 사모님이래. 그러니까 회장님이 다른 여자랑 바람 피우다가 목숨까지 잃었다는 거네?”“정말 어이가 없군. 이렇게 방탕한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아니나 다를까 지성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회사 내부는 분위기가 흉흉했다.다행히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대인 관계가 좋았던 지라 내 체면을 봐서라도 오래된 거래처는 투자를 철회하기는커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라희 씨 부모님께서 예전에 워낙 잘 챙겨주셨거든요. 다들 같은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이 회장님의 유일한 딸인데, 40년 전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날 뻔했다.심지어 지현석이 죽었을 때보다 더 울컥했다.부모님께서 나한테 정말 큰 재산을 남겨준 듯싶었다.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는 의리 있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수한 유전자까지 아낌없이 물려주었다.신혼 초를 돌이켜보면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가 해외 연수를 갔는데 경영자 과정을 이수하는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수석으로
의사가 매무새를 정돈해준 덕분에 지현석의 얼굴은 말끔하게 변했다. 비록 혈색은 없었지만 여전히 잘생겼다.40년 전을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서 아직 어린 내가 가업을 잇기에 무리인지라 이화 그룹은 부도 직전까지 갔다.그때 나타난 구세주가 바로 지씨 가문이었고, 이화 그룹을 인수함과 동시에 결혼까지 하는 조건으로 매년 배당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당시 지현석의 잘생긴 얼굴과 탄탄한 몸매, 게다가 매년 넘쳐나는 돈을 떠올리자 마음이 혹했다.세상 물정에 어두운 부잣집 아가씨가 어찌 사회의 흉흉함을 알겠는가? 결국 얼떨결에 동의하게 되었다.어쨌거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이 바닥에서 꽤 알아주는 분들이었기에 지현석과 결혼한 이후로 이화 그룹의 거래처였던 회사들이 전부 지성 그룹으로 넘어갔다.덕분에 지성 그룹은 눈에 띄게 승승장구했고, 무려 2년 만에 무명 기업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국내 업체로 급부상했다.다만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지현석에게 첫사랑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사모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법무팀장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곧바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아, 일단 남편의 사망을 부고하고 장례식은 최대한 품위 있게 진행해요.”나는 손을 내저으며 마치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처럼 비통하게 말했다.의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구석에 흰 천을 반쯤 덮고 누워 있는 안정미를 힐긋 바라보았다.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저 여자는 어떡해요?”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지현석과 꼭 껴안고 죽었으니 나름대로 ‘결실’을 이뤘다고 볼 수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명문가 출신인데 차마 이런 말까지 내뱉기는 어려웠다.결국 메마른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돌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난 모르는 사람이라서 우선 병원에 안치해두세요.”의사가 떠난 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당신이 죽고 나서도 구설에 오르게 할 수는 없어. 두 사람을 죽인 범인은 바로 불효녀 지예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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