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루아 씨 제 친구예요. 이사는 기쁜 일인데, 소식을 들은 이상 축하해 주러 오는 게 당연하죠.”배진욱이 부드러운 어조로 받아쳤다.맞은편의 남자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그는 식탁 위에 남은 음식들을 슬쩍 훑어보며, 자못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딱 3인분만 준비했는데 저희도 거의 다 먹어 가거든요.”‘루아 씨라... 정말 친근하게도 부르는군.’구태윤의 눈빛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조각 같은 얼굴은 시종일관 무덤덤했지만, 그를 중심으로 형체 없는 압박감이 퍼져 나가며 숨통을 조여왔다.“다 드셨으면 이만 나가주시죠. 지금부터는 우리 부부만의 시간이라서.”구태윤이 태연하게 말했다.정루아는 연신 심호흡하고 그에게 다가갔다.“누가 다 먹었대? 나 아직 배 안 불렀어.”그러고는 털썩 앉아 젓가락을 들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이내 배진욱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욱 씨, 좀 더 먹을래?”배진욱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구태윤을 힐긋 쳐다보았다.“그래.”눈빛에는 은근한 비웃음과 도발이 섞여 있었다.구태윤의 눈동자 속에 감돌던 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어두운 시선으로 정루아를 응시했다.그녀는 늘 타인에게만 친절했다.배진욱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건만, 매번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가슴속에서 분노가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고, 짜증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이연희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식탁으로 돌아왔다.구태윤을 슬쩍 쳐다보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에휴, 내가 참자.’물론 속은 후련하겠지만 괜히 말실수 했다가 찍혀서 인생 망하는 수가 있었다.그녀의 목숨은 소중하니까.냄비는 여전히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저마다의 고민을 품은 얼굴들에 먹구름이 내려앉았다.맛있는 고기를 씹어 넘기면서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구태윤은 열심히 젓가락질하는 정루아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배진욱이 안경을 고쳐 쓰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문전 박대하는 건 좀 아니잖아요.”이연희가 잽싸게 받아쳤다.“어차피 집으로 들여보내 봤자 우리만 피곤해져요.”배진욱이 피식 웃었다. 이내 말을 이었다.“제가 구 대표님을 많이 겪어본 건 아닌데, 첫인상이 참 집요하다 싶었어요. 한번 마음먹은 일은 쉽게 포기하진 않겠더라고요.”정루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그렇다. 구태윤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목적을 이루지 못한 이상,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찾아올 것이다.‘휴...’“우선 밥부터 먹자.”정루아가 말했다.“어떻게든 되겠지.”그제야 배진욱도 입을 다물었다.항상 그녀의 사생활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며, 딱 적당한 선을 지켰다.잘 익은 고기를 한 입 먹자 만족감이 밀려왔다.맥주까지 한 병 비우니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이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경찰입니다!”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굳어버렸다.깜짝 놀란 이연희가 눈을 크게 떴다.“경찰이 왜 여기에...?”정루아 역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굳은 표정의 경찰 두 명이 서 있었다.“이곳에서 도박판이 벌어졌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수색 협조 부탁드립니다.”경찰은 신분증을 꺼내 보이고는 막무가내로 들어섰다.뜬금없는 소리에 정루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저희 도박 같은 거 안 하는데요.”집 안을 둘러보던 두 경찰은 구석구석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단 세 사람이 모여 샤부샤부를 먹고 있는 모습뿐이었다.도박은커녕 게임 테이블조차 하나 없었다.두 경찰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죄송합니다!”이때, 현관문 쪽에서 장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주소를 착각했습니다.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이 집이 아니라 다른 주소였어요. 정말 죄송합
구태윤이 무덤덤한 어조로 물었다.“루아가 새집으로 이사했는데, 올라가서 축하라도 해드려야지?”장유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솔직히 말하면 정말 가기 싫었다.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자신을 쏘아보는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당최 외면할 용기가 없었다.그는 코를 쓱 만지며 헛기침했다.“뭐, 축하해 주는 건 맞지만 빈손으로 가기가...”구태윤이 싸늘하게 대꾸했다.“그럼 가서 뭐라도 사 오든가.”장유성이 중얼거렸다.“어... 루아 씨가 그런 걸 따질 쩨쩨한 사람도 아니고, 분명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말을 마치고는 인터폰으로 정루아가 사는 호수를 눌렀다.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보세요. 누구세요?”장유성은 숨을 깊게 내쉬며 목소리 톤을 다듬었다.“루아 씨, 저예요. 장유성! 아까 낮에 루아 씨 비슷한 사람을 봤거든요. 착각인가 싶어서 경비원한테 확인까지 해봤는데 진짜 루아 씨더라고요. 이쪽으로 이사 온 거예요? 괜찮다면 저 잠깐 올라가도 될까요?”정루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지금은 좀 그런데, 아직 짐 정리가 덜 돼서요.”“딱이네요! 제가 정리 도와드릴게요. 저 집안일 진짜 잘하거든요.”장유성은 엄청난 압박감을 견뎌내며 아무 말이나 지어냈다.“저한테 사양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우리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너무 서운하게 이러지 마시고, 네?”정루아가 도리어 물었다.“구태윤이 시킨 거예요?”“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걘 루아 씨가 이사 온 것도 모를걸요? 저 진짜 우연히 본 거예요, 제발 믿어주세요...”장유성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나중에 천벌이라도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내가 죄인이지...’정루아가 망설이며 떠보았다.“진짜요? 나 속이는 거 아니죠?”“네, 그럼요.”장유성은 눈 딱 감고 대답했다.이때, 인터폰 너머로 이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맹세할 수 있어요? 만약 구태윤이 따라 올라오면 평생 솔로로 살고 영원히 여자친구
배진욱의 집은 바로 뒷동이라 베란다에서 바라보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정루아가 대답했다.“응, 계약 끝나고 바로 이사 왔지.”“축하해.”배진욱이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괜찮다면 집구경 좀 시켜줄래?”“응. 잠깐만, 문 열어줄게.”정루아는 활짝 웃으며 열림 버튼을 눌렀다.배진욱은 금세 올라왔다. 손에는 과일과 디저트를 들고 있었다.“처음 방문하는 거라, 작지만 성의로 받아줘.”말을 마치고는 물건을 그녀에게 건넸다.정루아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그냥 와도 되는데,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배진욱이 말했다.“걱정 마. 다음부턴 없어.”정루아는 피식 웃었다.“그래.”배진욱은 집 안을 가볍게 둘러보고는 물었다.“아직 짐 안 옮겼어?”“응, 정리를 채 못했어. 다 싸고 나면 이삿짐센터 부르려고.”정루아는 그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배진욱이 넌지시 떠보았다.“굉장히 서둘러 이사하는 느낌이네?”그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정루아를 바라보았다.“혹시 피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정루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아니야. 그냥 생활 환경도 좀 바꿀 겸...”선을 긋는 그녀를 눈치채고 배진욱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잠시 후, 인터폰이 다시 울렸다.이연희가 도착했다.양손 가득 짐을 들고 올라온 그녀가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루아야, 이것 좀 봐. 접시랑 수저도 새로 사 왔어. 진짜 예쁘지?”이연희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쇼핑백을 열었다.정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예쁘네. 참, 배진욱 씨도 와 계셔.”이연희가 흠칫하더니 거실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그러고는 배진욱을 향해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진욱 씨, 안녕하세요!”“반가워요, 연희 씨.”이연희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어쩐 일로 오셨어요? 우리 루아 이사한 건 또 어떻게 아시고.”배진욱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저 바로 뒷동에서 살거든요.”“아, 그렇구
구태윤의 잘생긴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루아야,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는데 뭐가 불만이야?”정루아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불만이라니? 나 지금 너무 기분 좋은데?”이내 웃음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이제 만족해?”구태윤의 조각 같은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한민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왜!”수화기 너머로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와 상사의 짜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한민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보고했다.“대표님, 10분 뒤에 회의가 시작됩니다.”구태윤은 아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정루아는 이미 대본을 챙기고 회의실로 들어간 뒤였다.그녀의 차가운 태도와 냉소가 분노를 유발했다.결국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정호는 싸늘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정루아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컨디션이 안 좋은가?”“아니요, 괜찮아요.”정루아가 무덤덤하게 답했다.그녀는 남은 대본을 훑어보며 앞으로 한 달 정도의 분량이 남았음을 가늠했다.정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일할 땐 사적인 감정 끌어들이지 마세요. 목소리에 다 티 나니까.”“네, 알고 있어요.”회의를 마치고는 곧장 녹음실로 들어갔다.오후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나오니 목이 타들어 갈 듯했다.그녀는 탕비실로 가서 레몬수를 한 잔 타서 조금씩 마셨다.퇴근 후, 곧장 마트로 향해 생필품을 산 뒤 새집으로 배송시켰다.장보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경비실로 찾아가 출입을 차단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등록했다.경비원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 사람은 단지 안으로 발도 못 붙이게 할게요.”정루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그녀는 짐을 챙겨 새집으로 향했다.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경호원이 정루아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구태윤에게 보고했다.어스름한 차 안, 화면 위로 끊임없이 올라오는 메시지들을 확인한 구태윤의 표정
“아무것도 안 나왔다고?”정루아가 경악하며 되물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이연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나도 이해가 안 가. 열 살에 보육원에 입소한 기록은 분명히 있거든? 그리고 열두 살 때 너희 부모님께 입양된 것도 맞고. 그런데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 기록이 아예 없어. 백지상태야.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싹 지워버린 것처럼.”정루아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정시연의 과거가 통째로 삭제되다니.대체 왜 지운 거지?절대 밝히지 못할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아니면 무언가 거대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이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내 능력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여기까지야.”“아니야, 이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정루아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독였다.“이제 그만해.”더 깊이 파헤치다간 이연희까지 위험에 휘말릴까 봐 걱정되었다.“응.”이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침대에 엎드려 손등으로 턱을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그나저나 정시연은 정체가 뭘까? 너희 부모님이 그렇게 끼고도는 것도 이상하고, 과거까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고... 보면 볼수록 참 수수께끼라니까?”정루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나도 모르겠어.”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답답하고 혼란스럽지도 않았을 터였다.이연희가 하품을 쩍 했다.“휴... 완전히 막다른 길에 다다라 버렸네. 너무 조급해하지 마, 루아야. 진실은 언젠가 꼭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응, 알아. 피곤할 텐데 얼른 자.”“그래, 너도 잘자.”“좋은 꿈 꿔.”전화를 끊은 정루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정시연의 과거라면 정석주와 임혜숙이 모를 리 없었다.그렇다면 부모님이 흔적을 지워버린 범인일까?대체 왜 그런 짓까지 한 걸까.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다.하지만 이제는 가서 물어보는 것조차 귀찮아졌다.이미 친자 확인 검사를 마친 상태였고, 결과도 조만간 나올 예정이었다.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그녀는 억지로 생각을 털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