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이 빌어먹을 년이!”박정란은 정말로 증손주가 납치당하는 끔찍한 상상이라도 했는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이내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갔다.정루아는 노인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을 보며 한층 더 덤덤해진 어조로 말했다.“구태윤이 날 24시간 내내 감시할 수는 없잖아요? 틈만 나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줄 알아요.”“정루아!”구태윤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불끈 솟아올랐다.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깊은 곳에서 잔혹하리만치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정루아는 그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당신 할머니 상태부터 좀 살피지? 숨넘어가기 직전인데, 이대로 방치해서 할머니 죽인 살인범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구태윤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 입 안 다물어?”정루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래도 이혼 안 하겠다고 버티시겠다?비록 몸은 갇혀 있을지언정 입까지 막고 말을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박정란을 바라보았다.“구하준이 이제 겨우 세 살이었던가요?”“구태윤!”박정란은 천인공노할 망언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이내 두 눈을 부라리며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구태윤은 냉랭한 목소리로 경호원들을 불러 박정란을 억지로 끌어냈다.“이 불효막심한 놈들!”박정란은 핏대를 세우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젊은 사내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이내 병실 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구태윤은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그렇게 해서라도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털어내려는 듯했다.그는 정루아의 침대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미간을 살짝 찌푸린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루아야, 이제 이런 얄팍한 잔머리는 그만 굴려. 나랑 이혼하겠다고 본인 미래까지 망쳐버리는 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스스로 잘 알 텐데.”정말 미쳐서 모든 걸 내던질 작정이 아니라면, 굳이 자신과 진흙탕 싸
박정란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태윤아, 너도 들었지? 쟤는 작정하고 우리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 인간이야. 더 볼 것도 없다. 당장 저년이랑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정루아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구태윤을 바라보았다.구태윤 역시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자신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본 듯했다.무덤덤한 어조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할머니, 루아랑 함께한 세월이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이혼이 가당키나 합니까? 저희 부부 관계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지금 정원 그룹이 겪고 있는 위기는 그쪽 내부 문제일 뿐입니다. 전 아무것도 건드린 적 없어요. 장인어른께서는 남 탓하실 게 아니라, 본인 회사부터 내부 감사해서 터진 구멍을 메우시는 게 순서입니다.”박정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어디서 그런 뻔지르르한 말로 얼버무리려고 해? 내가 어떻게든 너희 둘 갈라놓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대답해! 이혼할 거야? 말 거야?”“안 합니다.”단호한 목소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박정란은 기가 막혀 손가락을 부르르 떨었다.“이... 불효막심한 놈이 감히 내 뜻을 거역해? 당장 이사회를 소집해서 네 직무부터 정지시켜야 정신을 차리겠느냐!”구태윤은 체념한 듯 할머니를 바라보았다.“연세도 있으신데 회사 일에는 그만 손 떼세요.”박정란은 철저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게다가 늙은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직접 행차했음에도, 제 뜻대로 해결된 게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결국 분노가 치밀어 구태윤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하지만 늙은이의 손에 기운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맞아도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운 수준이었다.“할머니, 손까지 쓰셨으니 이제 분은 좀 풀리셨습니까? 그만 댁으로 모시다 드릴게요.”구태윤이 무덤덤하게 받아쳤다.정루아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렇게 허무하게 무산되다니.그녀가 정말 구씨 가문을 발칵 뒤집어
“구태윤, 내 말 듣고 있어?”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에 정루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이내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매섭게 쏘아보았다.잔뜩 독이 오른 그녀의 모습에도 구태윤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리고 가녀린 손목을 덥석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밤새 생각해봤는데, 난 역시 이혼 못 해. 루아야, 우리 아직 끝낼 단계 아니야.”정루아는 이를 악물었다.“내가 정시연을 죽여버려도 상관없다는 거야?”“그 여자를 죽여도 이혼은 불가능해.”구태윤의 눈빛이 유난히 어두웠다.그는 정루아를 침대에 앉히고는 허리를 숙여 여전히 핏기 없는 갸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루아야, 우리 함께한 세월이 자그마치 몇 년인데, 이미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졌잖아. 이혼이라는 말,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야.”정루아는 손을 빼내며 차갑게 말했다.“난 더 이상 당신 안 사랑해.”“상관없어.”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한 번 사랑했는데, 두 번은 못 할까.”구태윤의 뺨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구태윤이 말을 이어갔다.“더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가서 사 올게.”정루아는 묵묵부답했다.“굶을 생각은 하지 마. 여기 병원이야, 알지? 의사 시켜서 링거로 영양제 맞히면 그만이니까, 단식 같은 건 안 통한다는 소리야.”구태윤이 무덤덤하게 말했다.정루아는 가슴이 답답했다.이내 그를 밀치며 쏘아붙였다.“당신 얼굴 보기 싫으니까 나가.”구태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가 뱉은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듯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바로 그때, 병실 밖에서 박정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것들이 겁도 없이 감히 내 길을 막아? 당장 해고야, 썩 꺼지지 못해?”노인의 목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짱짱하고 고압적인 기세였다.문밖을 지키던 경호원 두 명은 울상이 되었다.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구태윤이 걸어 나왔다.노
정시연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제가 가서 빌게요. 전부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이잖아요. 내가 못나서 굴러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아빠가 화가 나서 루아를 때릴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태윤 씨도 아빠한테 화풀이 안 했을 텐데... 지금 루아 찾아갈게요. 날 용서해 주고 화만 풀 수 있다면, 루아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임혜숙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붙잡았다.“시연아, 이 일이 왜 네 탓이란 말이냐? 부모가 자기 자식 버릇 좀 고치겠다는데 뭔 대수라고. 다 구태윤이 쓸데없이 참견질해서 이 난리가 난 거지.”정시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하지만... 내가 사과하지 않는 이상 태윤 씨는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예요.”임혜숙이 정석주를 돌아보았다.“여보, 이제 우리 어떡해? 설마 진짜로 루아한테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내내 침묵을 지키던 정석주가 입을 열었다.“구씨 본가에 한 번 다녀올게.”본가 어른들을 움직여 구태윤의 목을 죄어오게 만든다면, 제아무리 날뛰는 놈이라도 멈출 수밖에 없을 터였다.정석주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 정시연의 병실 문 앞을 지켰다.그 모습을 본 임혜숙이 다가가 물었다.“당신들 뭐야?”경호원 중 한 명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구 대표님의 지시를 받고 큰사모님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임혜숙의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역력했다.한편으로는 정원 그룹을 파멸로 몰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시연을 보호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정시연은 어떻게든 정루아에게 사과하러 갈 타이밍을 노렸다.마침 임혜숙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아픈 몸을 이끌고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러나 병실 문 앞에 이르자마자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다.“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정시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경호원이 말했다.“구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큰사모님의 부상이 심각하니, 완쾌하기
상석에 앉은 정석주는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는 주주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안색은 극도로 어두웠다.속에서는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구태윤이 정말로 자신을 향해 칼날을 겨눌 줄은 꿈에도 몰랐다.‘내가 엄연히 장인이거늘, 감히 나한테 도전장을 내밀어?’옆에 선 비서는 끊임없이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사색이 되었다.비서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정석주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에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회의실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숨이 막힐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정석주는 들끓는 화를 억누르며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떴다.“그만들 하세요. 우선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이 일은 내가 직접 책임지고 처리할 테니까.”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회의실을 빠져나갔다.비서가 그의 뒤를 바짝 쫓으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회장님, 다른 협력업체 몇 군데에서도 일단 상황을 관망하겠다며 연락이...”정석주는 굳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됐어, 알았으니까 가서 일 봐.”비서는 결국 입을 다물고 사무실을 나섰다.정석주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통째로 바닥에 쓸어버렸다.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가, 휴대폰을 꺼내 구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한민혁의 목소리였다.“정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한민혁은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정석주가 호통을 쳤다.“구태윤한테 당장 전화 받으라고 해!”한민혁이 대답했다.“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입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미팅 끝나고 보고 올리겠습니다.”이제 자신을 만나 주지도 않겠다는 뜻이었다.‘좋아!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정석주는 이를 악물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곧장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병원, 병실 안.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전보다 많이 가라앉았지만, 아직 똑바로 누울 수는 없었다.정루아는 퇴원하려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다.그녀의 얼굴은 백지장
“루아야, 일어났니?”조심스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구태윤이 싸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초조한 모습으로 앞에 서 있는 임혜숙을 발견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태윤아, 루아 깼어?”구태윤이 냉담하게 말했다.“여긴 왜 오셨습니까?”임혜숙이 당황하며 대답했다.“애 상태가 어떤지 걱정돼서 와봤지.”“잘 있으니 신경 끄세요. 그쪽 보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 앞으로 다는 찾아오지 마시고.”구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그게 무슨 소리니?”임혜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루아가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엄마인 내가 와서 봐야지.”구태윤은 병실 문을 닫았다. 잘생긴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정 회장님은 언제쯤 와서 사과하신답니까?”그 말을 들은 임혜숙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사과라니?”“하!”구태윤이 실소를 터뜨렸다.“제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신 모양이네요.”임혜숙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급히 말을 이어갔다.“태윤아, 네 아버지도 화가 나서 순간 이성을 잃은 거야. 진심으로 루아를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명색이 제 딸인데, 부모가 자식한테 사과하는 법이 어디 있니? 게다가 이번 일은 루아가 잘못한 게 맞잖니.”구태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루아가 잘못했다라... 정시연을 밀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라도 했습니까?”순간 말문이 막힌 임혜숙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시연이가 루아를 모함하려고 제 몸을 다치게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잖니.”“발을 헛디뎠을 순 있어도, 루아가 밀쳤을 리는 절대 없습니다.”정루아를 향한 구태윤의 신뢰는 무조건적이었다.임혜숙이 반박하려던 찰나, 구태윤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정 회장님더러 직접 와서 루아한테 사과하라고 하세요. 안 그러면 저도 더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예요.”서늘한 경고를 끝으로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복도에 홀로 남겨진 임혜숙은 어찌할 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