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며칠 뒤.자신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게 된 이후로는 누구 하나 얕잡아 보는 사람 없이, 업무도 순조롭게 풀리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엘레노어였다.그날 오후, 엘레노어가 주방에서 채소를 썰고 있는데 저택의 집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엘레노어 아가씨, 문 앞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을 아가씨의 아버님이라고 하십니다. 이름은 잭슨 몽고메리라고 하더군요."엘레노어의 손에 쥐여 있던 칼이 멈춰 섰다. 그녀는 천천히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표정만큼은 차분하게 유지했다. "잠시 기다리게 하세요." 그녀가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엘레노어는 손을 씻고 물기를 닦아낸 뒤 응접실로 걸어갔다.아치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샘이 벌써 소식을 전했는지, 그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창가에 서 있었다."만나볼 거야?" 아치가 엘레노어를 돌아보며 물었다."딱 한 번이요. 안 만나주면 또 찾아올지도 몰라요."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그녀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왜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날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으면서." 엘레노어가 미더운 눈빛으로 아치를 올려다보았다. "내 곁에 서 있어도 돼요. 하지만 내가 시키기 전엔 먼저 말 꺼내지 마요."아치가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알았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엘레노어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아치와 함께 저택 밖으로 걸어 나갔다.잭슨이 대문 밖에 서 있었다. 엘레노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정장이 훨씬 헐렁해 보였다. 머리숱은 더 적어졌고, 눈꺼풀은 푹 꺼져 있었다. 그는 딸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지나치게 함박웃음이었고 또 너무나 따뜻한 척하는 웃음이었다."엘레노어," 잭슨이 손을 내밀며 아는 체를 했다."아버지." 엘레노어는 대문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아치는 그녀의 바로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아버지가 기사 봤단다."
엘레노어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포개어 얹은 채 4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마거릿은 유리문 바깥에 서 있었다. 엘레노어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문이 열렸다. 줄리언이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는 테이블 끝에 멈춰 서서 차마 다가오지 못했다."앉으세요, 줄리언 씨." 엘레노어가 말했다.줄리언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가 이내 무릎 위로 거둬들였다. 몇 초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쉰 목소리였다.엘레노어는 말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그 꽃 말이야." 줄리언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초콜릿이랑 이메일, 그리고 로비에 찾아간 거 전부 다. 네가 싫다고 했는데도 내가 찾아갔어.""계속해 봐요." 엘레노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내가 끈질기게 굴면 네가 마음을 열 줄 알았어." 줄리언이 테이블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끈질긴 게 아니었어. 억지였지."엘레노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 했던 짓들도 미안해." 줄리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레스토랑 일도. 폴라 일도. 사람들 앞에서 네 자존심을 짓밟았던 것도. 두 번째 기회를 달라는 게 아니야. 엘레노어, 그냥 내가 내 잘못을 알고 있다는 걸 네가 알아줬으면 했어.""들었어요."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줄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닦으려 하지 않았다. "그 돈은 전부 돌려줄 거야.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서라도. 그리고 이 도시를 떠날 거야.""어디로요?" 엘레노어가 물었다."아직 몰라." 줄리언이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지."엘레노어가 한참 동안 줄리언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분노를 찾으려 했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건 그저 이미 다 읽은 책을 덮는 것처럼 고요하고 쌉싸래한 감정뿐이었다. "사과해 줘서 고마워요." 엘레노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받아들일게요. 그게 다예요.""알아.
엘레노어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로비로 발을 내딛기 전 깊은 숨을 내쉬었다.그날 아침 로비는 붐비고 있었다. 몇몇 직원들이 회전문 근처를 바쁘게 오갔고, 일부는 커피 숍에서 줄을 서 있었으며, 또 일부는 안내 데스크 근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줄리언은 회색 정장을 입은 변호사 한 명과 함께 안내 데스크에 서 있었다. 그는 재무팀 직원이 건네는 서류에 한 장 한 장 서명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넋이 나간 듯 비어 있었다.아치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엘레노어가 다가가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질문은 매우 명확했다. ‘정말 그대로 진행할 거야?’남편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 엘레노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에 섰다. 그녀의 손바닥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아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엘레노어의 손을 잡았다.주변의 웅성거림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 안내 데스크 직원이 타자 치기를 멈췄다. 커피 숍 근처에 있던 두 직원도 서로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아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높지는 않았지만, 넓은 로비는 순식간에 정적에 싸였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수십 개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손에 커피를 든 채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던 벨라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최근 이 회사 안에서 엘레노어 몽고메리에 관한 수군거림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아치가 무미건조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딱 한 문장으로 그 소문들을 끝내고자 합니다. 아울러 엘레노어가 제 아내라는 사실을, 공식적인 신분을 밝히겠습니다."한 직원이 손에 쥐고 있던 출입 카드를 떨어뜨렸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벨라는 숨을 죽인 채 두 손으로 커피 컵을 꽉 쥐었다. 벨라는 아치와 엘레노어의 관계가 드디어 세상에 공개될 줄은
다음 날.쌤이 줄리언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들어오시죠.” 쌤이 문을 활짝 열었다.줄리언은 정확히 아홉 시에 아치의 서재로 걸어 들어왔다. 어제와 똑같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대리석 바닥을 딛는 발걸음은 불안정했다.쌤이 그의 뒤에서 문을 닫은 뒤 창가 근처에 섰다.아치는 책상 너머에 앉아 그 앞에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올려둔 채였다. "앉아." 그가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명령했다.줄리언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리히터 대표님, 해명을 위해 법무팀에 연락을 취해봤습니다만," 그가 서둘러 말을 꺼냈다."해명을 들으려고 부른 게 아닙니다." 아치가 서류철을 책상 너머로 밀어 밀었다. "열어봐."줄리언이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두 번째 장, 그리고 세 번째 장을 넘겼다. 종이 끝을 쥔 그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반년 동안 40억입니다." 아치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이중 청구에, 당신 사촌 명의로 된 인형 납품업체까지. 쌤이 지난주에 전부 정리해 뒀더군요.""해명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줄리언이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그럴 수도 있겠죠. 그건 법정에서 다룰 문제입니다." 아치가 손바닥으로 서류철을 탁 덮었다.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그게 아니니까."줄리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뭡니까?""내 아내에게 꽃을 보냈더군요." 아치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장이 서려 있었다.줄리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아내분이라니요?" 그가 떨리는 입술로 되물었다."엘레노어 몽고메리는 내 정식 아내입니다." 아치가 타협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은 채 낮고 분명하게 말했다. "우린 몇 주 전에 결혼했어."줄리언이 쌤을 돌아보며 그 사실을 부정해 주길 바랐지만, 쌤은 가만히 시선을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줄리언이 다시 아치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결국 줄
검은색 세단이 집 앞에 멈춰 섰다.아치가 먼저 내려 엘레노어의 문을 열어주었다.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지만, 아치는 말없이 먼저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엘레노어는 복도에 서서 아치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치가 여전히 화가 나 있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엘레노어는 주방으로 향해 차를 우려냈다. 이것이 아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를 바랐다.“이걸로 달래질 수 있으면 좋을텐데.” 엘레노어가 확신 없는 눈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차가 다 준비되자, 엘레노어는 아치의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앞에 있는 문을 바라본 뒤 서재 문을 두 번 노크했다."들어와." 안에서 아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목소리였다.엘레노어가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가 가까이 다가간 뒤, 아치의 곁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 좀 가져왔어." 그녀가 책상 건너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고마워." 아치가 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아직 화 안 풀렸네." 엘레노어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깍지 꼈다. 아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그래." 아치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그토록 솔직한 대답에 엘레노어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까 차에서는 화 안 났다고 했잖아.""너한테 화난 건 아니야." 아치가 손을 내리고 엘레노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자식이 물러설 줄을 몰라서 짜증 나는 거야. 네가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계속 찾아오잖아.""나도 알아."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어떻게 할 거야? 그 사람을 벌이라도 주려고? 아니면 혼내주기라도 할 거야?" 엘레노어가 장난스러운조로 말했다."내일 아침에 내 집무실에서 그 자식과 얘기할 거야." 아치가 어깨 위에 있는 엘레노어의 손을 잡아끌어 깍지를 꼈다. "내가 약속했으
첫 번째 꽃다발이 배달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오늘 줄리안은 리히터 컴퍼니 로비에 직접 찾아와 버렸다.엘리너는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그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너가 내려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눈치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와야만 했다.그녀는 깊게 숨을 몰아쉬고는 로비 한가운데 서 있는 줄리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엘리너."줄리안이 엘리너의 모습을 발견하곤 함박웃음을 지었다.엘리너는 줄리안에게서 딱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또 무슨 볼일로 찾아온 거예요?”"그냥 너랑 이야기가 좀 하고 싶었어."줄리안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엘리너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지난번에 시간 충분히 드렸잖아요, 줄리안 씨. 나 지금 바빠요.""그걸로는 부족해. 난……."줄리안이 한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그날 이후로 제대로 잠도 못 잤어. 네가 아직 나한테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아. 네가 나를 보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아니요."엘리너가 줄리안의 말을 냉정하게 끊었다.그 두 글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명확하고 단호하게 발성되었다.줄리안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제발 더 이상 찾아오지도 말고, 이런 선물 같은 거 보내지도 말아줘요."엘리너가 말을 이었다."나 일하는 중이에요."“너 정말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거야?”줄리안이 처연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엘리너를 올려다보았다.엘리너가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게 전부인가요?”엘리너의 목소리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만하는 게 좋을 거예요. 시간 낭비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엘리너는 곧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줄리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