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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작가: 은지아
하지만 송남지가 직접 물어오니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멋쩍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누구랑 협력하든 별반 다를 건 없어.”

송남지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고 눈빛이 밝게 빛났다.

하지만 그 빛은 하정훈에게는 다소 거슬렸다.

하정훈은 송남지가 왜 윤 씨 가문을 위해 이렇게 애쓰는지 궁금했다.

송남지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소중한 그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하정훈의 얼굴에 드리운 실망감을 알아채지 못한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하 씨 가문이 기흥이랑 다시 손잡을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있는 거예요?”

하정훈의 눈빛은 찰나에 어두워졌지만, 곧 검은 흑요석을 박아놓은 듯한 눈망울을 번뜩이며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하 씨 가문은 기흥과 협력할 거야.”

송남지는 잠시 멍해졌다.

하정훈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는데, 너무나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그림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윤 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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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면을 쓴 남편   제1018화

    하정훈은 전시회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2층에서 내려왔다.본래 그는 아래로 내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 먼 코다르까지 걸음 한 것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큐레이터, 미술품 소장가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으며, 전시관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는 오직 송남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는 2층에 가만히 선 채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보았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프랑스 출신 큐레이터와 유창한 프랑코니아어로 대화를 나누며 부드러운 미소로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기품 있게 답하는 그녀를 말이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서 있는 그녀의 자태는 마치 그 누구의 보호막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히 홀로 빛나는 왕비의 모습과도 같았다.문득 하정훈은 송남지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빛을 잃은 게 아니라 한층 더 굳건하고 강해진 것이다. 그 강인함은 겉으로 두른 단단한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의 확고함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이 깨달음은 그에게 긍지와 불안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긍지를 느낀 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직감이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카나리아가 아니라, 척박한 땅 어떤 조건 속에서도 기어코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워내는 나무 같은 여자였다.반면 불안한 이유는 만약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면 대체 무슨 명분으로 그녀 곁에 머물러야 하느냐는 막막함 때문이었다.“하 대표님.”등 뒤에서 들려온 김서윤의 목소리에 하정훈이 돌아보자 그가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알아보라고 하신 것들 여기 다 있습니다.”김서윤이 서류철을 내밀며 덧붙였다.“권우빈의 계약 날짜와 송남지 씨의 병원 기록, 그리고 수리스 호텔 투숙 내역까지요. 시간대가 오차 없이

  • 가면을 쓴 남편   제1017화

    “원망이라니, 내가 네게 무슨 원망을 하겠어?”오가은의 나직한 물음에 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부푼 배를 바라보았다.“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은 거요. 혼자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도, 정훈 씨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전부 다요...”오가은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남지야, 정훈이가 왜 너와 이혼하려 했는지 알고 있니?”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무너질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거겠죠.”오가은은 몇 초간 침묵했다.“그 아인 어릴 때부터 그랬단다. 무슨 일이든 혼자 짊어지려 하고 집에 통 말하는 법이 없었지. 아픈 것도 성루이야 병원의 의사가 전화를 주지 않았다면 나랑 그 애 아빠는 끝까지 까맣게 몰랐을 게다.”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울컥 메었지만,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남지야,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다만 그 녀석이 너무 고집스럽고 제멋대로 판단한 게 야속할 뿐이지. 널 밀어내는 게 다 널 위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다니 말이다. 둘이 함께한다는 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기 위함이라는 걸 그 애는 몰랐던 게야.”송남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아주머니...”오가은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가볍게 도닥였다.“너는 그저 몸조리에만 전념하거라.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정훈이 그 녀석은 제풀에 지치든 말든 내버려 두렴. 너한테 진 빚은 살면서 천천히 갚아 나가게 해야지.”송남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으나, 웃음 끝에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오가은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울지 마라. 임산부가 울면 눈에 해롭단다.”송남지는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쳤다.“그런데 코다르에는 어쩐 일이세요?”오가은은 송남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전시회 보러 왔다. 재스민의 화전인데 당연히 와봐야지.”송남지는 그것이 핑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가은이 코다르까지 온 것은 전시회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 가면을 쓴 남편   제1016화

    개막식은 이튿날 저녁 여섯 시에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아에로포르 엑스포 센터의 1층 로비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팔리에서 온 큐레이터, 알비온의 갤러리스트, 밀란시아의 컬렉터, 그리고 코다르의 현지 아티스트들과 언론 기자들이 가득했다. 조명을 받은 샴페인 잔들이 투명한 호박색으로 반짝였고 프랑코니아어, 영어, 인타리어가 공기 중에 섞여 지휘자 없는 교향악처럼 공간을 채웠다.송남지는 전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맞춤 제작한 검은색 롱드레스는 허리 위로는 몸에 꼭 맞고 아래로는 여유롭게 흘러내려 그녀의 31주 차 만삭 배를 감쪽같이 가려주었다.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 어깨 위로 늘어뜨렸고 화장은 얼굴에 혈색만 돌게끔 립스틱만 약간 바른 정도였다. 그 모습은 도무지 출산을 앞둔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오롯이 큐레이터이자 갤러리스트로서, 자신이 기획한 작품들 앞에 확고하고 평온하게 서 있는 한 명의 여자였다.그 옆에는 그녀가 직접 세팅해 준 짙은 파란색 정장을 입은 권우빈이 섰다.앳된 얼굴엔 긴장감이 서렸지만, 등은 꼿꼿했고 눈동자는 투명하리만치 단단했다.발표는 순조로웠다.송남지는 영어로 3분, 프랑코니아어로 2분간 연설을 진행했다. 그녀는 소피와 스태프들, 참여 작가들, 그리고 전시를 위해 애써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정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전시와 무관한 사람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2층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눈으로 본 것도, 귀로 들은 것도 아닌, 거의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더 깊은 차원의 감각이었다.하정훈은 2층,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모퉁이의 인파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고집스럽게, 그리고 방해되지 않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발표가 끝나자 사람들은 전시장 안으로 흩어졌고, 송남지는 프랑스 큐레이터들에게 둘러싸여 향후 협업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권우빈 역시 몇몇 컬렉터들에게 이끌려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

  • 가면을 쓴 남편   제1015화

    아래층의 창문은 여전히 어두웠다. ‘송남지는 이미 잠들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잠 못 든 채 파도 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진 않을까.’하정훈은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얹었다. 닿을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이 손끝을 타고 번져나갔다.“남지야.”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읊조렸다.“다시는 너를 밀어내지 않을게.”달빛이 그의 눈가에 어린 눈물 자국과 비로소 굳게 다져진 그의 결심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전시회 개막을 앞둔 밤, 아에로포르 전시 센터는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송남지는 전시장 정중앙에 서서 마지막 작품이 벽면에 고정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르 파티오 정원의 고목이 된 올리브 나무를 담은 권우빈의 그림이었다. 짙게 드리워진 녹색 그늘 아래, 복부가 살짝 솟아오른 여인의 흐릿한 뒷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녀는 권우빈에게 굳이 그 부분을 수정해달라 청하지 않았다.어떤 건 애써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불러온 그녀의 배가 그러하듯,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눈가에 일렁이는 감정 또한 그러했다.“누나, 내일 개막식에서 인사말 할 건가요?”권우빈이 그녀의 곁에서 줄자를 든 채 마지막 작품의 수평을 확인하며 물었다.“응.”송남지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에 띄워둔 연설문을 내려다보았다.“5분 정도, 짧게 하려고.”권우빈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전시장 반대편에서 구두 굽 소리가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송남지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고은비였다. 짙은 녹색 벨벳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휘날리며 나타난 그녀, 단정하게 올린 머리 아래로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내고 있었고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든 채, 이런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다는 듯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송 여사님.”고은비가 다가와 미소 지었다.“전시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네, 순조롭습니다.”송남지는 차분하게 대꾸했다.“고은비 씨도 전시

  • 가면을 쓴 남편   제1014화

    새벽 두 시, 유경태의 전화가 걸려 왔다.로즈메리 향이 은은하게 밴 옷을 입고 방으로 돌아온 하정훈은 잠시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지금 몇 시인지 알아?”그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알아.”유경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몹시 무거웠다.“정훈아, 할 말이 있어.”하정훈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미간을 짚었다.“말해.”“송남지에 관한 거야.”하정훈의 손이 멈칫했다.“지난번 남지 씨가 병원에 검진받으러 왔던 거 기억나? 내가 예전에 말했던, 위장이 안 좋아서 왔다는 그날 말이야.”유경태의 목소리는 낮았고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르는 듯했다.“그땐 평범한 검진이라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거든. 그런데 오늘 그 당시 검진을 담당했던 황 선생을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경태야...”하정훈이 말을 끊었다.“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전화기 너머로 몇 초간 정적이 흐르더니 유경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남지 씨 임신 사실, 너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어. 남지 씨가 임신한 시기는 권우빈이라는 애가 나타나기 훨씬 전이라는 거야.”하정훈의 숨이 턱 막혔다.“그날 남지 씨가 검진받으러 왔을 때, 권우빈은 재스민과 계약은커녕 서경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때였어.”유경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내가 권우빈의 계약 날짜랑 남지 씨 검진 기록을 대조해 봤는데, 거의 2주나 차이가 나더라. 정훈아, 그 아이는 절대 권우빈의 아이일 수 없어.”하정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그럼 누구 아이라는 거야?”그가 되물었다.유경태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하정훈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그때는 그가 병원에서 검진을 받을 때였으니 그녀가 취리히에서 비를 맞던 그 밤, 호텔 방 안에서 그에게 먼저 다가왔던 그 새벽이었다.모든 조각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그는 감히 믿을 수 없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만들어냈다.아이는 그의 것이었다.전화기를 내려놓은 하정훈은 어둠 속에 박제된 듯 굳어 있었다.블라인드

  • 가면을 쓴 남편   제1013화

    하정훈은 자신에게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에 그녀를 마주할지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믿었고 조금 더 품위 있고, 덜 비참한 방식으로 그녀의 삶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하지만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정훈 씨.”고은비가 그의 뒤로 다가와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 놓아줘요. 그 여자는 이미 새로운 삶을 찾았고 정훈 씨도 그래야 해요.”하정훈은 몸을 돌려 고은비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아름다웠다. 꽃잎 한 장 한 장을 세심하게 빚어낸 백차꽃처럼, 정교하고 우아하며 흠잡을 데 없는 미모였다. 말을 건네는 입가에 머문 미소와 눈빛엔 거부하기 힘든 진실함이 깃들어 있었다.하지만 하정훈은 문득 그녀가 자신과는 아득히 먼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결코 넘을 수 없는 깊은 간극이었다.“은비야,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그의 말에 고은비가 찰나의 당혹감을 드러냈다.하정훈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외투를 챙겨 들며 덧붙였다.“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저녁은 먼저 먹어.”하정훈은 고은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밀고 나갔다.이번 여행은 겉보기에 둘이 함께 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고은비가 강제로 동행을 고집했고 하씨 가문에서도 고씨 가문의 체면을 무시할 수 없어 묵인한 일에 불과했다.하정훈은 송남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저 아래층으로 내려가 정원을 가로질러 올리브 나무 아래 매일 아침 송남지가 앉아 있던 그 등나무 의자에 앉았을 뿐이었다.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와 그의 발치에 은백색의 파편처럼 흩어졌다.정원은 고요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로즈마리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그는 꽤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클로딘이 그릇을 치우러 나왔다가 그를 발견하고 놀랄 만큼 오랜 시간이었다.그녀가 프랑코니아어로 말을 건네자 그는 같은 언어로 답했다.“아닙니다. 잠시 쉬고 있는 것뿐이에요.”클로딘은 그를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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