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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윤소정
강지현이 이제 막 차에 타려 하자 이도운도 표정을 가다듬고 함께 가려 했다.

이 시간이면 두 사람은 늘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

“비서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난 부동산 중개인이랑 집 보러 가기로 했어.”

이도운의 두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오늘 회사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이 집은 경쟁이 치열해서 오늘 안 가면 팔릴지도 몰라.”

강지현은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너 항상 그랬잖아.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까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입가와 눈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이도운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곧장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알았어. 그럼 나도 오늘 회사 안 가. 우리 함께 집 보러 가자.”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강지현이 더 환하게 웃더니 몸을 돌려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나 혼자 고르고 싶어서 그래. 다 고르면 너한테 보여줄게.”

그녀는 이도운의 속셈을 너무 잘 안다. 자신과 함께해주긴커녕 감시하기 위해서겠지.

이도운의 수작으로 부부 공동명의로 집을 사게 되면 그 집은 결국 그와 백하린의 소유가 된다.

강지현의 유혹적인 말투에 갑자기 흥분한 이도운은 그녀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잡아끌었다.

“나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응.”

강지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곧바로 손을 뺐다.

“알았어. 그렇게 해, 그럼.”

이도운은 낮게 말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피할 곳조차 없던지라 강지현은 역겨움을 참으며 스킨십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차를 몰고 떠나자 이도운의 입에 걸렸던 미소도 싹 사라졌다.

단지 착각일까? 강지현이 뭔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아니면 그녀가 원래 예민한 사람이라 백하린을 질투하는 걸까?

이도운은 이유 모를 짜증이 밀려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강지현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아무리 좋고 자신에게 진심이라 해도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내 백하린을 사랑할 테니까.

한 시간 후, 강지현은 거대한 통유리창 앞에 서서 파이낸셜의 뷰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점찍어둔 이 단독주택은 실내 인테리어가 전부 최첨단 설비로 되어있고 미니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였다. 사용 면적은 무려 100평이 넘었다.

가장 큰 면적은 아니지만, 파이낸셜에서 위치가 가장 좋은 집이었다.

강지현은 이 도시의 불빛이 전부 켜졌을 때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벌써 상상하고 있었다.

“이 집으로 할게요. 제 명의로 계약 진행해주세요.”

그녀는 만족스럽게 분양 담당자에게 말했다.

이곳은 바로 입주가 가능했다. 이는 그녀가 숨 막히고 역겨운 그 ‘집’을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분양 담당자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그냥 둘러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횡재라니.

어느덧 강지현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달라졌다. 담당자는 그녀를 로비의 VIP 대기실로 안내하고는 커피와 디저트를 대접하라고 시킨 후 부동산 계약서를 가지러 갔다.

이따가 강지현이 카드를 긁고 사인만 하면 후속 절차는 전담 직원이 모두 처리해줄 것이다.

그녀가 계약서를 기다리던 그때,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들려왔다.

“그쪽인가요? 내가 점찍은 집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강지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명품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젊은 여자가 화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경호원 두 명과 여성 분양 담당자 한 명이 따랐다.

“지금 저한테 말한 거예요?”

강지현은 잠깐 놀랐다가 가볍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누구겠어요? A동은 내가 먼저 봐뒀어요. 그 집 내가 살 겁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고 날카롭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강지현을 째려보면서 오만하게 말했다.

“아까 집 볼 때 누가 이 집을 예약했다는 말도 없었고 그쪽 아직 계약금도 안 냈죠? 내가 먼저 돈을 냈으니 당연히 내 거죠.”

강지현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는 막무가내인 사람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다른 자리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여자가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알려주러 온 게 아니거든요. 나한테 우선권이 있으니까 내놓기 싫어도 내놓아야 할 겁니다.”

강지현이 돌아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선권이요?”

그녀의 옆에 있던 여성 분양 담당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희는 구매자의 자산 규모를 먼저 확인합니다. 선착순이 아니라 고객님의 자산 규모에 따라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담당자는 말하면서 강지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경멸의 뜻이 매우 짙었다.

“규정 한번 어이가 없네요!”

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 계약서를 가지러 갔던 담당자가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강지현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자를 보더니 담당자는 나직이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저분이 바로 하씨 가문 아가씨인데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감 회사가 저분 집안 소유예요.”

강지현은 그제야 하이 토이가 생각났다.

유산을 상속받은 후 여러 가문에 대해 알아봤는데 해원시의 상업 순위에서 하이 그룹이 5위였다.

저 여자는 충분히 거만을 떨 자본이 있었다.

여성 분양 담당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마음이 불편하시겠지만, 규정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불편할 것도 없어요. 다만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죠. 그나저나 여기 규정대로라면 저분보다는 제가 우선권이 있을 테니 이 집은 제가 삽니다.”

강지현은 가볍게 숨을 내쉰 후 옆에 있는 담당자에게 말했다.

“빨리 처리해주세요.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저.”

지금 이 말은 자신의 자산 순위가 해원시 5위인 하이 그룹보다 더 높다는 의미였다.

기고만장하던 그 여자와 옆에 있던 여성 담당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여자 방금 뭐라고 했어요? 본인에게 우선권이 있다고요?”

여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여성 담당자에게 다시 물었다.

이에 담당자도 급히 예약 정보를 확인했다.

‘말도 안 돼. 만약 아가씨와 같은 엄청난 고객이 온다면 사전에 우리한테 말했을 텐데. 적어도 총괄 매니저님이 직접 나서야 하잖아.’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현의 옷차림만 보면 너무 평범해서 끽해야 졸부일 뿐 자산이 하이 그룹 따님을 뛰어넘을 리가 없었다.

“고객님, 아직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나요? 저희는 자산 규모에 따라...”

“그럼 규모를 확인해보시죠!”

강지현은 더 이상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재차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동안 형편없는 인간들을 수없이 봐온지라 이까짓 권세에 빌붙는 사람들은 축에 끼지도 못했으니.

옆에 있던 남자 담당자는 반신반의했지만 그래도 절차에 따라 진행했다.

그 시각, 2층 VIP 구역의 커튼이 움직이더니 훤칠한 체구의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사람은 그 뜻을 바로 알아채고 부하에게 지시했다.

“가서 김 대표님 말씀 전해드려. 저분 자산은 조회할 필요 없어. 주씨 가문의 아가씨야.”

해원시에 주씨 가문은 딱 하나뿐인데 무려 해원시 갑부 집안이었다. 그 집안에 딸이 있었다고? 이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강지현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를 본 여성 담당자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봐요! 자기 주제를 알고 이러시는 건가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여기 집을 사려면 자산 검증이 필요해요. 뭐 수중에 돈이 좀 있겠지만 웬만해선 여기 집 사기 힘들 겁니다. 더는 아가씨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안 그러면 경비원을 불러서 내쫓는 수가 있어요.”

이번엔 여자도 화를 가라앉히고 코웃음을 치면서 담당자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대체 무슨 우선권이 있는지 한번 봐야겠어요. 다만 미리 말해두는데 우선권도 없으면서 내 시간을 낭비했다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겁니다. 나 절대 그쪽 가만 안 둘 테니까!”

여자는 강지현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얼굴에 누가 봐도 응석받이로 자란 공주님이었다.

강지현이 덤덤하게 웃었다.

“좋아요. 그럼 만약 내게 우선권이 있다면요? 그쪽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 건가요?”

“이봐!”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사이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강지현에게 달려왔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확실히 고객님께 우선권이 있으세요. 저희가 무례했던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옆에 있던 남자 담당자도 입이 쩍 벌어졌다. 방금 자산을 검증하려는데 자신이 접대한 여자가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자산을 가진 데다가 갑부 주씨 가문에서 금방 찾은 딸이라는 소식까지 전해 들은 것이었다.

여성 담당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따져 물으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몇 마디 속삭이자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사과부터 해댔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주씨 가문 따님인 줄 몰랐습니다. 방금 무례하게 굴었던 점 부디 용서해주세요...”

그 말에 여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씨 가문? 설마 내가 아는 그 주씨 가문을 말하는 거야?’

해원에서 주씨 가문이 손 하나 까딱해도 금융계 전체가 뒤흔들린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절대 과언이 아니다.

“빨리 절차 진행해주세요. 시간 없다니까요.”

강지현은 그들과 논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산 검증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담당자가 서둘러 계약서를 가져왔다. 그녀는 사인한 후 즉시 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쪽이 주씨 가문의 딸이라고요? 왜 전에 본 적이 없죠?”

여자는 멍한 얼굴로 강지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주씨 가문의 동년배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완전 뉴페이스였다.

“주씨 가문은 무슨. 이거 다 사기 아니야?”

여자는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그들이 서로 짜고 쳐서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짓하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움직이려 했다.

분양 센터의 사람들이 나서서 말리기 전에 또 한 무리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로비에 몰려들어 여자의 일행을 막아섰다.

앞장서서 걸어오던 중년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 저는 주씨 가문의 집사 유정재입니다.”

그 말에 여자는 물론이고 강지현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걸까?

그녀는 다가오는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금테 안경과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분위기와 말투는 매우 점잖았지만 묘한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

유정재가 나타난 후 여자도 기가 팍 꺾였다.

“집사님, 설마 이 여자가... 정말 주씨 가문 아가씨라고요?”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주승호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해 한 명 입양했는데 왜 하필 주승호가 사망하자마자 뜬금없이 친딸이 나타난 걸까?

‘헐! 설마 사생아야?’

“맞습니다. 이분은 주승호 씨 친딸이자 현재 주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이십니다.”

말을 마친 유정재는 여자를 지나쳐 강지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강지현은 그의 시선이 마냥 불편할 따름이었다. 문득 유정재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유정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뒤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강지현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여자도 충격에 휘청거릴 뻔했다.

그녀가 가방을 꽉 움켜쥐고 서둘러 떠나려는데 주변의 경호원들이 길을 막았다.

“아가씨, 저분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바로 해결해드릴까요?”

유정재는 뒤돌아보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강지현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여자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

‘내가 조금 전에 버릇없이 굴었다고 진짜 무릎 꿇게 하는 건 아니겠지? 이대로 꿇으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쪽팔려 죽겠네 진짜.”

“...”

재벌가에서 주씨 가문의 지위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스케일은 강지현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됐어요. 손해 본 것도 없는데요 뭘.”

“그렇다면 아가씨가 저희 아가씨께 사과드리세요. 그래야 앞으로 두 가문의 체면을 지킬 수 있습니다.”

유정재가 허리를 곧게 펴고 말했다. 강지현은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유정재는 누군가 주씨 가문에 무례를 범하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여자는 강렬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결국 침을 꿀꺽 삼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지현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여자가 사과하고 나서야 경호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서둘러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여자가 떠난 후 유정재가 눈짓을 보내자 조금 전 강지현을 무시했던 여성 담당자도 끌려나갔다.

강지현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정재가 다가오며 공손하게 길을 안내했다.

“여기 일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차 밖에 대기시켰으니 먼저 타시죠, 아가씨.”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정재를 쳐다봤다. 처음의 경계심은 사라지고 많이 차분해진 눈빛이었다.

강지현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나지막이 물었다.

“차에요? 어디 가는데요?”

“당연히 주씨 저택이죠.”

유정재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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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며칠 동안 주단우뿐 아니라 현다영까지 미행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조사했다. 그리고 알아낸 내용을 엄경미에게 낱낱이 보고했다.그 사실을 알게 된 주단우는 곧장 남매에게 달려왔다.엄경미가 어떤 수를 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 부하들에게 붙잡히면 현다영과 현시우는 해원시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뻔했다.하지만 주단우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엄경미의 명령을 어기고 조직원들에게 맞서 두 사람을 구해낸 대가가 얼마나 클지.때로는 순간적인 충동 하나가 목숨까지 앗아가는 법이었다.주단우는 눈을 감았다. 공포는 어느새 피로와 통증에 묻혀 희미해졌다. 지금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 몸을 회복한 뒤, 다시 대책을 세워야 했다.현시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형,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주단우는 현시우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내저었다.“좀 자면 괜찮아질 거야.”괜찮았다.몸 하나는 워낙 튼튼했다. 매번 맞고 깨져도 자고 일어나면 씻은 듯 나아 있었으니까.“옷 벗어요.”막 잠이 들려던 순간, 현다영의 목소리가 들렸다.현시우는 현다영이 들고 온 구급상자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방금 전 누나가 말없이 자리를 피한 건 매정해서가 아니라 약을 찾으러 갔던 것이다.“형, 조금만 참아요. 우리 누나가 약 발라줄 거예요!”주단우가 겨우 눈을 떴다.현다영은 이미 구급상자를 앞에 두고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현시우는 현다영의 지시에 따라 서둘러 따뜻한 물을 떠왔다.“왜 가만히 있어요?”현다영은 솜과 연고를 꺼내놓고 주단우를 바라보았다.주단우는 잠시 현다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고 상의를 벗었다.현다영은 그저 상처를 확인하려던 것뿐이었다. 아까부터 주단우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어깨와 가슴을 문지르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런데 상의를 벗자 생각지도 못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주단우의 몸에는 자잘한 흉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등 쪽은 더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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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방금 전까지 현시우는 주단우를 위해서라며 현다영에게 싫다는 말까지 했다.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주단우를 향해 남아 있던 일말의 걱정마저 차갑게 식어버렸다.20분 뒤, 차는 현다영의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현다영은 결국 현시우를 학교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했다.오는 길 내내 현시우가 주단우 걱정에 울먹이는 걸 보니, 억지로 학교에 보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주단우의 안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밤새 난리를 피울 게 뻔했으니까.집에 도착하자마자 현다영은 주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시우가 오는 길에 몇 번이나 걸었지만 받지 않았던 번호였다.이번에도 신호음만 이어지다 끊겼다. 잠시 뒤 다시 걸자, 아예 전원이 꺼져 있었다.“거봐! 형한테 무슨 일 생긴 게 분명해!”“경찰서에서 연락 올 거야. 그냥 배터리가 나갔을 수도 있고.”현다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현시우를 다독였다.“일단 너부터 씻어. 잠자리 봐줄게.”현다영은 침구를 정리하러 돌아섰다.너무 태연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현시우가 결국 울컥했다.“이제 알겠어. 누나가 왜 형을 그렇게 오해하는지!”현시우가 씩씩대며 소리쳤다.“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사람이니까 그런 거잖아!”현시우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거기 서!”현다영이 엄하게 꾸짖었지만 이번에는 현시우도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문밖에 주단우가 서 있었다.입고 있던 재킷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셔츠 깃은 뜯겨 나갔고 옷 여기저기는 찢겨 있었다.목덜미와 입가, 뺨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평소의 말끔한 귀공자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은 영락없는 거리 싸움꾼 꼴이었다.“형...”현시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하지만 주단우는 대꾸할 힘도 없는 듯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현다영은 주단우를 보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현시우는 서둘러 문을 닫고 주단우에게 달려갔다.“형, 괜찮아요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547화

    현다영이 망설이자, 주단우가 소리쳤다.“빨리 가! 나 오래 버티지 못해!”앞서 얻어맞은 사내 둘은 주단우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주단우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듯했다.그러나 현시우를 붙잡고 있던 사내들까지 합세하자, 주단우는 혼자서 그들을 막아내야 했다.현시우는 난전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붙잡힌 손을 뿌리쳤다. 주단우도 쇠파이프를 휘둘러 현시우 앞을 막아선 사내를 밀쳐냈다.곧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섰다.“단우 형!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현시우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주단우가 나타난 순간, 구해줄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나중에 얘기해! 정신 똑바로 차려.”“곧 누나가 차 끌고 올 거야. 내가 길 열면 앞뒤 보지 말고 뛰어. 바로 차에 타. 알았어?”“형은요?”현시우가 발길질하며 불안하게 물었다.목이 잔뜩 쉰 주단우가 짧게 답했다.“이놈들이 나한테 뭘 어쩌겠어? 너희 먼저 가.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진짜죠?”현시우가 머뭇거리는 사이, 주단우가 먼저 돌진했다. 주단우가 쇠파이프를 휘두르자 사내들이 겁을 먹고 사방으로 흩어졌다.“뛰어!”주단우가 고함치자, 현시우는 곧장 길가로 내달렸다. 마침 현다영이 차를 몰고 달려왔다.차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현시우는 뒤쫓아오던 사내들에게 붙잡히기 직전, 가까스로 차 안으로 몸을 던졌다.현다영은 현시우의 다리가 다 들어오기도 전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가 그대로 튀어나갔다.현다영은 신호등을 몇 번이나 무시하고 달렸다. 한참을 달린 뒤에야 겨우 속도를 조금 줄였다.현시우는 내내 창문에 매달려 뒤를 살폈다.차가 너무 빠르게 달린 탓에,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뒤쪽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누나! 형을 그냥 두고 오면 어떡해? 혼자서 괜찮겠어?”현시우가 애가 타서 소리쳤다.“우리 다시 가서 형 구하자!”“그 사람이 뭐라고 했지?”현다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그녀는 현시우보다 훨씬 차분했다. 아니, 차분해지려 애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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