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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윤소정
강지현이 이제 막 차에 타려 하자 이도운도 표정을 가다듬고 함께 가려 했다.

이 시간이면 두 사람은 늘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

“비서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난 부동산 중개인이랑 집 보러 가기로 했어.”

이도운의 두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오늘 회사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이 집은 경쟁이 치열해서 오늘 안 가면 팔릴지도 몰라.”

강지현은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너 항상 그랬잖아.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까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입가와 눈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이도운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곧장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알았어. 그럼 나도 오늘 회사 안 가. 우리 함께 집 보러 가자.”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강지현이 더 환하게 웃더니 몸을 돌려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나 혼자 고르고 싶어서 그래. 다 고르면 너한테 보여줄게.”

그녀는 이도운의 속셈을 너무 잘 안다. 자신과 함께해주긴커녕 감시하기 위해서겠지.

이도운의 수작으로 부부 공동명의로 집을 사게 되면 그 집은 결국 그와 백하린의 소유가 된다.

강지현의 유혹적인 말투에 갑자기 흥분한 이도운은 그녀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잡아끌었다.

“나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응.”

강지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곧바로 손을 뺐다.

“알았어. 그렇게 해, 그럼.”

이도운은 낮게 말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피할 곳조차 없던지라 강지현은 역겨움을 참으며 스킨십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차를 몰고 떠나자 이도운의 입에 걸렸던 미소도 싹 사라졌다.

단지 착각일까? 강지현이 뭔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아니면 그녀가 원래 예민한 사람이라 백하린을 질투하는 걸까?

이도운은 이유 모를 짜증이 밀려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강지현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아무리 좋고 자신에게 진심이라 해도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내 백하린을 사랑할 테니까.

한 시간 후, 강지현은 거대한 통유리창 앞에 서서 파이낸셜의 뷰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점찍어둔 이 단독주택은 실내 인테리어가 전부 최첨단 설비로 되어있고 미니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였다. 사용 면적은 무려 100평이 넘었다.

가장 큰 면적은 아니지만, 파이낸셜에서 위치가 가장 좋은 집이었다.

강지현은 이 도시의 불빛이 전부 켜졌을 때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벌써 상상하고 있었다.

“이 집으로 할게요. 제 명의로 계약 진행해주세요.”

그녀는 만족스럽게 분양 담당자에게 말했다.

이곳은 바로 입주가 가능했다. 이는 그녀가 숨 막히고 역겨운 그 ‘집’을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분양 담당자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그냥 둘러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횡재라니.

어느덧 강지현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달라졌다. 담당자는 그녀를 로비의 VIP 대기실로 안내하고는 커피와 디저트를 대접하라고 시킨 후 부동산 계약서를 가지러 갔다.

이따가 강지현이 카드를 긁고 사인만 하면 후속 절차는 전담 직원이 모두 처리해줄 것이다.

그녀가 계약서를 기다리던 그때,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들려왔다.

“그쪽인가요? 내가 점찍은 집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강지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명품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젊은 여자가 화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경호원 두 명과 여성 분양 담당자 한 명이 따랐다.

“지금 저한테 말한 거예요?”

강지현은 잠깐 놀랐다가 가볍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누구겠어요? A동은 내가 먼저 봐뒀어요. 그 집 내가 살 겁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고 날카롭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강지현을 째려보면서 오만하게 말했다.

“아까 집 볼 때 누가 이 집을 예약했다는 말도 없었고 그쪽 아직 계약금도 안 냈죠? 내가 먼저 돈을 냈으니 당연히 내 거죠.”

강지현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는 막무가내인 사람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다른 자리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여자가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알려주러 온 게 아니거든요. 나한테 우선권이 있으니까 내놓기 싫어도 내놓아야 할 겁니다.”

강지현이 돌아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선권이요?”

그녀의 옆에 있던 여성 분양 담당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희는 구매자의 자산 규모를 먼저 확인합니다. 선착순이 아니라 고객님의 자산 규모에 따라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담당자는 말하면서 강지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경멸의 뜻이 매우 짙었다.

“규정 한번 어이가 없네요!”

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 계약서를 가지러 갔던 담당자가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강지현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자를 보더니 담당자는 나직이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저분이 바로 하씨 가문 아가씨인데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감 회사가 저분 집안 소유예요.”

강지현은 그제야 하이 토이가 생각났다.

유산을 상속받은 후 여러 가문에 대해 알아봤는데 해원시의 상업 순위에서 하이 그룹이 5위였다.

저 여자는 충분히 거만을 떨 자본이 있었다.

여성 분양 담당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마음이 불편하시겠지만, 규정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불편할 것도 없어요. 다만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죠. 그나저나 여기 규정대로라면 저분보다는 제가 우선권이 있을 테니 이 집은 제가 삽니다.”

강지현은 가볍게 숨을 내쉰 후 옆에 있는 담당자에게 말했다.

“빨리 처리해주세요.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저.”

지금 이 말은 자신의 자산 순위가 해원시 5위인 하이 그룹보다 더 높다는 의미였다.

기고만장하던 그 여자와 옆에 있던 여성 담당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여자 방금 뭐라고 했어요? 본인에게 우선권이 있다고요?”

여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여성 담당자에게 다시 물었다.

이에 담당자도 급히 예약 정보를 확인했다.

‘말도 안 돼. 만약 아가씨와 같은 엄청난 고객이 온다면 사전에 우리한테 말했을 텐데. 적어도 총괄 매니저님이 직접 나서야 하잖아.’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현의 옷차림만 보면 너무 평범해서 끽해야 졸부일 뿐 자산이 하이 그룹 따님을 뛰어넘을 리가 없었다.

“고객님, 아직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나요? 저희는 자산 규모에 따라...”

“그럼 규모를 확인해보시죠!”

강지현은 더 이상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재차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동안 형편없는 인간들을 수없이 봐온지라 이까짓 권세에 빌붙는 사람들은 축에 끼지도 못했으니.

옆에 있던 남자 담당자는 반신반의했지만 그래도 절차에 따라 진행했다.

그 시각, 2층 VIP 구역의 커튼이 움직이더니 훤칠한 체구의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사람은 그 뜻을 바로 알아채고 부하에게 지시했다.

“가서 김 대표님 말씀 전해드려. 저분 자산은 조회할 필요 없어. 주씨 가문의 아가씨야.”

해원시에 주씨 가문은 딱 하나뿐인데 무려 해원시 갑부 집안이었다. 그 집안에 딸이 있었다고? 이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강지현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를 본 여성 담당자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봐요! 자기 주제를 알고 이러시는 건가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여기 집을 사려면 자산 검증이 필요해요. 뭐 수중에 돈이 좀 있겠지만 웬만해선 여기 집 사기 힘들 겁니다. 더는 아가씨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안 그러면 경비원을 불러서 내쫓는 수가 있어요.”

이번엔 여자도 화를 가라앉히고 코웃음을 치면서 담당자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대체 무슨 우선권이 있는지 한번 봐야겠어요. 다만 미리 말해두는데 우선권도 없으면서 내 시간을 낭비했다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겁니다. 나 절대 그쪽 가만 안 둘 테니까!”

여자는 강지현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얼굴에 누가 봐도 응석받이로 자란 공주님이었다.

강지현이 덤덤하게 웃었다.

“좋아요. 그럼 만약 내게 우선권이 있다면요? 그쪽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 건가요?”

“이봐!”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사이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강지현에게 달려왔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확실히 고객님께 우선권이 있으세요. 저희가 무례했던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옆에 있던 남자 담당자도 입이 쩍 벌어졌다. 방금 자산을 검증하려는데 자신이 접대한 여자가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자산을 가진 데다가 갑부 주씨 가문에서 금방 찾은 딸이라는 소식까지 전해 들은 것이었다.

여성 담당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따져 물으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몇 마디 속삭이자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사과부터 해댔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주씨 가문 따님인 줄 몰랐습니다. 방금 무례하게 굴었던 점 부디 용서해주세요...”

그 말에 여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씨 가문? 설마 내가 아는 그 주씨 가문을 말하는 거야?’

해원에서 주씨 가문이 손 하나 까딱해도 금융계 전체가 뒤흔들린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절대 과언이 아니다.

“빨리 절차 진행해주세요. 시간 없다니까요.”

강지현은 그들과 논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산 검증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담당자가 서둘러 계약서를 가져왔다. 그녀는 사인한 후 즉시 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쪽이 주씨 가문의 딸이라고요? 왜 전에 본 적이 없죠?”

여자는 멍한 얼굴로 강지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주씨 가문의 동년배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완전 뉴페이스였다.

“주씨 가문은 무슨. 이거 다 사기 아니야?”

여자는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그들이 서로 짜고 쳐서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짓하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움직이려 했다.

분양 센터의 사람들이 나서서 말리기 전에 또 한 무리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로비에 몰려들어 여자의 일행을 막아섰다.

앞장서서 걸어오던 중년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 저는 주씨 가문의 집사 유정재입니다.”

그 말에 여자는 물론이고 강지현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걸까?

그녀는 다가오는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금테 안경과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분위기와 말투는 매우 점잖았지만 묘한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

유정재가 나타난 후 여자도 기가 팍 꺾였다.

“집사님, 설마 이 여자가... 정말 주씨 가문 아가씨라고요?”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주승호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해 한 명 입양했는데 왜 하필 주승호가 사망하자마자 뜬금없이 친딸이 나타난 걸까?

‘헐! 설마 사생아야?’

“맞습니다. 이분은 주승호 씨 친딸이자 현재 주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이십니다.”

말을 마친 유정재는 여자를 지나쳐 강지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강지현은 그의 시선이 마냥 불편할 따름이었다. 문득 유정재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유정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뒤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강지현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여자도 충격에 휘청거릴 뻔했다.

그녀가 가방을 꽉 움켜쥐고 서둘러 떠나려는데 주변의 경호원들이 길을 막았다.

“아가씨, 저분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바로 해결해드릴까요?”

유정재는 뒤돌아보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강지현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여자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

‘내가 조금 전에 버릇없이 굴었다고 진짜 무릎 꿇게 하는 건 아니겠지? 이대로 꿇으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쪽팔려 죽겠네 진짜.”

“...”

재벌가에서 주씨 가문의 지위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스케일은 강지현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됐어요. 손해 본 것도 없는데요 뭘.”

“그렇다면 아가씨가 저희 아가씨께 사과드리세요. 그래야 앞으로 두 가문의 체면을 지킬 수 있습니다.”

유정재가 허리를 곧게 펴고 말했다. 강지현은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유정재는 누군가 주씨 가문에 무례를 범하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여자는 강렬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결국 침을 꿀꺽 삼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지현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여자가 사과하고 나서야 경호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서둘러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여자가 떠난 후 유정재가 눈짓을 보내자 조금 전 강지현을 무시했던 여성 담당자도 끌려나갔다.

강지현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정재가 다가오며 공손하게 길을 안내했다.

“여기 일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차 밖에 대기시켰으니 먼저 타시죠, 아가씨.”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정재를 쳐다봤다. 처음의 경계심은 사라지고 많이 차분해진 눈빛이었다.

강지현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나지막이 물었다.

“차에요? 어디 가는데요?”

“당연히 주씨 저택이죠.”

유정재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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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유는 주시언의 불행이 못내 즐거웠다.이제 제멋대로 하원영을 짓밟아도 그녀를 보호해 줄 방패막이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하지만 하원영이 주시언의 소식을 듣자마자 자존심도 내팽개친 채 제 앞에 무릎을 굽히며 매달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사실 하지유도 주시언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닥쳤는지는 알지 못했다.그저 하원영이 간절해질수록 더 애타게 할 심산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결국 그녀가 기댈 곳은 주병찬이었다.그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본래 성격대로라면 남의 냉대를 견디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고, 주씨 가문에 제 발로 기어들어 와 수모를 자처하는 짓 따위는 죽어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네가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 잘 알 텐데. 이만 실례하지. 배웅은 생략하마.”주병찬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기에 간신히 인내심을 쥐어짜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려 했다.“방금... 엄경미랑 통화하신 거죠? 제 짐작이 맞다면, 그 여자 시언 오빠를 빌미로 아버님을 협박하고 있지 않나요?”하원영은 지금 이 순간 주병찬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가 감추려던 치부를 들춰냈다.주씨 가문의 일에 연루된 사람치고 끝이 좋았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하원영에게는 더욱 뼈아픈 사실이었다.주병찬의 몸이 움찔했다.하원영을 돌아보는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이더니, 이내 형언할 수 없는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엿듣지 말아야 할 일은 잊어버리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이건 내가 원영 씨한테 주는 마지막 충고니까.”“저에 대한 오해가 깊으신 거 잘 압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발 이것만은 믿어주세요. 저 역시 시언 오빠가 잘못되는 건 원치 않아요. 오늘 여기 온 이유도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예요.”하원영은 용기를 내어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 손바닥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가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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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풀이가 덜 되셨다면, 제가 손을 좀 써서 연씨 가문 그 계집애가 고생을 더 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제수씨.”주병찬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연씨 가문이 어떻게 되든 난 상관없어요. 단지 시언이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랄 뿐.”“아주버님, M국 쪽 협상은 제가 알아서 다 조치해 뒀어요. 우리를 협박한 연씨 가문 놈들이 무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죠? 굳이 그쪽 자존심까지 챙겨줄 이유 전혀 없잖아요. 안 그래요?”엄경미의 말에 주병찬은 머릿속이 하얘졌다.그제야 자신이 철저히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엄경미가 연씨 가문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주시언을 M국에서 빼내는 것쯤은 말 한마디면 끝날 일이었다.하지만 조용히 해결하는 대신, 오히려 연씨 가문과 정면충돌을 선택하며 판을 키웠다.이건 도움을 주기는커녕 완전히 진흙탕 싸움으로 만드는 짓이었다.하지만 명분만큼은 완벽했다. 주시언의 복수를 대신하고 가문의 위신을 세워준다는 허울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를 탓할 구실조차 마땅치 않았다.결국 주시언의 생사는 여전히 엄경미의 손아귀에 쥐여 있는 셈이었다.“제수 씨나 나나 알 만한 사람들끼리 왜 이럽니까. 대체 목적이 뭐죠? 지금 나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주병찬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아주버님,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걱정 마세요, 일주일 안에 시언이는 반드시 무사히 귀국할 테니까. 다만...”엄경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나긋해졌다.“요즘 주상 그룹 신약 출시 건으로 바쁘잖아요. 아주버님께서 작은 도움 하나만 더 주셨으면 해서.”“적당히 좀 하지? 주승호 하나 없다고 이 집안이 우스워 보여요?”격분한 주병찬은 충동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엄경미가 감히 자신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협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처음 주승호에게 시집왔을 때만 해도 그녀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자, 유순하고 온화한 가문의 영애 그 자체였다.하지만 주병찬은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보통내기가 아닌 여자라는 것을.집안,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307화

    설령 주병찬이 강지현을 조카딸처럼 아끼려 한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가까이하지 않을 터였다.주병찬은 엄경미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 승낙했다.이제 와서 두 여자 사이의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기엔 기력이 부쳤고, 무엇보다 엄경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난적이었다.그에게 주시언만이 삶의 전부였기에 몸을 사리며 제 안위만 보전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반면, 강지현은 김태하라는 거대한 그늘에서도 끝내 엄경미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타고난 팔자라고 치부해 버렸다.그렇게 스스로를 모질게 설득했지만 막상 강지현의 처참한 몰골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그는 강지현에게 티슈를 건네며 위로했다.“지현아, 너무 걱정하지 마. 하늘이 도울 테니 김태하도 분명 무사할 거다. 무엇보다 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그러다 몸 상할라.”주병찬의 목소리에 강지현은 무언가 생각난 듯, 초점이 흐릿하던 눈동자에 찰나의 생기가 돌아왔다.“큰아버지, 아시다시피 지금 주상 그룹은 더없이 중요한 시기잖아요. 회사 쪽은 제가 어떻게든 살피겠지만 이번 프로젝트에는 큰아버지의 지분도 걸려 있지 않아요? 부디 저 좀 도와주세요. 절대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돼요.”강지현은 지금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선택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신약 출시라는 중대한 과업을 목전에 둔 상황이 아니던가.물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라 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했다.하지만 최종 검토와 승인만큼은 반드시 그녀가 직접 확인하고 서명해야 하는 절차였다.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작정 자리를 비우게 된 지금, 주변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주병찬밖에 없었다.그 역시 주씨 가문의 일원인데다 주상 그룹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든든한 동지였기 때문이다.“걱정 말거라, 내가 잘 챙기마.”주병찬의 목울대가 미세하게 꿀렁였다.찔리는 마음으로 내뱉은 대답이었으나, 강지현은 그의 얼굴에 스치는 찰나의 흔들림을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그저 간절한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43화

    강지현의 입꼬리를 살짝 올라갔다.“이런 우연이 다 있나? 나도 주상 그룹 아가씨랑 아는 사이인데. 게다가 주씨 가문 사람들도 많이 알아. 주상 그룹이 나한테는 집처럼 익숙한 곳이야.”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룸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두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강지현의 말투가 단호하고 차분해서 진짜인지 거짓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이런 우연이 있다고? 슬기랑 지현이 모두 주씨 가문 아가씨랑 아는 사이라니.’주씨 가문은 보통 가문이 아니었다. 해원시의 최고 재벌이었고 뉴스나 매체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그런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46화

    박슬기의 말에 사람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조금 전 강지현이 보여준 그 진지한 태도 때문에 모두 그녀가 정말 주씨 가문의 아가씨인 줄 알고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럴 리가.“강지현, 제발 연기 좀 그만해. 순진한 예림이가 네 거짓말에 넘어갔잖아.”“사과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공주 팔자도 없으면서 공주병만 얻었구나.”이번에는 아무도 강지현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았다. 점점 듣기 거북한 말을 쏟아냈고 경멸의 눈초리가 사방에서 날아왔다.박슬기의 말이 맞았다. 못 사는 사람일 수록 허세를 부리는 법이다. 강지현이 이렇게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42화

    강지현은 박슬기가 몸에 걸친 명품들을 훑어보았다. 눈대중으로 계산해보면 4천만 원도 채 안 되었다.‘이젠 몇천만 원만 있어도 레벨을 따질 자격이 생기나?’“듣건대 쟤...”“지현아, 슬기가 말을 좀 듣기 거북하게 했어도 손을 대서는 안 되지. 얼른 슬기한테 사과해.”도예림이 강지현에게 뭐라 하려던 그때 남자 동창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주변 친구들도 나서서 맞장구쳤다.“지현아, 다 친구인데 이렇게까지 따질 필요는 없잖아.”“슬기가 말하는 게 좀 직설적이긴 해도 악의는 없었을 거야.”“맞아. 게다가 슬기 신분이 이제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40화

    말하는 사람의 말투가 별로 좋지 않았다. 강지현이 고개를 돌린 순간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백하린이 가르치던 여학생이었고 이도운과 같은 반이었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박슬기, 샘이 나서 그러는 거지? 지금까지 연애도 못 해봤으면서. 소개팅이라도 해보지 그래?”도예림은 그녀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강지현 대신 쏘아붙였다.“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끼어들어? 이도운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지현이를 선택한 거야.”그 말에 룸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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