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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윤소정
강지현은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얼굴에 주스 세례를 당하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본 가정부들이 재빨리 달려와서 닦아주었다.

“이윤후!”

이도운까지 버럭 화를 내니 아이는 겁을 먹고 위층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도운이 쫓아가려 하자 옆에 있던 백하린이 얼른 그를 말렸다.

“그만해, 도운아. 윤후 아직 어린애라 너무 무섭게 굴면 안 돼. 내가 가서 볼게.”

이어서 옷을 닦고 있는 강지현을 힐끗 쳐다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이도운은 그제야 강지현에게 주의를 돌렸다.

“괜찮아? 이리 봐봐?”

강지현이 옷을 다 닦은 그때 이 남자가 얼굴을 만지려 손을 내밀었다.

“더러워. 저리 비켜!”

그녀의 입에서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도운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더럽긴. 네가 더럽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항상 걱정만 했지. 윤후가 이렇게 말썽부릴 줄 알았다면 애초에 네게 맡기고 직접 키우게 하는 게 아닌데...”

강지현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 친엄마가 키웠더라면 나보다 훨씬 잘 키웠을 텐데 아쉽게도 죽어버렸다지? 난 친엄마가 아니라서 애 하나 잘 키우지 못하나 봐.”

이도운은 흠칫 놀라더니 안색이 돌연 굳어졌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윤후는 우리가 입양했어. 윤후한테 엄마는 오직 너뿐이라고.”

말을 마친 남자는 애정 가득한 눈길로 강지현을 쳐다보며 머리까지 살짝 쓰다듬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스킨쉽에 괴로움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방에 돌아온 그녀는 곧장 욕실에 가서 샤워했다.

이도운도 곧바로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백하린을 집에 들이는 것에 대해 상의해야 하니까.

말이 상의지, 답은 이미 정해졌고 그녀에겐 결정권조차 없었다.

그 둘이야말로 찐 부부였고 강지현은 가짜 아내이니까.

“지금은 회사가 상장을 앞둔 중요한 시기야. 윤후도 한창 사람 손 탈 때고 회사는 네가 없으면 돌아가질 않아. 교수님은 이제 육아 전문가셔. 아까 너도 봤잖아. 윤후가 교수님 말씀을 제법 잘 듣는 거...”

“알았어. 그렇게 해.”

강지현은 주절거리는 이 인간의 몰골이 너무 역겨웠다. 들을수록 헛구역질만 난달까?

“역시 넌 사리 분별을 잘하고 널 아끼는 내 마음도 잘 알아주네?”

원하는 답을 얻은 이도운은 짙은 눈동자에 다정함이 철철 흘러넘쳤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으려고 하는데 강지현이 즉시 몸을 돌려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강변 뷰 별장 사진이 떠 있었고 위치를 보니 파이낸셜이었다.

그곳은 상업이 발달하고 해원의 시 중심에 있어 집값이 이도운의 현재 집값보다 훨씬 더 비쌌다.

“도운아, 이 집 어때?”

“당연히 근사하지. 여기 금싸라기 땅이잖아.”

이도운은 그녀의 의도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달에 내 생일이잖아. 이 집이 마음에 드는데 생일 선물로 사주면 안 돼?”

강지현은 최대한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도운은 그녀를 2년이나 속였다. 그동안 그녀는 시간만 낭비한 게 아니라 커리어까지 포기했다.

그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성장할 기회와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안까지 싹 다 포기하고 고작 이 남자의 작은 회사로 들어갔다.

짧디짧은 2년이란 시간 동안, 강지현은 이도운의 회사를 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제 몇 달 후엔 상장까지 하여 이도운의 몸값이 수조 원으로 뛰어오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되레 이용가치를 잃어서 버림받을 신세에 처하게 됐다.

절대 두 남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고, 이대로 두 인간을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이도운은 전에 늘 진심을 담아 맹세했었다. 무릇 강지현이 원하는 거라면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전부 만족시켜줄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물욕이 별로 없던 터라 작정하고 뭘 요구해본 적이 없었다.

이도운은 잠시 망설였다.

“갑자기 웬 집? 지금 이 집도 좋잖아.”

“좋긴 한데 투자 가치가 부족해. 사진 속 이 집은 달라. 앞으로 분명 집값이 많이 오를 거야. 게다가 회사도 곧 상장하는데 나중에 새집에서 연회를 열고 손님을 대접하기도 편할뿐더러 도운이 너도 면이 설 거잖아. 안 그래?”

한마디 한마디가 이도운을 위한 배려였고 이에 남자의 마음에 피어올랐던 의심도 말끔히 해소되었다.

‘역시 지현이는 내 돈만 탐내는 게 아니야. 날 이렇게 지극히 생각해주잖아.’

이도운은 문득 죄책감과 함께 강지현에 대한 연민마저 느꼈다.

“너만 내 옆에 있으면 언제든 면이 서. 다른 건 필요 없어, 지현아.”

이도운이 다시 안으려고 손을 뻗자 강지현은 망설임 없이 몸을 피했다.

“내 생일 선물이라고 했잖아. 그냥 나한테 사준다고 생각하면 안 돼? 뭐 설마... 돈 아까워서 이래?”

마지막 한마디는 농담처럼 툭 내던지는 그녀였다.

이도운은 오늘따라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 앞에만 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어 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물었다.

“그래서 이 집 얼만데?”

“별로 안 비싸. 140억 정도?”

강지현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 순간 이도운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녀에게 인색해지고 싶지 않았으나 가격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하지만 회사가 상장을 앞둔 이 시점에 강지현의 기분을 망칠 순 없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마음에 든다는데 남편인 내가 사줘야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지현이 보는 앞에서 재무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날 밤, 강지현의 개인 계좌로 140억 원이 입금되었다.

이도운은 그녀의 요구대로 특별히 송금 메모까지 남겼다.

[지현이 집 사주기. 생일 축하해.]

통장 잔고가 3천만 원에서 140억 3천만 원으로 늘어났다.

‘결혼’ 후 강지현은 집안의 경제권을 오롯이 이도운에게 맡겼다.

통장에 남아있는 돈은 그녀가 대학교 시절 근로 장학금으로 모은 것이었다.

지난 2년간 그녀는 월급을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강지현이 방에서 나왔을 때 아래층 주방에서 이도운이 앞치마를 두르고 백하린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윤후도 껌딱지처럼 두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강지현이 알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얌전했다.

이들 세 식구의 화목한 풍경은 강지현이 내려온 순간 와장창 무너졌다.

백하린은 이도운의 어깨에 걸쳤던 손을 재빨리 내렸고 이도운도 황급히 강지현 앞으로 다가왔다.

“일어났네? 오늘 아침은 내가 직접 했어, 지현아. 얼른 먹어봐봐.”

강지현은 식탁 위에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을 진작 보았다.

집에 요리하는 가정부가 있는 데다가 이도운이 아침을 먹는 습관이 없어 요리에 별로 관심이 없을 터.

게다가 평소에 먹던 담백함 위주의 한식과는 달리 오늘은 죄다 서양식이었다. 메뉴도 엄청 다양하니 누구를 위해 준비한 것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강지현은 피식 웃으며 백하린에게 물었다.

“다 교수님이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응. 다른 음식이 입에 안 맞을까 봐 도운이가 준비해줬어. 요즘 세월에 얘처럼 자상한 남자 별로 없다, 지현아. 우리 지현이는 정말 복 받았네. 이렇게 좋은 남편을 두고 말이야.”

백하린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강지현과 눈이 마주칠 때 눈가에 은근한 우월감을 뽐냈다.

“그러게요. 얘는 항상 다정한 편이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한테 자상하고 매너가 넘친다니까요.”

“지현이 헛소리 듣지 말아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이도운이 서둘러 부정했다. 강지현의 말 속에 칼을 품었으나 말투가 워낙 홀가분해서 다정한 연인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백하린은 결코 웃지 못했다.

이윤후는 그녀가 기분이 안 좋은 걸 알아채더니 아니 글쎄 강지현이 마지막 남은 계란 후라이를 집으려 할 때 그 위에 간장을 마구 뿌려놓았다.

아이가 너무 힘을 준 나머지 간장이 강지현의 하얀 손등에 튀었다.

“이윤후, 뭐 하는 짓이야?”

이도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백하린은 재빨리 강지현에게 휴지를 건네고 뒤돌아서서 이윤후에게 나직이 말했다.

“윤후야, 배가 불러도 음식을 낭비하면 안 돼. 봐, 실수로 엄마 손까지 더러워졌잖아. 얼른 사과해, 너희 엄마한테.”

이윤후는 강지현을 힐끗 째려보고는 마지못해 사과했다.

“미안해요.”

강지현은 손을 닦으면서 두 모자를 쳐다봤다.

이윤후는 턱을 치켜들고 사과했고 백하린의 말 역시 대충 얼버무리는 수준이었다.

“이제 다 먹었으면 방으로 들어가.”

아이가 사과한 후 강지현이 뭐라 하기도 전에 백하린이 한발 앞섰다.

“잠깐.”

이윤후가 막 돌아가려던 그때, 강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잡아끌더니 다짜고짜 벽으로 밀어붙였다.

“똑바로 서.”

“이거 놔요. 이 나쁜 여자야!”

아이가 격하게 반항했지만, 강지현은 어느덧 녀석을 다루는 데 능숙해져서 양쪽 팔을 비틀어 강제로 벽에 고정했다. 이어서 옆에 놓인 꽃병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와아앙...”

이윤후는 아프고 겁에 질린 나머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지현아, 너 왜 그래? 윤후가 사과도 했잖아. 꼭 이렇게 폭력적으로 훈육해야겠어?”

백하린이 안달이 나서 그녀를 말렸다.

“교수님! 윤후 제 아들이에요. 엄마가 자식 훈육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요? 교수님이야말로 왜 이렇게 애를 감싸고 돌아요? 뭐 윤후 친엄마라도 돼요?”

강지현은 차갑게 대꾸하면서도 훈육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이 이윤후는 엉덩이를 몇 대 더 맞았다.

백하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주먹을 꽉 쥐어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갈 지경이었고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아니 난 그저 애가 너무 어리길래... 게다가 윤후가 그리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

“작은 잘못을 제때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큰 잘못을 저질러요. 전 교수님처럼 육아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때리지 않으면 다루기 힘들어요.”

강지현의 말에 백하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설령 강지현이 강하게 나온다 해도 그녀는 딱히 말릴 명분이 없었다.

이도운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강지현이 아무리 엄하게 굴어도 손을 댄 적은 없으니까.

이윤후가 잘못한 건 맞지만 백하린이 하도 곁눈질하니 그는 마지못해 강지현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말렸다.

“됐어, 그만해. 이 정도로 때렸으면 충분해, 지현아.”

확실히 강지현도 녀석을 몇 대 때리고 나니 속에 쌓였던 분노가 조금은 가셨다.

그녀가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자 이윤후는 재빨리 백하린의 뒤로 숨었다.

아이는 엉엉 우느라 강지현에게 대들지도 못했다.

이에 백하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억누르면서 이윤후를 토닥였다.

“잘 들어, 이윤후! 내가 네 엄마인 한 항상 날 존중해야 해. 계속 어른한테 버릇없이 굴면 오늘처럼 회초리를 들 거야.”

그녀의 강압적인 태도에 이윤후는 감히 더 흐느끼지도 못했다. 다만 강지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띠었다.

이 광경을 본 이도운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말을 마친 후, 강지현은 곧장 주방을 나섰다.

이도운이 망설임 없이 쫓아가려는데 백하린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운아...”

그녀의 눈동자에 속상함이 가득 찼다.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도운이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했고 둘의 감정이 워낙 깊어 불안감을 느낀 적이 없었기에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지만...

강지현이 이렇게까지 모욕할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이도운의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갖은 수를 썼다.

그때 이도운은 아직 학생이라 저항할 힘이 없었고 백하린은 거의 실업자가 될 뻔했다. 나중에 지도 교수 일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지못해 육아 강사로 전직했다.

결국, 달리 방법이 없었던 이도운은 강지현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백하린도 그에게 왜 하필 강지현이냐고 물었었다.

이도운은 강지현이 예쁘장해서 집에 데려가면 가족들이 받아들일 거라고 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녀는 의지할 곳 없는 고아인 데다 금융 학과에서 손꼽히는 천재 소녀라 많은 유명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강지현과 교제하면 자신의 사업에도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백하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도운은 강지현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백하린과 몰래 혼인 신고를 했다.

이렇게 하면 강지현과 함께 있더라도 부부 공동 재산은 백하린과 이도운의 몫이 된다.

이도운은 나중에 가업을 이어받아 발언권을 갖게 되면 그들의 관계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 사이에서 강지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낱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도구가 감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기어오르려 하다니. 백하린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도운은 백하린이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강지현과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었다. 그는 백하린을 힘껏 안아준 뒤 미간을 찌푸리고 강지현을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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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312화

    “그러니까... 강지현 씨가 여기 왔다는 말이에요?”서지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김태하가 소식을 절대 함구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김씨 가문 사람들조차 조금 전에서야 비보를 접했고, 분위기상 강지현에게 알린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최동윤의 표정은 차분하고도 단호했다.“네, 맞습니다. 지금 안에 계시니 서지아 씨는 이만 돌아가 주시죠.”서지아의 눈동자에 쓸쓸함이 스쳤다.그녀는 입술만 달싹였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손에는 김태하를 위해 준비한 보양식이 들려 있었다.오늘 그가 깨어나기를, 그리고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자신과 마주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챙겨온 것이었다.하지만 강지현이 나타난 이상, 실낱같은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서지아가 상실감을 안고 막 자리를 뜨려던 찰나, 병실 문이 열렸다.“서지아 씨.”밖의 기척을 들은 강지현이 걸어 나왔다.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서지아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휩싸여 황급히 눈길을 피했다.“강지현 씨, 태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고생스럽겠지만 잘 좀 돌봐주세요.”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최동윤은 혹여 강지현의 기분이 상할까 싶어 얼른 가로막으려 했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런 내색 없이 묵묵히 건네받았다.“서지아 씨 마음은 남편 대신해서 제가 잘 받을게요.”다만 예우를 차릴 기분이 아닌지라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렸을 뿐, 그 어디에도 웃음기는 없었다.“그리고 남편 돌보는 건 아내인 제 몫이니까 서지아 씨는 이제 신경 안 쓰셔도 돼요.”서지아는 이 말이 자신을 향한 경고라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맞대응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이내 열린 문틈 사이로 김태하를 애틋하게 바라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서지아가 떠나자 최동윤이 서둘러 강지현의 손에 든 것을 건네받으려 했다.“지현 씨,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강지현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음식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고,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311화

    접경 지역의 의료 수준은 열악했다.김태하는 장기 다발성 출혈로 당장 손을 써야 하는 위중한 상태였으나, 이곳이 그나마 최선인 병원이었다.그야말로 황천길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아찔한 상황이었다.김태하는 사고를 당하던 그 짧은 순간에도 자신의 불행을 예감했던 모양인지 최동윤에게 강지현만큼은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최동윤은 고개를 떨군 채 연신 사과를 건넸다.“대표님을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다 지현 씨가 걱정할까 봐 그러신 겁니다.”“지현아, 태하 그 아이 성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남한테 약한 모습 보여주는 걸 워낙 싫어하는 애라... 혹여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났던 게지.”은주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김태하의 처참한 몰골을 마주하는 그녀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김씨 가문의 핏줄로 태어났음에도 어려서부터 복이라곤 누려본 적 없이 고생길만 걸어온 아이였다.하지만 성정이 워낙 강인해 단 한 번도 나약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심지어 아플 때조차 혼자서 묵묵히 견뎌내곤 했다.은주희 본인은 물론이고 지순옥조차 손자가 이토록 무력하게 앓아누운 모습은 처음 본다.“알아요...”강지현은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이내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거대한 바위에 깔렸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은주희가 전한 사고 현장을 떠올릴 때마다 강지현은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그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이 걱정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니, 그런 사람을 대체 어떻게 원망할 수 있을까.“지현아, 의사 말로는 이제 고비는 넘겼대. 내출혈도 잡혔고, 척추 손상도 불행 중 다행으로 아주 심각하진 않다니까 곧 깨어날 거야.”은주희는 말을 멈추고 강지현의 안색을 살폈다.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에 차마 남은 사실을 다 전하지 못한 채 낙관적인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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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유는 주시언의 불행이 못내 즐거웠다.이제 제멋대로 하원영을 짓밟아도 그녀를 보호해 줄 방패막이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하지만 하원영이 주시언의 소식을 듣자마자 자존심도 내팽개친 채 제 앞에 무릎을 굽히며 매달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사실 하지유도 주시언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닥쳤는지는 알지 못했다.그저 하원영이 간절해질수록 더 애타게 할 심산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결국 그녀가 기댈 곳은 주병찬이었다.그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본래 성격대로라면 남의 냉대를 견디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고, 주씨 가문에 제 발로 기어들어 와 수모를 자처하는 짓 따위는 죽어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네가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 잘 알 텐데. 이만 실례하지. 배웅은 생략하마.”주병찬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기에 간신히 인내심을 쥐어짜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려 했다.“방금... 엄경미랑 통화하신 거죠? 제 짐작이 맞다면, 그 여자 시언 오빠를 빌미로 아버님을 협박하고 있지 않나요?”하원영은 지금 이 순간 주병찬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가 감추려던 치부를 들춰냈다.주씨 가문의 일에 연루된 사람치고 끝이 좋았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하원영에게는 더욱 뼈아픈 사실이었다.주병찬의 몸이 움찔했다.하원영을 돌아보는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이더니, 이내 형언할 수 없는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엿듣지 말아야 할 일은 잊어버리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이건 내가 원영 씨한테 주는 마지막 충고니까.”“저에 대한 오해가 깊으신 거 잘 압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발 이것만은 믿어주세요. 저 역시 시언 오빠가 잘못되는 건 원치 않아요. 오늘 여기 온 이유도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예요.”하원영은 용기를 내어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 손바닥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가 온전히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308화

    “분풀이가 덜 되셨다면, 제가 손을 좀 써서 연씨 가문 그 계집애가 고생을 더 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제수씨.”주병찬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연씨 가문이 어떻게 되든 난 상관없어요. 단지 시언이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랄 뿐.”“아주버님, M국 쪽 협상은 제가 알아서 다 조치해 뒀어요. 우리를 협박한 연씨 가문 놈들이 무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죠? 굳이 그쪽 자존심까지 챙겨줄 이유 전혀 없잖아요. 안 그래요?”엄경미의 말에 주병찬은 머릿속이 하얘졌다.그제야 자신이 철저히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엄경미가 연씨 가문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주시언을 M국에서 빼내는 것쯤은 말 한마디면 끝날 일이었다.하지만 조용히 해결하는 대신, 오히려 연씨 가문과 정면충돌을 선택하며 판을 키웠다.이건 도움을 주기는커녕 완전히 진흙탕 싸움으로 만드는 짓이었다.하지만 명분만큼은 완벽했다. 주시언의 복수를 대신하고 가문의 위신을 세워준다는 허울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를 탓할 구실조차 마땅치 않았다.결국 주시언의 생사는 여전히 엄경미의 손아귀에 쥐여 있는 셈이었다.“제수 씨나 나나 알 만한 사람들끼리 왜 이럽니까. 대체 목적이 뭐죠? 지금 나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주병찬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아주버님,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걱정 마세요, 일주일 안에 시언이는 반드시 무사히 귀국할 테니까. 다만...”엄경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나긋해졌다.“요즘 주상 그룹 신약 출시 건으로 바쁘잖아요. 아주버님께서 작은 도움 하나만 더 주셨으면 해서.”“적당히 좀 하지? 주승호 하나 없다고 이 집안이 우스워 보여요?”격분한 주병찬은 충동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엄경미가 감히 자신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협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처음 주승호에게 시집왔을 때만 해도 그녀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자, 유순하고 온화한 가문의 영애 그 자체였다.하지만 주병찬은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보통내기가 아닌 여자라는 것을.집안,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307화

    설령 주병찬이 강지현을 조카딸처럼 아끼려 한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가까이하지 않을 터였다.주병찬은 엄경미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 승낙했다.이제 와서 두 여자 사이의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기엔 기력이 부쳤고, 무엇보다 엄경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난적이었다.그에게 주시언만이 삶의 전부였기에 몸을 사리며 제 안위만 보전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반면, 강지현은 김태하라는 거대한 그늘에서도 끝내 엄경미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타고난 팔자라고 치부해 버렸다.그렇게 스스로를 모질게 설득했지만 막상 강지현의 처참한 몰골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그는 강지현에게 티슈를 건네며 위로했다.“지현아, 너무 걱정하지 마. 하늘이 도울 테니 김태하도 분명 무사할 거다. 무엇보다 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그러다 몸 상할라.”주병찬의 목소리에 강지현은 무언가 생각난 듯, 초점이 흐릿하던 눈동자에 찰나의 생기가 돌아왔다.“큰아버지, 아시다시피 지금 주상 그룹은 더없이 중요한 시기잖아요. 회사 쪽은 제가 어떻게든 살피겠지만 이번 프로젝트에는 큰아버지의 지분도 걸려 있지 않아요? 부디 저 좀 도와주세요. 절대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돼요.”강지현은 지금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선택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신약 출시라는 중대한 과업을 목전에 둔 상황이 아니던가.물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라 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했다.하지만 최종 검토와 승인만큼은 반드시 그녀가 직접 확인하고 서명해야 하는 절차였다.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작정 자리를 비우게 된 지금, 주변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주병찬밖에 없었다.그 역시 주씨 가문의 일원인데다 주상 그룹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든든한 동지였기 때문이다.“걱정 말거라, 내가 잘 챙기마.”주병찬의 목울대가 미세하게 꿀렁였다.찔리는 마음으로 내뱉은 대답이었으나, 강지현은 그의 얼굴에 스치는 찰나의 흔들림을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그저 간절한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0화

    백하린이 이도운에게 선물 받은 명품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프로젝트 자료를, 다른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채 안내 직원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그녀 역시 투자 유치를 위해 온 것이었다.강지현을 본 백하린이 걸음이 멈추더니 눈빛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지난 며칠 동안 강지현이 이경 그룹을 내팽개치고 사라진 통에 이도운은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회사도 난리가 났다. 심지어 이씨 가문 사람들까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뭘 하고 있나 했더니 여기서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어? 이경 그룹의 지원 없이 정말 맨손으로 성공할 수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66화

    김태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중얼거리면서 대답했다.김태하는 조금 전 그녀가 그의 가슴에 꼭 달라붙어 있던 것을 떠올리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자는 거 아니었어요?”“아까는 정말 너무 피곤해서 눈도 못 떴어요... 하지만 태하 씨가 온 건 알고 있었어요.”강지현이 고개를 들었지만 눈은 여전히 제대로 뜨지 못했고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태하 씨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하 씨만 있다면 아무도 절 함부로 괴롭히지 못 할 거잖아요... 그냥 좀 쉬고 싶었어요...”알코올 때문에 강지현은 더 이상 논리적인 사고를 할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67화

    “내 명의로 된 투자 계열사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여기에 두 배 더 투자할 거야. 자금 여유가 있어야 일이 잘 풀리니까.”김태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냥 계획안이 괜찮아 보여서 전망성이 좋다고 판단했고 자진해서 투자하겠다고 해.”“알겠습니다.”최동윤이 답했다.김태하는 일 처리에 있어서 늘 분별력이 있었다. 오늘처럼 화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움직이는 건 최동윤도 처음 보았다.게다가 김태하는 리스크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프로젝트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투자하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64화

    안 대표 역시 거들며 소리쳤다.“주상 그룹의 상속인이 어떤 분인데 여기까지 와서 우리한테 투자를 유치하겠어요? 지현 씨는 그냥 우리랑 곱게 술이나 마셔요. 그러면 투자 얘기도 하기 훨씬 쉬울 거예요.”전 대표는 심지어 강지현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손을 뻗었다. 그녀가 피하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지현 씨 체면을 세워주려고 이러는 건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주제넘게 굴지 말아요.”강지현은 그들의 오만한 태도를 지켜보다가 휴대하고 있던 벨벳 가방에서 도장을 꺼냈다.“여러분, 이게 뭔지 아시죠?”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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