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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윤소정
강지현은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얼굴에 주스 세례를 당하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본 가정부들이 재빨리 달려와서 닦아주었다.

“이윤후!”

이도운까지 버럭 화를 내니 아이는 겁을 먹고 위층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도운이 쫓아가려 하자 옆에 있던 백하린이 얼른 그를 말렸다.

“그만해, 도운아. 윤후 아직 어린애라 너무 무섭게 굴면 안 돼. 내가 가서 볼게.”

이어서 옷을 닦고 있는 강지현을 힐끗 쳐다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이도운은 그제야 강지현에게 주의를 돌렸다.

“괜찮아? 이리 봐봐?”

강지현이 옷을 다 닦은 그때 이 남자가 얼굴을 만지려 손을 내밀었다.

“더러워. 저리 비켜!”

그녀의 입에서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도운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더럽긴. 네가 더럽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항상 걱정만 했지. 윤후가 이렇게 말썽부릴 줄 알았다면 애초에 네게 맡기고 직접 키우게 하는 게 아닌데...”

강지현의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 친엄마가 키웠더라면 나보다 훨씬 잘 키웠을 텐데 아쉽게도 죽어버렸다지? 난 친엄마가 아니라서 애 하나 잘 키우지 못하나 봐.”

이도운은 흠칫 놀라더니 안색이 돌연 굳어졌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윤후는 우리가 입양했어. 윤후한테 엄마는 오직 너뿐이라고.”

말을 마친 남자는 애정 가득한 눈길로 강지현을 쳐다보며 머리까지 살짝 쓰다듬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스킨쉽에 괴로움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방에 돌아온 그녀는 곧장 욕실에 가서 샤워했다.

이도운도 곧바로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백하린을 집에 들이는 것에 대해 상의해야 하니까.

말이 상의지, 답은 이미 정해졌고 그녀에겐 결정권조차 없었다.

그 둘이야말로 찐 부부였고 강지현은 가짜 아내이니까.

“지금은 회사가 상장을 앞둔 중요한 시기야. 윤후도 한창 사람 손 탈 때고 회사는 네가 없으면 돌아가질 않아. 교수님은 이제 육아 전문가셔. 아까 너도 봤잖아. 윤후가 교수님 말씀을 제법 잘 듣는 거...”

“알았어. 그렇게 해.”

강지현은 주절거리는 이 인간의 몰골이 너무 역겨웠다. 들을수록 헛구역질만 난달까?

“역시 넌 사리 분별을 잘하고 널 아끼는 내 마음도 잘 알아주네?”

원하는 답을 얻은 이도운은 짙은 눈동자에 다정함이 철철 흘러넘쳤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으려고 하는데 강지현이 즉시 몸을 돌려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강변 뷰 별장 사진이 떠 있었고 위치를 보니 파이낸셜이었다.

그곳은 상업이 발달하고 해원의 시 중심에 있어 집값이 이도운의 현재 집값보다 훨씬 더 비쌌다.

“도운아, 이 집 어때?”

“당연히 근사하지. 여기 금싸라기 땅이잖아.”

이도운은 그녀의 의도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달에 내 생일이잖아. 이 집이 마음에 드는데 생일 선물로 사주면 안 돼?”

강지현은 최대한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도운은 그녀를 2년이나 속였다. 그동안 그녀는 시간만 낭비한 게 아니라 커리어까지 포기했다.

그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성장할 기회와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안까지 싹 다 포기하고 고작 이 남자의 작은 회사로 들어갔다.

짧디짧은 2년이란 시간 동안, 강지현은 이도운의 회사를 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제 몇 달 후엔 상장까지 하여 이도운의 몸값이 수조 원으로 뛰어오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되레 이용가치를 잃어서 버림받을 신세에 처하게 됐다.

절대 두 남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고, 이대로 두 인간을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이도운은 전에 늘 진심을 담아 맹세했었다. 무릇 강지현이 원하는 거라면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전부 만족시켜줄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물욕이 별로 없던 터라 작정하고 뭘 요구해본 적이 없었다.

이도운은 잠시 망설였다.

“갑자기 웬 집? 지금 이 집도 좋잖아.”

“좋긴 한데 투자 가치가 부족해. 사진 속 이 집은 달라. 앞으로 분명 집값이 많이 오를 거야. 게다가 회사도 곧 상장하는데 나중에 새집에서 연회를 열고 손님을 대접하기도 편할뿐더러 도운이 너도 면이 설 거잖아. 안 그래?”

한마디 한마디가 이도운을 위한 배려였고 이에 남자의 마음에 피어올랐던 의심도 말끔히 해소되었다.

‘역시 지현이는 내 돈만 탐내는 게 아니야. 날 이렇게 지극히 생각해주잖아.’

이도운은 문득 죄책감과 함께 강지현에 대한 연민마저 느꼈다.

“너만 내 옆에 있으면 언제든 면이 서. 다른 건 필요 없어, 지현아.”

이도운이 다시 안으려고 손을 뻗자 강지현은 망설임 없이 몸을 피했다.

“내 생일 선물이라고 했잖아. 그냥 나한테 사준다고 생각하면 안 돼? 뭐 설마... 돈 아까워서 이래?”

마지막 한마디는 농담처럼 툭 내던지는 그녀였다.

이도운은 오늘따라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 앞에만 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어 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물었다.

“그래서 이 집 얼만데?”

“별로 안 비싸. 140억 정도?”

강지현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 순간 이도운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녀에게 인색해지고 싶지 않았으나 가격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하지만 회사가 상장을 앞둔 이 시점에 강지현의 기분을 망칠 순 없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마음에 든다는데 남편인 내가 사줘야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지현이 보는 앞에서 재무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날 밤, 강지현의 개인 계좌로 140억 원이 입금되었다.

이도운은 그녀의 요구대로 특별히 송금 메모까지 남겼다.

[지현이 집 사주기. 생일 축하해.]

통장 잔고가 3천만 원에서 140억 3천만 원으로 늘어났다.

‘결혼’ 후 강지현은 집안의 경제권을 오롯이 이도운에게 맡겼다.

통장에 남아있는 돈은 그녀가 대학교 시절 근로 장학금으로 모은 것이었다.

지난 2년간 그녀는 월급을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강지현이 방에서 나왔을 때 아래층 주방에서 이도운이 앞치마를 두르고 백하린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윤후도 껌딱지처럼 두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강지현이 알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얌전했다.

이들 세 식구의 화목한 풍경은 강지현이 내려온 순간 와장창 무너졌다.

백하린은 이도운의 어깨에 걸쳤던 손을 재빨리 내렸고 이도운도 황급히 강지현 앞으로 다가왔다.

“일어났네? 오늘 아침은 내가 직접 했어, 지현아. 얼른 먹어봐봐.”

강지현은 식탁 위에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을 진작 보았다.

집에 요리하는 가정부가 있는 데다가 이도운이 아침을 먹는 습관이 없어 요리에 별로 관심이 없을 터.

게다가 평소에 먹던 담백함 위주의 한식과는 달리 오늘은 죄다 서양식이었다. 메뉴도 엄청 다양하니 누구를 위해 준비한 것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강지현은 피식 웃으며 백하린에게 물었다.

“다 교수님이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응. 다른 음식이 입에 안 맞을까 봐 도운이가 준비해줬어. 요즘 세월에 얘처럼 자상한 남자 별로 없다, 지현아. 우리 지현이는 정말 복 받았네. 이렇게 좋은 남편을 두고 말이야.”

백하린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강지현과 눈이 마주칠 때 눈가에 은근한 우월감을 뽐냈다.

“그러게요. 얘는 항상 다정한 편이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한테 자상하고 매너가 넘친다니까요.”

“지현이 헛소리 듣지 말아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이도운이 서둘러 부정했다. 강지현의 말 속에 칼을 품었으나 말투가 워낙 홀가분해서 다정한 연인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백하린은 결코 웃지 못했다.

이윤후는 그녀가 기분이 안 좋은 걸 알아채더니 아니 글쎄 강지현이 마지막 남은 계란 후라이를 집으려 할 때 그 위에 간장을 마구 뿌려놓았다.

아이가 너무 힘을 준 나머지 간장이 강지현의 하얀 손등에 튀었다.

“이윤후, 뭐 하는 짓이야?”

이도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백하린은 재빨리 강지현에게 휴지를 건네고 뒤돌아서서 이윤후에게 나직이 말했다.

“윤후야, 배가 불러도 음식을 낭비하면 안 돼. 봐, 실수로 엄마 손까지 더러워졌잖아. 얼른 사과해, 너희 엄마한테.”

이윤후는 강지현을 힐끗 째려보고는 마지못해 사과했다.

“미안해요.”

강지현은 손을 닦으면서 두 모자를 쳐다봤다.

이윤후는 턱을 치켜들고 사과했고 백하린의 말 역시 대충 얼버무리는 수준이었다.

“이제 다 먹었으면 방으로 들어가.”

아이가 사과한 후 강지현이 뭐라 하기도 전에 백하린이 한발 앞섰다.

“잠깐.”

이윤후가 막 돌아가려던 그때, 강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잡아끌더니 다짜고짜 벽으로 밀어붙였다.

“똑바로 서.”

“이거 놔요. 이 나쁜 여자야!”

아이가 격하게 반항했지만, 강지현은 어느덧 녀석을 다루는 데 능숙해져서 양쪽 팔을 비틀어 강제로 벽에 고정했다. 이어서 옆에 놓인 꽃병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와아앙...”

이윤후는 아프고 겁에 질린 나머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지현아, 너 왜 그래? 윤후가 사과도 했잖아. 꼭 이렇게 폭력적으로 훈육해야겠어?”

백하린이 안달이 나서 그녀를 말렸다.

“교수님! 윤후 제 아들이에요. 엄마가 자식 훈육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요? 교수님이야말로 왜 이렇게 애를 감싸고 돌아요? 뭐 윤후 친엄마라도 돼요?”

강지현은 차갑게 대꾸하면서도 훈육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이 이윤후는 엉덩이를 몇 대 더 맞았다.

백하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주먹을 꽉 쥐어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갈 지경이었고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아니 난 그저 애가 너무 어리길래... 게다가 윤후가 그리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

“작은 잘못을 제때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큰 잘못을 저질러요. 전 교수님처럼 육아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때리지 않으면 다루기 힘들어요.”

강지현의 말에 백하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설령 강지현이 강하게 나온다 해도 그녀는 딱히 말릴 명분이 없었다.

이도운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강지현이 아무리 엄하게 굴어도 손을 댄 적은 없으니까.

이윤후가 잘못한 건 맞지만 백하린이 하도 곁눈질하니 그는 마지못해 강지현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말렸다.

“됐어, 그만해. 이 정도로 때렸으면 충분해, 지현아.”

확실히 강지현도 녀석을 몇 대 때리고 나니 속에 쌓였던 분노가 조금은 가셨다.

그녀가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자 이윤후는 재빨리 백하린의 뒤로 숨었다.

아이는 엉엉 우느라 강지현에게 대들지도 못했다.

이에 백하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억누르면서 이윤후를 토닥였다.

“잘 들어, 이윤후! 내가 네 엄마인 한 항상 날 존중해야 해. 계속 어른한테 버릇없이 굴면 오늘처럼 회초리를 들 거야.”

그녀의 강압적인 태도에 이윤후는 감히 더 흐느끼지도 못했다. 다만 강지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띠었다.

이 광경을 본 이도운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말을 마친 후, 강지현은 곧장 주방을 나섰다.

이도운이 망설임 없이 쫓아가려는데 백하린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운아...”

그녀의 눈동자에 속상함이 가득 찼다.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도운이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했고 둘의 감정이 워낙 깊어 불안감을 느낀 적이 없었기에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지만...

강지현이 이렇게까지 모욕할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이도운의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갖은 수를 썼다.

그때 이도운은 아직 학생이라 저항할 힘이 없었고 백하린은 거의 실업자가 될 뻔했다. 나중에 지도 교수 일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지못해 육아 강사로 전직했다.

결국, 달리 방법이 없었던 이도운은 강지현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백하린도 그에게 왜 하필 강지현이냐고 물었었다.

이도운은 강지현이 예쁘장해서 집에 데려가면 가족들이 받아들일 거라고 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녀는 의지할 곳 없는 고아인 데다 금융 학과에서 손꼽히는 천재 소녀라 많은 유명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강지현과 교제하면 자신의 사업에도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백하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도운은 강지현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백하린과 몰래 혼인 신고를 했다.

이렇게 하면 강지현과 함께 있더라도 부부 공동 재산은 백하린과 이도운의 몫이 된다.

이도운은 나중에 가업을 이어받아 발언권을 갖게 되면 그들의 관계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 사이에서 강지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낱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도구가 감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기어오르려 하다니. 백하린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도운은 백하린이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강지현과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었다. 그는 백하린을 힘껏 안아준 뒤 미간을 찌푸리고 강지현을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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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요?”“신경 쓰지 말라고요?”현다영과 하원영이 동시에 얼어붙었다.‘정말 김태하가 한 말이라고?’하원영은 결국 욕설까지 튀어나왔다.“김태하 미친 거 아니에요? 강지현이잖아요! 자기 아내인데!”하원영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주시언이 얼른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서지아와 지현우도 급히 달려왔다.두 사람 역시 은주희와 지순옥에게서 소식을 들었다. 어른들은 이미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주병찬은 조금 전 경찰에 신고하고, 결혼식은 일단 제쳐 두고 강지현부터 찾자고 제안했다.하지만 그 말이 나오자마자 김태하가 사람을 시켜 막았다.서지아가 도착했을 때 김씨 집안 어른들은 마침 김태하를 찾아간 뒤였다.“육 대표님이 정보망이 제일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도움을 부탁하면 안 될까요?”주시언이 문득 육운성을 떠올렸다.그는 강지현에게서 육운성의 지하 정보망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예전에 엄경미와 공회 문제도 육운성이 뒤에서 도와준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번 결혼식 때문에 육운성의 사람들도 돌발 상황에 대비해 미리 해원시에 배치돼 있지 않았던가?“맞아! 육 대표님!”하원영의 눈이 번쩍 빛났다.그런데 그제야 모두 육운성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친지들 가운데 지금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육운성뿐이었다....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결혼식 시작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사람들은 상원궁 입구를 몇 번이나 들락거렸지만, 끝내 강지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마침내 결혼식 생중계가 시작됐다.상원궁에서 가장 큰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안은 하객들로 가득했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를 카메라가 한 번에 훑었다.거대한 원형 스크린에서는 홍보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찬란한 장면마다 감탄이 터져 나왔다.하지만 정작 신부가 걸어야 할 무대에는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드넓은 연회장 안에 수군거림이 조금씩 번져 갔다.“들었어요? 신부가 사라졌대요!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912화

    “대표님, 사모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닐까요? 경찰에 연락할까요?”최동윤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김태하와 강지현이 겪어 온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그 역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김태하가 차갑게 끊었다.“그럴 필요 없어.”김태하는 CCTV 영상을 최동윤에게 돌려주며 말했다.“나한테 미리 아무 연락도 없었으니, 조금 있으면 올지도 모르지.”“그...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최동윤은 경악했다.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평소 사모님을 목숨처럼 여기는 대표님 입에서 나올 말인가?’김태하가 냉랭하게 말했다.“왜 불가능하지? 영상 보면 본인이 직접 차에서 내렸잖아.”최동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이런 상황에 설마 대표님이 사모님과 감정싸움이라도 하는 건가?’최동윤은 다시 영상을 확인했다.확실히 김태하의 말대로 강지현은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곁에는 아무도 없었다.차에서 내린 강지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맛자락을 들고 뛰기 시작했고, 도중에는 면사포까지 벗어 던졌다.하지만 그 모든 행동이 너무 이상했다.“사모님답지 않아요. 분명 무슨 사정이 있는 것 아닐까요...”“할 일이 그렇게 없어?”김태하가 다시 최동윤의 말을 막았다.온몸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섬뜩할 정도였다.“결혼식 시작까지 한 시간 남았어. 전 세계 생중계까지 하는데, 설마 이때 도망이라도 갔다고 생각해?”“도망이라니요... 아니에요.”최동윤은 말문이 막힌 채 고개를 저었다.김태하는 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연회장은 이미 하객들로 가득 찼고, 지금은 일손이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최동윤에게도 맡은 일이 있었고, 김태하 역시 촬영 스튜디오로 가 사전 인터뷰를 준비해야 했다.김태하는 소름 끼칠 만큼 침착했지만, 소식을 들은 집안 어른들과 친지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최동윤은 처음 보고를 김태하에게만 하고 따로 소문내지 않았다.하지만 강지현은 식장으로 오는 길에,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상태였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911화

    그제야 공포에서 조금 진정된 강지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상대 남자는 변조기조차 쓰지 않았다. 분명 그녀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하지만 서운혁과 자신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이거나, 오래전부터 몰래 자신을 조사해 온 자일 터였다.지금 강지현에게 남은 원수는 단 하나, 공회뿐이었다.송준호도 떠나기 전, 해원시에 남아 있는 공회의 잔당을 반드시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었다.그래서 요즘 강지현과 김태하는 최대한 조용히 지내며 매사에 주의를 기울였다.저 미친놈들이 자신들에게 손쓸 기회를 찾지 못하자... 결국 서운혁에게 표적을 돌린 모양이었다.지금 여기서 신고라도 했다가는 서운혁은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그렇다고 범인들을 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결혼식까지 망가질 게 뻔했다...강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묵인한 셈이었다.목적을 이뤘다고 생각한 상대가 목소리를 낮추며 본론을 꺼냈다.“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전화기 너머 목소리를 듣던 강지현은 갑자기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소리쳤다.“길가 약국에 세워 주세요. 살 게 있어요.”“물건을 사신다고요? 강지현 씨, 필요하신 게 있으면 사람을 시키면 돼요. 지금 시간이...”“세우라면 세워요. 지금 당장!”기사는 당황했지만 강지현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어 급히 길가에 차를 세웠다.함께 출발한 차량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고, 하필 강지현의 차가 멈춘 곳은 사거리였다.뒤따르던 차들도 무슨 일인지 몰라 하나둘 멈춰 섰다.그 순간 강지현이 갑자기 차에서 내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채 약국 안으로 전력 질주했다.바로 뒤 차량에서도 경호원들이 내려 그녀를 따라갔다.하지만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강지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강지현은 전화를 든 채 이미 약국 뒷문으로 빠져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상대는 분명 미리 현장을 답사해 모든 걸 준비해 둔 상태였다.그 약국은 사람들의 시야를 피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각지대에 있었다.택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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