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최동윤이 김태하와 강지현을 전용 보안 검색 통로 앞까지 배웅했을 때 강지현이 그를 불렀다.“여기까지만 해요. 최 비서.”강지현이 다른 수행 비서와 직원들을 바라보자 최동윤이 들고 있던 짐을 누군가 바로 받아 갔다.최동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사모님, 무슨 뜻입니까?”“최 비서는 남아. 우리랑 노르국까지 갈 필요 없어.”김태하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는 최동윤 앞으로 다가가 잠시 훑어보고는 손을 들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최동윤은 오늘도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있었다.생각해 보니 김태하는 최동윤이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처음 미래 그룹에 입사해 자신의 곁에서 일하기 시작한 날부터 최동윤은 김태하의 모든 습관과 기준에 맞춰 자신을 철저히 관리했다.“대표님, 제가 뭔가 잘못했어요?”최동윤은 당황했다.그동안 김태하가 어디를 가든 자신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아니. 이번에는 네가 회사에 남아서 맡아 줘야 할 일이 있어.”김태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최동윤은 늘 강압적이고 냉철하게 지시를 내리던 김태하가 이토록 다정하고 차분하게 말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대표님,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 되나요? 저는 대표님과 사모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게다가 회사 일이라면 저보다 잘하는 사람도 많고...”최동윤은 다급해졌다.자기가 없어도 회사가 돌아가는 건 알았다. 하지만 김태하는 이번에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것이었다.직원이라는 관계를 떠나 그는 김태하를 친구처럼 생각했고, 곁에 있고 싶었다.“이 일은 네게 맡겨야 마음이 놓여. 그리고 너도 몇 년 동안 나 때문에 밤낮없이 일했잖아. 진작 좀 한가하게 쉬게 해 줬어야 했어.”김태하의 말이 끝나자 강지현이 바로 덧붙였다.“맞아요. 나랑 태하도 결혼식 끝나면 최 비서한테 휴가 주자고 미리 얘기했어요.”최동윤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대표님, 사모님. 저는 휴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완전히 쉬라는 건 아
주상 그룹의 모든 업무 인계를 마친 강지현은 비로소 안심하고 건물을 나섰다.건물 밖에는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김태하는 벌써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강지현에게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그는 강지현에게만큼은 끝없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도 지루해하지 않았다.현다영은 강지현이 탄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뒤를 돌아보자 길 건너 나무 아래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예전과 똑같았다. 크고 탄탄한 체격은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다.수수한 후드티에 안에는 몸에 붙는 검은 민소매를 받쳐입고 현다영을 지켜보고 있는 이 남자는 송준호였다.현다영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녀는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도로가 있었다. 마침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시간이라 현다영이 건너가기 전에 차량 몇 대가 시야를 가렸다.“준호 오빠.”현다영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목소리는 도로의 소음에 묻혀 버렸다.차들이 지나가고 다시 건너편이 보였을 때, 조금 전 그곳에 있던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현다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실망감이 밀려왔다.‘내가 잘못 본 건가?’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경적이 울렸다.정신이 팔린 사이 현다영은 자신이 차들이 오가는 도로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눈앞으로 승용차 한 대가 그대로 현다영 쪽으로 달려왔다.피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강한 힘이 그녀를 낚아채 자신의 품에 안았다.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먼지와 아주 옅은 담배 향이 섞인, 부드럽지는 않지만 사람을 설레게 하는 냄새였다.현다영의 뺨이 상대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옷 아래로 팽팽한 근육선과 안정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까지 또렷하게 느껴졌다.차가 멀어지고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세상이 한순간 조용해진 것 같았다.현다영은 번쩍 고개를 들고 눈앞에 가까이 나타난 송준호 얼굴을 바라봤다.그는
강지현은 김태하의 품에 안겨 단잠에 빠졌고, 김태하 역시 두 눈을 감은 채 강지현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마치 그렇게 안고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는 듯했다.최동윤은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 있었다. 밤은 깊었지만 그는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다음 날 정오.주상 그룹 본사 최상층 주주회의실에서 회의 하나가 끝났다.회의실 문이 열리고 주주와 임원들이 차례로 나왔다.곧이어 전 직원 메일로 인사 발령 공지가 전송됐다.강지현 대표이사의 무기한 휴가로 인해 주단우 부대표가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고, 주시언은 사업 및 개발 부문을 총괄하는 임시 팀장을 맡았다. 현다영은 대표 비서실장으로 승진하여 주단우의 업무를 보좌하게 되었다.공지가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대표실에도 사람들이 모였다.현다영과 강지현이 이끌던 기존 팀원들이 모두 있었다. 막 복직 절차를 끝낸 주단우도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왔다.다만 주시언은 없었다.그는 오늘 하원영과 함께 주병찬의 수술을 지켜봐야 해서 강지현에게 전화로만 작별 인사를 하며 직접 배웅하러 올 수는 없었다.사실 주시언은 진작에 독립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주상 그룹도, 주병찬의 회사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다.강지현의 거듭된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주상 그룹에 이름만 올려두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강지현이 주단우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을 주단우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강지현이 자신에게 이 정도로 권한을 위임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우를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큰 신뢰까지 바라지는 않았다.대표실은 원래 여자 직원들끼리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는 훈훈한 분위기였지만 주단우가 들어오자 순식간에 깨졌다.주단우도 조금 어색한지 강지현의 마지막 서명이 필요한 서류를 책상에 올려놓고 헛기침을 했다.강지현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었지만 예전처럼 거만하고 사나운 기세가 사라진 주단우를 보고 웃음이 났다.“주 대표님, 칼에 찔린 건 허리라면서 왜 다리까지 불편해졌어요?”“칼 맞은 데
“너...”김태하는 원래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최동윤의 일만큼은 조금 화가 났다.강지현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요. 별일 아니겠죠. 최동윤 씨, 나 오렌지주스 한 잔만 가져다줄래요?”“네, 사모님.”강지현이 자신을 빼내 주는 걸 알아챈 최동윤은 바로 자리를 떴다.최동윤이 사라지자 김태하는 강지현이 꽉 붙잡고 있던 손을 빼내며 툴툴거렸다.“내가 최 비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것 같아? 분명 누군가한테 당했어.”“서지아 씨한테?”강지현이 조용히 물었다.김태하는 차갑게 말했다.“서지아 말고 또 누가 있겠어.”오늘 최동윤 일 때문에 김태하는 서지아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서지아는 아침 일찍 해원시로 돌아갔는데 최동윤이 병가를 냈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걱정하며 상태를 물었다.그때 김태하는 최동윤이 어젯밤 거의 알코올 중독 직전까지 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하지만 서지아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었다. 꼭 뭔가 찔리는 사람처럼 보였다.“최 비서는 낙천적이고 강단 있는 사람이야. 누가 좀 괴롭혔다고 이렇게까지 풀이 죽을 애가 아니라고. 서지아가 더 심한 짓을 한 게 분명해.”김태하의 말을 듣던 강지현은 눈을 살짝 굴리더니 피식 웃었다.김태하가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봤다.“왜 웃어?”강지현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김태하, 서지아가 무슨 더 심한 짓을 했을 것 같아?”“그걸 나한테 왜 물어.”김태하는 이번엔 재빨리 눈치를 챘다.“내가 서지아를 얼마나 안다고.”강지현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생존 본능 너무 강한 거 아니야? 진지하게 묻는 거야. 김 대표, 방금 당신이 최동윤은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여자가 남자한테 어떤 식으로 상처를 줘야 저렇게까지 힘들어질까?”“어떤 식으로...”김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지현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고 눈빛이 반짝거렸다.“설마 최 비서가 서지아를... 그럴 리가 있나?”김태하는
김태하의 말이 맞았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고, 저마다의 한계 때문에 겪는 어려움도 있기 마련이다.오랫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강지현과 서운혁은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문밖에서 경호원이 노크해 시간을 알려 주고 나서야 강지현은 이제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강지현.”서운혁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강지현이 돌아보자 그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몸 잘 챙겨요. 임신했으니 뭐든 조심하고요.”“네.”강지현은 답하며 무심한 듯 그의 이불 끝을 정리해 줬다.“부회장님도요.”서운혁은 여전히 아쉬워 보였다.“괜찮다면 그쪽에 도착해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만 한번 해줄래요?”“네.”강지현의 대답에 서운혁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럼 얼른 가 보세요. 김태하 씨가 기다리게 하지 말고요.”강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서운혁을 바라봤다.입 안에서 맴도는 호칭이 있었지만, 아직은 낯간지럽고 어색해 차마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하지만 올 때와는 달리, 방 안의 분위기는 한결 따뜻하고 편안했다.저녁, 공항.최동윤은 차를 세우고 전용기 터미널로 빠르게 걸어갔다.전용 대기실 안에서 김태하와 강지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늦게 나타난 최동윤을 보자 강지현이 곧바로 그를 바라봤다.“최 비서, 몸은 좀 괜찮아졌어?”대부분 하객은 오늘 오전 중으로 떠났고, 최동윤은 원래 아침 일찍 빌라로 와서 짐 정리를 도와야 했다. 하지만 온종일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점심이 되어서야 김태하에게 전화를 걸어 몸이 좋지 않으니 반나절 휴가를 달라고 했다.최동윤은 거의 휴가를 낸 적이 없었다. 몸이 아파도 쓰러지지만 않으면 쉽게 자리를 비우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래서 김태하는 한동안 크게 걱정했다. 점심에 그는 강지현과 함께 서운혁을 보러 병원에 가지 않고 호텔로 최동윤을 보러 갔을 정도였다.하지만 최동윤은 호텔에 없었다.동행한 직원 말로는
결국 강지현은 매정하게 돌아설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김태하의 말이 맞았다.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면 억지로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오빠인 서운혁이 백하린과 손을 잡고 자신을 해치려 했던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그렇다고 가족이 죽어 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병원에 오기 전까지 강지현은 계속 망설였다.아무 말 없이 떠나 버리면 자신과 서운혁이 서로 얼굴 붉히며 어색해질 일도 없을 테니까.하지만 김태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봤다.강지현이 원하는 건 단절이 아니라, 마음속 응어리를 풀지 못해 마주 볼 용기가 없는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었다.김태하가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잘못도 하고, 저마다 사정도 있어. 누구를 용서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너 자신을 몰아붙이지도 마.”강지현의 어머니가 아이를 버린 건 용서받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도 평생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 채 힘들게 살았고 그것으로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서운혁 역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기적일 수도, 충동적일 수도 있었고 사람과 감정에 눈이 멀 수도 있었다.강지현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용서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 때문에 스스로를 가둬두어선 안 된다.김태하는 그녀가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하길 바랐다.강지현의 말을 들은 서운혁은 마음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그럼에도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거나 용서해 달라고도 하지 않을게요. 다만 이것만 알아줬으면 해요. 앞으로 내가 필요할 때 나는 항상 곁에 있을 거고, 보고 싶지 않다면 절대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결정을 내리든 무조건 따를 거예요.”강지현은 창백한 서운혁의 얼굴을 바라보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나랑 김태하는 내일 노르국으로 가요. 그 사람 병을 제대로 치료해야 해서요. 그러니까 당신도 잘 쉬고, 빨리 나으세요.”서운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