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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박제된 공주의 반격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8 07:11:47

제13화. 박제된 공주의 반격

성진 그룹 회장 자택에 있는 강 회장 서재의 불빛은 새벽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강 회장은 조 실장이 가져온 치앙마이의 사진을 아주 천천히, 한 장씩 넘겼다.

그의 표정은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사진과 서류를 쥔 손끝에는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한장의 사진을 들어올렸다.

이하늬와 판박이로 닮은 이가 망원렌즈로 찍혀 있었다.

"서연이가... 서연가 살아 있었군."

강 회장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분노보다는 허망함,

그리고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핏줄에 대한 지독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어렸을때부터 해달라는 것은 무조건 해주었다.

해를 따달라면 해를 따오고, 달을 따달라면 달을 따오고...

그랬던 것이 서연이를 망친 것 같아, 독이 된 것 같아 심한 자괴감이 드는 강 회장이었다.

차곡차곡 그룹의 일을 맡겼다면, 이렇게 무책임한 아이가 안되었을 것을...

'내가...너를...이리 만들었구나...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다음날 성진 그룹 회장실에 출근한 강 회장이 조 실장을 불렀다.

강 회장은 한동안 창밖을 초점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조 실장이 말했다.

조 실장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직감했다.

어제 진짜 강서연의 존재를 보고했기에 그와 관련돼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회장님, 당장 경호팀을 보내 실종 신고된 상무님을 모셔올까요?"

"흠..."

조 실장의 물음에 강 회장은 창밖의 무표정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단순히 사랑하는 딸을 찾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성진 그룹이라는 제국의 마지막 성벽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설계자였다.

피 보다는 그룹의 생명을 더 중히 여기는 이성론자였다.

지금 성진 그룹은 창립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야심차게 그룹의 역량을 총동원한 투자가 몇년째 빛을 못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룹의 자금 유동성이 급격히 악화됐기 때문이다.

지금 한주 그룹과의 빅딜이 성사되질 않으면, 성진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위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진짜 강서연이든, 가짜 강서연이든...한주 그룹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한주 그룹과의 빅딜을 성사시켜야만 했다.

그래야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성진 그룹에 자금이 돌 수 있었다.

강 회장은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지금 진짜 서연이가 돌아오면 한주 그룹과의 빅딜 합병은 파기된다.

시장은 성진의 '거짓말'에 등을 돌릴 테지. 이하늬가 쌓아놓은 이 가짜 평화가 성진에게는 지금 더 절실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금은...진짜 강서연이는...없는게 좋아. 성진을 위해서..."

강 회장은 사진을 서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다. 강 회장으로서는 어쩔수가 없었다.

그것도 냉정하게 정리해야 한다.

"이봐. 조 실장. 치앙마이에 사람을 보내되, 조용히 지켜만 봐라.

​서연이가 제 발로 돌아오겠다고 할 때까지,

혹은... 이하늬가 더 이상 쓸모없어질 때까지.

그때까진 이하늬가 진짜 강서연이어야만 한다.

만약 이하늬가 이 사실을 눈치챈다면, 그땐 조 실장. 네가 알아서 처리해."

"네...알겠습니다."

그 시각, 하늬는 서재 옆 비밀 복도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온 강 회장의 서늘한 목소리. '가짜 평화', '쓸모없어질 때까지'.

그 단어들이 하늬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자신이 친딸을 대신할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건 애초에 사치였다.

그녀는 그저 진짜가 돌아올 때까지 불을 밝혀두는 임시 촛불에 불과했다.

항상 켜두는 전등이 아닌 것이다.

하늬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텅 빈 방, 거울 속에 비친 화려한 상속녀의 모습이 오늘따라 기괴했다.

승준은 오늘 지방 출장 중이라 이 거대한 저택에 그녀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늬는 홀로 침대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진짜 강서연이 살아 있다.

그리고 강 회장은 자신을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보고 있다.

'도망쳐선 안 돼. 여기서 나가면 엄마의 치료도, 내 안전도 보장받지 못해.'

하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였다.

그녀는 천상 배우였다.

상대방의 패를 읽고, 그가 원하는 완벽한 인물이 되어 판을 주도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본업이었다.

하늬는 서랍에서 서연의 과거 일기장과 조 실장이 준 인물 관계도를 다시 꺼냈다.

회장이 '가짜 평화'를 원한다면,

그녀는 회장이 결코 자신을 버릴 수 없을 만큼 '성진 그룹에 없어서는 안 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하늬는 평소보다 더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으로 강 회장의 아침 식사 자리에 나타났다.

그녀는 평소의 위태로움 대신, 강 회장조차 긴장하게 만들 만큼 서늘하고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이번 한주 그룹과의 합병 안에서 수정하고 싶은 조항이 생겼습니다.

성진의 지분율을 5% 더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이죠. 제가 직접 승준 씨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네가 말이냐? 어떻게?"

"저에게 맡겨주시면, 성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호? 그래? 그럼 한번 해봐. 너의 능력을 믿어보마."

"네. 알겠습니다."

강 회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호기롭게 강 회장에게 말은 했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자니 자신의 지금 자리가 위태로웠다.

엄마의 수술비를 위해서라도 더 이 자리에 있어야 만 했다.

하늬는 이제 단순히 시키는 일을 하는 대역이 아니었다.

그녀는 회장의 욕망을 정확히 겨냥하며, 자신의 생존권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있었다.

진짜 강서연이 돌아오더라도,

성진의 이익을 위해 '이하늬'라는 카드를 버릴 수 없게 만드는 처절하고도 영리한 반격의 시작이었다.

살아남기위한 박제된 공주가 아니라, 무능력한 강서연이 아니라, 비즈니스 능력이 탁월한 강서연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이 성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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