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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7 00:00:21

제12화.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성진 그룹의 승리로 끝난 MOU 기술 협약식 이후, 승준은 차가운 침묵으로 하늬를 대했다.

하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예우를 갖추기 위해 찾은 호텔 레스토랑.

두 사람 사이에는 얼음장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마주 앉았지만, 서로의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이다.

승준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고자 말을 했다.

"성공 축하해, 서연아. 네가 그렇게까지 지독한 승부사인 줄은 몰랐거든."

"...네. 감사해요. 그리고...미안해요."

"미안하다니...무슨...도도하고 차가운 강. 서. 연. 이 아니었던가?"

"미안해요..."

"난 지난번 빚을 갚은 걸로 알게. 퉁치자고 한건 서연일텐데?"

"네..."

일부러 이름을 한자 한자 또박 또박 부르는 승준이었다.​

승준의 뼈 있는 한마디에 하늬가 와인 잔을 입술로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어? 하늬야! 이하늬 맞지?"

"...누구?"

"하늬야. 나야 나. 민석. 며칠 못봤다고 내 얼굴 까먹은 건 아니지?"

"...네....?"

레스토랑 입구 쪽에서 누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치며 다가왔다.

민석. 왜 하필 여기에서 만난단 말인가?

대학로 시절, 하늬와 단칸방에서 대본을 외우며 동고동락했던 연극배우 동료, 민석이었다.

그는 지금 이 화려한 호텔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 유니폼 차림이었다.

"하늬야, 너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야, 너 옷차림이 이게 뭐야? 무슨 촬영 중이야?"

하늬의 심장이 순간 바닥으로 덜컥거리며 추락했다.

승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민석과 하늬를 번갈아 훑었다.

조 실장이 경고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그때 하늬를 보며 승준이 물었다.

"이하늬? 그게 누구지? 저 남자가 지금 당신을 부르는 것 같은데."

승준이 낮게 하늬를 보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른척 해야 할까?'

하늬의 머릿속은 순간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 순간은 이하늬가 아닌 도도한 강서연이어야만 했다.

하늬는 떨리는 손을 식탁 밑으로 감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단 1초 만에 영혼 없는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죄송하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전 이하늬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뭐? 야, 하늬야! 나 민석이야, 김민석! 우리 저번 달까지 같이 '햄릿' 연습했잖아.

너 왼쪽 귀 뒤에 있는 그 작은 점까지 내가 다 아는데...!"

"...뭐라구요?"

그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준이 일어서며 민석을 제지했다.

"이봐요. 사람을 헷갈려도 그렇지...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아니...그게???"

민석이 당황해 다가오려 하자, 하늬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민석의 발치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쨍그랑, 파열음과 함께 붉은 와인이 민석의 신발을 적셨다.

레스토랑 안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불쾌하군요. 호텔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런 몰상식한 직원이 손님에게 아는 척을 하죠?

당장 매니저 부르세요."

하늬의 목소리는 오만함 그 자체였다.

민석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하늬를 보았다.

자신이 알던 다정하고 따뜻한 하늬가 아니었다.

"하늬야... 너 정말 왜 그래? 너 엄마 병원비 때문에 힘들어서 그래?"

"뭐하시는 거에요? 난 당신을 몰라요."

"하늬야. 나야 나"

"이봐요. 매니저님. 여기 매니저님 안계세요?"

'엄마'라는 단어에 하늬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게 끝이었다.

하늬는 우아하게 일어나 민석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찰나의 정적. 손바닥이 닿기 직전, 승준이 하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만해, 서연아. 너무 과하잖아."

하늬는 승준의 손을 뿌리치며 악을 썼다.

"과해? 저런 천박한 남자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모욕하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난 강서연이야! 성진 그룹의 상무라고! 어디서 감히 대학로 연극쟁이 따위가 나랑 엮이려 들어!"

​"강서연?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나?"

의아해하는 민석을 뒤로하고, 총 매니저가 와서 상황을 수습했다.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손님을 아는 사람과 혼동했나 봅니다."

"이봐요.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에요? 무례하게."

"죄송합니다. 손님..."

연신 사과하는 매니저를 뒤로하고, 하늬는 이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 싶었다.

너무나 괴로운 시간인 것이다.

하늬는 미친 듯이 핸드백을 챙겨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뒤편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벽을 잡고 구토하듯 가쁜 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천박한 연극쟁이'라 부르며 짓밟아야 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잠시 후, 따라 나온 승준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서연아, 진정해. 정말... 그냥 닮은 사람이라서 저 남자가 오해한 거야?"

​"오해했다니요?"

하늬는 피눈물을 삼키며 승준을 쏘아보았다.

"당연하죠! 승준 씨도 저 남자가 미쳤다고 생각 안 해요?

내가 왜 저런 하층민이랑 아는 사이여야 하죠? 기분 잡쳤어요. 먼저 갈게요."

"하층민? 이봐 강서연. 말이 너무 심하잖아?"

일부러 모진 말을 내뱉는 하늬였다.

하늬는 승준을 밀치고 차에 올라탔다.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호텔을 보며 그녀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무대 위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가장 잔인한 연극이었다.

하지만 승준의 눈에는 하늬의 그 '지나친 결벽증'과 '히스테리'가 오히려 그녀가 진짜 강서연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짜가 되기 위해 진짜의 심장을 찔러야 했던, 하늬의 가장 슬픈 임기응변이었다.

'이번에는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갈수록 하늬는 이 연극을 지속하기 어려워 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조명이 꺼지면...난 강서연이 아니라, 이하늬야.'

점점 그 슬픈 사실이 하늬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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