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구연정이 자꾸만 아빠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완전히 신경을 끌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흔쾌히 구승훈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건 어려웠다.“갑자기 그건 왜 물어?”천아름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그게... 내가 친구가 있는데...”강하리가 천아름을 힐끔 쳐다보자 천아름이 켕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왜? 내가 아니라 내 친구라니까.”강하리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언니 친구가 왜?”천아름이 혀를 끌끌 찼다.“친구라는 거 안 믿는 거지? 나라고 생각하는 거지?”강하리가 말했다.“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언니 왜 그래?”“내 친구라니까.”“그래. 언니 친구. 언니 친구가 왜? 감정 문제야?”천아름이 콧방귀를 뀌더니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됐어.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올게.”강하리가 말했다.“같이 가. 나도 화장실 좀 다녀오게. 이따 우리 둘이 방 따로 잡고 연지도 부르자.”“그래. 오늘 민우가 여씨 가문에 큰 엿을 먹였다고 들었는데 민우도 불러서 어떻게 엿을 먹였는지 들어보자. 기분이라도 좋아지게.”천아름이 웃으며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고 룸에서 나갔다. 강하리가 뭔가 더 말하려다 문 앞에 선 조시욱을 발견했다. 조시욱은 강하리가 룸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어? 하리야? 네가 왜 여기 있어?”강하리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아, 회사에서 축하 파티한다고 왔어요. 그러는 선배는 왜 여기... 있어요?”조시욱이 옆방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이랑 술 한잔하러 왔어.”조시욱이 천아름을 바라봤다.“천아름 씨도 우리 형 알 텐데요. 내 기억엔 친구인 걸로 알고 있는데.”친구라는 말에 천아름이 웃음을 터트렸다.“기억이 잘...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친구가 좀 많았어야 말이죠.”조시욱의 표정이 어딘가 난처해 보였다.“그래요? 나는 두 사람이 꽤 친한 줄 알았는데.”천아름이 조시욱을 노려봤다.
구승재와 구승훈이 탄 차가 요양원을 떠나자 한 남자가 복도로 들어갔고 임희주의 병실로 가는 대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데스크 간호사와 수다를 떨었다.임명우는 외모가 준수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었고 원하는 정보를 티 나지 않게 물었다.“저 병실에 있는 환자는 묻지 않는 게 좋아요.”간호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임명우는 더 궁금해졌다.“왜요? 설마 큰 인물이라도 되는 거예요?”간호사가 입을 삐죽거렸다.“큰 인물인지는 모르겠는데 매우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요. 저 보디가드들 봤죠? 24시간 저렇게 지키고 서 있다니까요.”임명우가 눈살을 찌푸리고 복도 끝을 내다봤다. 병실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만 열댓 명인 걸 보고 임명우는 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두려운 건가?’임명우가 간호사와 카톡을 추가하고는 요양원에서 나와 핸드폰을 꺼내 텔레그램으로 어딘가 문자를 보냈다. [임희주가 깨어났어. 영원히 입 못 열게 해야 할 거야.]그러자 상대가 바로 답장했다.[네.]그때, 다른 한 통의 익명의 메시지가 조시욱의 핸드폰에 도착했다.[손잡을래요? 내가 강하리 씨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줄게요. 조시욱 씨는 구승훈 좀 붙잡아놓고 있어요.]조시욱은 핸드폰에 뜬 문자를 보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와 번호를 조사해 보려는데 이내 다른 문자가 한 통 더 도착했다.[내 번호 알아볼 생각하지 마요. 나는 구승훈과 이익의 충돌이 있을 뿐이지 당신과는 없어요. 생각이 있으면 1을 보내고 생각 없으면 그냥 무시해요.]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건 녹음파일이었다. 내용은 간호사와 임희주가 나눈 대화였는데 그 안에는 구승훈과 임희주의 관계에 대한 추측도 들어 있었다. 여자를 숨겨뒀느니,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사랑이라느니, 임희주가 깨어나자마자 구승훈이 달려왔다느니 이러한 내용도 들렸다. [이건 선금으로 하죠. 강하리 앞에서 점수를 따지는 못하더라도 구승훈의 점수를 깎아내릴 수 있지 않겠어요?]익명의 메시지가
구승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바로 말해둘게.”구승재가 자리를 뜨려는데 구승훈이 이렇게 말했다.“그리고 오늘 임희주의 병실에 잠입 시도가 있었으면 하는데...”구승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구승재에게 당부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노민준 사무실.구승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노민준이 통화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통화를 끝낸 노민준이 그제야 이렇게 물었다.“어떻게 됐어?”구승훈이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지금은 말한다 해도 명줄을 지킬만한 단서는 남겨둘 거야. 하지만 나는 임희주가 아는 모든 걸 알아내고 싶어.”노민준이 캐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앞으로 이 일은 관여하지 않을게. 집에서 자꾸만 들어오라고 보채고 있어. 민우가 오늘 여씨 가문으로 가서 파혼하겠다고 했나 봐. 노씨 가문 지금 말도 아니야. 가서 정리해야지.”구승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수고가 많네.”노민준이 혀를 끌끌 찼다.“너랑 나 사이에 그런 말이 왜 필요하니?”“근데...”노민준이 멈칫했다.“너도 조심해. 저쪽도 인내심이 바닥난 것 같던데 곧 여초연을 구해내려고 움직일 거야. 그러면 요양원에 이런저런 이유로 찾아오는 환자들이 많아질 텐데 환자 중 대부분이 정황을 알아보려고 온 사람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구승훈이 대답했다.“그 소식 내가 내보냈어. 만반의 준비를 해야지. 그래도 안 되면 여초연을 풀어주면 그만이고.”노민준이 멈칫했다.“풀어준다고? 누구에게 풀어준다는 거야?”노민준이 이렇게 말하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설마 조시욱?”구승훈이 대답 대신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뜻은 분명했다. 노민준은 그런 구승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꿍꿍이가 많은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과 손잡는 건 위험하지 않겠어?”“꿍꿍이가 많아도 너무 많지.”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조시욱이 하리에 대한 마음은 주해찬이 하리에 대한 마음의 50퍼센트도 안 돼. 나머지는 다 꿍꿍이야.”구승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날 밤 조시욱은 일부
임희주는 절망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지만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임희주를 내려다보며 시계를 확인했다.“아참, 깜빡했네요. 오늘 10시 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리가 문을 잠근다고 해서 9시까지밖에 못 기다려요.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예요.”이 말에 임희주가 눈을 부릅떴다.‘강하리? 문을 잠근다는 말이 무슨 말이지?’임희주는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정도로 틀어졌는데 다시 화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승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희주가 다시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턱이 빠져서 그런지 발음이 새고 침이 마구 아래로 흘렀지만 구승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놓인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침대를 세 번 두드려요. 내가 들으려는 말이 아니면 다음엔 턱만으로 부족할 거예요.”침대를 두드리려던 임희주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구승준을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분노와 원망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하지만 구승훈은 마치 그 눈빛을 보지 못한 듯 멀리 앉아서는 때때로 시계만 확인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임희주는 협박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슬픔을 감췄다. 발버둥 치는 것도 포기한 걸 봐서는 이제 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때 구승훈이 옆에서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임희주에게로 다가가 오만한 표정으로 몰라보게 달라진 임희주를 내려다봤다.“아참, 오는 길에 아는 사람을 한 명 만났지 뭐예요. 아마 임 선생도 아는 사람일 거예요.”임희주는 마치 잠에 든 것처럼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꼭 쥔 주먹이 그녀의 불안함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구승훈이 웃으며 그 이름을 내뱉었다.“임명우.”세글자가 나오자 임희주의 몸이 그대로 굳었고 아무리 주먹을 움켜쥐어도 몸이 파르르 떨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구승훈은 그런 임희주의 반응을 다 봤으면서 딱히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임희주의 침대맡에 서서 그녀가 항복하기를 기다렸다.그렇
“형, 저 임명우 정말 임희주를 죽이려 했던 거 맞아?”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희주의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기골이 장대한 남자 몇 명이 임희주를 꾹 누르고 있었고 금방 잠에서 깨어난 임희주가 미친 것처럼 발버둥 치는 바람에 남자들도 겨우 잡고 있었다. 구승훈이 안으로 들어가자 임희주가 잠깐 멈칫하는 듯 싶더니 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옆에선 노민준이 구승훈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약물이 예상한 효과를 내지 못했어. 깨어나긴 했지만 너도 봤듯이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야. 이성을 조금 유지할 수는 있지만 미친 정도가 예전의 너랑 비겨도 전혀 손색이 없어.”구승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놓인 트레이에서 장갑을 꺼내 착용하고는 옆에 선 노민준에게 당부했다.“묶으면 돼. 진정제만 투여해 주고 일단 나가 있어.”노민준이 임희주를 침대에 단단히 묶었다. 발버둥 치고 싶지만 행동이 제한되자 임희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구 대표님, 제발 나 좀 놓아주세요. 네? 제발 부탁 좀 드릴게요.”구승훈이 차갑게 웃더니 임희주의 턱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장갑이 턱에 닿자 임희주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고 뒷걸음질 치려는데 밧줄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구승훈이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걸 보고 임희주가 드물게 이성을 조금 찾았다.“나, 나 다 알아요. 구 대표님이 뭘 알아내려는지 아는데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에요. 이제 그만 나 좀 놔줘요.”임희주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이 남자가 얼마나 매정한지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아챘다. 순간 임희주는 슬픔이 물밀듯 몰려왔다.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 동정이라도 좋으니 일말의 감정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구승훈이 콧방귀를 뀌며 손에 힘을 주자 당장이라도 턱뼈가 부러질 것처럼 너무 아팠다.“그래요? 죽는 게 그렇게 두려우면 더 말해야
요양원.구승훈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자의 비명을 들었다. 그 소리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 같아 구승훈이 우뚝 멈춰 서는데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는 여전히 온몸으로 꺼림칙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임명우가 걸음을 멈추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오랜만이네요. 구 대표님.”구승훈이 임명우를 아래위로 훑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확실히 오랜만이네요. 임 대표님은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임명우가 느긋한 표정으로 구승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친구 좀 만나러요. 구 대표님은요?”대수롭지 않은 말투가 마치 오래된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임명우를 얕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임명우는 독사와도 같아 언제 어디서 혀를 날름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버릴지 몰랐다.“나도 친구 만나러 왔어요.”임명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그래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구 대표님은 누구 만나러 왔는데요? 어쩌면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그 정도로 기막힌 우연은 아니에요.”구승훈이 가식적으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임 대표님이 만날 수 없는 사람일 거예요.”임명우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복도 끝에 보디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병실을 바라봤다. 처절한 곡소리는 바로 그 병실에서 전해지고 있었다.“구 대표님, 저기에 여자라도 숨겼나 봐요? 강 대표님은 알고 있어요?”임명우도 딱히 짜증 내지 않고 말로 구승훈을 자극했다.“내가 한번 맞춰볼까요? 안에 있는 사람 설마 임희주예요?”“쯧쯧. 구 대표님 여자에게 인기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네요. 오전에는 강 대표님을 위해 몸을 던지고 저녁에는 요양원에 숨겨둔 애인 만나러 오고.”“강 대표님이 알면...”구승훈이 걸음을 옮겨 임명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있었고 아래로 축 늘어트린 눈꺼풀이 눈동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