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팔짱을 끼고 옆 테이블에 기대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진짜 오랜만이긴 하네요. 잘 지내셨어요?”“덕분에 아주 잘 지내.”여초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조시욱에게 눈길을 돌렸다.“조시욱 씨를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조시욱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그는 여초연의 침착한 모습에 놀란 게 아니라 서로 웃고는 있지만 살벌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모자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가 애써 차분하게 답했다.“놀랄 필요가 없어요. 이제부터 저랑 매일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의 말에 여초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빠르게 고개를 돌려 구승훈에게 물었다.“저 사람한테 날 넘긴 거야?”구승훈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왜요? 놀랐어요?”순간 여초연이 갑자기 흉악한 얼굴로 웃자, 듣기 거북한 목소리가 밀폐된 공간에서 울려 펴지면서 사람의 얼굴을 자기도 모르게 찡그리게 했다.“난 또 얼마나 큰 능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그런데 고작 이 정도야? 구승훈, 이 쓸모없는 놈! 진작에 널 내 손으로 죽여야 했는데!”그러나 구승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하게 답했다.“죽인 다음에는요? 저 대신에 그 남자애를 몰래 구씨 가문에 데려오려고요? 제가 쓸모없는 건 맞는데 애석하게도 명줄이 엄청 길다고 하더라고요?”순간 여초연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애써 못 알아들은 척 답했다.“난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그러자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었다.“여초연 씨, 전 항상 당신한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조금이라도 엄마의 사랑을 느껴보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그게 다 헛수고였죠. 당신은 애초에 모성애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저한테 주기 싫었던 거였어요.”“아니라고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어르신한테서 다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제 형도 꼭 찾아내서 제대로 형 대접 해줄게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그러면서 조시욱에게 한마디만 남겼다.“이제 그쪽에게
요양병원은 이미 복도 끝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이 사람들은 전부 조시욱 쪽의 사람들이었고 여초연을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조시욱은 병원에 왔던 참에 임희주 얼굴도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녀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과 협상해 보려 했다.그러나 오늘따라 그 사람들은 고집을 부리며 한 발짝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짝수로 밀어붙일까도 고민해 봤는데 여기는 구승훈의 구역이라 질 게 뻔했다.아무리 그가 노골적으로 자기 부하들을 많이 배치한 것 같지는 않아 보여도 여초연을 여기에 붙잡아 뒀으면 분명 아무런 준비도 안 했을 리가 없었다.하여 조시욱네 패거리들은 지금 먼저 공격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애매하게 서 있기만 했다.복도에 들어선 구승훈은 이 장면을 목격하고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였는데 그들은 조시욱의 팔을 이끌고 한쪽으로 비켜줬다.사실 그들도 많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서 있기만 하니 왠지 모르게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구승훈이 덤덤하게 그들을 쳐다보니 수치심이 마구 생기기도 했다.조시욱은 구승훈의 차분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자기 사람들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사람이 바람처럼 사라졌다.그러다가 구승훈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이따 임 선생 좀 만날 수 있을까요?”그러나 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조식욱도 같이 따라 타게 되었다.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층수를 누르는 버튼 쪽에 있는 자외선 카메라에 자기 얼굴을 스캔했다.인식이 되었다고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곧이어 버튼이 안 보이던 곳에 지문인식하는 화면이 나타났다.구승훈이 손가락을 대자 그제야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조시욱은 뒤에서 그저 복잡한 얼굴로 말없이 지켜봤다.사실 여초연이 붙잡힌 뒤로 그는 줄곧 구승훈의 동향을 주시
하지만 누군가 때문에 그녀는 평생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그 생각에 강하리는 눈을 꼭 감았다. 만약 그때 심미현을 잘 보호해서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이처럼 후회만 남았을까?강하리는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와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다.하여 핸드폰으로 연락처를 뒤지다가 문득 구승훈의 이름에서 멈추게 되었다.구승훈과 조시욱이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구승훈은 분명 그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구승훈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오늘 집에 와?]역시나 구승훈은 문자를 보자마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지금까지 자신이 강하리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는데 아마 이 메시지는 그 오랜 시간을 거쳐 처음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자기 사장님께 한창 상황을 보고하던 준봉은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말문이 막혀버렸다.곧 라이벌 만나러 가는 사람이 저렇게 활짝 웃는 게 어디 말이 되나 싶었다.구승훈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답장했다.[기어서라도 갈 테니까 문만 열어놔.]강하리는 그의 답장이 어이없는 한편 이렇게라도 그와 문자를 주고받으니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리고 곧바로 도우미에게 혹시 두꺼운 이불이 있으면 소파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구승훈은 그 뒤로 아무 답장이 없는 핸드폰만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가 한껏 실망한 얼굴로 다시 내려놓았다.그러다가 문득 준봉의 착잡한 얼굴을 보더니 아까보다 더욱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난감하네. 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언제 오냐고 닦달이야. 여자들은 왜 이렇게 집착이 심할까?”순간 준봉은 어이없는 나머지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사장님, 지금은 그저 너무 신나 보이기만 하지, 하나도 난감한 것 같지 않은데요?”그러자 구승훈이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답했다.“내 아내가 나더러 언제 오는지 물어보는데 좀 신나면 안 돼?”“아유, 당연히 되죠, 안 될 것도 없죠. 그런데 이런 태도로 이따 조시욱 씨를 만날 건
밥을 다 먹고 난 뒤 구승훈은 집에서 나왔다.노윤정도 오늘 두 사람을 따라다니느라 힘들었는지 일찍 곯아떨어졌다.창가 쪽에 앉아 있던 강하리는 진태형에게 전화할지 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는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순간 곰탕이 아닌 걸 발견한 강하리가 어리둥절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오늘에는 곰탕이 아니네요?”그러자 도우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구승훈 씨가 혹시나 아가씨께서 먹기 싫다고 하면 억지로 먹이지 말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곰탕은 기름기가 많아서 소화가 잘 안될 것 같아 우유로 바꿨습니다.”그녀는 덤덤하게 컵을 건네받았지만 얼굴에는 행복감이 가득 번졌다.“여전히 아가씨를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 지내고 계시는지, 식사는 제때 하시는지 너무 걱정되네요. 오늘 보니까 예전보다 많이 야윈 것 같던데.”그러자 강하리가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렇게 걱정되시면 그 사람 전담 도우미가 되는 건 어떠세요?”도우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강하리는 황급히 떠나가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손에 든 컵을 몇 번 쓰다듬더니 이내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그리고 한참 동안 고민 끝에 그녀는 다시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진태형은 한창 바쁜지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하리야, 무슨 일로 이 시간에 다 전화했어?”강하리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고민 끝에 물었다.“아빠, 언제 돌아오세요?”진태형이 한껏 다정하게 답했다.“오늘 밤 비행기 타면 아마 내일 아침 일찍 도착할 거야. 내리자마자 너랑 연정이 보러 갈게.”그러자 강하리는 핸드폰을 꽉 쥐고 어렵게 입을 뗐다.“아빠, 혹시 진시연 씨한테 올해 같이 설을 보내자고 하셨어요?”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진태형 때문에 강하리는 더 조바심이 났다.“아빠,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끊임없이 쏟아지는 물음에 진태형은 피식 웃더니 수
구승훈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고 노민우는 이미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씨X!”‘홀아비?’‘내가 홀아비라고?’마치 자기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 구승훈 때문에 노민우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구승훈, 넌 네가 대단한 거 같지? 아내가 없는 건 너나 나난 마찬가지잖아!”이때, 노민우에게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난 곧 생길 거야. 그러니까 너랑 난 달라.]노민우는 이를 꽉 깨물고 큰 소리로 말했다.“아직 재혼도 안 했으면 넌 그냥 전남편일 뿐이야!”[그 전남편은 이미 집까지 드나드는데?]순간 노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갑자기 화를 내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져 왔다.그는 몇 번 더 문에 대고 욕설을 내뱉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러다가 밖으로 나와 조용한 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니 문득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어제 손연지의 출입국 기록에 그녀의 이름이 없다는 걸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되어 잠도 오지 않았는데 오늘 강하리한테서 저런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되니 그 충격은 배로 느껴졌다.그리고 이내 코끝이 찡해졌다.그는 나름 자신이 노력하고 있는데 기다려주지 않는 그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강하리는 위층에서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떠나가는 노민우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다가 영상 통화 중에도 침대에 기대어 무언가를 먹고 있는 손연지에게 되물었다.“정말 안 만나줄 거야?”그러자 손연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만나서 뭐 해? 하리야, 이게 열등감이 아니라 지금 내 조건을 고려해 보면 민우 씨 엄마가 아니라 나도 나 같은 여자를 만난다고 하면 너무 싫겠다. 아무리 민우 씨가 인성은 별로라고 해도 그 대신 집안이 받쳐주잖아. 난 그것도 없고 심지어는 애까지 못 낳는대.”“그래서 그냥 여기서 끝내려는 거야. 지금은 민우 씨가 많이 섭섭해하겠지
아파트 입구.노민우는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채 초췌한 얼굴로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입고 있던 옷도 이미 쭈글쭈글 구겨져 있었고 평소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도 엉망진창이 되어있어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노민우는 여기서 밤새 기다린 듯 구승훈과 강하리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구승훈이 먼저 그를 부르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서 그런지 일어날 때도 겨우 몸을 일으켰다.구승훈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그래도 한 손으로 그를 부축해 주며 그에게 물었다.“왜 여기에 있어? 연성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그러자 노민우가 갑자기 강하리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되물었다.“연지는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민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들어가서 말해줄게요.”순간 노민우가 휘청거리더니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아직 어디도 안 간 거 맞죠? 제가 몇 번이고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는데 연지의 이름은 없었어요. 아직 가지 않았죠?”이미 목도 많이 쉬어 있던 탓에 거의 소리를 내질렀다고 봐야 했다.그런 노민우의 모습에 구승훈이 어두운 얼굴로 다그쳤다.“무슨 말버릇이야?”그제야 자기 태도를 인식한 노민우가 다급하게 사과했다.“하리 씨, 미안해요. 전 그냥 연지 소식이 너무 궁금해서... 혹시 저한테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을까요?”그러자 강하리가 한숨을 내쉰 뒤 덤덤하게 답했다.“아마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그녀의 말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진 노민우는 막 뭐라고 되물으려다가 옆에 차가운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 구승훈 때문에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이미 많이 반성하고 있는데 저더러 여기서 뭘 더 어떡하라는 걸까요? 어디 혼자만 괴롭나요? 저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요!”“연지 때문에 우리 집사람들과 그렇게 싸웠는데 이대로 가버리면 저는 어떻게 해요? 제 감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있잖아요.”“저는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짐이라고 했다면서요? 그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