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송유라가 올린 사진 때문에 인터넷은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사실 오래전부터 찍혀 있던 사진이었고 막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 찍힌 사진이었다. 송유라는 단지 적당한 시기에 그걸 인터넷에 뿌렸을 뿐이다. 그녀는 강하리가 구승훈을 찾아가 따지고 성질을 부리기를 바랐다. 구승훈 같은 성격이라면 여자가 끊임없이 따지고 성질부리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번 말다툼이 있다 보면 그는 분명 싫증을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승훈 오빠는 널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넌 네 신세가 불쌍하지도 않니?”가슴이 답답해진 강하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그녀는 송유라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 사진이 언제 찍혔던지 구승훈의 묵인이 없었다면 송유라가 그런 상황에서 트위터에 사진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일에 대해 신경 썼다면 아마 진작에 그 게시물을 삭제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게시물은 아직도 인터넷에 버젓이 걸려 있다. 두 사람이 화해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듯 말이다. 강하리는 깊을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송유라, 나랑 구 대표가 어떻게 되든 그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이야. 그 사람이 날 신경 쓰든 안 쓰든 그건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두 사람 사이를 간섭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웃으며 말하는 강하리를 보고 송유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송유라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전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그것도 구승훈이 스스로 자신은 솔로라고 밝힌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그냥 네가 불쌍해 보여서. 오빠 곁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분도 없이. 역시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니까. 강하리, 오빠한테 넌 그냥 섹스 파트너일 뿐이야.”그 말을 들은 강하리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진
다행히 저녁 식사는 이내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송유라가 갑자기 놀러 가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구승훈은 아무 말도 없이 강하리만 쳐다보았다.“난 안 될 것 같아요. 세 사람만 놀러 가요.”“승훈이 넌?”안현우가 물었다.“좀 피곤해. 다음에 하자.”나른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그는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송유라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오던 그들은 마침 정주현과 마주쳤다. 정주현은 그들보다 나이가 어렸다. 양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옷을 입고 그는 활기찬 소년의 모습이었다. 강하리를 발견한 그가 눈빛을 반짝거렸다.“강하리 씨.” 그가 그녀한테 먼저 인사를 건네고는 그제야 구승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반가워요.”한편, 강하리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이 굳어진 구승훈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그러나 정주현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강하리만 쳐다보았다.“하리 씨,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조금 피곤해서요. 미안하지만 먼저 가볼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자리를 떴다. 정주현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는 그제야 구승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 그는 구승훈 옆에 찰싹 붙어있던 송유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구 대표님, 대표님과 강 부장님 두 분 사귀는 사이 아니죠? 아니라면 제가 강 부장님한테 대시할 생각이거든요.”그 말에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차갑게 웃었다.“정주현 씨, 남의 여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말하는 그의 눈빛에 싸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는데 정주현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안 좋아졌다.사실 정주현은 구승훈이 조금 두려웠다. 구승훈이라는 사람은 상류층에서 신 같은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라도 젊은 구승훈 앞에서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란 강하리는 그를 밀어냈다.“승훈 씨.”이곳은 레스토랑 입구의 주차장이었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구승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반항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키스는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거칠었다. 오늘 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녀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강하리, 계속 발버둥 칠래?”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고 그 소리에 그녀는 몸이 뻣뻣해졌다.“여기서 이러지 말아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어찌할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정주현이 자리를 뜬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강하리를 안아 차에 태웠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승훈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시동을 걸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그녀를 문으로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그의 키스에 그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거침없이 그의 키스에 호응했다. 이 남자 앞에서 반항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녀를 더 힘들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고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흠칫하던 구승훈은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옷이 흐트러지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옷을 찢어버렸다. 쌀쌀한 기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왜? 벌써 안달이 난 거야?”“추워요.”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 그녀를 거침없이 탐했다. “강 부장, 걱정하지 마. 곧 뜨겁게 만들어 줄 테니까.”이내 그가 그녀를 침대에 거칠게 내던졌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렸다.뜨거운 키스는 점점 아래로 향
“샤워요.”그녀가 한마디 툭 내뱉고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욕실로 들어갔다.욕실로 들어온 후,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그동안 사실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많이 애를 썼다. 그러나 기억은 끌어안고 있을수록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내려놓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늘 밤, 그 남자가 또다시 그녀의 상처를 끄집어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뜨거운 물이 샤워부스에서 흘러내렸고 그녀는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몸을 감쌌다. 이렇게 해야만 마음의 고통이 조금 풀리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가슴이 찢어지지만 그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울었다. 구승훈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그렇다.처음에는 뜨겁고 강렬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반복되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랑도 소리 없이 다 사라져 버린 것 같다.잠시 후, 그제야 마음이 가라앉은 그녀는 타올을 잡아당겨 몸에 둘렀다.욕실을 나가니 그가 담배를 손에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그녀를 발견한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욕실로 들어가 드라이기를 가지고 나왔다.“이리 와.”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리 오라고. 내 말 안 들려?”강하리는 앞으로 다가가 드라이기를 잡았다.“내가 할게요.”그러나 그는 손을 놓지 않았고 그녀를 자기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따뜻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잠시 후,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강하리, 이제 다시 그런 말 하지 마. 나 그런 말 듣기 싫어.”“내가 틀린 말 했어요? 사실이잖아요. 승훈 씨는 내가 승훈 씨한테 다른 걸 원하기를 바라는 거예요?”차갑게 말하는 그녀를 그는 힐끗 쳐다보았다.“그럼 내가 한 말 사실이라는 거야?”
깊은 밤부터 시작해 날이 밝을 때까지,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힌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자.”강하리는 눈을 감고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침실로 나와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은 못 갈 것 같아. 다음에 보자.”그 말에 강하리를 만나보고 싶었던 심준호는 다소 실망한 모습이었다. “그럼... 강하리 씨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피식 웃었다. “우리 강 부장한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거 아니야?”그 말을 듣고 심준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너 진짜 강하리 씨 좋아하는 거지?”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와 강하리는 좋아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관계였다.다만 강하리 이 여자에 대해 변태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소유욕이 있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소유욕은 남자라면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 얘기 더 있어? 없으면 전화 끊어.”“아니, 잠깐.”심준호가 급히 입을 열었다.“오해하지 마, 난 너네 강 부장한테 전혀 다른 뜻 없으니까. 어제 예진이가 갑자기 강 부장이 우리 누나랑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물어본 거야.”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해?”“응. 난 잘 모르겠는데, 예진이는 포토그래퍼라서 이런 쪽에 많이 민감한 편이야. 어제 강하리 씨 사진과 우리 누나 사진이랑 비교해 보니까 확실히 비슷한 구석이 많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없이 침대에서 조용히 자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이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아.”“나도 그거 아는데. 하지만 닮은 사람을 봤으니까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하잖아. 놓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심준호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강하리 씨 어머니의 성함이 뭔지 알아?”그 말에 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에 대해서는 그도 정말 모르고 있었다.그저 강하리의 어머니가 큰 교통사고로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
“배고파?”배가 고팠던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그 식사 자리가 너무 불편해 별로 먹지 못하였고 오늘도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일어나, 나가서 밥 먹자.”“움직이기 싫어요. 그냥 주문해서 먹어요.”그녀의 말에 구승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자고도 아직 회복이 안 돼?”“오랫동안 일했으니까요.”그가 웃으며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었다.“일어나서 운동 좀 해.” 옷을 입혀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강 부장도 보경대학 나왔다고 했지? 나 구경 좀 시켜줘.”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갑자기 보경대학은 왜요?”“강 부장에 대해 알아가고 싶어서.”그녀는 거절할 수가 없었고 거절한다고 해도 이 남자한테는 소용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시큰거리는 허리를 펴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두 사람은 밥을 먹고 난 뒤, 보경대학으로 향했고 날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보경대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캠퍼스에는 각양각색의 커플들이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구승훈과 함께 캠퍼스를 걸어 다니면서 문득 그녀는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그녀도 캠퍼스 어딘가에서 이 남자를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말이 안 되는 우연한 만남을 위해 가장 먼 길을 돌아 매일 수업을 들으러 가기도 했었다.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상황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승훈 씨는 어디서 대학 다녔어요?”그녀는 갑자기 물었다.“강주에서.”그 말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렸다. 구승훈은 외국에서 대학을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그가 강주에서 대학에 다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그 작은 어촌 마을이 바로 강주에 있었다.“왜... 왜 강주예요?”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하듯 담담해 보였다.“그냥, 가고 싶어서.”아주 짤막한 대답이
사실 이 질문은 좀 갑작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두 사람의 세 번째 만남이었으니까.그래서 그의 물음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예의 바르게 되물었다.“우리 어머니에 관해 궁금한 게 뭔가요?”“하리 씨 어머니의 연세, 직장 그리고 성함이요. 실례가 안 된다면 나한테 말해줄 수 있을까요?”정서원을 생각하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매우 훌륭한 여자였다. 예쁘고 성격도 온화하고 춤이든 그림이든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을 잘못 만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바람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한 남자 때문에 이 꼴이 된 것이다. 그녀는 아픈 마음을 가다듬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우리 엄마는 정 씨예요. 3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어요.”그녀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정서원의 나이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모른다. 그 당시 기억을 잃은 정서원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신분증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지금의 서류들은 모두 후에 송동혁이 대신 발급받아 준 것이었다. 그래서 나이든 생일이든 강하리는 사실 정확히 몰랐다. 한편, 심준호는 강하리의 어머니의 성을 들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이 정 씨였군. 그럼 아니라는 거잖아.’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큰 교통사고였나요?”그는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아주 심했죠. 지금까지도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거든요.”그녀의 말에 심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눈앞의 어린 여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누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여자라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이 안 좋았다.“미안해요.”진작에 익숙해진 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심준호는 예의상 더는 묻지 않고 말길을 돌렸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핸드폰 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해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강하리에게 연락처를 남겨주었다.“기회가 되면 자주 연락해요. 승훈이 신경 쓰지 말고.”강하리는 심준호의 번호를 받아적었고 심준호는 웃는 얼굴로 구승훈을 쳐다보았다.한편,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구승훈은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심준호가 떠난 뒤에도 구승훈은 카페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커피를 마시지 않는 그 앞에는 따뜻한 물 한 잔이 놓여있었다. 그는 예술품을 다루듯이 유리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대표님, 안 가요?”그녀의 말에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을 열었다.“왜? 심준호가 가면 우리도 가야 하는 거야?”그의 말투에서 그녀는 그가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아마도 자신이 심준호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대인관계가 있지 않는가?“가고 싶지 않으면 여기 좀 더 있어요.”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갑자기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준호 같은 스타일 좋아해?”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 한 쌍의 커플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여자가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문뜩 곧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 말은 곧 있으면 구승훈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니요, 심준호 씨는 내 스타일 아니에요.”“그럼, 강 부장은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당신이 짝사랑하는 그 남자는 어떤 스타일인 거야?”그녀는 맞은편의 남자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좋아하는 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사람을 이미 충분히 좋아할 만큼 좋아했었다.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녀는 아마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구승훈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대답이 이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좋다는 얘기인가?”“그렇게까지는 못하죠. 하지만 날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