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가 놀라 굳은 몸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어떻게 여기에..."미간을 살짝 좁힌 구승훈이 강하리의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가늠했다."아직 열나네. 옷 갈아입어, 병원 가게."강하리의 가슴속에 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살짝 웃어 보였다."약 몇 번만 더 먹으면 나을 거예요.""강하리, 말 좀 듣고 얼른 옷 갈아입어. 아니면 내가 갈아입혀 줘?"강하리의 손목을 낚아챈 채 말했다.그러자 강하리가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코끝이 찡한 느낌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승훈 씨, 여긴 왜 오셨어요?"강하리 본인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몰랐지만 아마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어서 서러운 듯했다. 구승훈을 보고 어쩐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니.하지만 더 의문인 건 며칠 전 그 일을 겪고도 한달음에 달려온 구승훈의 행동이었다.그 생각을 고스란히 얼굴에 띄운 강하리를 보던 구승훈이 웃었다."왜. 여긴 네 구역이니까 난 들어오면 안 되나? 그렇다고 여기서 죽게 둘 순 없잖아."강하리가 조금 젖은 눈을 살짝 문지르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괜찮아요."들은 체도 안 한 구승훈이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건넸다."빨리 입어. 병원 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남은 손으로는 강하리의 붉어진 눈꼬리를 문지른 채였다."말 좀 들어."강하리가 깊게 심호흡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제어하고 갈아입으러 자리를 피했다.택시를 잡아 병원에 도착한 뒤 진찰에 링거까지 맞으니 어느덧 점심이었다."아침에 밥은 먹었어?"강하리가 고개를 젓자 뒷목을 살짝 꼬집었다."나 안 왔으면 호텔에서 죽어 갈 생각이었지, 아주."찍소리 못하는 강하리에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뭐 먹을래."강하리가 눈을 내리깔았다."팥죽이요."잠시 멈칫한 구승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팥죽을 사 와서는 오른손에 링거를 꽂은 강하리를 대신해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여 줬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가 별말 없이 죽을 받아먹었다."강 부장, 이래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안 강하리가 더 이상 묻지 않고 눈을 감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턱을 잡아 입 맞췄다.질척하게 이어지는 키스는 전과 많이 달랐다. 훨씬 더 다정한...당황한 강하리가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구승훈이 강하리의 위로 올라탔다."승훈 씨, 저...""쉿. 더 움직이면 여기서 안 끝나."어느새 갈라진 목소리가 강하리의 귀를 파고들며 맞닿은 아래가 여실히 느껴졌다.반사적으로 몸을 굳힌 강하리를 보고 구승훈이 웃었다."그렇게 하기 싫어?""전 환자잖아요."구승훈이 밤에 얼마나 끈질긴지는 강하리가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절대 받아낼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물론 구승훈도 제아무리 짐승 같다 해도 환자를 상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몇 번 더 이어진 키스를 끝내고 나서 구승훈은 화장실로 들어가 반 시간이 지나서야 시원한 공기와 함께 나왔다.그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충분히 데운 다음 강하리를 다시 안았다....다음날 아침, 둘은 함께 연성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착륙 후,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잠시 고민한 강하리가 답했다."월세방이요."무어라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구승훈이 조용하니 강하리가 당황한 채로 월세방 앞에 도착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리려던 순간이었다.구승훈이 힐끗 쳐다보고는 강하리의 캐리어를 들고 강하리보다 먼저 내렸는데 반대 손에는 자신의 캐리어도 들려 있었다.입을 다물지 못하고 무슨 말을 꺼내려던 순간 구승훈이 한발 빨랐다."강 부장 몸도 안 좋은데 괜히 오라 가라 하면 안 되잖아."미세하게 씰룩이는 입꼬리와 함께 하려던 말도 억누르고 구승훈의 보폭에 맞췄다.함께 집에 발을 들인 순간, 구승훈의 벨소리가 퍼졌다.그 익숙한 벨소리는 무슨 저주라도 걸린 듯 따뜻했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지워냈다.구승훈을 슬쩍 쳐다본 강하리가 캐리어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 딱히 정리는 하지 않고 멍만 때리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강하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고는 간단하게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병원에 도착하니 간병인이 반갑게 인사했다.“하리 씨, 새해 복 많이 받아요~”강하리도 웃음으로 인사했다. 그러더니 오는 길에 산 과일을 간병인에게 건네주었다.“아주머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어요.”간병인은 과일을 받더니 매우 기뻐했다.“수고는 무슨,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그러더니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 정서원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또 한해가 지나갔다. 이미 4년째다.이런 나날이 언제 끝날지 아직 모른다. 사실 제일 힘든 건 강하리일 것이다.간병인은 말없이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강하리에게 자리를 남겨준 것이다.강하리는 침대맡으로 걸어가 정서원의 근육을 한참 안마해 주었다.안마를 해주고 나서야 강하리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엄마, 새해 복 많이 받아요.”정서원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강하리는 웃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맡에 앉아 곁을 지키다가 나왔다.의외인 건 병원 입구에서 송동혁을 만난 것이었다.3년을 못 봤는데도 단번에 그를 알아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하지만 떠오른 장면이라곤 3년 전 그녀가 별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매정한 남자의 모습뿐이었다.사실 정서원이 그때 기억을 잃긴 했어도 몸에 값비싼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액세서리는 결국 송동혁이 전부 채갔다.결혼하려면 집도 필요하고 돈도 써야 한다는 말에 정서원은 액세서리를 전부 송동혁에게 준 것이었다.3년 전 강하리가 송씨 집안에 찾아갔을 때도 송동혁이 따로 그녀에게 돈을 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한 적이 없었다.그냥 송동혁이 정서원에게서 앗아간 액세서리로 바꾼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였다.그때 송동혁이 이렇게 말했다.“정서원 목숨은 내가 구한 거야. 그 액세서리는 목숨값이고.”“애 지우라는 말 안 들었을 때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인데
송동혁은 오래전부터 구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10년 전, 그가 송유라에게 강하리를 가장해 구승훈과 만나게 했을 때부터 모든 걸 계획은 시작된 것이다.하지만 그는 송유라가 그렇게 제멋대로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구승훈의 몸을 얻는 거로는 모자라 구승훈의 마음까지 얻으려 했다.소탐대실이라고 결국 강하리가 어부지리를 보게 된 것이다.강하리가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이 정말 송유라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훼방을 놓는다 해도 밀고 나갔겠죠.”허를 찌르는 강하리의 말에 송동혁은 말문이 막혔다.그는 송유라가 돌아오기만 하면 구승훈이 바로 송유라를 다시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송유라가 돌아오자마자 구승훈이 에비뉴 주얼리의 광고를 준 것이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하여 송씨 집안은 구씨 집안과 약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구승훈은 약혼은커녕 송유라와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송동혁이 콧방귀를 뀌었다.“구승훈이 우리 유라랑 결혼하는 건 시간 문제야. 하리야, 눈치 깠으면 얼른 구승훈을 떠나. 아니면 위에 누워있는 여자든 너든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야.”송동혁은 이렇게 말하더니 더는 입씨름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갔다.그녀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송동혁일 것이다.바닥에서 치고 올라오기 위해, 자기의 이속을 채우기 위해 송동혁은 자기 처와 자식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정서원은 마음씨가 착해 별로 원망하지 않을지 몰라도 강하리는 자기 신분을 안 그날부터 송동혁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남자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길가로 걸어갔다.막차가 아직 끊기기 전이었다.강하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서서 사색에 빠졌다.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뒤에는 행인들만 보였다.강하리는 입을 앙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자 주해찬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선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주해찬은 사실 그녀에게 전화할 때부터 이미 여기에 있었다.“마침 근처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그러더니 강하리에게 따듯한 밀크티 한잔을 건넸다.“이 밀크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샀어.”강하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주해찬의 미소가 더 부드러워졌다.“취향이 변했을까 봐 걱정했는데.”강하리가 웃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신정에 본가에 안 내려간 거예요?”“갔지. 오늘 올라온 거야.”사실 이번 회의에 그가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이번에 온 사람은 외교부 수장이었다. 주해찬은 외교부에서 떠오르는 샛별이긴 했지만 이런 회의에 참석하기엔 경력이 부족했다.하지만 저번에 강하리가 돌아설 때 그녀의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아 보였던 게 생각났다.주해찬은 돌아가자마자 알아봤다.그리고 곧 구승훈이 대외로 강하리가 여자 친구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모자라 구승준 옆엔 아직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첫사랑도 있었다.이 소식을 들은 주해찬은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게 좋은 여자를 왜 아껴주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12월 31일 그날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려놓았다. 그러다 마침 오늘 이 핑계를 빌어 다시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주해찬은 자료를 강하리에게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자료를 받더니 가로등 불빛을 빌어 확인했다.주해찬은 가로등 아래에 선 강하리를 조용히 바라봤다.불빛이 깔끔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비췄고 그 모습이 너무 부드러워 보였다.주해찬은 순간 학창 시절에도 가로등 아래에 선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몰래 훔쳐봤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한참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야, 구승훈을 떠날 생각은 없어?”자료를 보던 강하리는 뜬금없이 들어온 주해찬의
강하리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그 남자는 강하리의 입을 틀어막았다.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는 왜 질러?”순간 강하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노려봤다.“승훈 씨, 미쳤어요? 늦었는데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해요?”구승훈이 콧방귀를 끼더니 그녀의 허리를 힘껏 꼬집었다.“내가 들어가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어떻게 들어가? 문 따고 들어갈까?”강하리가 멈칫했다. 구승훈에게 열쇠를 주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미안해요. 깜빡했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불을 켜자 구승훈의 눈에 들어온 건 강하리의 손에 들린 밀크티였다. 구승훈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심드렁해서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갈아신었다.슬리퍼로 바꿔 신으면서도 강하리는 밀크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구승훈은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밀크티를 빼앗아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뭐 하는 거예요?”강하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구승훈은 차가워진 눈빛으로 물었다.“감기 다 나은 거야?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데이트나 하고?”강하리가 입을 오므렸다. 주해찬과 있는 걸 본 게 틀림없었다.“선배는 그냥 자료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내일 오전에 회의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선배는 무슨. 호칭이 스윗한데? 그 사람은 이름 없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구 대표님, 나랑 선배는 진짜 눈곱만치도 이상해할 거 없는 그냥 친구예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는 콧방귀를 꼈다.“그래야 할 거야. 강하리, 다른 남자한테 선을 긋는 건 네 의무야. 내가 이렇게 경고하기 전에 잘해.”강하리는 원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송동혁을 보자 바닥을 쳤다. 게다가 아까 크게 놀라기까지 하니 뭘 하든 심드렁했다.하여 지금 이 남자와 이렇게 사소한 일로 다툴 힘이 전혀 없었다.“구 대표님, 나한테 순수하지 못한
강하리는 씁쓸하게 웃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송유라 꿈을 이루는 걸 당연히 막을 리 없었다.막지 않을뿐더러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그게 아니면 송유라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에비뉴 주얼리 광고를 줄 리가 없었다.결국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송유라와 비길 수 없는 존재였다.그녀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꿈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다.구승훈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강하리의 말에 그도 마음이 착잡해졌기 때문이다.사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구승훈은 자신의 여인이 얌전하게 그의 옆에 붙어있기를 바랐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많이 잘못한 것처럼 보였다.방 안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강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자료에 몰두했다.구승훈은 자지도 않았고 떠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그는 침대에 앉아 담배를 문 채 강하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분명 이렇게 여려 보이는데 왜 이렇게 고집이 센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우스운 건 요즘 구승훈도 이 여자를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오늘 주해찬 옆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혼자서 조금 화가 났을 뿐이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천천히 연기를 뱉어냈다.그러더니 담요를 가져와 강하리 옆에 던져줬다.“써. 병들면 힘든 건 너야.”강하리가 하던 동작을 멈추더니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고는 말했다.“고마워요.”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을 쳐다봤다.“구 대표님, 혹시 나 좀 도와줄래요?”구승훈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강 부장, 내 원칙은 잘 알고 있잖아. 도움을 받으려면 자세가 나와야지.”강하리는 당연히 그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구승훈은 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더 맹렬하게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서야 구승훈
회의는 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강하리가 통역실에서 나오자 주해찬이 그쪽으로 다가갔다.“내가 그랬잖아. 너는 문제 없을 거라고. 박 교수님도 오전 내내 칭찬하셨어.”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하는 내내 손에 진땀이 나더라고요. 무슨 문제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그냥 오래 쉬어서 그래. 그 대단한 실력이 묻힌 거지.”강하리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웃었다.“오래 쉰 건 맞아요. 다행히 지금 다시 시작했잖아요. 시작만 하면 어느 때든 늦지 않아요.”주해찬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말했다.“그래, 맞아. 실력이 있으니까 언제 시작해도 늦은 건 아니야.”둘은 나란히 밖으로 향했다.대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마침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강하리는 예의상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누군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강하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했다.얼마 전 새로 부임한 외교부 장관 진태형이었다.강하리가 우러러보는 사람이기도 했다.진태형은 날카롭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 강하리는 그런 눈빛이 어딘가 부담스러웠다.주해찬이 나서서 소개했다.“장관님, 이분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 강하리 씨입니다.”진태형은 강하리를 아래위로 훑었다.하지만 그 눈은 마치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혹시 심미현 씨를 아시나요?”강하리는 이 물음에 잠깐 멍해졌다.그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분입니다.”진태형은 왠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눈빛이었다.하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주해찬 씨 말로는 언어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던데요?”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그냥 좋아할 뿐입니다.”진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의 얼굴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여전히 그리움이 느껴졌다.“앞으로 주해찬 씨를 따라 외교부에 와서 자주 관람해도 됩니다.”강하리가 고개를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