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선배.”차 안.한참동안 말이 없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어느모로 보나 빠진 구석 하나 없는 주해찬이었다.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구승훈에게 비하당한 게 속상했다.“뭐가 미안해. 구승훈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웃으며 대답하는 주해찬의 따뜻한 목소리에 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나 따위가 뭐가 좋다고.’자신이 주해찬에게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그만큼 높은 곳에 서 있는 선배였으니까.강하리가 말이 없어졌지만, 주해찬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다 보였다. 아직 지난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급할 건 없었다. 3년이나 기다렸는데, 몇 년쯤 더 기다린다고 해도.“저녁 먹었어?”“아직이요.”“그럼 우선 밥 먹으러 가야겠네.”“대충 요기만 하면 돼요. 편의점 가서 컵라면이나 먹으려고 했는데.”주해찬이 문득 차를 세우고 내렸다. 옆에 아직 불이 켜진 디저트 가게가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해찬이 디저트 가게에서 나왔고, 손에는 케익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어, 저건?’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학생시절, 중독됐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족을 못 쓰던 초코케익.구승훈과 함께일 때 한 번도 못 먹어봤던.주해찬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가슴 한 구석에서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뭔가가 차올랐다.받아들어 한입 베어문 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함박 웃음을 지어버렸다.기억 저 편, 잊혀졌던 맛이 미각을 깨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목구멍이 간질여졌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저렇게나 행복하게 웃는다고?’뒷쪽 택시에서 지켜보는 구승훈은 죽을 맛이었다.초코케익 좋아하는 걸 알았더라면 한 트럭이라도 사줄 수 있었는데.‘3년동안 나는 뭐 한 거지?’어쩌다가 이렇게 남의 데이트나 훔쳐보는 변태 같은 꼬라지가 됐냐고.주해찬의 차가 어느 호텔에 들어섰다.“여기 심씨 가문이 경영하는 호텔이야. 여분으로 비워두는 방이 언제든 있으니까, 앞으로 보성에 출장 오면 준호한테 바로 전화하도록.”“알겠어요.
어쩔 새도 없이, 강하리의 뺨이 데인 듯 홧홧해났다.룸서비스 직원 옆에 서 있는 고이선이 보인 건 다음 순간이었다.“X년이, 구승훈 꼬신 것도 모자라서 주현 오빠까지 넘봐? 제 주제도 모르고!”악다문 이빨 사이로 말을 뱉으며 고이선이 다시 손을 드는 순간.짜악-!찰진 소리와 함께, 강하리의 손이 고이선의 뺨에 날아들었다.룸서비스 직원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저, 손님? 경찰 불러드릴까요?”“네. 경비원도요.”직원의 물음에 강하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심씨 가문 호텔에서 감히 나를 때려? X년이 죽을라고!”강하리의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던지 잠시 멍해졌던 고이선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고이선의 고함과 함께, 험상궃은 인상의 우락부락한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번들번들한 사내의 눈길이 목욕가운 하나만 입은 강하리의 몸에 멈췄다.순간 소름이 쫙 끼친 강하리가 문을 닫으려고 돌아서는 순간.고이선이 그녀의 머리채를 콱 잡았다.“어디 가려고? 남자라면 환장하는 거 아니었니? 맘껏 놀라고 데려왔는데 왜 빼?”콰직-!“끼아아악!”무기로 쓸 수 있는 식기들은 많았다.예를 들면, 강하리의 손에 들려있던 디저트용 포크라든지.디저트용 포크가 머리채를 움켜쥔 고이선의 손에 꽂혔고,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저 년 죽여! 당장!”고이선이 미친듯이 소리쳤고, 험상궃은 사내가 강하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하지만 그 주먹은 강하리에게 닿지 못했다.으스러질 듯 팔목을 잡힌 사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다음 순간.사내가 뒤로 날아갔다.쿠당탕!벽에 부딪쳐 스르르 무너지는 사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구승훈.온 몸에 시커먼 아우라가 감돌고 있었다. 눈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퍼억!사내의 면상에 한번 더 강펀치를 날린 구승훈이 휙 고이선을 돌아보았다.고이선이 흠칫 몸을 떨었다.“고이선 씨,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어둠의 심연에서 나올 법한 목소리에 고이선은 소름이 쫙 돋았다.구승훈이 여기 나타날 줄이야
쾅!문이 닫히면서 고이선의 시선을 가로막았다.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진 고이선.“야 강하리! 죽여버릴 거야! 잡히기만 해 봐!”히스테리에 찬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방 안.착 가라앉은 눈길로 구승훈이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피투성이가 된 강하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얼마나 놀랐을까.구승훈은 마음 한 켠이 아프게 찔려왔다.떨리는 강하리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들어가, 묵묵히 손에 묻은 피를 씻어주었다.얼굴에 튄 핏자국까지 꼼꼼히 닦아준 뒤 찬찬히 뜯어보았다.“다친 데는 없고?”“없어요.”그제야 한 시름 놓은 구승훈은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강하리의 아랫턱을 잡아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봤지? 이게 너 좋아한다는 남자한테 붙어있은 대가야. 정주현이 보이는 대로 깨끗하기만 할 것 같지? 남자는 다 한통속이야.”말없이 구승훈의 손을 벗어나 화장실 밖으로 향하는 강하리.“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구승훈의 얼굴이 또 일그러졌다.“구해주신 건 고마웠어요. 대표님이 안 오셨더라면 무슨 꼴을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하지만.”강하리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그렇다고 대표님이 내 일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에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든 보답하겠습니다.”“그래서? 여전히 정주현에게 붙어 있으시겠다?”구승훈의 눈매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강하리는 눈을 내리 깔았다.솔직히 정주현에 대해선 업무를 제외한 다른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감정 쪽으로 발전할 일도 없을 거고.정주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복잡한 관계라면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으니까.정주현이 그걸 받아들이면 좋고, 감정적으로 물고 늘어진다면 다른 길도 생각해 볼 예정이었다.하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게 구승훈과는 상관없는 일.“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강하리.”“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요? 대표님이야말로 점점 더 꼬여가는 걸 뻔히 보면서 왜 자꾸 질척거리시는 거예요?” “내가 질척거린다고? 정주현이 싸지른 똥을 막아 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예상했던 대로 구승훈이 미간을 좁힌다.“우리 둘 사이 일에 왜 자꾸 송유라는 끌어들이는 거지?”데자뷰 저리가라 할 익숙한 레퍼토리다.엄한 사람 멕인다는 듯한 핀잔 섞인 저 말투.‘내가 끌어들이고 싶어서 끌어들이는 거냐고.’날이 갈수록 버라이어티해지는 수작질로 자꾸 언급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가만히 있는다고 멈출 송유라도 아니고.구승훈과 엮여있는 한, 점점 더 심해질 거다.“송유라와 상관이 없다고요? 셀프최면 거는 게 재밌으세요? 송유라를 입 밖에 내지 않으면 대표님의 그 무책임함이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세요?”싸늘한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말투가 구승훈의 눈과 가슴을 쿡 찔렀다.그 한기에 꽁꽁 얼어버린 심장이 발치에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그런 뜻이 아니라…….”습관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급 후회가 밀려왔다.잠시 멈췄던 구승훈이 힘없이 한 마디 물었다.“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강하리가 침묵에 빠졌다. 좀 의외였다. 구승훈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하지만 곧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고의상해죄,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거예요. 나쁜 짓을 했으니 벌은 받아야죠. 대표님은 가만히 보고만 계시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아직도 안 잊었어?”“안 잊은 게 아니라 안 잊혀지는 겁니다.”아직도 눈만 감으면 끔찍했던 기억이 번뜩번뜩 튀어나오는데.아이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도는데.그 모든 걸 저지른 장본인이 발 편히 뻗고 자게 놔둘 수가 있을까.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강하리를 놓치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송유라를 나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그 오랜 세월 동안 버릇처럼 몸에 배어버린, 송유라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나도 끈덕졌다.“그러잖아도 송유라한테서 멀어지느라 노력하는 중이야. 그러니까-.”“그래 봤자 일 나면 한걸음에 달려가실 거잖아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강하리가 냉소를 흘렸다.뒷말은 뻔했다. 그러니까 뭐? 적당한 선에서 그치라는 거겠지.‘웃기지도 않네
”뭐라고?”구승훈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얌전하던 고양이가 한 순간 살쾡이로 변할 수도 있단 말인가?“당장 꺼지라고! 귀 먹었어?”환청이 아니다. 살쾡이가 날카롭게 하악질을 하며 이빨을 드러낸다.이빨을 꽉 악다문 강하리가 눈가에 독기가 어린 채, 잇새로 다시 한 번 내뱉었다.그동안의 고통과 울분이, 찢겨져 너덜너덜한 가슴에서 맹렬히 폭발하는 순간이었다.더이상 참는 건 의미가 없었다.사실 애초부터 송유라와 관련된 일로 재협상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었다.그냥 구승훈의 반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정도.어쨌거나 송유라 편일 테니까.뭘 하든 그건 변하지 않으니까.몇 번이고 자신은 버려졌고, 이 남자는 송유라한테 가 있었으니까.지금도 이 남자는 내가 여태 받은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으니까. 근본적으로 이 남자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구승훈의 눈이 사납게 번득였다.“너 지금 뭐라고?”경악으로 물들었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맞아죽을 뻔한 걸 구해 줬더니 이게 어따 대고 소리를!”차가운 그 한 마디가 폭주하던 강하리의 이성 한 조각을 건드렸다.“보답하겠다 그랬지.”강하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그 보답이란 거, 지금 당장 받아내야겠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목소리의 냉랭함 따윈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그 역시 끓어오른 가슴속 뭔가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정주현과 주해찬과 있을 때는 잘도 헤실거리다가 나한테만 못되게 군다 이거지?“몸으로 때워.”“?”강하리가 움찔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하지만 구승훈의 진지한 표정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나왔다. 또라이 전술.’“미치려면 좀 곱게 미치든가.”거침없이 악담을 뿜어내는 강하리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하는 구승훈.“섹스 마려워? 출장마사지라도 불러 줘?”“너가 마려워. 강하리 너가.”어쩔 새도 없이, 남자의 뜨겁고 거친 숨결이 강하리를 덮쳤다.“야 이 미친 새-.”뒷말은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온 남자의 입술이 막아버렸다.강하리의 반항은 가볍게 힘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벼락처럼 구승훈의 귀에 꽂혔다.구승훈이 감전이라도 된 듯 움찔했다. 정수리까지 치밀었던 화와 욕정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강하리를 꽉 잡았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눈가에 고통스런 빛이 스쳐지났다.날 선 비수가 가슴을 긋고 지나간 기분이었다.그 사건 이후 강하리가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그래서 그냥 그대로 지나간 줄로만 알았다.입에 담지 않으면 천천히 나아지겠지.시간이 어루쓸다 보면 아물겠지.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아물기는 커녕,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한 상처였다.강하리한테도, 자신한테도.살짝만 건드려도 쫙 갈라져, 두 사람을 갈라놓는 깊은 골짜기로 변해버렸다.구승훈의 울대뼈가 아래위로 요동쳤다.비틀비틀 뒤로 두 발작 물러났다.강하리가 지금 이 일을 다시 꺼낸 의도는 분명했다.이 상처 보이냐고.나 지금 이런 상태니까,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철저하게 선을 긋고 있는 거였다.“아플 거 뻔히 알면서, 그런데도 굳이 헤집어서 나를 밀어내는 거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강하리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안 그러면 더 아플 거니까.”어느덧 강하리의 목소리와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잔잔해져 있었다.그만큼 차갑기도 했다.“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지나갈 거예요. 앞으로의 시간에 비하면 3년은 아무것도 아닐 거니까. 대표님이나 나나 아직 젊잖아요.”“그러니까, 더이상 피차 상처 내면서 엉켜있지 말자구요. 네?”담담한 강하리의 눈빛과 마주하는 구승훈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자존심 따위에 이러는 거 아니라고!’라고 외치고 싶었다.하지만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자존심이 아니면?사랑?X랄.어렸을 적부터 알았다.사랑, 결혼 따위는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이란 걸.“그러니까 내가 뭘 하든, 우리 둘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는 거네?”“네.”외마디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모든 소리가 사라진 방 안.
모락 모락.파아란 연기가 허공에 감돌다가 흩어진다.그 아래에는 어두운 얼굴의 구승훈이 있었다.그가 서 있는 곳은 강하리의 방 앞 복도.‘처음 해 본 생각이지만, 저거 부럽네. ’금방 풀려 흩어지는 저 연기처럼 강하리를 향한 마음도 풀렸으면.딱딱하게 응어리가 진 그게 뭔지는 확실하진 않았다.확실한 건, 강하리를 이대로 포기하는 게 아직도 안 된다는 거였다.둘이 시작한 일인데, 혼자만 그 자리에 갇혀 지지부진하는 것만 같은 기분.강하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머무른 적이 있단 건 확실했다.뭐든 들어줬고 뭐든 받아줬었다.그런데 지금 혼자만 쏙 빠지려고 한다.‘여태껏 길들여 놓고 버리는 건 좀 너무하잖아.’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연기는 오랫동안 구승훈을 감돌았다.줄담배를 태운 탓이었다.지나가던 사람들이 코를 싸쥐며 미간을 찌푸리건 말건.바닥에 쌓여가는 담배 꽁초에 보다 못한 직원이 재떨이를 가져올 때에도.한 대, 또 한 대, 끝낼 줄 모르고 씁쓸함을 태웠다.그러다가 날이 희끄무레 밝아올 무렵, 접근하는 사람이 없단 걸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떴다.호텔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승훈의 핸드폰이 울렸다.딩! 디리리리딩 딩!액정에 송유라가 떴다.“오빠, 언제 돌아와요? 나 곧 수술인데.”“걱정 마. 수술 전에는 돌아갈 거니까.”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구승훈이 대꾸했다.“진짜?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빠!”막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든 순간, 저만치에서 음식 포장을 들고 호텔에 들어가는 주해찬이 보였다.또 가슴이 답답해났지만, 애써 눌러 내렸다.뭐, 어때. 아침밥 갖다주는 것 뿐인데.택시를 잡고 호텔로 돌아간 구승훈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바로 회의장으로 향했다.……주해찬이 방에 들어섰을 때 강하리는 막 외출 준비를 하던 차였다.음식 포장을 벗기자 짠 나타나는 불고기 밥버거에 강하리가 환호성을 질렀다.“선배는 내 학창시절 식습관을 어디 적어라도 놓은 거예요? 이 아침에 밥버거는 어디서
강하리는 대답이 없었다. 입만 벙긋하면 이 남자가 또 화르륵 타오를 거니까.하지만 구승훈은 할 말이 남은 모양.“아침밥 맛있었어?”“네. 대표님은 아침 뭐 드셨어요?”엉겁결에 강하리가 대답하고 보니, 구승훈이 썩은 표정이다.내가 밥이 넘어갈 것처럼 보여? 라고 말해주는 듯한.아차 싶었다.“강 부장은 참 순진한 여자야. 고작 아침밥 한 끼에 좋아죽는 걸 보면.”더 한층 시큼텁텁해진 구승훈의 말투.누군 3년 간의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죽을 맛인데.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지금부터 구승훈의 업무 관련 외 질문은 사절하기로 했다.그때 마침 마중나온 부드러운 인상의 협력사 비서실장.“구 대표님, 강 부장님, 오셨어요?”비서실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강하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비서실장이 친근하게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처음 뵐 때부터 느낀 건데, 우리 강 부장님은 어쩜 이리도 예쁘실까. 방금 남자친구분 차에서 내릴 때 아침햇살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 남자친구가 아니고 그냥 친구예요.”평소에 서류를 주고받으며 가끔씩 수다도 떤 친분이 있는 비서실장의 너스레에 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암요! 남자친구였다면 이마 쓱으로 끝나지 않으셨겠죠. 잘 생기신 분이 어쩜 그리 스윗하기까지 하실까. 우리 강 부장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 뭐예요.”옆 구승훈이 썩소를 지었다.어울리긴 개뿔!비서실장, 사람 보는 눈이 동태 눈깔이었네. 그렇게 안 봤는데.강하리는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한다고.사실 강하리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는 미스터리지만.여태껏 자신이 강하리 스타일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지금은 영 모르겠다.저렇게나 매정하게 자신을 버리는 걸 보면.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나고 기분이 언짢아졌다.그게 강하리에게 고스란히 보였다.또, 또 시작이다. 또!“정 실장님, 진짜 그런 사이 아니에요.”다시 한 번 정정했지만.“압니다. ‘아직은’ 아닌 거죠.”비서실장, 정은숙이 눈까지 찡긋한다.이거야 원, 해명할수록 역효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