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도착한 강하리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예상치 못한 구승훈의 행동이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 땅은 이제 받아도 문제, 안 받아도 문제였다.개자식, 대체 도와주려는 건지, 난처하게 하려는 건지!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혼란스러운 생각을 억눌렀다.그녀는 와인 때문인지 얼굴이 온통 빨개진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거울로 바라보았다.몸에서도 열기가 치솟고 있었다.그녀는 얼굴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막 밖으로 나서기 바쁘게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고 강하리는 두어 번 심하게 몸부림치다가 의식을 잃었다.그녀가 기절하자 상대는 모자와 큰 치마를 그녀의 몸에 씌우더니 화장실 문을 열고 그녀를 부축하며 걸어 나왔다.“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이 모습을 본 웨이터가 달려와 도와주려고 했다.“위층에 쉴 수 있는 라운지가 있는데 안내해 드릴까요?”상대가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이미 방 준비했어요.”웨이터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위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제가 눌러드릴게요.”웨이터가 모퉁이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눌러주자 상대는 강하리를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마침 이쪽으로 향하는 구승훈의 시선을 차단했다.“대표님?”넋이 나간 그의 모습에 옆에 있던 사람이 부르자 구승훈은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제가 좀 바빠서요, 다음에 얘기하시죠.”구승훈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정말 드물었고, 평소 말을 섞을 만큼 자신의 지위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꽤 아쉬워했다.하지만 구승훈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럼 대표님 먼저 일 보세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화장실로 향했다.강하리가 들어간 지 이미 한참이 지났다.그는 옆에 있는 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강 대표한테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봐줄 수 있어요?”웨이터는 서둘러 대답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건지, 약 효과 때문에 괴로운 건지 알 수 없었다.자꾸만 옆에 있는 사람의 몸에 밀착하고 싶었다.“더... 더워... 나 너무 힘들어요... 구승훈 씨...”구승훈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안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잠시 후 그가 코웃음을 쳤다.“강하리, 여기 구승훈 같은 건 없어. 난 현우 오빠지.”그렇게 말하며 그가 강하리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데 강하리가 갑자기 몸부림을 쳤다.약효가 지나갔는지 그녀가 힘겹게 눈을 뜨자 안현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강하리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안현우, 꺼져!”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고 안현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꺼지라고? 내가 가면 누가 널 기분 좋게 해주겠어? 강하리, 얌전히 있어. 나 구승훈만큼 잘해!”안현우는 말을 마친 후 강하리를 껴안고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강하리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도망가려 했지만 다시 한번 발목이 잡혀 뒤로 끌어당겨졌다.이윽고 그가 벨트로 강하리의 몸을 내리쳤다.“망할 년이 아직도 도망가려고 하네!”강하리는 눈물을 흘렸다.“안현우, 구승훈이 알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안현우는 웃었다.“안다고 해도 침대 위에서 네 방탕한 모습만 볼 텐데? 생각해 봐, 나랑 자고도 걔가 널 원할까?”안현우가 앞으로 다가가 침대에서 그녀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강하리, 보여? 저기에 네가 망가지는 모습이 다 담길 거야.”그가 옆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하자 강하리의 몸이 덜덜 떨렸다.“안현우, 원하는 게 뭐야? 뭐든 다 들어줄게, 제발 날 보내줘, 응?”안현우는 콧방귀를 뀌었다.“강하리, 내가 원하는 건 너야.”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강하리의 옷깃을 잡아 뜯었고 강하리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몸부림을 쳤다.그러다 안현우가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소품을 집어 안현우의 머리에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하지만 약에 취해 힘은 턱없이 약했고 안현우는 조금의 상처
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은 채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고 노진우가 바짝 뒤따랐다.“대표님, 안 대표는...”안현우는 구승훈의 발길질에 숨이 넘어갈 뻔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통을 꾹꾹 참으며 웃었다.“구승훈, 너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날 때렸어? 우리 두 가문이 어떤 사이인지 잊지 마!”구승훈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앞으로 나아가 안현우를 한 번 더 걷어차더니 발로 안현우의 목을 짓밟았다.“무슨 약을 먹인 거야?”안현우의 동공이 움츠러들며 구승훈이 전혀 장난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구승훈, 정말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구승훈이 힘껏 발로 밟자 안현우는 순식간에 숨 막히는 공포를 느꼈다.“무슨 약을 먹인 거야!” 구승훈은 굳은 얼굴로 다시 물었고 안현우는 얼굴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랐다.“약 이름은 A, 암시장에서 샀고 해독약이 없어. 이대로 있으면 저 여자는 바보가 되겠지.”구승훈의 눈동자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여자를 바라보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러고는 분풀이하듯 다리를 뻗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안현우를 발로 찼다.“잘 지키고 있어.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다시 충혈된 눈으로 정주현을 바라보았다.“정주현 씨, 방에 다른 카메라나 녹음기가 있는지 확인하세요. 안현우 평소에 더럽게 노는 놈인데 영상 유출되지 않게요.”정주현은 이를 악물고 구승훈 품에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승훈, 그 여자 건드리지 마, 알았어?”걸음을 멈칫한 구승훈은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안은 채 방을 나섰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그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노민준, 노민우의 사촌 형이자 현재 명인병원의 원장으로서 약물에 대해선 천재인 사람이었다.“A라는 약이 있다는데 혹시 들어봤어?”노민준은 다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너 그 약 먹었어?”구승훈은 설명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해독할 수 있어?”“다른 건 시도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A는 답이 없어. A가
안현우! 강하리는 성에 차지 않는 듯 그의 셔츠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이미 흠뻑 젖은 셔츠를 아예 벗어 버리고 넓고 단단한 가슴으로 강하리를 벽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날 원해, 하리야?” 강하리의 의식은 이미 한참 흐려져 있었고, 안현우는 지난번 김주한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약물을 썼다.몸속에서 솟구쳐 오르던 욕망이 온몸을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대답해 줘.” 남자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강하리의 허리선을 따라 부드럽게 아래로 쓰다듬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기분 좋게 해줄까?”강하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를 세면대로 데려가 앉힌 후 쭈그려 앉았다.참을 수 없는 욕망이 마침내 분출구를 찾았다.남자는 강하리의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최대한의 쾌락을 선사해 주려고 애썼다.언젠가 자신이 여자를 위해 이런 짓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꺼이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들 떨리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절정에 다다른 순간 발끝이 움츠러들었다.고개를 든 구승훈의 입가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입을 헹구고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와 키스를 했다. “좀 나아졌어?” 그녀의 귓가에 비비적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강하리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고 구승훈은 그녀를 안아 침대로 옮겼다. 그녀는 침대에 눕히기 바쁘게 다시 감겨왔다. 남자의 몸은 욕망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마음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안현우, 절대 멀쩡하게 살려두지 않을 거야! 밤새 뒤엉키며 구승훈은 그녀를 으스러질 듯 품에 꽉 안았다.오랜만에 느끼는 쾌락에 그는 광기에 물들어 갔다. 새벽이 다가오고 나서야 구승훈은 겨우 진정된 여자를 품에서 놓아주고 가운을 걸친 다음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안현우 어딨어?”남자는 담배를 손에 끼운 채 전화를 걸었고 통화가 연결되자 정주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구승훈! 강하리 어디로 데려갔어? 이
저택 지하 창고.창고라고 했지만 실은 철창이었다.철창 한쪽 벽에는 온갖 종류의 고문 도구가 걸려 있었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구승훈은 불쾌감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고, 밀려오는 역겨움을 참으며 긴 다리를 뻗어 그중 한 케이지로 다가갔다.그곳에는 안현우가 가운데에 묶여 있었는데 상반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고 몸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구승훈이 들어오자 안현우가 피식 웃었다.“구승훈, 네가 이렇게까지 그 여자를 소중히 여길 줄은 정말 몰랐네!”구승훈의 얼음장 같은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그는 안현우를 힐끗 보고는 옆에 있는 벽으로 걸어가 채찍을 잡고 근처 양동이에 담그더니 안현우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바로 채찍을 휘둘렀다.채찍이 닿자 살갗이 벗겨지며 안현우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구승훈, 너 이 새끼...”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채찍이 날아왔고 안현우의 비명소리가 지하 창고에 계속 울려 퍼졌다.정주현과 노진우가 달려갔을 때 안현우의 몸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정주현은 순간 멈칫하다가 옆으로 가서 헛구역질을 해댔다.구승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채찍을 옆으로 던지며 노진우에게 눈치를 주었다.“깨워.”노진우는 짧게 대답하고 양동이에 담긴 얼음물을 들이부었다.안현우는 멍한 상태로 눈을 떴고 그의 눈은 진작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승훈아, 승훈아, 오랜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살려줘, 응? 다신 안 건드릴게, 다신!”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만히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안현우는 독하고 무정한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경험했다.그리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그에 대해 사실은 하나도 몰랐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구승훈, 안씨 가문에게 밉보일까 두렵지도 않아?”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날 처음 보는 것처럼 말하네?”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는 다시 채찍을 들어 이번에는 안현우의 하반신을 내리쳤다.비명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고 안현우가 또다시 기절한 후에야 구승훈은 채찍을 던지고 어두
강하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어젯밤 그 사람 누구지?구승훈이었나?갑자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흠칫한 강하리는 그대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손연지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좀 어때, 괜찮아?”강하리는 입술마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연지야, 나...”손연지가 얼른 달려와 안아주었다.“괜찮아, 이제 다 지나갔어.”강하리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어젯밤의 기억은 어렴풋하고 혼란스러웠지만 안현우와 있었던 일만 해도 악몽이 되기에 충분했다.강하리는 여전히 손연지의 품에 기대어 몸을 떨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진정한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손연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구승훈이 연락했어.”강하리의 몸이 흠칫하면서 이불 위에 놓여있던 손을 말아쥐었다.어젯밤 그 사람이 구승훈인가?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조차 다행인지 괴로운 건지 알 수 없었다.그동안 구승훈에 대해 마음이 흔들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그와 밤을 보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어젯밤에 너랑 구승훈...”손연지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는 가슴에 맺힌 서러움을 억지로 삼키며 눈물을 닦았다.“연지야, 나 가서 쉬고 싶어.”손연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얼른 가자.”그녀는 강하리에게 옷을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이 호텔 입구에 다다르자 밖에서 들어오는 구승훈이 보였다.“왜 좀 더 자지 않고.”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는 복잡하고 여러 감정이 뒤엉킨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어젯밤 당신이었죠?”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나 맞아, 하리야.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해도 돼.”그 말을 하자마자 강하리는 그의 뺨을 때렸고 때린 후에도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뺨을 맞고도 그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때려도 화가 안 풀려?”강하리가 눈을 질끈 감고 손연지를 밖으로 끌어당기는데 구승훈이 그
“바로 갈게.” 구승훈은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구씨 가문 저택, 구동근은 어두운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안현우의 부모님이 앉아 계셨다.구승훈이 안씨 가문 외동아들인 안현우를 망쳐놨으니 안씨 가문 사람들은 구씨 가문과 등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따지고 들 생각이었다.구승훈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구동근이 지팡이를 내리쳤다.“망할 자식! 너 정말 나 열받아 죽으라고 이러는 거냐?”구승훈은 휙 몸을 피하며 덤덤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집어 들고 구동근에게 걸어갔다.“진짜로 열받아 돌아가시진 마세요.”남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구동근에게 건넸고 구동근은 화가 치밀어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지팡이를 집어 들어 구승훈을 향해 마구 휘둘렀고 구승훈은 아예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지팡이가 무겁게 그의 몸을 때리자 옆에서 지켜보는 구승재의 마음도 아팠다.하지만 구승훈은 그저 차갑게 웃었다.“다 때리셨어요? 부족하면 더 때리세요.”구동근은 분노가 들끓었다.“이 망할 놈! 고작 그깟 여자애 때문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 앞길 망쳐놓고 오랜 친구를 피투성이로 만들어? 구승훈, 아주 잘하는 짓이다!”구승훈은 그저 웃기만 했다.“모두를 위해 쓰레기 처리한 겁니다. 괜히 돌아다니면서 남한테 피해나 줄 테니까!”“구승훈, 그게 무슨 말이야?”구승훈은 태연한 얼굴로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그쪽 아들을 본인이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세요? 쓰레기 같은 놈 그 정도로 만든 것도 봐준 겁니다.”구승훈의 말이 끝나자 안씨 가문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두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어르신, 우리 두 집안 자식들이 오랜 세월 친구로 지냈는데 손자분이 무슨 짓을 했는지 좀 보세요!”구동근이 손을 들어 구승훈의 뺨을 때렸고 구승훈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따귀를 맞은 그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참, 안현우 망가뜨리면서 다리도 부러뜨렸는데, 며칠 동안
어르신은 말을 마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구승재가 달려와 구승훈을 부축하며 물었다. “형, 괜찮아?”구승훈은 웃기만 할 뿐 옆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기까지 했다. “괜찮아, 안 죽어.”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의사 선생님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래.”구승재는 강하리 쪽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편 이쪽 상황을 전해 들은 구승유는 서둘러 뒷마당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고 정원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인은 온화하면서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고, 단정한 치마저고리를 입으니 더욱 우아해 보였다. 구승유는 황급히 달려가 여자의 팔을 껴안았다. “큰엄마, 큰오빠가 할아버지한테 맞았어요.” 여초연은 멈칫하며 물었다.“걔는 어디 있어?”“거실에요, 셋째 오빠랑 같이 있어요.” 여초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가봐야겠다.”밖으로 나가면서 그녀는 다시 물었다.“또 그 여자 때문이야?”구승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오빠 이번엔 진심인 것 같아요.”여초연의 눈빛이 번뜩였다.“네 오빠 마음이 움직였다면 좋은 여자겠지.”곧 여초연이 거실에 도착하자 그녀를 본 구승훈의 시선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왜 왔어요?” 여초연은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다쳤다고 들었어.”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픔이 번쩍였다.“너도 참, 꼭 그렇게 반기를 들어야겠어?”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이렇게 되면 당신은 기쁘지 않나?” 여초연의 얼굴에 아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옆에서 보다 못한 구승유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오빠! 큰엄마는 오빠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태도 좀 바르게 할 수 없어?”구승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넌 참견하지 마.”형이 큰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구승유는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그녀는 다가가 여초연을 부축했다.“큰엄마, 그냥 아파하라고 해요. 본인이 자초한 건데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