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혁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가까이 다가가 칼을 그의 목에 바로 갖다 댔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하지만 송동혁은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난 그런 적 없어.”구승훈의 손에 쥔 칼이 송동혁의 손바닥을 단숨에 파고들었다.송동혁은 비명을 질렀지만 여전히 같은 말뿐이었다.“내가 안 그랬어, 구 대표. 내가 안 그랬어. 억울해. 유라가 알면 얼마나 서운해하겠어...”구승훈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칼을 뽑아 들었고 송동혁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구승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구승재는 황급히 물티슈를 건넸다.“형, 대체 무슨 일이야? 송유라가...”구승훈은 손을 닦으며 대답 대신 어두운 얼굴로 한 마디만 남긴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송동혁 돌려보내.”구승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저 멀리 희뿌연 빗줄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서둘러 찾아와 송동혁을 고문한 건 송유라가 진짠지 아닌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그동안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제 송동혁의 행동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불안함이 가득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목걸이는 분명히 하나뿐인데, 강하리와 송유라 둘 다 갖고 있었다.송유라의 팬들이 그 목걸이 모조품을 많이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강하리의 목걸이는 절대 가짜가 아니었다.그녀의 어머니가 남겨준 유물이었다.4년 전 강하리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을 때 송유라는 이제 막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터라 그 목걸이를 대중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강하리와 송유라가 이전에 서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고서야 모조품을 만들 수가 없다.하지만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 과거 서로를 알고 지낸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구승재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었다.“형, 무슨 일이야?”구승재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지금까지 엉뚱한 사람을 보호하고 있었다면 어떨 것
그 말을 듣고 손연지는 안도했고 가정부 아주머니는 옆에서 억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식사를 마친 손연지는 강하리에게 눈썹을 찡긋했다.“내가 은행까지 데려다줄까?”“너 오늘 일 안 해?”“휴가 냈어, 가자.”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밖으로 나섰다.은행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제 막 차를 주차했을 때 장서연도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장서연을 본 손연지는 눈을 흘기며 조용히 중얼거렸다.“외출할 때 오늘의 운세라도 봤을걸. 똥 밟았네.”강하리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없는 사람 취급해.”그들이 무시하고 싶어도 장서연이 가만 둘리 없었다.두 사람을 보자마자 장서연이 다가왔다.“강하리 씨, 우연히 또 만나네요.”강하리가 그녀를 무시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녀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강하리 씨, 구승훈이랑 헤어졌죠?”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뭐야, 어디서 개가 사람 일에 참견하지?”그녀의 말에 장서연의 얼굴이 붉어졌다.“손연지 씨, 당신이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손연지는 헛웃음을 지었다.“난 개랑 말 섞고 싶지 않네.”그녀는 강하리를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갔고 장서연은 굴하지 않고 따라갔다.“강하리 씨, 빌어먹을 당신 엄마 죽었다면서요?”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손을 들어 장서연의 뺨을 내리쳤다.“장서연, 한마디만 더 하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장서연은 뺨을 맞고 깜짝 놀라 분노에 찬 표정으로 강하리를 노려보았다.“강하리, 당신이 어떻게 감히 날 때릴 수 있어?”“때리기만 하면 다행이지!”그런데 장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사람 때릴 줄밖에 모르지. 당신 엄마가 죽었을 때 구승훈이 어디 있었는지 알아? 송유라 옆에 있었어. 송유라가 수술하는 동안 구승훈이 이틀 동안 잠도 못 잔 건 알아? 강하리, 네 남자 마음속엔 언제나 다른 여자가 있어도 넌 전혀 상관없나 봐?”“닥쳐!” 장서연이 말을 끝내자 이번엔 손연지가 그녀의 뺨을 때
손연지는 그녀를 껴안고 토닥였다.“잘 간직했다가 시집갈 때 꼭 착용해!”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집으로 돌아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어젯밤 비를 여러 번 맞은 탓에 옷이 눅눅해져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곧 강하리를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왔다.“형, 그 목걸이 감정해 봤는데 진품이야.” 구승훈은 멈칫했다.“확실해?”“응, 당시 이 목걸이를 만들었던 장인이 직접 감정했는데 거짓일 리가 없지.”구승훈은 침묵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강하리와 송유라 일은 어떻게 됐어?”“확인하고 있어.”짧게 대답을 마친 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괜한 생각인가, 심준호의 말에 홀려서.’그는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다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옷을 챙겨입고 무의식적으로 향수에 손을 뻗는데 향수를 집어 들자 그것이 바닥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강하리의 서랍을 열려고 몸을 돌렸다.보통 향수는 강하리가 그를 위해 몇 병씩 준비해 두곤 했다.하지만 서랍을 여는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강하리의 서랍 안에는 일기장이 들어있었다.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일기장은 강찬수한테서 가져온 것이다.그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일기장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그것을 집어 들었다.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목걸이가 부서졌다. 강찬수가 부쉈다. 엄마도 다쳤다. 난 이 집이 특히 싫다. 강찬수가 싫다. 엄마랑 여기서 탈출해서 다시 그 작은 어촌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 승훈 오빠도 보고 싶다...”구승훈은 멍한 표정으로 그 글들을 바라보았다.목걸이, 어촌 마을, 승훈 오빠?순간 구승훈은 숨이 막히고 당황한 나머지 팔다리가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두 페이지를 넘기다가 다시 손가락이 떨렸다.[오늘은 내 열일곱 번째 생일이다. 지난 몇 년 이래
구승재는 당황했다.“형, 대체 무슨 일이야?”“송유라 데려오라고, 내 말 못 알아들어?”구승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알았어, 형. 바로 Y국에 연락할게.”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간 뒤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 어디 있어?”“은행에 있어요.”은행 입구에 막 도착한 구승훈은 안쪽에서 강하리와 손연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봤다.강하리의 눈이 빨갛게 충혈된 걸 보아 운 게 분명했다.그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순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오호라, 구 대표님께서 또 오셨네?” 손연지가 잔뜩 비꼬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강하리만 바라봤고 그 눈빛에는 모든 것이 극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어느 한 마디조차 꺼내기가 두려웠다.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손연지를 바라보았다. “가자.”구승훈이 다가가 강하리를 끌어당기더니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하리야, 내가 데려다줄게.”“그럴 필요 없어.” 강하리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구승훈이 다시 잡으려 해봐도 그녀는 번번이 피할 뿐이었다.강하리는 곧장 손연지의 차로 향했고 구승훈은 씁쓸한 마음이 밀려왔다.하지만 이대로 강하리를 눈앞에서 놓아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차가 시동을 걸기 직전에 뒷좌석 문을 열고 따라 올랐다.손연지는 그가 타는 것을 보고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꺼져요! 내 차에 더러운 남자는 못 타요!”구승훈은 여전히 강하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진작 알아차렸다.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주머니 유품 가지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창밖을 내다봤다.“구승훈 씨, 나한테 그만 매달려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며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화나면 날 때리고 욕해, 응?”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난 당신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이랑 어떤 이유에서든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손연지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 씨, 당
하지만 뭐가 됐든 이제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손연지는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 운전했다.전화를 끊고 무슨 말을 하려던 그녀의 얼굴이 확 변했다.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손연지의 얼굴이 하얗게 일그러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리야,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들어.” 강하리는 깜짝 놀랐고 손연지는 그대로 핸들을 돌려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며 보호했고 곧 차가 심하게 흔들리다가 겨우 멈췄다.시내였고 차가 너무 빨리 달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다친 손연지는 이마에서부터 피가 뺨으로 흘러내렸다.강하리도 팔이 긁혔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가락마저 덜덜 떨렸다.곧 누군가 차 문을 벌컥 열었고 그녀보다 더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채 구승훈이 허둥지둥 강하리의 안전벨트를 풀더니 그대로 안아서 밖으로 옮겼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 배는,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연지가 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자신의 차에 태운 뒤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달려갔다.“연지는!” 강하리가 그를 향해 소리치자 구승훈이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챙겨줄 사람 있어.”그는 강하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제야 강하리는 남자의 손도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가슴이 찡했지만 그래도 손을 뒤로 뺐다.“난 괜찮아, 배도 아프지 않으니까 이럴 필요 없어.”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녀의 안색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구승훈은 다시 한번 손을 잡았고 강하리는 뿌리치고 싶었지만 힘이 다한 듯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방금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만약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저히 버티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구승훈의 차는 재빨리 병원에 도착했고 미리 노민준에게 연락해 전문의를 데려와 검사한 뒤 괜찮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손연지도 빠르게 병원에 실려 왔고 노민우는 노진우에게 안겨 들어온 손연지를 바
강하리도 저쪽에서 구승재의 말을 어렴풋이 들었다.그녀는 손톱이 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다물었다.역시.그녀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번엔 또 누군데? 송씨 가문? 문씨 가문? 아니면 당신네 구씨 가문?”구승훈은 시선을 내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극심한 죄책감에 말로 다 못 할 아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누구든 내가 찾아내서 제대로 처리할게.”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이번엔 찾아내도 다음엔? 아직도 모르는 걸까.그가 자신의 곁에만 있으면 그들은 몇 번이고 자신을 사지로 내몰 거라는 걸!게다가 더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손연지가 또다시 연루되었다는 거다!오늘 손연지가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차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가에 차오른 말을 삼켜버렸다.그래도 오늘은 그가 자신을 도와준 셈이니 한참 동안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고마워.”고맙다는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자신이 참 쓰레기같이 느껴졌다.그녀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내디딘 한 걸음이 또다시 그에게 짓밟혔다.그때 굳이 송유라를 만나러 갈 필요가 없었다.그는 자신이 가서 무슨 말을 해도 송유라가 소란을 피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갔다.단지 그녀가 하양이라고 생각해서 성의를 보여주고 싶었다.그런데 신이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칠 줄이야.강하리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미안했다고.하지만 착각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녀에게 상처를 줬고 한번 받은 상처는 엎어진 물처럼 되돌릴 수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부질없는 것이었다.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다가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하리야, 다 내가 해야 할 일이잖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다시는 내 주변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 아직도
응급실에서 노민우는 손연지를 안고 들어와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손연지는 그가 외치는 소리에 창피해서 힘껏 노민우의 가슴을 꼬집었다.“좀 조용히 해!”노민우는 고통에 신음했다.“손연지, 너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나 아직 살아있거든?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 누가 들으면 내가 당장이라도 죽는 줄 알겠네!”“괜찮을지 안 괜찮을지는 의사 말 들어봐야 알지!”손연지가 혀를 찼다.“내려줘!”노민우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그녀를 근처 의자에 내려놓은 뒤 의사를 불러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손연지는 겉으로는 센 척해도 속으로는 아픈 게 무서웠다.의사가 상처 부위에 과산화수소를 붓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곧바로 옆에 있던 노민우의 손을 꼬집었다.노민우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그런 도련님을 옆에서 지켜보던 의사가 눈을 흘겼다.‘대체 누가 다친 건지.’손연지는 상처에 약을 바른 후 이렇게 물었다.“흉터가 남을까요?”노민우가 그녀를 바라봤다.“흉터 때문에 소영준이 싫다고 할까 봐?”손연지가 곧장 그의 손을 뿌리쳤다.“소 교수님이 너처럼 얼굴만 보는 줄 알아?”노민우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가서 뇌 CT도 찍어.”그는 손연지를 CT 촬영실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소영준이야말로 얼굴을 제일 많이 보는 사람이야. 그 사람 평소 잠자리 파트너들도 엄청난 미녀라는 걸 모르지?”손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식으로 소 교수님을 깎아내리지 않고는 하루도 못 사는 거야?”노민우는 울화가 치밀었다.“내가 그 사람을 깎아내린다고?”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아니면 뭐겠어?”말하기 바쁘게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리고 우리 병원 연수도 당신이 망친 거야?”노민우는 괜히 마음에 찔렸다.“우리 병원에서 연수 기회 얻으려다가 그쪽 병원 자리까지 뺏게 된 거야.”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발로 그를 걷어찼다.“노민우, 너 진짜 미쳤어?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그녀의 고함소리에
손연지의 눈동자가 번쩍였다.“설마 장서연 그 망할 년?”강하리도 당연히 장서연을 떠올렸다.오늘 그녀가 손연지 차에 탄 걸 본 사람은 장서연밖에 없으니까.하지만 송씨 집안 사람이자 송유라 사촌 동생이라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구승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가 갑자기 콧방귀를 뀌었다.“허, 맞네. 구 대표님이 감싸고 도는데 장서연이면 뭐 어때? 기껏해야 경고로 끝나겠지, 안 그래?”손연지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눈빛에는 냉기가 가득했다.노민우는 옆에서 목을 가다듬으며 손연지를 잡아끌었다.“그만해.”손연지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개자식이 나쁜 짓까지 해놓고 욕먹는 걸 무서워해?”구승훈의 얼굴이 점점 더 추해졌다.“정말 그 사람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손 선생님도 말씀 가려서 하세요.”구승훈은 강하리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했기에 손연지의 행동도 어느 정도 참고 넘어갔다.하지만 결국 그는 구승훈이었고 강하리 앞에서는 몸을 낮출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연지에게 항상 관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손연지는 이 말을 듣자마자 발끈했고 노민우는 황급히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그러자 그녀의 화살이 이번엔 노민우에게 향했다.“왜 날 잡아당기는 거야!”노민우는 그녀를 바라봤다.“헛소리 그만해, 이건 결국 하리 씨랑 승훈이 일이잖아.”“하리랑 구승훈 일이라니, 나도 오늘 피해자라고!”노민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밖에서 구승재가 황급히 들어왔다.“형, 형수님.”강하리를 보자마자 그는 자연스럽게 형수님이라고 불렀다.지금까지 강하리가 구승훈과 헤어졌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그였기에 형수님 호칭이 나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하지만 강하리에겐 다소 조롱 섞인 말로 들렸다.“구승재 씨, 난 이제 그쪽 형수님 아니니까 그냥 날 강하리라고 불러요.”당황한 구승재는 깜짝 놀란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지며 어느새 부드러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