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나 뉴스에서 그를 거의 매일 본다.“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강하리는 낮게 불렀다.“안녕하세요, 할아버지.”심금천은 멍하니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앞으로 집에 자주 놀러 와.”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심문석은 이어서 둘째, 셋째에게도 그녀를 소개했다.셋째를 소개할 때 석미란은 눈을 흘길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막 뭐라 하려던 찰나 구승훈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지금도 구승훈을 보면 얼굴에 아픔이 느껴졌다.구승훈만 있는 게 아니라 큰집 식구들과 어르신까지 있었고 대체 저 계집이 무슨 약이라도 먹였는지 하나 같이 자기 딸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저 계집한테 더 잘해주었다.석미란은 남몰래 몇 마디를 중얼거리며 옆으로 걸어갔다.심문석이 강하리를 데리고 일일이 소개를 마친 뒤 백아영이 그녀를 곁으로 끌어당겼다.“태형 씨 말로는 일 다 넘겼다면서?”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마음 편히 해외 파견을 기다리고 싶어요.”백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문연진과 함께 밖에서 들어오는 문원진을 보았다.멈칫하던 강하리의 안색이 굳어지자 백아영의 두 눈이 번뜩였다.“여기 있기 싫으면 승훈이랑 나가서 둘러봐. 여긴 별로 볼 것도 없고 노인네들만 많으니까.”강하리는 문씨 일가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바로 답했다.헐렁한 니트를 입었어도 문연진의 눈을 완벽히 속일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지난번 유산을 경험한 뒤 눈앞에 겨눈 총보다 뒤에 숨어 쏜 화살이 더 무섭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터라 지금은 문연진을 피하고만 싶었다.“백 장관님 감사합니다.”백아영이 웃으며 말했다.“가 봐.”강하리가 구승훈과 함께 자리를 뜨려는 찰나 때마침 문씨 일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문연진은 강하리가 입고 있던 헐렁한 니트와는 대조적으로 유난히 화려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심
문원진의 말이 끝나자 구승훈은 비웃었다.“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 문제는 내부 부서와 징계위원회에서 결정한 건데 하리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문원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승훈아, 무슨 일이 있어도 연진이는 여전히 네 약혼녀야!”구승훈의 얼굴은 싸늘한 서리로 뒤덮인 듯 차가웠다.“전 평생 딱 한 명의 여자한테만 프러포즈했고 그게 하리입니다. 어르신께서 계속 그러시면 창피를 당하는 건 그쪽일 텐데요.”“구승훈, 너...”“그만해!” 보다 못한 심문석이 소리를 질렀다.“우리 심씨 가문을 뭐로 보는 거야? 여기 있기 싫으면 당장 꺼져!”문원진은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능글맞게 다가와서 준비한 선물을 심문석에게 건넸다.“어르신, 그래도 연진이 크는 걸 옆에서 지켜보셨잖아요. 지난번 일은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애 앞길 망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심문석이 콧방귀를 뀌었고 그가 말하기도 전에 백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자기가 선택한 길이고 본인이 자초한 일 아닌가요. 문원진 씨, 얘 앞길이 어떻게 되든 그건 본인이 결정할 일이지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하지 마세요. 남들도 사람 앞길 망칠 만큼 큰 책임을 짊어질 리가 없고요.”문원진은 말문이 막혔다.“백아영 씨, 그래도 우린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사이고 연진이는 친손녀 같은 애인데 이런 일로...”“내 손녀가 그런 짓을 했다면 외교부나 징계위원회에서 나서기 전에 내 손으로 외교부에서 쫓아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남아 있을 자격이 없어요.”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며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백아영 앞에서 문원진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일그러진 얼굴로 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문연진은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백 장관님,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럼 강하리는요?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외교부에 남아있을 자격이 있나요?”“무슨 일?” 구승훈이 비웃으며 물었다.“당연히 돈 많은 사람에게 스폰받은 것 말이에요. 승훈 오빠
그런데 강하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백 장관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다들 감싸주셔서 감사해요.”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하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가족을 부러워했다.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고 나중에는 어머니를 때리지 않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으며 그러다 엄마가 있는 사람까지 부러워하고 있었다.그녀는 유독 자신에게만 가족의 연이 박하다는 걸 느꼈는데 오늘 이곳에서 심씨 가문 사람들이 가족처럼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순간 백아영의 가슴이 더욱 아파지며 다가와 강하리를 꼭 안아주었다.“바보 같긴, 우리는 그냥 진실을 말한 것뿐인데.”방에서 나온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그러쥐고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심씨 가문 사람들 몇 마디에 감동한 거야?”그의 손을 떨쳐낸 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강하리 씨.”정주현은 그녀를 보고 이쪽으로 걸어왔고 그 뒤를 정양철이 따라왔다.“하리 양,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정양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정 회장님?”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였다.“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죠.”정주현은 옆에서 눈을 흘겼다.“나쁘지 않긴, 이사회가 다 뒤집어지게 생겼는데 뭐가 나쁘지 않아.”정양철이 그를 노려보았다.“말 안 한다고 아무도 널 벙어리로 생각 안 해.”정주현은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하리 씨 우리 회사의 복덩어리라고 했지, 안 믿더니.”정양철은 그를 무시하고 강하리만 바라봤다.“외교부 일은 어떻게 돼가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할만해요.”정양철의 눈이 번뜩였다.“오호? 재능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잘 되나 보군요.”강하리는 웃으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구승훈은 옆에서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정양철을 바라봤다.정양철은 그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B시로 돌아왔어요. B시에서 무슨 일
문연진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갔다.“사모님, 전 그런 뜻이 아니라 강하리가 단순한 여자가 아니란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들을지 말지는 사모님이 결정할 일이죠.”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와인 잔을 손에 들고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연미숙은 문연진이 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말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대양그룹 지사의 강하리가 사실 어리고 예쁜 아가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문연진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그녀가 옆으로 손을 흔들자 경호원 복장을 한 사람이 다가왔다.“가서 정 회장님이 연성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다 확인해 봐요, 전부 다.”경호원은 대답하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심문석 생신 잔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강하리는 다시 그의 곁으로 불려 갔고 그는 강하리를 데리고 B시의 모든 고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게 했다.강하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지켜보며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낌새를 알아차렸다.앞으로 심씨 가문에 딸 하나가 더 생긴 것 같다, 과거 심예진처럼.하여 저마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심준호가 구승훈 옆에 서서 말했다.“문씨 가문을 잘 지켜봐. 저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들은 아니야.”구승훈이 대답하며 연미숙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녀는 멀리서 그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정양철 알아?”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정양철은 사람이 점잖기로 유명하고 당시 별 볼 일 없던 정씨 가문을 지금의 규모로 키우기까지 했잖아. 왜, 무슨 일 있어?”구승훈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저었고 이때 갑자기 밖에서 고함이 들렸다.심준호의 표정이 확 바뀌더니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서 냉기가 번뜩였다.“네가 처리해. 난 하리 데리고 갈게.”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심문석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강하리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그런데
강하리는 구승훈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한 번도 구승훈이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고 애초에 구승훈에게 이 아이의 존재를 알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그녀나 구승훈이 애를 써도 이 아이의 안전을 백 퍼센트 장담하긴 어렵다는 걸 잘 알았다.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들을 피해 한국을 떠나 조용히 아이를 낳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외 파견이 아닌 이상 해외에 나가려면 여러 단계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설령 나가더라도 감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해외 파견에 대해서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데 출국 허가는 쉬울?그녀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머릿속엔 온통 사생아라는 남자의 매서운 눈빛뿐이었다.구승훈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겁내지 마, 내가 너희 둘 다 지켜줄 테니까.”강하리가 다소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냈지만 여자의 쌀쌀맞은 태도가 오히려 구승훈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배를 감쌌다.“오늘 밤에 내가 책 읽어줄까?”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차에서 바로 내렸다.“필요 없어.”하지만 밤이 되어 구승훈이 동화책을 들고 다가왔을 때 강하리는 거절하지 않았다.이제 그녀는 선명한 태동을 느낄 수 있었다.구승훈이 배를 만지거나 태교를 빌미로 그녀에게 은근슬쩍 스킨십을 할 때면 태아는 유난히 활발하게 움직였다.강하리는 이게 혈육의 교감인지 생각하곤 했다.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하니까.강하리는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침대 옆에 기대어 앉아 영어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구승훈이 침대 쪽으로 걸어가 그런 강하리를 품에 안았다.“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대?”강하리는 그의 손에 든 동화책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사실 아무것도 못 알아들어. 그냥 당신 목소리를 좋아하는 거지.”구승훈이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럼 내가 읽어줄까? 강주에서 네가 나한테 책 읽어줄 때처럼.”강하리는 잠시 침묵
진태형은 잠시 침묵했다.“해외 파견은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아요.”“그럼 제가 개인 사정으로 출국 신청을 하는 건요?”진태형은 나지막이 말했다.“신청은 할 수 있지만 승인 떨어지는 게 무척 어렵고 기간도 오래 걸릴 거예요.”강하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어요.”강하리가 전화를 끊자 구승훈이 상쾌한 기운을 풍기며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구승훈은 파자마 한 벌을 몸에 걸친 뒤 강하리에게 다가와 포옹했다.“안 피곤해?”강하리가 낮게 물었다.“구승훈 씨, 우리 아기 괜찮겠지?”구승훈은 한참을 꽉 껴안고 있다가 대답했다.“응.”강하리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자면서도 깊게 찡그린 그녀의 미간을 보자 구승훈은 마음이 아파 그녀를 다시 품에 꼭 껴안았다.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다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그 후로 강하리는 계속 바쁘게 지냈지만 그녀는 구승훈이 동네에 많은 사람들을 심어놓았다는 걸 알았다.안팎으로 남녀불문하고 그가 데려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먹을 것과 입는 것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고 나문빈마저 들어오려면 여러 번의 확인을 거쳐야 했다.그래서 나문빈은 들어올 때마다 투덜거렸다.“그쪽 집에 오는 게 유엔 본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네요.”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최근 B시에 에너지 회사 입찰이 있는데 잘 준비해 봐요.”나문빈은 혀를 찼다.“알겠어요.”온라인 회의를 속속들이 마치고 드물게 여유시간이 생기자 그녀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발코니 쪽으로 의자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집안은 따뜻했다.계약서를 들고 무심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낯선 번호였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번호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정양철 씨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 왔고 강하리는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안녕하세요.”전화기
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애초에 널 자기 회사로 데려간 게 네 어머니를 해치려고 그랬다는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정양철은 우리 엄마와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왜 그렇게까지 했냐는 거야...”강하리는 말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구승훈의 손을 꽉 잡았다.“송동혁은? 구승훈 씨, 송동혁 어디 있어?”송동혁이 애초에 엄마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혹시... 정양철?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랐다.줄곧 엄마와 정양철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송동혁을 만나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혹시 엄마가 오래전에 정양철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정말 그런 거라면 모든 게 말이 된다.정양철이 엄마를 쫓고 있었는데 송동혁이 구해줬다.그래서 그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찾지 않았던 게 아닐까?그런데 나중에 엄마와 닮은 자신이 정주현과 일하는 걸 얼떨결에 보게 되어 곧장 연성으로 온 게 아닐까?강하리는 문득 팔다리가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던 그녀는 계약서를 들고 있던 손마저 떨렸다.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정말 그런 걸까 봐.그렇다면 정서원을 그렇게 만든 게 결국 자신이니까.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송동혁은 아직 구치소에 있어, 왜 그래?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강하리의 입술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그 사람 만나고 싶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알았어, 내가 준비할게. 근데 지금은 네 몸이 안 좋아서 안 될 것 같아. 애 낳고 가는 건 어때?”강하리는 임신 7개월 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이 상태로 외출하는 건 정말 위험했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기다리자.”한편, 전화를 끊은 연미숙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더미로 향했다.처음에는 믿지 않
강하리가 헛웃음을 지었다.“둬도 난 쓸데없는데.”구승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래, 나랑 아이가 누려야지.”“아이만이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근데 나 이미 많이 먹었는데.”강하리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창피한 것도 몰라?”구승훈의 눈엔 온통 웃음기가 가득했다.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구승훈은 조심스럽게 운전했다.앞뒤, 좌우, 사방에 경호원들의 차가 가득했고 원래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오늘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병원 측에서는 구승훈이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전용 통로를 통해 들어선 그는 곧바로 의사 진료실로 들어갔다.몇 가지 검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벌써 정오가 가까워졌다.석미란이 진료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한 여자를 품에 안고 병원 제일 안쪽 진료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몸매와 분위기가 확실히 강하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다만... 강하리의 걷는 모습을 보던 그녀는 다소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잠시 멈칫하다가 황급히 그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몇 발짝 내딛기 전에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여긴 통행금지입니다.”여러 명의 경호원이 석미란 앞에 서서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석미란은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내가 누구인지 알아? 여긴 심씨 가문 병원이고 난 심씨 가문 사람이야!”하지만 경호원은 움직이지 않았고 석미란은 더욱 화가 났다.“당신들 눈이 먼 거야 아님 귀가 안 들려?”경호원이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석미란은 이를 악물고 두 경호원을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밖으로 나오자 구승훈이 이미 강하리를 차에 태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의 눈빛이 번뜩이다가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에야 그녀는 진료실로 향했고 의사는 당연히 그가 심씨 가문 셋째 사모님이라는 걸 알았다.그녀가 묻자 도저히 어쩔 수 없었지만 여전히 답은 전과 같았다, 생리 불순.석미란은 그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