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는 이 재벌가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연정이를 찾지 못하면 누구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구 대표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정이를 지키지 못했어요. 제 탓입니다.”구승훈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그의 눈에는 극도로 억눌린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누가 기절시켰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봤나요?”“대표님, 저는 연정이를 안고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누군가 우산을 들고 다가와서 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구승훈은 병동에서 나와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꺼냈다.하지만 몇번이나 시도해도 불이 붙지 않자 그는 담배를 라이터와 함께 손에 움켜쥐고 힘껏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내리쳤다.“형...”구승재가 옆에서 황급히 불렀다.이마를 짚은 구승훈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구승재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형, 어떡하지? 연정이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어떡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가서 문연진이랑 구정우 전부 잡아서 때려!”구승재는 서둘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한 뒤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시간이 1분 1초 흘렀고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문자를 바라보았다.[일은 어떻게 됐어?][잘 안됐어? 왜 아직도 안 와?][언제 와? 기다릴게.]구승훈은 한참 동안 전화를 붙들고 있다가 답장을 보냈다.[오늘 못 갈 것 같으니까 먼저 자.]전송을 마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구승재에게 말했다.“일단 하리가 모르게 해.”구승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휴대폰으로 보낸 메시지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했다.서재를 두어번 둘러보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강하리, 네 딸 살아있는 거 알아?]강하리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몇 초가 지나서야 메시지 의미를 파악했고 거의 순식간에
강하리의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고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물었다.“아기 어딨어? 아이 보고 싶어. 구승훈, 아이 좀 보게 해줘!”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말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침묵하는 상대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다.“나한테 아이 안 보여주려는 거지?”그녀가 묻자마자 구승훈 쪽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노진우 씨 가족분 있나요?”구승재는 서둘러 답했다.“선생님, 노진우 씨 어떻게 됐나요?”강하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지금 병원에 있어? 구승훈 씨, 병원이야? 노진우 씨가 왜? 연정이가 우리 아이지? 구승훈 씨, 연정이는?”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대답했다.“그래, 병원에 있고 노진우가 좀 다쳤어. 걱정하지 마.”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그녀에게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지금 갈게.”하지만 구승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하리야, 집에서 기다려. 내가 돌아가서 다 얘기할게.”“구승훈!”“하리야, 얌전히 있어. 내가 연정이 데리고 갈게, 알았지?”강하리의 눈가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왜 우는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듯 숨이 턱턱 막혔다.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형, 하리 씨도 안 거야?”하지만 구승훈은 옆에 있는 응급실 문만 쳐다보며 물었다.“노진우는 어때?”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왼쪽 다리뼈가 골절돼서 수술할 수밖에 없고 추후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대.”“연정이 소식은?”구승재는 구승훈을 향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형, 하리 씨한테는 말하지 마. 혹시라도...”구승훈은 두 눈을 감았다.“승재야, 내가 미안할 짓을 했어.”이렇듯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시키는 게 아닌데. 안 그러면 연이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이번에는 구승훈이 전화조차 받지 않았고 강하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이 오지 않는다면 그녀가 갈 것이다.그런데 집을 나서자마자 아파트 아래층에서 구동근이 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다.“강하리 씨, 순순히 따라갈 건가, 아니면 내가 손을 써야 하나?”하지만 강하리 옆에 있는 경호원이 앞을 막아 나섰다.“어르신, 강하리 씨는 건드리지 마세요.”구동근이 차갑게 웃었다.“감히 너희가 날 막아? 처리해!”그의 명령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곧바로 움직였고 현장은 난장판이 되었다.아파트 경비원들은 멀리서 지켜보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이쪽으로 오지도 못했다.강하리가 경찰에 신고하려는데 전화가 걸리기도 전에 경호원에게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제압당했다.구동근이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경찰에 신고하려고? 강하리, 내가 그걸 무서워할 줄 알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가 등 돌릴까 봐 무섭지도 않으세요?”“너 때문에 구씨 가문까지 망치는 애를 내가 왜 신경 써?”말을 마친 그가 경호원에게 눈짓했다.“데려가!”연정이의 옷을 병원에 가져와 가정부가 확인했을 땐 날이 이미 환해졌다.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구승훈의 가슴엔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구승재도 안타까운 눈빛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구승훈에게 말을 걸었다.“어젯밤 그 사람들 일행 아니야. 한쪽은 문연진이 보낸 게 맞는데 다른 한쪽은 확실하지 않아. 조금 전 확인했는데 구정우 쪽 사람들도 아니야. 형, 할아버지가 한 게 아닐까?”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강하리 옆에 있던 경호원의 연락에 전화를 받자 그의 표정이 확 변했다.“알겠어.”그는 전화를 끊고 구동근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원하는 게 뭐에요?”구동근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왜, SH그룹을 무너뜨리겠다며? 그럼 난 강하리도 죽일 거다. 뭘 선택할지는 네가 알아서 해!”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는 연정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문연진을 바라보다가 물었다.“뭐라고?”문연진이 웃었다.“내 말 못 들었어? 그럼 다시 한번 말해줄게. 강하리, 네 아이는 죽었어. 완전히 죽었다고.”강하리는 순간 미친 듯이 달려들어 문연진의 목을 졸랐고 그녀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문연진은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강하리는 온몸의 힘을 동원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아이를 위한 복수, 연정이를 위해 복수해야 한다. 문연진을 죽여야 한다!문연진은 목이 졸려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강하리는 힘이 별로 없었지만 이 순간 문연진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그녀의 얼굴을 벌겋다 못해 푸르게 변해갔다.이대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고 구승훈이 경찰과 함께 외부에서 들어왔다.안의 상황을 발견한 구승훈의 발걸음이 멈칫하다가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하리야!”그가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 강하리의 손을 뗴어내려 했지만 이성을 잃은 강하리의 두 눈엔 증오뿐이었고 제자리에 굳어버린 듯한 손은 남자인 구승훈이 떼어내기도 버거웠다.강하리를 다치게 할까 봐 차마 힘도 쓰지 못한 채 구승훈은 옆에서 그녀를 달랬다.“하리야, 손 놔. 손 놔.”옆에 있던 류덕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 모습을 보고 있었고 그가 다가가려는 순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았다.“하리야,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손 놔.”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손에 힘을 탁 풀었고 탈진한 문연진이 바닥에 쓰러졌다.이를 본 류덕구는 급히 사람을 시켜 문연진을 데려가게 했다.“병원으로 보내.”구승훈이 류덕구를 바라봤고 류덕구가 고개를 끄덕였다.“전 어르신 상대하러 가볼게요.”류덕구가 떠난 후 강하리는 구승훈을 올려다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몸까지 떨리고 있었다.“구승훈 씨, 아이는? 아이는 어디 있어? 아이 데리고 나 만나러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아이 데려갔으면 제대로 지켰어야지!”구승훈은 죄책감이 들면서도 안쓰러웠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여전히 똑같았다.“미안해. 하리야, 내가 미안해. 너한테도, 아이한테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말을 꺼냈다.“구승훈, 다시는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말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하리야.”“놔.” 강하리의 목소리가 차가웠다.“가지 마. 날 혼자 두지 마, 제발.”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이 툭 떨어지면서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고 구승훈은 곧바로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이대로 가면 영영 떠날 거라는 걸 잘 알았다.그녀를 놓아줄 용기가 없었던 그는 죽어도 보내려 하지 않았다.“다신 거짓말 안 할게. 하리야, 가지 마.”강하리는 몸부림을 치지 않고 그대로 안겨있었지만 시선을 내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엔 전혀 온기가 없었다.“구승훈, 이렇게까지 나한테 상처 준 걸로는 부족해?”구승훈의 몸이 굳어졌고 강하리는 이미 그에게서 벗어나 멀리 가버린 뒤였다.밖에서는 구동근이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강하리를 납치했던 경호원들은 경계하면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구승훈, 할아버지한테 이런 식으로 할 거야!”구승훈은 굳어진 얼굴로 구동근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류덕구를 바라보았다.“불법 감금은 직접 보셔서 알겠고 아파트 아래에서 찍힌 영상도 보내드렸습니다. 불법 감금뿐만 아니라 대낮에 공개적으로 사람을 납치했어요. 부디 법대로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구승훈, 이 개자식!”구동근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구승훈이 경찰을 이용해 그를 상대할 줄이야.류덕구가 그를 힐끗 보았다.“어르신께서 잘못하셨죠.”말을 마친 그가 부하들에게 눈치를 줬다.“데려가.”구동근이 그렇게 잡혀갔고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밖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야 그녀도 걸음을 옮기려는데 구승훈이 다시 한번 나지막이 불렀다.“
“하리야!”깜짝 놀란 주해찬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 강하리를 부축하려 했지만 구승훈이 먼저 상대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여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이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주해찬은 별안간 참지 못하고 다가가 구승훈의 멱살을 잡았다.“구승훈 씨, 왜 자꾸 상처를 주는 겁니까!”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나랑 하리 일입니다. 주해찬 씨와는 영원히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은 채 차에 올랐고 주해찬은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눈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뒤를 따랐다.강하리의 몸엔 별 이상이 없었고 단지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었다.구승훈은 병실에 서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주해찬은 병동 입구에 서 있었다.“구승훈 씨, 얘기 좀 하죠.”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주해찬 씨와 할 얘기 없습니다. 나랑 강하리 일에 당신이 끼어들 일은 전혀 없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주해찬이 갑자기 길을 막았다.“구승훈 씨, 더 이상 상처 주지 말고 멀리 떨어져요. 알아들어요?”구승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차갑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그렇게 말한 후 그는 주해찬을 밀어내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구승재는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형, 할아버지가 경찰서로 가는 길에 쓰러졌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류 서장님 쪽에 의사가 없어? 아니면 내가 의사까지 불러줘야 해?”말문이 막힌 구승재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구승훈이 물었다.“문연진은 어딨어?”강하리는 문연진이 자기 입으로 연정이를 죽였다며 실토했다고 했지만 연정이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연정이가 진짜로 죽었더라도 반드시 찾아낼 거다.“문연진은 유산할 뻔해서 응급실 갔다가 방금 병실로 옮겨졌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연진의 병실로 향했다.이제 막 깨어난 문연진은
문 앞에 서 있던 구승재가 문연진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문연진, 우리 할아버지 경찰서에 계시는데 정말 만나고 싶어?”문연진은 깜짝 놀라며 홱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다.“강하리 때문에 할아버지를 가뒀어?”하지만 구승훈은 눈빛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문연진이 갑자기 웃었다.“구승훈, 미쳤구나, 진짜 미쳤어. 그 여자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어?”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문연진, 진짜 미친 사람은 너지. 좋은 집안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는데 굳이 죽을 길을 찾아가잖아. 문씨 가문이 이렇게 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 스스로 자초한 거야.”문연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를 잃었다.그녀도 이 결혼에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만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눈물을 머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승훈 오빠는 애초에 내 것이었어야 해. 우린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인연이야. 강하리가 남의 결혼 망친 나쁜 년이라고. 그래서 죽어야 하는 거야, 걔 말고 걔 아이까지도! 전부 다 죽어야 해!”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의 목을 조르고 벽에 밀쳤다.“연정이 어떻게 죽였어, 어디서 죽였어? 문연진,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줄게.”문연진은 낄낄 웃었다.“말하면 날 놔줄 거야? 구승훈, 내가 바보인 줄 알아?”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문연진, 넌 지금 임신 중이고 정말 잘못했어도 법적으로 선처할 수 있어.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정말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멈칫하던 문연진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차에 치이고 절벽에 떨어져서 죽었어.”문연진의 말이 끝나자 구승훈의 손이 갑자기 느슨해졌다.구승재 역시 당황하며 바닥에 쓰러진 문연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강하리한테 네 손으로 연정이를 죽였다는 말이, 연정이와 노진우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는 뜻이야?”문연진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콜록거리다가 한참 후 씁쓸하게 웃었다.“내 말 못 믿겠으면 절
주해찬은 얼굴을 찡그렸고 구승훈은 이미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몸 상태가 안 좋아서 이틀 동안 더 지켜봐야 해.”말하며 그가 보온병을 들고 강하리 앞으로 다가왔다.“팥죽 끓여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고개를 돌린 얼굴은 붉게 물든 눈가와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만 보였다.구승훈이 보온병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주해찬이 그의 손을 막았다.“구 대표님, 제가 할게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주해찬 씨 참견이 지나친 것 같은데요?”그러나 주해찬은 놓지 않았다.“그쪽이 있으면 먹겠어요?”구승훈은 말문이 막혔지만 죽을 그릇에 따라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하리야, 네가 화난 건 알지만 밥은 먹어야지.”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마주한 뒤 한참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배고프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가세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손가락을 들고 있던 구승훈의 손이 멈칫했다.‘구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두 사람 사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그녀는 용서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 조금의 희망도 남겨두기 싫었다.구승훈은 심장의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하리야.”하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고 강하리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엔 어렴풋한 고통이 담겼다.“하리야, 나도 아기를 지키고 싶었어.”강하리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꼭 나한테 숨겨야만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거야?”구승훈은 말문이 막혔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든 강하리의 두 눈엔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구승훈, 당신은 처음부터 날 믿지 않았던 거지?”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조금이라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사고는 벌어졌다.“가, 다시는 오지 마.”구승훈은 가만히 앉아 있었고 강하리는 주해찬을 바라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