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구승훈은 철창에 갇힌 느낌뿐이었다.손목과 발목은 물론 목까지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그의 뒤에는 사나운 개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전혀 힘을 쓸 수 없어 울부짖으며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요.”“엄마, 꺼내줘요!”“엄마, 살려주세요...”그러나 그의 외침에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고 이빨을 드러낸 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가 그에게 달려들었다.“엄마!”구승훈이 번뜩 눈을 떴고 조용한 치료실에는 진자 바늘이 똑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정신과 의사인 임희주가 옆에 있다가 그가 깨어나자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기분이 어떠세요?”구승훈은 미간을 누른 채 물을 건네받지 않았다.마음속에 억눌린 짜증은 진정되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같은 말만 했다.“내일도 이 시간에 뵙죠.”임희주가 입술을 달싹거렸다.“구승훈 씨, 천천히 해도 돼요. 너무 긴장한 상태라 여유가 필요해요.”“필요 없습니다.”말을 마친 구승훈은 치료실에 조금도 머물지 않고 떠났다.임희주는 문 앞에 서서 구승훈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눈가에 스쳤지만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차에 돌아온 구승훈이 넥타이를 끌어당기자 준봉은 백미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입꼬리를 당기며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노진우는 몸이 좋아진 이후 구승훈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구승훈은 계속 연성에 남으라고 했다.구씨 가문 사람들을 감시하면서 여초연의 행방을 찾으려는 거다.여초연은 그때 떠난 이후 증발한 듯 사라졌고 구승훈은 그동안 많은 인력을 해외에 보냈지만 여초연에 대한 단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너무 한가해 미칠 지경이던 노진우는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무척 들떴다.“대표님, 시키실 일 있으세요? 저 언제든 B시로 갈 수 있어요.”구승훈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가서 여씨 가문 조상 무덤 좀 파
기세등등하게 강하리를 찾아와 정안그룹과 에비뉴를 내놓으라고 따지려던 참인데 강하리가 그들을 만나러 오지도 않을 줄이야.그들이 오자마자 응접실로 안내하고 좋은 차와 물을 대접했지만 강하리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강하리가 전화를 끊자 손연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아? 정 안 되면 회사로 가. 걱정하지 마, 내가 죽이진 않을 테니까.”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지며 고개를 돌려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노민우를 바라보았다.이번엔 접시를 깨고 그다음엔 그릇을 떨구자 강하리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구씨 가문 사람들보다 어젯밤 소파에서 잔 노민우가 복수심에 주방을 망쳐버릴까 봐서 걱정이었다.“그릇 하나만 더 깨뜨리면 경비 불러서 쫓아내게 할 거예요!”그릇을 들고 있던 노민우의 움직임이 갑자기 조심스러워졌고 가정부는 연정이를 안은 채 눈 뜨고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부엌을 바라보았다.“사모님, 제가 하게 해주세요.”강하리는 한숨을 쉬었다.“됐어요. 고생 좀 하라고 해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연정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가정부는 손연지와 노민우를 번갈아 보았다.“저기, 일들 보세요. 난 좀 치우고 있을게요.”손연지는 사람들이 떠난 뒤에야 부엌으로 향했고 멈칫하던 노민우는 고개를 돌려 손연지를 바라보았다.“어젯밤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손연지는 부엌문 앞에 서서 심호흡하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돌아가, 노민우. 여기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노민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이게 어떻게 시간 낭비야? 손연지, 난 특별히 사과하러 온 거야. 화 풀고 나랑 같이 가. 내가 일자리도 다시 마련해 줄게, 응?”손연지가 갑자기 비웃었다.“시간 낭비가 아니면 뭔데? 노민우, 난 다른 사람 결혼 망칠 생각 없어. 예전엔 네가 싱글이라 기꺼이 만났지만 이젠 약혼녀도 있으면 그 사람이나 소중히 여겨.”노민우의 손에 들린 칼에 손가락을 베일 뻔하며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 여자를 소중히 여기라고?”손연지
노민우가 혀를 차며 해명하려던 찰나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휴대폰에 걸려 온 전화를 살피던 그는 손연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가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위층으로 향하자 노민우는 황급히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내가 한 밥 안 먹을 거야?”“너나 먹어!”손연지가 씩씩거리며 그를 발로 찼다.“꺼져! 누가 그딴 거 먹고 싶대?”“이미 다 했는데.”손연지는 이를 갈았다.“노민우, 난 널 남자로 생각 안 해.”노민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렇게 오랜 시간 애까지 만들었는데 아직도 내가 남자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거야?”손연지가 비웃었다.“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냥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기다려, 내가 결혼할 때 너한테 주례를 부탁할 테니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노민우를 밀어냈고 상대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연달아 발길질당했다.“손연지!” 노민우는 화가 났다.“너 누구랑 결혼하는데?”“누구랑 결혼하든 내 마음이지. 나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아?”노민우가 눈을 부릅떴다.“진짜 결혼하려고?”손연지가 웃었다.“왜, 너는 약혼해도 되고 난 결혼하면 안 돼?”“난 엄마 달래려고 약혼한 거지 진짜로 결혼할 생각은 없어.”손연지는 그 말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은 듯 차분하게 노민우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마저 한 박자 늦게 뛰었다는 건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왜 흔들려? 뭘 망설여? 전에 당한 굴욕으로 충분하지 않아? 하리처럼 엄마가 목숨까지 잃어야겠어?’게다가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지금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는 굴복하지 않았을 거다.고작 한심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두 사람은 또다시 불쾌하게 등을 돌렸고 노민우는 식탁에 앉아 검게 탄 밥을 바라보며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해명을 다 했는데 왜 아직 화가 나 있는 걸까.노민우는 정신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내 물건이니 당연히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거죠. 정안이나 에비뉴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 여자에게 줘도 부족해요. 다들 자신 있으면 제 손에서 빼앗아 가세요. 그게 아니면 제 아내 회사에 찾아와서 괜히 공기나 더럽히지 마시고요.”구민성과 구민수를 제외한 다른 친척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움츠렸고 구민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이 사람들 내보내지 않고!”준봉은 그 말에 급히 경호원을 불러들여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구민성의 목소리가 꼭대기 층에 계속 울려 퍼졌다.“구승훈, 이거 놔. 난 네 삼촌이야. 구승훈, 두고 봐. 구씨 가문이 네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구민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구승훈은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 나면 B시에 오세요. 하리 어머니 산소에 가서 절이라도 하셔야 제가 결혼식을 올리죠.”구동근은 순식간에 발끈했다.“망할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못 알아들어요? 제가 다시 얘기할까요? 급하니까 일찍 오세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빨리 강하리와 식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한 건 사실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강하리를 명실상부 그의 아내로 만들어야 그가 이성을 잃어도, 구씨 가문에서 원하지 않더라도 강하리에게 준 재산을 빼앗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구승훈은 문득 자신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시간을 지체해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강하리가 자신을 포기할까 봐, 상황이 점점 악화하여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강하리를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고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흔들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강하리가 회사로 달려갔을 때 그녀가 본 건 응접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구승훈의 뒷모습뿐이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이 남자에게서 다시 한번 느껴져
준봉은 갑자기 강한 적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노진우가 어떻게 강하리 앞에서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강하리는 무심하게 준봉에게 걸어갔고 준봉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가져와요.” 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준봉은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상사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지만 사모님의 말씀은 더더욱 그러했다.휴대폰 화면에 뜨는 메시지를 보며 강하리의 속눈썹이 살짝 처졌다.“그쪽 대표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하리는 불편한 느낌을 참으며 힘겹게 물었다.구승훈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준봉은 신경이 곤두서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강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그쪽이 곁에 있는 게 싫다고 하면 그쪽 대표님이 어떻게 할 것 같아요?”“대표님은 어머님에 의해 약물을 투여받았습니다.”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툭 내뱉었고 말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이건... 그의 탓이 아니겠지?아무렴 우선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데...강하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언제요? 무슨 약이요?”준봉은 강하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표님이 혼자 버틸 필요는 없으니까.“아가씨를 구하러 갔을 때요. 정확히 어떤 약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노민준 씨 말로는 신경 약물이라고 했어요.강하리는 문득 구승훈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밤잠을 설치던 때가 떠올랐다.모든 것이 그 약 때문이었을까?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홀로 고통을 견뎌냈던 건가?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후 준봉은 서둘러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사모님께 약물에 관해 말씀드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구승훈은 휴대폰의 메시지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 준봉에게 답장을
강하리가 비웃었다.“그냥 뭐? 구승훈, 만약 내가 아프거나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다가 그가 말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미안해, 자기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밀어냈다.“돌아가. 나 클라이언트 만나야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고 구승훈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려 했지만 그녀는 피했다.응접실 문이 열리자 임명우가 문 앞에 서 있었고 남자는 여전히 반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말을 마친 그가 그제야 구승훈을 발견한 듯 반응했다.“구 대표님도 여기 계셨네요?”강하리 앞에서 불쌍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지고 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지더니 앞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어깨를 감싸며 소유욕을 드러냈다.강하리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그를 뿌리치진 않고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러 가. 퇴근하고 다시 얘기해.”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을 숨긴 채 시선을 내렸고 강하리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저녁에 맛있는 거 해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임명우를 바라봤다.“임명우 씨, 제 아내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이렇게 끈질기게 매달릴 줄은 몰랐네요.”임명우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강 대표님은 제가 항상 존경하는 분이니 당연히 매달릴 수밖에요.”구승훈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번뜩였다.“그럼 일찍 포기하시라고 조언하고 싶네요.”임명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구 대표님 뜻대로 안 될 것 같은데요.”말을 마친 그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 대표님,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뒤돌아 사무실로 향했고 임명우는 구승훈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강하리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어두운 눈빛으로 임명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후 그는
임명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JM을 빠져나왔다.강하리가 그런 이유를 대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그는 계약 해지를 거부했고 강하리가 계약을 해지하려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진행 과정이 최소 반년은 걸린다.그리고 반년 동안 강하리는 어쩔 수 없이 임명우와 같이 일해야 했다.강하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임명우를 배웅했고 그가 사라지자 곧장 표정이 굳어졌다.나문빈은 남미에서 힘들게 돌아와 위층에 도착하자마자 안예서가 방금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강하리의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난 일단 돌아가서 쉬고 다시 올게요.”말을 마친 그가 도망치려는데 그 순간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나문빈은 몸이 경직된 채 심호흡을 한 뒤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강하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휴가 좀 줄까요?”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임명우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자세히 말해줘요.”전에 임명우를 조사한 적이 있긴 해도 알아본 결과가 과거 정양철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깨끗했다.이에 강하리는 다소 불안해했다.과거 정양철은 무방비 상태로 대했지만 지금의 임명우는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싫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어쩔 방법이 없어 보였다.나문빈은 강하리가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임명우는 해외에서 만났는데 학업 성적은 별로여도 인간관계가 좋았어요. 우리 반에서 나름 좋은 사람이었죠.”그제야 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나문빈을 바라보았다.좋은 사람?우연의 일치일까, 과거 정양철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리고요?”“임명우에게 해외에서 만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의학 전공을 한다지만 우린 본 적이 없어요.”“여자 친구요?”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의대생이요?”나문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옆에서 리시안셔스 하나를 꺼냈고 강하리가 곧장 그것을 낚아
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많이 신경 써줘요. 사실... 힘들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구라도 친엄마한테 그런 일을 당하면 괴로울 거예요. 강하리 씨는 지금 승훈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강하리 씨만 무사하면 승훈이도 괜찮을 거예요.”휴대폰을 든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한참 후 그녀가 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돌아 정안 건물을 바라보았다.구승훈에게 화가 나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노민준의 말을 듣고 난 뒤 독하게 마음을 먹지 못했다.그래, 누구라도 친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면 괴로울 거다.구승훈에게서 보이는 쓸쓸함이 그의 모친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구승훈은 어린 시절 어떤 일을 겪었을까?왜... 그의 어머니는 그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처음엔 연정이를 납치하고 그다음엔 구승훈에게 약을 주사했다.그렇게 그가 잘 지내는 게 싫었던 걸까.강하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가 휴대폰을 들고 드디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녁에 갈비찜 먹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속 무거웠던 돌덩이가 마침내 안착했다.[맡겨만 줘. 강 대표님, 아직도 화났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응.]문자를 보낸 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건을 챙겨 외교부로 향했다.내일 외교부 회의가 있어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주해찬을 만날 줄은 몰랐다.주해찬은 마치 추모하듯, 경의를 표하듯 외교부 입구에 홀로 서 있었고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가갔다.발소리가 들리자 문득 몸을 돌린 주해찬은 강하리를 본 순간 마치 자신이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깊게 가라앉아 더 이상 소생의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주해찬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보경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따스하고 맑고 깨끗한 눈빛이었다.“안녕, 난 주해찬이라고 해. 네 직속 선배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모르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