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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손발 땀쟁이
주예는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진후의 SNS 계정을 다시 열었다.

화면이 넘어가자 진후가 기록해 둔 일정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규나 건강검진]

[규나 항공권, 호텔 예약]

[규나 생일]

[규나...]

주예와 관련된 기록은 맨 아래까지 내려가서야 하나 나왔다.

3년 전, 혼인신고를 한 날이었다.

주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끝이 조금씩 식어 갔다.

‘정말 끝까지 이랬네.’

주예는 올라오려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킨 채 다른 폴더를 열고 나서, 진후가 최근에 사들인 부동산, 주식 거래 내역 같은 자료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주예는 내용을 제대로 다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주예는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전부 사진으로 남긴 뒤 정리해서 장연에게 메일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연에게서 답장이 왔다.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 쪽도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주예는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부터 내리던 비는 아직도 그칠 기색이 없었다.

주예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빗줄기를 실은 찬 바람이 얼굴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살짝 추웠다.

그래도 주예는 이런 감각이 싫지 않았다.

...

다음 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주예는 이미 스승인 도해산의 작업실에 도착해 있었다.

작업실은 시외에 자리하고 있었고, 사방에는 푸른 식물들이 둘러서 있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른 덩굴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주예는 이곳에서 거의 20년을 보냈다.

이 길을 다시 밟고 서 있으니, 아주 오래전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도해산은 예술계에서 이름이 높았다. 고서화 보존처리 솜씨는 이미 경지에 닿아 있었다.

도해산은 본래 은퇴한 뒤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20년 전 예외를 두고 주예를 마지막 제자로 들였다.

어린 나이에도 주예가 남다른 재능을 보인 데다, 부모가 몇 번이고 찾아와 부탁한 끝에야 도해산이 마음을 돌렸다.

주예의 기억 속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집에서 쉬어야 했지만, 주예가 그림을 그릴 때 곁에 앉아 툭 던지듯 해 주던 말들은 늘 정확했다.

짧은 말에도 요점이 분명했고,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주예는 결혼했다.

그녀는 너무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은 길고, 결혼은 정성을 들여 가꿔야 하며, 꿈은 잠시 미뤄 둬도 괜찮다고.

나중에 다시 붙잡을 시간쯤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주예 곁에서 사라졌다.

부모도, 오빠도, 진후도.

그제야 주예는 깨달았다.

인생에는 애초에 ‘나중’이라는 게 없었다.

주예는 그 자리에 선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볼 거야.’

주예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익숙한 안료 냄새와 화선지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도해산은 돋보기를 쓴 채 허리를 굽히고 그림 한 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더니 주예를 보자마자 짧게 말했다.

“왔냐?”

주예는 오랜만에 보는 스승을 바라보다가 눈가가 조금 뜨거워졌다.

“스승님.”

“왔으면 일부터 해.”

도해산은 주예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손짓했다.

“이리 와서 이거부터 봐.”

작업대 위에는 군데군데 손상된 화조도 한 점이 펼쳐져 있었다.

종이는 푸르게 삭아 있었고, 물감층은 얼룩처럼 벗겨져 있었다.

그림에는 찢긴 자국도 여러 군데 남아 있었다.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주예는 바로 집중했다.

일회용 장갑을 끼고 스탠드 조명을 낮춘 뒤, 주예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종이 표면을 살폈다.

“손상 범위가 꽤 넓네요. 전에 한 번 손댄 적 있나요?”

주예가 물었다.

“그런 것 같지.”

도해산이 코웃음을 쳤다.

“근데 수준이 엉망이야. 채색 메움도 거칠고, 종이까지 눌려서 상했어.”

주예는 핀셋으로 도드라져 올라온 보수 재료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주예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건 먼저 불려서 떼어 내야겠어요. 그 다음 원래 결을 따라 다시 메워야 해요.”

“그래.”

도해산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은 안 죽었구나. 내 체면을 구기진 않았어.”

주예는 눈을 휘며 조금 웃었다.

“손이 조금 굳긴 했어요.”

“아예 망가졌으면 이 그림은 손도 못 대게 했어.”

도해산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어색하게 덧붙였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점검을 마친 주예는 장갑을 벗어 휴지통에 넣었다.

“잘 지냈어요.”

“그래.”

도해산은 짧게 답한 뒤 다른 두루마리 그림을 하나 꺼냈다.

“이건 네가 먼저 손 좀 풀어 봐.”

종이에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올라와 있었다. 작업실에서 맡은 소규모 의뢰 건이었다.

주예는 그림을 받아 펼쳤다. 손은 흔들림 없이 가장자리를 눌러 잡고 있었다.

그러자 주예의 마음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하루 종일 주예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종이를 정리하고, 아교를 풀고, 붓을 시험했다.

창밖 하늘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구름은 오전보다 더 낮게 내려와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앞으로 몇 주 동안 비가 이어진다고 했다.

오후가 되었을 때, 주예는 창밖을 한 번 본 뒤 진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스승님 일 좀 도와드리느라 늦을 것 같아.]

메시지를 보낸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진후의 답장이 왔다.

[몇 시쯤 끝나? 내가 데리러 갈게.]

주예는 짧게 답했다.

[그래.]

주예가 도구를 다 정리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주예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20분.

주예는 30분쯤 전, 진후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나 거의 끝나 가. 기다릴게.]

시간상으로 진후도 이제 도착할 때가 됐다고 여긴 주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때는 이미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주예는 처마 아래 서서 입구 쪽 플라타너스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9시 40분, 핸드폰이 한 번 울렸다.

[여보, 일이 좀 생겨서 늦어졌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예는 답했다.

[알았어.]

주예는 후드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9시 50분.

빗방울이 점점 촘촘해졌다.

젖은 공기가 목덜미를 타고 스며들었다.

주예는 골목 어귀를 바라봤다.

길에는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주예는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고 모자 챙을 더 눌러쓴 채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작업실 위치에서는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

주예는 거의 1킬로미터 가까이 뛰어간 뒤에야 겨우 택시 한 대를 붙잡았다.

“기사님, 하늘빌로 가주세요.”

차 문이 닫히자 빗소리가 바깥으로 밀려났다.

주예의 옷은 이미 전부 젖어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몸이 덜덜 떨렸다.

그제야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주예가 전화를 받았다.

[지금 급한 일이 좀 생겼어.]

진후의 목소리는 낮게 눌려 있었다.

[당신... 날 기다리지 말고 그냥 택시 타.]

“급한 일?”

주예는 눈을 감았다. 입가에 비웃는 기색이 얇게 스쳤다.

[응.]

진후가 잠깐 뜸을 들였다.

[규나 쪽에 새로 상황이 좀 생겼어. 나 지금 병원이야.]

역시 그랬다.

주예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한 번도 다르지 않네.’

“강규나 씨 어디가 안 좋은데?”

주예가 물었다.

[어제 사고 난 뒤에 좀 찰과상이 있었어.]

진후가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과를 보자고 하더라.]

진후는 뒤이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신도 괜한 생각 하지 마.]

“나 아무 생각 안 해.”

주예는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

[그래. 집에 도착하면 나한테 연락해.]

진후가 타이르듯 말했다.

[다음에는 내가 꼭...]

그 뒤 말은 병원 방송 소리에 묻혀 버렸다.

주예는 굳이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끊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가사도우미 여주댁도 이미 쉬고 있었다.

주예는 흠뻑 젖은 옷을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속 주예의 얼굴은 핏기가 조금 빠져 있었다. 머리도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주예는 감기약을 꺼내 물과 함께 삼킨 뒤 침대에 다시 누웠다.

한밤중이 되자 주예는 열기에 떠밀리듯 잠에서 깼다.

몸은 금방이라도 달아오를 듯 뜨거웠고, 머리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팔다리는 쑤시듯 아팠다.

말 한마디 꺼내는 일조차 힘이 들 것 같았다.

주예는 몽롱한 상태로 몸을 뒤척이며 침대 머리맡 물컵을 더듬었다.

손끝이 미끄러지자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누군가 문을 노크하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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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장은 온기가 완전히 걷힌 듯 차가웠다.빈소에는 정적만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영정 사진 앞에는 하얀 국화들만 가득 놓여 있었다.임주예는 아버지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무릎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바닥 안을 파고들 정도로 손가락을 세게 쥐고 있었다.'지금 손을 놓아 버리면, 나까지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옆에서는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한 대표는 어디 갔대? 아직도 안 왔어?""아직도 몰라? 공항에 마중 나갔다더라. 기사도 떴잖아.""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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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디까지나 주예를 배려하는 사람처럼 들렸다.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결국 진후 자신이 품고 있는 보잘것없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후는 주예가 늘 그랬듯 알아서 사양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래.” 주예가 받아들였다.“응? 뭐라고 했어?” 진후가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좋다고. 이제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당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예는 가볍게 웃었다.‘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다음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5화

    “사모님?”여주댁이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응...”주예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잔뜩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겨우 숨 섞인 소리만 흘러나왔다.여주댁은 급히 안으로 들어와 주예의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열이 너무 심하잖아요.”“비를 좀 맞아서 그런가 봐요.”주예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약은 먹었어요.”“이렇게 있으면 안 되죠.”여주댁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이대로 열이 더 오르면 큰일 나요.”여주댁은 곧장 핸드폰을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3화

    밤, 7시 반.주방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 차 있었다.도미찜은 찜기 위에서 김을 올리고 있었고, 갈비찜은 자작하게 졸아들고 있었으며, 두부는 반듯한 모양으로 가지런히 썰려 있었다. 냄비에 담긴 육수는 불 위에서 천천히 끓고 있었다.진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짙은 색 코트 안에는 날렵하게 재단한 수트를 받쳐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조금 풀어져 있었다.주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진후의 매서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주예는 주방에서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기척이 들렸는데도 주예는 돌아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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