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손발 땀쟁이
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디까지나 주예를 배려하는 사람처럼 들렸다.

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결국 진후 자신이 품고 있는 보잘것없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후는 주예가 늘 그랬듯 알아서 사양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

주예가 받아들였다.

“응? 뭐라고 했어?”

진후가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

“좋다고. 이제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당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예는 가볍게 웃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

다음 날 밤, 프라이빗 멤버십 라운지.

넓고 세련되게 꾸며진 메인 홀은 전 회원에게 열려 있었다.

조도는 낮았고, 벽에 줄지어 놓인 술병들이 금빛을 받아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VVIP 전용 룸이 이어졌다.

주예는 진후의 옆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주 단정한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화장도 옅었다.

룸 문이 열리자 안은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한 대표 왔네? 어, 오늘은 웬일로 여자까지 데리고 왔어?”

주예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이분이 사모님이세요?”

주예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예쁘시네요.”

누군가 주예를 훑어보듯 바라봤다.

“근데 진짜 좀 닮긴 했네요.”

그 말이 끝나자 공기가 잠깐 가라앉았다.

진후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면서 그 말을 한 사람을 바라봤다.

술이 조금 들어간 탓인지 뒤늦게 분위기를 알아차린 그 사람이 멋쩍게 웃었다.

“형수님 칭찬한 거예요. 진후 형, 보는 눈은 진짜 좋으시네요.”

다른 사람이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규나가 떠나자마자 형이 갑자기 결혼했잖아. 그 뒤로 3년 내내 형수님을 얼마나 꽁꽁 숨겨 뒀는지, 다들 형이...”

말끝이 거기서 한번 끊기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이 따라붙었다.

“됐어요, 여기까지만 할게.”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은근한 호기심과 구경거리를 만난 듯한 들뜸이 배어 있었다.

주예는 그 말들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다 들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을 집어 들었고, 주예는 직접 레몬 탄산수를 따라 부었다.

진후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그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한마디만 했다.

“술 좀 작작 마셔.”

“사모님은 무슨 일 하세요?”

한 여자 동석자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미술 전공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예전엔 그랬어요.”

주예는 무난하고 단정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집에 있어요.”

“집에 있는 것도 힘들죠.”

누군가 중간에서 분위기를 눙쳤다.

“한 대표 같은 일 중독자 챙기려면 보통 피곤한 게 아니잖아요. 한 대표가 원래 곁에 있는 사람한테 기준이 높잖아요.”

“그건 맞죠.”

또 다른 사람이 웃었다.

“진후 형 예전부터 그랬잖아. 회사 아니면 규나였는데...”

“그러니까. 진짜 예상도 못 했어. 규나는 외국으로 가버리고, 진후 형은 갑자기 결혼하고.”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일부러 주예 쪽을 바라봤다.

주예가 얼마나 불편해할지 보고 싶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주예는 피하지 않고 그 시선들을 마주 봤다.

오히려 더 궁금하다는 듯, 더 듣고 싶다는 듯 자연스럽게 눈을 맞췄다.

옷소매로 가린 채 손끝으로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조용히 켰다.

‘말할 거면 많이들 말해. 빠짐없이 다 남겨 줄 테니까.’

진후는 그런 주예의 반응을 보고 주예가 억지로 태연한 척한다고 여긴 듯했다.

뭔가 설명하려는 듯 입술이 움직였지만, 룸 문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막혔다.

“왔다, 왔어.”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주인공 왔네.”

규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단색 팬츠 차림 위에 캐시미어 숄을 걸쳤고, 가볍게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는 느슨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다.

길고 흰 목선이 드러났다.

규나는 익숙한 몸짓으로 룸 안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넸다.

곧 누군가 규나의 팔을 잡아 끌면서 진후의 오른편에 앉게 했다.

주예는 진후의 왼편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한 바퀴 돌리자며 술을 권했다.

규나는 조금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가볍게 당황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나 술 안 마셔.”

“규나야, 왜 이래. 예전엔 술 꽤 잘 마셨잖아?”

“외국 나간 뒤로는 안 마셨어. 이제는 진짜 못 마셔.”

상대가 한 번 더 권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진후가 곧장 규나 손에 들린 잔을 받아 갔다.

말투에는 여지를 두지 않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규나는 안 마셔. 내가 대신 마실게.”

“와, 한 대표 멋있네. 대신 막아 주는 거면 두 배로 마셔야지.”

누군가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띄웠다.

다른 사람이 힐끗 주예를 봤다.

“형수님도 한잔하시죠? 오늘 형수님 보기 쉽지 않았는데.”

주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후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였다.

“여보, 친구들하고 조금 마셔. 처음 보는 자리인데 분위기 깨면 안 되잖아.”

“형수님, 한잔!”

여기저기서 맞장구가 이어졌다.

주예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웃음은 예의 바르고 매끄러웠다.

“미안해요. 요즘 감기 기운이 있어서 집에서 나오기 전에 감기약 먹고 왔어요.”

주예는 잔을 가볍게 밀어 놓았다.

“먼저들 드세요.”

이어서 주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저 먼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주예는 몸을 돌려 룸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안쪽의 소란과 음악은 문 반대편으로 깔끔하게 밀려났다. 복도는 놀랄 만큼 조용했다.

주예는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 주예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낯설 정도로 조용한 표정만 남아 있었다.

핸드폰이 한 번 울렸다.

장연에서 온 메시지였다.

[서류 정리는 거의 끝났습니다. 소송 절차는 언제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예는 화면 위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손끝이 천천히 액정을 두드렸다.

‘그래. 이제 정말 끝낼 수 있어.’

다시 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누군가 크게 외치고 있었다.

“뽀뽀해! 뽀뽀해!”

“한 대표, 뽀뽀 한 번 하지!”

주예는 문밖에 선 채 장연에게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저도 준비됐어요.]

진후는 규나 대신 꽤 많은 술을 받아 마신 상태였다.

그 바람에 술기운이 올라와 있었고, 진후는 이마를 짚은 채 소파에 기대 있었다.

주예는 이미 챙길 건 다 챙겼다.

이제는 나갈 핑계만 만들면 됐다.

‘딱 좋아. 여기서 정리하면 돼.’

주예는 진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예는 다정한 척 진후의 허리를 감아 안고, 걱정하는 말투를 흉내 냈다.

“여보, 이렇게 많이 마셔서 괜찮아? 우리 이따가 할머니 댁에도 가야 하잖아.”

주예는 곧 고개를 들어 룸 안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웃어 보였다.

“저희는 먼저 일어날게요. 다들 편하게 즐기세요.”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자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굳이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 한마디로 진후에게 더 다가오려던 규나의 걸음도 자연스럽게 멈췄다.

진후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 주예가 자신을 남편처럼 챙기는 말을 들었다.

결혼 초반을 빼면, 주예가 그렇게 불러 준 적은 오래전 일이었다.

진후는 잠깐 현실감이 흐려졌다.

주예가 이끄는 힘을 별 의심 없이 따라 일어섰고, 그렇게 주예에게 거의 반쯤 끌리다시피 룸 밖으로 나왔다.

주예는 진후를 차에 태우자마자 뒷좌석에 툭 밀어 넣었다.

운전기사가 앞에서 차를 몰았고, 주예와 진후는 뒷좌석 양끝에 따로 앉았다.

가운데에는 선 하나라도 그어 놓은 듯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운전기사가 창문을 조금 내렸다.

찬 바람이 안으로 스며들자 진후의 정신이 한결 또렷해졌다.

“오늘 좀 시끄러웠지.”

진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뭘?”

주예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진후를 봤다.

“다들 술이 들어가서 말 조심을 못 했어.”

진후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당신도 알잖아. 다들 어릴 때부터 같이 봐 온 사이라, 우리 일을 가지고 쉽게 농담해.”

“응.”

주예는 대충 맞장구를 쳤다.

“당신과 강규나 씨가 어릴 때부터 같이 컸고, 다들 두 사람이 걸어온 시간을 처음부터 봐 왔겠지.”

진후는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여보, 요즘 예전보다 더 말이 없어졌어.”

“원래 조용했어.”

주예는 담담하게 입가를 휘었다.

“당신이 제일 좋아했던 점이 그거 아니었어?”

진후는 말문이 막혔다.

한참 뒤, 진후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나랑 친한 지인들 말하는 방식이 원래 저래. 내가 예전에 당신을 저 사람들한테 안 데려갔던 것도, 당신이 불편해할까 봐 그랬어. 다음부턴 안 가도 돼.”

“괜찮아.”

주예가 말했다.

“어차피 앞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을 테니까.”

진후가 고개를 돌려 주예를 봤다.

“그게 무슨 뜻이야?”

주예는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100화

    주예는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묵직한 인기척이 한꺼번에 밀려들더니, 주예의 몸이 뜨거운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등은 차가운 문에 닿았다.곧바로 거칠고도 집요한 키스가 이어졌다.힘이 너무 강해서 주예는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예는 타이밍을 봐서 상대의 입술을 콱 물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익숙한 서늘한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주예는 잠깐 멍해지면서, 몸에 들어가 있던 힘도 풀렸다.그 변화를 눈치챈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목구멍 안쪽에서 흘러 나왔다.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키스는 더욱 거칠어졌다.커다란 손바닥이 주예의 뒷머리를 단단히 감쌌다. 다른 손은 주예의 뺨을 따라 내려와 목덜미를 스쳤고, 드레스 선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지다가 마침내 허리를 정확히 움켜쥐었다. 그 손으로 주예의 몸을 자기 쪽으로 더 세게 끌어당겼다.“읏...”숨이 달리자 주예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주예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상대의 수트를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남자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남자는 어둠 속에서 붓고 젖은 주예의 입술을 손끝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목소리는 깊이 잠겨 있었다.“그 사람이랑 이혼해.”그제야 숨을 돌릴 틈이 생긴 주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방금 전까지 너무 심하게 휘말린 탓에 눈가에도 붉은 기운이 번져 있었다.주예는 조금 전, 어둠 속에서 거리낌 없이 밀고 들어오던 정재를 떠올렸다. 바깥 홀에서 하늘과 나란히 서 있던 모습도 같이 겹쳐졌다. 주예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정재의 가슴을 밀어냈다.“누군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런 말 하는 거 진짜 어이없네.”주예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그래도 방금 키스는 제법 괜찮았으니까, 지금 나가면 그 일은 그냥 개한테 한 번 물린 셈 치고 넘어가 줄게.”정재는 그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99화

    그때 정재는 고홍근 옆에 서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단정하고 우아한 하늘을 향한 정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선에는 가늠해 보려는 뜻이 서려 있었다.그런데 그 눈길은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혔다.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쪽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이들 사이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번졌다.“고홍근 회장이 손녀까지 직접 데리고 나온 걸 보니 의도가 뻔하지. 심씨 가문 안주인 자리를 노리는 거 아니겠어?”“고하늘 씨는 그럴 만하지. 그 또래 가운데선 고씨 가문에서 제일 잘나가는 편이잖아. 고홍근 회장도 기대를 많이 거는 것 같고.”“고하늘 씨가 심정재 회장님 옆에 서 있으니까 참 잘 어울리긴 하네. 딱 금수저 커플 같잖아.” “심정재 회장님이 보는 눈빛 못 봤어? 누가 봐도 서로 마음 있는 분위기던데.”“아, 진작 알았으면 나도 우리 조카 데려와 볼 걸 그랬네. 혹시 알아? 심정재 회장 눈에 들지.”“그만해. 네 조카가 하늘이만 하겠냐?”“못하면 어때. 우리 조카도 나름 장점은 있지. 남자야 원래 선택지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말은 점점 거칠어졌다. 주예는 듣고 있을수록 속이 답답해졌다.‘시끄럽네.’주예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진후가 다가와 주예의 어깨를 감쌌다.“왜 그래? 몸이 안 좋아?”정재는 내내 시선을 주예 쪽에 걸쳐 두고 있었다. 그때 진후의 손이 주예의 어깨를 감싸는 게 보이자, 정재의 눈이 확연히 달라졌다.옆에 서 있던 진석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질 듯한 정재의 기색을 읽은 진석은 바로 움직였다. 표정부터 다시 정리했다.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걸친 진석이 재빨리 진후 쪽으로 다가갔다.“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심정재 회장님 비서 진석이라고 합니다.”“아, 과분하십니다. 무슨 일로 말씀 주셨습니까?”진후는 뜻밖이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대표님께서 로즈 화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계시다고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98화

    진후의 눈에 오늘 가장 중요한 상대는 정재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일들은 그저 곁가지에 불과했다. 아직 본격적인 자리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방금 강규나 씨 봤어. 가서 몇 마디도 했고.”주예가 의미를 담아 말했다.‘그러니까 네 첫사랑한테 가.’‘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그런데 진후는 그 속뜻을 전혀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주예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흘러내린 잔머리까지 손수 정리해 주며, 자상한 남편인 척 행동했다.바로 그때 정재가 모습을 드러냈다.정재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쓸어 담는 사람이었다. 홀 안의 공기가 단숨에 정리되는 듯했다. 정재는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원단 위에는 가시 돋친 장미 덩굴 문양이 어둡게 수놓아져 있었다.“오늘 이 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내놓아 주신 소장품은 마지막에 전부 자선 목적으로 쓰이게 됩니다.”“그래서 먼저 기증받는 분들을 대신해 감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사업 이야기는 내려놓고, 작품 이야기만 했으면 합니다. 모두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정재가 말을 마치자,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아까까지 오가던 형식적인 치켜세우기는 흐릿해졌고, 대화는 오늘 나온 작품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오늘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 합쳐도 스무 명이 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정재에게 들러붙듯 다가가는 장면은 벌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심정재 회장에게 초청받아 이 자리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인정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정재는 가장 먼저 고홍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정재야, 오늘 내놓은 것들 참 대단하더라. 하나만 따로 꺼내 놔도 경매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것들이야.”고홍근이 감탄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칭찬에는 진심이 실려 있었다.“과찬이십니다, 회장님.”“하늘이는 내가 굳이 소개 안 해도 되겠지? 너희도 알게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97화

    “규나가 어릴 때 생각이 아직도 나요. 하얗고 말랑말랑한 작은 떡 같았고, 성격도 워낙 발랄해서 가만히 있질 못했잖아요.” “그때 제가 옆집에 살아서, 맨날 규나랑 놀겠다고 찾아가곤 했습니다.”진후는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말하면서도, 시선 한쪽으로는 강빈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강빈은 아주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났다. 그래서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그 뒤 5년 동안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부모가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뒤에야 강빈은 학업을 멈추고 급히 귀국해야 했다. 장례식장과 병원을 오가던 그때, 강빈이 처음으로 여동생을 본 때였다.“내가 돌아왔을 때 규나는 병원에 있었어. 그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당연히 넋이 나가 있었겠지.”강빈의 말 사이사이에는 동생을 향한 안쓰러움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진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사고가 났을 때, 규나도 차 안에 같이 있었던 거죠?”“그래. 부모님은 끝내 못 돌아오셨지만, 다행히 규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어. 좀 많이 놀랐을 뿐이지. 그건 아마 돌아가신 부모님이 지켜 준 거겠지.”거기까지 말한 강빈은 진후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네가 규나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지 나도 다 알아. 반쯤 오빠 노릇까지 해 준 셈이잖아. 네가 옆에 있으니까, 나도 마음이 좀 놓였어.”그 말을 들은 진후의 속을 싸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역시... 강빈 형님은 규나가 친여동생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계셔.’진후는 아무 뜻 없는 말처럼, 가볍게 아쉬움을 섞어 말을 이었다.“그래도 저는 늘 좀 아쉬웠습니다. 규나가 다섯 살 이전 일은 거의 전혀 기억을 못 하시더라고요. 물론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죠.”“어릴 때 제가 같이 놀다가 규나 발을 다치게 한 적이 있었거든요. 발바닥에 흉터도 남았고요.”“규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상처였는지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던데, 만약 기억했으면 워낙 꾸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평생 저를 원망할지도 모릅니다.”강빈의 눈이 가늘어졌다.뭔가 이상했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96화

    주예는 홀 안을 가득 메운 서화와 고서, 골동품 진열장을 천천히 둘러봤다. 직업 때문인지, 주예는 그런 물건을 보면 저절로 걸음을 늦추게 됐다. 시선도 하나씩 오래 머물렀다.그러다 겉보기에는 수수하고 오래된 잔 앞에서 주예의 표정이 다시 묘하게 바뀌었다.그 물건은... 어릴 적 정재의 거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주예는 철이 없었고, 장난도 심했다. 주예는 그 잔으로 붓을 헹군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정재는 끝까지 그 물건이 얼마나 귀한 건지 한마디도 꺼낸 적이 없었다.진후는 그런 주예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주예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하고 굳어 있는 걸 본 진후는, 주예가 아직도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받아들였다. 진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앞으로는 이런 자리에 더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네.’그때 규나와 강빈도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규나는 들어오자마자 진후를 발견했다. 지난번 병원 소동 이후, 진후는 규나를 얼음처럼 차갑게 대했다.규나는 몇 번이나 진후를 찾아갔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규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그날 조금 심하게 밀어붙였나?’그래서 오늘은 강빈을 따라 이 자리에 왔다. 규나는 진후한테 조금 살갑게 굴고,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여 주면 분위기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진후 옆에 선 사람이 주예라는 걸 본 뒤, 규나는 그대로 표정이 굳어졌다.진후가 주예를 데리고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질투가 규나의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었다.규나는 숨을 크게 한 번 고른 뒤, 진후를 스쳐 지나서 주예 쪽으로 다가갔다. 규나는 친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척 자연스럽게 웃었다.“주예 언니,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세요?”규나는 주예의 시선이 머문 쪽으로 함께 고개를 돌렸다.“아, 보고 계신 게 이 청화백자 용무늬 잔이군요.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거예요. 원래는 한 쌍이었다고 하는데, 전란을 거치면서 하나가 유실됐다고 하더라고요”“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이 한 점이 더 귀

  •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제95화

    모임이 열리는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의 비밀스러운 개인 저택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저택 입구에는 경호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고 각종 최고급 차량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주예는 도요타 미니밴에서 내렸다. 멀리서도 진후의 상징처럼 익숙한 검은색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 주예는 그쪽으로 곧장 걸어갔다.진후는 주예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준비해 둔 드레스 안 입었네?”“무슨 드레스?”주예가 잠깐 멈칫했다.“오늘 아침 일찍 사람 시켜서 당신 작업실로 보내 놨잖아.”주예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제야 작업실 쪽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걸 놓친 모양이었다. 주예는 담담하게 말했다.“오늘은 작업실에 안 갔어.”주예가 핸드폰을 보는 모습을 본 진후는 더 강하게 인상을 썼다.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작업실 가서 드레스 찾아와. 최대한 빨리.”전화를 끊은 진후 마음속에는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처음으로 주예를 이런 급의 모임에 데리고 왔는데, 주예는 이 자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부분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주예는 진후 표정을 보고도 조금도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한 대표.”주예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내가 지금 입은 옷이 당신 체면을 깎는다고 생각되면, 난 그냥 돌아갈게. 앞으로 이런 자리엔 굳이 부르지 마.”주예가 오늘 입은 건 짙은 녹색 벨벳 드레스였다. 장식은 많지 않았다. 대신 가슴 위에 보석 브로치 하나만 달려 있었다. 이런 디자인이 단순한 옷일수록 입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다. 그런데 주예는 빛이 날 정도로 흰 피부 덕분에 오히려 그 절제된 디자인을 훨씬 더 고급스럽게 살려 냈다.진후는 주예의 한마디에 바로 말문이 막혔다.“내 뜻은 그게 아니야. 됐어, 일단 들어가자. 드레스가 도착하면 그때 갈아입으면 되니까.”경호 인력이 초대장을 확인한 뒤, 도어맨이 공손하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