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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랑은 계약 사항에 없었다

Author: 노에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18:19:24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서윤과 강도윤에게는 그랬다.

두 사람의 결혼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선택이었다. 어느 한쪽이 절박해서 매달린 것도 아니었고, 집안의 강요에 굴복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양가 모두 두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제는 두 사람이 그 선택권을 거절하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 달 전, 한서윤은 아버지의 서재에 앉아 결혼 제안서를 읽고 있었다. 제안서의 첫 장에는 강명그룹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강명그룹. 국내 유통과 금융, 부동산, 투자 사업을 아우르는 대기업이었다. 그중에서도 최근 공격적인 사업 확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계열사가 강명인베스트먼트였다.

그리고 그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 바로 강도윤이었다.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

아버지가 말했다. 서윤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왜요? 조건이 별로예요?”

“조건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결혼은 사업 계약과 다르니까.”

“저는 사업 계약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꼭 그렇게 말해야겠느냐?”

“그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말씀드릴까요?”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강도윤 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

“그럼 남는 건 서로에게 필요한 조건뿐이죠.”

그녀는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양가의 사업적 협력. 신사업 진출을 위한 자본과 네트워크의 공유. 장기적인 경영 안정성. 그럴듯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서윤에게 중요한 건 그럴듯한 명분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업이었다.

한서윤은 한경그룹 장녀라는 이름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가 일군 회사를 물려받아 적당히 관리하는 후계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키우고, 자신의 판단으로 시장을 움직이고, 누구도 자신을 누군가의 딸이라는 이유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자본도, 인맥도, 경영권을 둘러싼 내부의 신뢰도 필요했다. 강명그룹과의 결혼은 그 모든 것을 조금 더 빠르게 얻을 기회였다.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잘 알지는 못하죠.”

“그런데도?”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오히려 편하죠.”

서윤은 서류를 덮었다.

“괜히 서로 좋아했다가 헤어지기라도 하면 피곤하잖아요.”

“서윤아.”

“아버지.”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 결혼한다고 제 인생까지 넘길 생각은 없어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딸을 바라봤다.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그였다.

“강명 쪽에도 같은 뜻을 전달하마. 네가 원한다면.”

“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기 직전, 아버지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정말 괜찮겠느냐?”

서윤은 잠시 멈췄다. 괜찮으냐고. 그 질문은 조금 이상했다. 결혼이 행복할 수 있을지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다. 강도윤이라는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지 묻는다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선택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괜찮아요.”

서윤은 웃었다.

“제가 선택한 거니까요.”

***

강도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결혼 제안을 받은 날,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답을 내렸다.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생각은 해 봤느냐?”

“충분히요.”

“한서윤 양과는 몇 번 만나 보지도 않았잖아.”

“그렇다고 결혼한 뒤에 더 잘 알게 된다는 보장도 없죠.”

“너는 결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구나.”

도윤은 피식 웃었다.

“가볍게 생각하니까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도윤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조건부터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 서로의 사업에 간섭하지 않고, 경영권을 보장하고, 결혼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면 정리하는 것까지.”

“사랑은?”

“없습니다.”

대답이 지나치게 빨랐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느냐?”

“적어도 지금은요.”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랑이 없다고 해서 결혼을 못 할 이유도 없죠.”

그에게 결혼은 삶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삶에는 목표가 있었다. 강명인베스트먼트의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경영 능력을 증명하는 것. 그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방이 그만큼 합리적인 사람이어야 했다. 한서윤은 그런 점에서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머리가 좋고, 자기주장이 분명하며, 집안의 배경에 기대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여자.

무엇보다 그를 향해 불필요한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도윤은 여자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는 많았고, 그중에는 그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한서윤은 달랐다. 몇 년 전 한 행사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도윤의 미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웃으니까 더 무서우시네요.’

그가 이유를 묻자 서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서요.’

그는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적어도 자신을 좋게 보이게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두죠.”

도윤이 말했다.

“결혼하더라도 제 사업은 제가 결정합니다.”

“한서윤 양도 같은 조건을 원할 거다.”

“그럼 문제없겠네요.”

도윤은 미련 없이 대답했다. 그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결혼.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리고 언젠가 필요가 없어지면 끝낼 수 있는 약속.

그는 그런 결혼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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