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의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결혼을 전제로 만난 자리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서로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좋아하는 음식도, 취미도, 연애 경험도 묻지 않았다. 대신 신사업의 전망과 투자 계획, 경영권 보장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식사가 끝날 무렵, 서윤이 먼저 제안했다.“우리 따로 이야기할까요?”도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호텔 라운지의 구석진 자리에 마주 앉았다. 서윤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미리 정리해 봤어요.”도윤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첫 장에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혼인 및 이혼에 관한 합의서.그는 짧게 웃었다.“준비성이 좋으시네요.”“불필요한 분쟁은 미리 막는 게 좋으니까요.”“동의합니다.”서윤은 핵심 조항을 짚었다.첫째, 각자의 사업과 경영권에 간섭하지 않을 것.둘째, 양측이 합의한 사업 목표와 경영 기반이 충족되면 이혼할 수 있을 것.셋째, 각자의 연애와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을 것.넷째, 사랑이나 정서적 의무를 요구하지 않을 것.도윤은 서류를 천천히 넘겼다.“연애 상대가 생겨도 서로에게 알릴 의무는 없고요?”“네. 다만 외부에 알려져 양가 사업에 손해가 생길 만한 일은 피해야겠죠.”“좋습니다.”“그리고 이혼 시 재산 문제로 서로 발목 잡는 일도 없었으면 해요.”“그건 변호사와 별도로 정리하죠.”도윤은 펜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한서윤 씨.”“네.”“정말 저와 결혼할 생각입니까?”서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강 대표님은 아니세요?”“저는 하고싶습니다, 이 결혼.”“그럼 됐네요.”“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있고요?”서윤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아요.”도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그건 마음에 드네요.”“저도 강 대표님이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분이라 다행이에요.”두 사람은 마침내 서명했다.서로를 향한 사랑을 맹세하는 대신, 서로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언젠가 헤어질 권리를 약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다.
Last Updated : 2026-10-1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