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윤은 한참 동안 방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우스웠다.
자신이 먼저 결혼을 제안한 것도 아니고, 한서윤이 결혼을 원한다고 했을 때 조건을 검토한 뒤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서로의 사업을 위해 필요한 결혼이었고, 각자의 연애를 허용하는 것에도 동의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사생활을 신경 쓴단 말인가. 도윤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세린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와 있었다.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그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그래. 그럼 다음에 봐.]
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향하던 중, 서윤의 방문이 열렸다. 잠옷 차림의 서윤이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복도로 나왔다.
“응. 나도 보고 싶어.”
도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니, 목소리보다 그 표정이 낯설었다.
서윤은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웃고 있었다. 상대방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꼭 보자. 약속.”
잠시 후 통화가 끝났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내리다가 그제야 복도에 서 있는 도윤을 발견했다.
“…아직 안 잤어요?”
“아직.”
“아.”
서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도윤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태하 씨?”
서윤이 물을 마시다 말고 돌아봤다.
“네?”
“통화한 사람.”
“그걸 왜 물어요?”
“그냥.”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맞아요.”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컵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강도윤 씨.”
“왜.”
“자꾸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도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내가 뭘.”
“태하 얘기만 나오면 묘하게 기분 나쁜 사람처럼 굴잖아요.”
“착각이야.”
“그래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녀는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저는 태하한테 미안해지고 싶지 않거든요.”
그 말에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 미안한데?”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제가 결혼했잖아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태하가 저를 좋아하는데, 저는 다른 남자랑 결혼했으니까.”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태하는 저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가 행복하면 된다고 하거든요.”
“…….”
“그러니까 저도 그 사람한테 잘해 주고 싶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런데도 서윤은 그 남자에게 잘해 주고 싶다고 했다.
도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 남자는 서윤에게 무엇을 해 주었길래. 자신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듣는 걸까.
“좋겠네.”
결국 그가 내뱉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네?”
“그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뜻밖에도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네. 좋아요.”
도윤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서윤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태하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그녀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잘 자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좋은 사람. 한서윤에게 좋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자신은 그저 남편일 뿐이었다. 그것도 언젠가 헤어지기로 약속한.
도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거면 됐다. 애초에 그가 원했던 것도 바로 그런 관계였다.
그런데 왜 지금은.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기분 나쁜 걸까.
***
강도윤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기분이 나쁜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대표님, 오늘 저녁 일정 다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비서의 목소리에 도윤은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말해 봐요.”
“오후 다섯 시에 한경그룹과 공동 투자 관련 회의가 있습니다. 이후 일곱 시부터 양가에서 주최하는 자선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서윤 사모님과 함께 참석하시는 일정입니다.”
도윤의 펜이 멈췄다.
“…그건 왜 다시 말합니까?”
“두 분이 함께 참석하시는 첫 공식 행사라 확인차 말씀드렸습니다.”
“취소할 생각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간 뒤에도 도윤은 한동안 서류를 넘기지 않았다.
한서윤. 어젯밤 통화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응. 나도 보고 싶어.'
'내일은 꼭 보자. 약속.'
도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미친. 이제는 남의 통화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쓸 줄은 몰랐다.
결혼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한서윤은 생각보다 훨씬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여자였다.
특히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
오후 일곱 시.
호텔 연회장에는 정재계 인사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양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자선 행사인 만큼 규모가 상당했다. 각 기업의 대표와 주요 임원, 재단 관계자들이 참석했고,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단연 강도윤과 한서윤이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한 투자사의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서윤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윤 역시 적당히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완벽한 부부였다.
서로의 팔을 가볍게 맞댄 채 미소를 짓고,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 전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받았다. 사업과 관련된 질문에는 서로의 전문 분야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카메라 앞에서는 다정한 부부처럼 행동했다.
누가 보더라도 서로를 잘 이해하는 이상적인 부부였다.
물론 그들 사이에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늘은 남편분과 함께 오셨네요.”
한 여성이 서윤에게 말을 걸었다.
“네. 공식 행사니까요.”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세요.”
서윤은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도윤의 팔에 얹혔다. 도윤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서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던 여자가 카메라 앞에서는 망설임 없이 팔을 잡았다.
그것이 계약에 따른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윤은 이상하게 그 손을 의식했다.
“강 대표님.”
옆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도윤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말씀하시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연회장 입구에서 한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도윤의 시선은 다시 멈췄다.
윤태하였다. 검은색 턱시도에 단정하게 넘긴 머리. 군더더기 없는 이목구비와 여유로운 걸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외모였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주변을 편안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그는 입구에서 몇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다가 서윤을 발견했다. 그리고 웃었다.
서윤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하지만 도윤은 알아차렸다.
그녀의 눈매가 부드러워졌고, 입가의 미소가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들어 낸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하야.”
그 두 글자가 도윤의 귀에 유난히 선명하게 박혔다. 태하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다행이네.”
태하는 서윤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살펴보더니 웃었다.
“오늘 예쁘다.”
서윤이 눈을 흘겼다.
“평소에는 안 예쁘다는 뜻이야?”
“평소에도 예쁘지.”
태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늘은 조금 더.”
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저 남자는 말을 참 쉽게 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예쁘면 예쁘다고 말했다.
도윤은 그런 말들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한서윤은 그런 쓸모없는 말에 웃고 있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윤아.”
태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깐 괜찮아? 인사드릴 분이 계셔서.”
“응. 가자.”
서윤은 자연스럽게 태하를 따라 움직였다. 그 순간 도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서윤이 자신의 팔에서 손을 떼고 태하에게 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녀는 계약을 위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강 대표님?”
옆에 있던 투자사 대표가 그를 불렀다.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시죠.”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다만 손에 쥔 잔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오후 여섯 시.서윤은 회사 로비에서 태하와 헤어지고 있었다.“오늘 고마웠어.”“내가 뭘 했다고.”“그냥… 들어 줘서.”태하는 그녀를 바라봤다.“다음에는 네가 내 얘기 들어 줘.”서윤이 웃었다.“무슨 얘기?”“내가 얼마나 오래 널 좋아했는지.”“야.”“농담 아니야.”태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다음에는 정말 제대로 이야기할게.”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리고 대신 그녀의 어깨에 걸친 가방끈을 바로잡아 주었다.“들어가. 늦겠다.”“응. 너도 조심히 가.”서윤이 돌아서려는 순간, 태하가 그녀를 불렀다.“서윤아.”“응?”“나,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윤은 그를 바라봤다. 태하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런데 그 행복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그 말은 고백보다 조용했고, 그래서 더 깊이 남았다.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하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가. 다음에 보자.”그가 먼저 돌아섰다.서윤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정말 나쁜 사람.”태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걸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리고 그 순간.“한서윤.”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강도윤이 서 있었다.“…여기서 뭐 하세요?”“미팅이 근처에서 끝났어.”“아, 그러세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먼저 가세요. 저도 가야 해서.”그녀가 지나치려는 순간, 도윤이 물었다.“윤태하 만났어?”서윤은 걸음을 멈췄다.“네.”“무슨 이야기 했는데?”서윤의 표정이 굳었다.“그걸 왜 물어보세요?”도윤은 잠시 침묵했다.“그냥.”“그냥이요?”서윤은 짧게 웃었다.“강도윤 씨, 저한테 관심 없다고 하셨잖아요.”“…….”“제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다고도 하셨고요.”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래서?”“그런데 왜 자꾸 물어보세요?”서윤은 그를
월요일 아침.강도윤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한서윤 씨는 아직 안 내려오셨습니까?”그가 묻자 집사가 대답했다.“오늘은 일찍 출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침도 회사에서 드신다고요.”“…그래요?”도윤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했을 일이었다. 서윤은 원래 자기 일정에 간섭받는 걸 싫어했다. 아침을 먹든 말든, 일찍 출근하든 늦게 출근하든,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그런데 오늘따라 식탁이 지나치게 넓어 보였다.도윤은 시계를 확인했다.오전 7시 42분. 서윤이 평소 집에서 나가는 시간보다 삼십 분은 빨랐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그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정확히 십 초 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오늘 일정이나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화면을 켜자마자 서윤과의 대화창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대화는 사흘 전이었다.[오늘 양가 식사 일정 잊지 마세요.]그가 보낸 메시지.[네, 확인했습니다.]서윤의 답장. 딱 그게 전부였다.도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잘됐네.”대화할 일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는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출근하는 내내 서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연락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정말로.***한편, 한서윤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 윤태하를 만나고 있었다.“너 요즘 바쁘지?”태하가 물었다.“응. 신사업 때문에 정신없어.”“잠은 잘 자고?”“당연하지.”“거짓말.”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가?”“너 피곤하면 오른쪽 눈부터 비비잖아.”태하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가리켰다.“지금도 그러고 있네.”서윤은 무의식적으로 눈가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태하는 늘 그랬다. 서윤이 좋아하는 커피가 무엇인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떤 음식을 찾는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괜찮지
저녁 일곱 시.양가 식사 자리는 예상보다 화기애애했다. 양가 부모님은 공동 사업의 진행 상황을 이야기했고,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해야 할 공식 행사에 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서윤은 평소처럼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도윤 역시 빈틈없이 행동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고, 누가 보더라도 사이가 좋은 부부였다.적어도 겉으로는.“요즘 두 사람은 어때?”서윤의 어머니가 물었다. 서윤은 미소를 지었다.“좋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도윤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서윤이가 잘해 줘서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서윤은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줬다.'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도윤은 태연했다.“그렇지, 여보?”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여보? 방금 여보라고 했어?'도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그럼요. 저희 남편이 워낙 잘해 주셔서요.”이번에는 도윤의 손이 멈췄다. 양가 부모님은 흐뭇하게 웃었다.“아이고, 신혼이라 그런가. 둘이 보기 좋네.”“그러게요. 도윤이가 원래 저렇게 살갑게 구는 애가 아닌데.”서윤은 환하게 웃었다.“집에서는 더 잘해요.”도윤은 물을 마셨다. 서윤은 그가 잔을 내려놓는 순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남편 노릇 잘하시네요.”도윤도 웃는 얼굴로 답했다.“너도 아내 노릇은 잘하네.”“그럼요. 계약은 지켜야 하니까요.”“…그래.”그는 미소를 유지했다.“계약은 지켜야지.”두 사람의 웃음은 완벽했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에서 서윤의 구두 끝이 도윤의 구두를 살짝 건드렸다. 실수인 척.도윤이 그녀를 돌아봤다. 서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을 마셨다.도윤은 낮게 웃었다.이 여자.정말 보통이 아니었다.***식사가 끝난 뒤.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올랐다.문이 닫히자마자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여보는 무슨 여보예요?”도윤은 안전벨트를 매며 대답했다.“부부니까.”“평소에는 이름도 제대로 안 부르시면서요.”“부
오후 네 시 삼십 분.강도윤은 예정에 없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정확히는, 회사 관계자와의 미팅이 근처에서 끝났다.그는 비서가 준비한 차에 오르려다가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리고 보았다.한서윤. 윤태하.두 사람은 전시관을 나오는 중이었다.태하가 서윤의 코트 깃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서윤은 웃으며 무언가를 말했고, 태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오래된 연인처럼.도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대표님?”비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태하가 서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길을 건너려 했다. 그때 서윤이 웃으며 무언가를 말하자 태하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차 대기시켜.”“네?”“저쪽으로.”비서는 도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사모님이 계시네요.”“못 봤나?”“아닙니다.”“그럼 움직여.”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 검은색 세단이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마침 서윤과 태하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이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한서윤.”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강도윤?”도윤은 태하를 한 번 바라본 뒤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타.”서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뭐라고요?”“집에 가야 하잖아.”“아직 시간 남았는데요?”“양가 식사.”“알아요. 여섯 시 반까지 들어가면 되잖아요.”도윤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지금 네 시 반이야.”“그러니까요.”“차 타.”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강도윤 씨.”“왜.”“저 지금 태하랑 같이 있잖아요.”“보이는데.”“그런데 왜요?”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이 웃었다.“설마 데리러 오신 거예요?”“지나가는 길이야.”“아, 지나가는 길.”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가던 길 가세요. 저희도 알아서 갈게요.”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태하가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괜찮습니다. 제가
토요일 오후 두 시.한서윤은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태하와 보내는 주말이었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전시회를 보고, 시간이 남으면 카페에 들를 생각이었다.평범한 데이트. 그런데 옷을 고르는 데 평소보다 십 분이나 더 걸렸다. 서윤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좁혔다.“…뭐 하는 거야, 한서윤.”누구를 만나든 평소처럼 입으면 그만이었다.태하를 만나는 데 특별히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어색할 리도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너 오늘 누구 만나?'물어볼 리도 없는 남자였다.'누굴 만나든 내 알 바 아니야.'분명 그렇게 말할 사람이었다. 서윤은 립스틱을 내려놓았다.“아, 몰라.”가방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그 순간이었다.“어디 가?”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강도윤이었다.주말인데도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소파에는 펼쳐 놓은 서류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식어 가는 커피가 있었다.서윤은 시계를 확인했다.“약속 있어요.”“누구랑?”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걸 왜 물어보세요?”도윤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주말에 외출한다니까 물어본 거야.”“제 외출 일정까지 보고해야 하나요?”“그런 말 안 했어.”“그럼 왜 궁금한데요?”그제야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윤태하?”서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와.”“뭐.”“진짜 신기하다.”“뭐가.”“제가 누구 만나는지 관심 없다고 하시는 분이 이름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시네요.”도윤의 표정이 굳었다.“그쪽이 네 주변에서 제일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니까.”“제가 언제 그렇게 자주 언급했어요?”“됐어. 나갈 거면 나가.”“네. 그러려고요.”서윤은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으려는 순간, 도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한서윤.”“이번엔 또 왜요?”“너
서윤의 손이 멈췄다.“…그건 왜 궁금하세요?”세린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저는 도윤 씨를 오래 봐 왔으니까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런데 결혼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갑작스러웠거든요.”“그랬겠네요.”“혹시 두 분, 정말 서로 좋아해서 결혼한 건 아니죠?”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그럼 다행이에요.”서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뭐가 다행이라는 거죠?”“도윤 씨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저를 떠난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요.”세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저는 도윤 씨와의 관계를 쉽게 정리할 생각이 없어요. 물론 결혼하셨으니 예전처럼 만날 수는 없겠죠.”그녀는 서윤을 똑바로 바라봤다.“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저도 확인해 보고 싶어요.”서윤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해는 됐다. 세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과 도윤의 결혼이 사업적 합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서윤은 그 감정을 굳이 분석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정세린 씨.”“네.”“도윤 씨가 뭘 원하는지는 도윤 씨에게 물어보세요.”세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저는 그 사람의 마음을 대신 설명해 드릴 수 없거든요.”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한 가지 더요.”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저희 결혼이 어떤 결혼이든, 지금 저는 그 사람의 아내예요. 그러니까 저한테 허락을 구하실 필요도 없지만, 저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실 필요도 없어요.”세린은 한동안 서윤을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미소 지었다.“생각보다 단단한 분이시네요.”“그런 말 자주 들어요.”“그럼 다음에 또 이야기해요.”“네. 들어가세요.”서윤은 라운지를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