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집에 들어온 서윤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도윤은 거실에 남았다. 평소처럼 각자 방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서윤이 다시 거실로 나왔다. 편한 셔츠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손에는 물컵이 들려 있었다.
도윤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왜요?”
서윤이 물었다.
“뭐가요?”
“아까부터 왜 그렇게 봐요?”
“내가 언제요.”
“지금도 보고 있잖아요.”
도윤은 시선을 돌렸다.
“착각입니다.”
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도윤 씨.”
“왜.”
“혹시 질투해요?”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서윤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진짜예요?”
“헛소리하지 마.”
“그럼 왜 자꾸 물어보는데요?”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있지.”
“아까는 대화라면서요.”
“한서윤.”
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적당히 해.”
서윤은 오히려 더 즐거워 보였다.
“왜요? 찔려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그건 제가 할 말 같은데요.”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계약서에 사생활 간섭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당신 사생활 따위에 관심 없어요.”
“잘됐네요.”
“네. 아주 잘됐죠.”
서윤은 돌아서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도윤이 그녀를 바라봤다.
“태하한테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도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태하?”
“아까 그 사람 이름이요.”
“내가 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한다고.”
“모르죠. 대표님은 가끔 말투가 사람 기분 나쁘게 하니까.”
도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걱정 마세요. 그쪽 연애 상대에게 관심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서윤은 물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잘 자요.”
그녀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태하. 이름까지 알려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오후.
서윤은 회의가 끝난 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태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저녁은?]
그녀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야근할 것 같아. 내일 보자.]
[알겠어. 밥은 꼭 먹고.]
잠시 뒤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보고 싶네.]
서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나도.]
짧은 두 글자였다. 하지만 태하는 그 메시지를 보고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런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날 저녁, 서윤은 회사 근처에서 정세린과 마주쳤다. 정확히는 마주칠 예정이 아니었다. 서윤이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나오던 중, 로비에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세린은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다가 서윤을 발견했다. 두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웃은 사람은 세린이었다.
“한서윤 씨, 맞죠?”
서윤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네. 정세린 이사님.”
“저를 아시네요.”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세린은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말씀도 예쁘게 하시네요.”
그녀는 서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도윤 씨와 결혼하신 뒤로 한번 뵙고 싶었어요.”
서윤은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세요?”
“네. 워낙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 말이 조금 걸렸다. 서윤은 태연하게 물었다.
“제 이야기를요?”
세린은 잠시 웃었다.
“아니요. 강명그룹의 새 며느리 이야기를요.”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식사라도 해요.”
세린이 명함을 건넸다. 서윤은 명함을 받아 들었다.
“좋아요. 연락드릴게요.”
“기다릴게요.”
세린은 부드럽게 웃고 돌아섰다. 서윤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세린. 이름은 알고 있었다. 도윤과 같은 업계에서 활동하는 인물이고, 여러 공식 행사에서 함께 찍힌 사진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서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상관이람. 남편이 누구를 만나든,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명함을 가방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서윤은 거실에서 도윤을 보자마자 무심한 척 물었다.
“정세린 이사님이랑 친해요?”
도윤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갑자기 왜?”
“오늘 만났어요.”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어디서?”
“회사 로비요. 저를 알고 있더라고요.”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세린이 서윤을 만났다는 사실은 예상 밖이었다.
“무슨 얘기 했는데?”
서윤은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왜요?”
“그냥 물어본 겁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녀는 돌아서며 덧붙였다.
“우리 계약서에는 서로의 연애 상대뿐 아니라 과거 연애 상대에도 간섭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던가요?”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한서윤.”
“네?”
“정말 피곤하게 구네.”
서윤은 활짝 웃었다.
“그러게요.”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도윤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세린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서윤 씨 만났어.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더라.]
도윤은 한참 동안 메시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앞으로는 내 아내와 따로 만날 필요 없어.]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다. 내 아내. 그 표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세린에게서 답장이 왔다.
[왜? 질투라도 해?]
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한서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업을 위해 결혼했고, 언젠가 목표를 이루면 이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도. 도윤은 방문 너머를 바라봤다.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탑승 안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윤은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좌석은 비즈니스석 앞쪽이었다. 그리고 그가 좌석에 도착했을 때. “…….” 두 좌석 앞에 한서윤과 윤태하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윤이 창가 쪽, 태하가 그 옆이었다. 태하는 서윤의 가방을 선반에 올려 주고 있었고, 서윤은 무언가를 설명하며 웃고 있었다. 도윤은 자신의 좌석 번호를 확인했다. 다시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비서가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아닙니다.” 도윤은 안전벨트를 매며 낮게 말했다. “저쪽은 신경 쓰지 마세요.” “네.” “내가 신경 쓰는 것처럼 보입니까?”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도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혀 아니잖아요.” “…네.” 그런데 이륙하기도 전에 태하가 서윤에게 담요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추우면 덮어.” “너는?” “나는 괜찮아.” “또 그러네. 너도 추우면서.” 서윤은 담요를 반으로 나누어 태하 쪽으로 밀었다. “그럼 같이 덮어.” 태하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웃었다. “그래. 같이 덮자.” 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담요 하나를 같이 덮든, 두 개를 덮든.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 남자는 매번 저렇게 자연스럽게 서윤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걸까. 왜 서윤은 저 남자 앞에서만 경계심을 풀고 웃는 걸까. 그리고 왜…… 자신과 있을 때보다 더 편안해 보이는 걸까. 도윤은 눈을 떴다. 그 순간, 앞좌석의 서윤이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 서윤이 작게 웃었다. “강도윤 씨도 이 비행기였죠.” 도윤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한 말투라니. “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네요. 제가 깜빡했어요.” 서윤은 다시 앞을 향했다. 그리고 태하에게 물었다. “우리 도착하면 바로 호텔로 갈 거지?” “응. 체크인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 “뭐
다음 날 아침. 서윤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식탁 위에는 도윤이 좋아하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짧은 메모가 있었다. [오늘 아침 회의 있다고 했죠? 커피 내려놨어요.]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계약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입니다. 오해 금지.] 도윤은 메모를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끝까지 사람을 열받게 하네.” 그는 커피를 들었다. 따뜻했다. 분명 조금 전에 내린 것이었다. 도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메모를 버리려다 멈췄다. 한참을 들고 있던 그는 결국 메모를 반듯하게 접어 서랍 안에 넣었다. 버릴 필요는 없었다. 그냥 종이니까. 별다른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오전 열한 시. 도윤은 서윤의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한서윤 대표님께서 방금 외부 미팅을 나가셨습니다.” “그래서요?” “미팅 상대가 윤태하 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비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 주말에 두 분이 함께 해외 출장을 갈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윤의 손이 멈췄다. “해외 출장?” “네. 공동 프로젝트 관련해서요. 일정은 금요일 출국, 일요일 귀국으로 확인 중입니다.” 도윤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흘. 한서윤과 윤태하가 함께 해외에 나간다. 업무 때문이라면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일정, 누가 승인했습니까?” “네?” 도윤은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됐습니다. 업무 일정이면 알아서 하겠죠.”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도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계약서를 꺼냈다. 익숙한 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제7조. 양 당사자는 계약 기간 중 상대방의 사생활 및 대외적 관계에 관여하지 않는다. 도윤은 그 문장을 읽었다. 한 번. 두 번.
오후 네 시. 서윤은 전시회장 출구에서 태하와 나란히 걸어 나왔다. “오늘 재밌었어.” “다행이네.” “책갈피도 고마워. 잘 쓸게.” “그럼 다음엔 책도 사 줄까?” “됐거든. 그건 내가 살 수 있어.” “알았어. 그럼 책을 고르는 데만 동행할게.” “그게 그거잖아.” 태하가 웃었다. “다음 주에도 시간 비워 둘까?” 서윤은 잠시 고민했다. 예전 같았으면 선뜻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누구를 좋아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애매한 태도에 흔들리느라 자신의 마음을 함부로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주는 아직 모르겠어. 일정 확인해 보고 연락할게.” 태하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다릴게.” “너는 맨날 기다린대.” “그럼 이번엔 기다리는 대신 먼저 연락할게.” “그건 또 뭐야.” “내가 적극적으로 구애하겠다는 뜻.” 서윤은 결국 웃었다. “진짜 대단하다, 윤태하.” “칭찬으로 들을게.” 태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려다 잠깐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머리 만져도 돼?” 서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전에는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 주던 행동이었다. 그런데 지금 태하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아무리 크더라도, 서윤의 마음을 마음대로 다루지는 않겠다는 듯이. 서윤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해 주었다. 그 장면을.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검은색 세단 안에서 강도윤이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볼 생각이 없었다. 정말이었다. 그는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운전기사가 잠시 차를 세웠고, 그때 우연히 두 사람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하가 서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모습. 서윤이 그 손길을 피하지 않는 모습. 그리고 태하를 향해 웃는 얼굴. 도윤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토요일 오전 열 시. 강도윤은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화면에는 한 시간 전 비서가 전달한 보고서가 떠 있었다. 해외 사업 확장 건에 대한 검토 자료였다. 중요한 내용이었다. 이번 분기 실적을 좌우할 수도 있는. 그런데도 도윤의 시선은 자꾸만 화면 위쪽으로 올라갔다. 한서윤. 마지막 메시지는 어젯밤이었다. [오늘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자세요.] 그게 전부였다. 예전 같았으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을 것이다. 늦는 이유가 뭔지, 언제쯤 들어올 건지, 저녁은 먹었는지. 물론 그런 질문을 했던 건 단순히 같은 집에 사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확인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서윤이 먼저 선을 그었으니까. 서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자고. 도윤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잘됐네.”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도 모를 혼잣말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윤은 거의 반사적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한서윤이 아니었다. 비서였다. [대표님, 다음 주 월요일 오전 회의 자료 전달드립니다.] 도윤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던졌다. “미쳤나, 진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 같은 시각. 서윤은 햇살이 쏟아지는 야외 테라스에서 웃고 있었다. “이거 기억해?” 윤태하가 테이블 위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서윤은 상자를 열어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맞아. 네가 예전에 갖고 싶다고 했던 거.” 안에는 작고 정교한 은색 책갈피가 들어 있었다. 책갈피 끝에는 조그만 별 장식이 달려 있었다. 몇 년 전, 서윤이 서점에서 발견하고 예쁘다고 말했던 물건이었다. 그때는 가격이 조금 부담스러워 그냥 내려놓았었다. 그걸 태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너 이걸 아직도 기억해?” “내가 네가 한 말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데.” 태하가 웃
오후 여섯 시.서윤은 회사 로비에서 태하와 헤어지고 있었다.“오늘 고마웠어.”“내가 뭘 했다고.”“그냥… 들어 줘서.”태하는 그녀를 바라봤다.“다음에는 네가 내 얘기 들어 줘.”서윤이 웃었다.“무슨 얘기?”“내가 얼마나 오래 널 좋아했는지.”“야.”“농담 아니야.”태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다음에는 정말 제대로 이야기할게.”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리고 대신 그녀의 어깨에 걸친 가방끈을 바로잡아 주었다.“들어가. 늦겠다.”“응. 너도 조심히 가.”서윤이 돌아서려는 순간, 태하가 그녀를 불렀다.“서윤아.”“응?”“나,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윤은 그를 바라봤다. 태하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런데 그 행복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그 말은 고백보다 조용했고, 그래서 더 깊이 남았다.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하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가. 다음에 보자.”그가 먼저 돌아섰다.서윤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정말 나쁜 사람.”태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걸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리고 그 순간.“한서윤.”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강도윤이 서 있었다.“…여기서 뭐 하세요?”“미팅이 근처에서 끝났어.”“아, 그러세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먼저 가세요. 저도 가야 해서.”그녀가 지나치려는 순간, 도윤이 물었다.“윤태하 만났어?”서윤은 걸음을 멈췄다.“네.”“무슨 이야기 했는데?”서윤의 표정이 굳었다.“그걸 왜 물어보세요?”도윤은 잠시 침묵했다.“그냥.”“그냥이요?”서윤은 짧게 웃었다.“강도윤 씨, 저한테 관심 없다고 하셨잖아요.”“…….”“제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다고도 하셨고요.”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래서?”“그런데 왜 자꾸 물어보세요?”서윤은 그를
월요일 아침.강도윤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한서윤 씨는 아직 안 내려오셨습니까?”그가 묻자 집사가 대답했다.“오늘은 일찍 출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침도 회사에서 드신다고요.”“…그래요?”도윤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했을 일이었다. 서윤은 원래 자기 일정에 간섭받는 걸 싫어했다. 아침을 먹든 말든, 일찍 출근하든 늦게 출근하든,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그런데 오늘따라 식탁이 지나치게 넓어 보였다.도윤은 시계를 확인했다.오전 7시 42분. 서윤이 평소 집에서 나가는 시간보다 삼십 분은 빨랐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그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정확히 십 초 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오늘 일정이나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화면을 켜자마자 서윤과의 대화창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대화는 사흘 전이었다.[오늘 양가 식사 일정 잊지 마세요.]그가 보낸 메시지.[네, 확인했습니다.]서윤의 답장. 딱 그게 전부였다.도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잘됐네.”대화할 일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는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출근하는 내내 서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연락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정말로.***한편, 한서윤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 윤태하를 만나고 있었다.“너 요즘 바쁘지?”태하가 물었다.“응. 신사업 때문에 정신없어.”“잠은 잘 자고?”“당연하지.”“거짓말.”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가?”“너 피곤하면 오른쪽 눈부터 비비잖아.”태하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가리켰다.“지금도 그러고 있네.”서윤은 무의식적으로 눈가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태하는 늘 그랬다. 서윤이 좋아하는 커피가 무엇인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떤 음식을 찾는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괜찮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