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프라이빗 룸의 문이 닫히자 복도의 발소리까지 끊겼다.
도현은 가죽 암체어를 서율의 맞은편으로 끌어당겨 앉더니, 서랍 안에서 묵직한 가죽 바인더 하나를 꺼내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바인더가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짧게 났다. 도현이 표지를 열자 세륜 로고가 워터마크로 들어간 수십 장의 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두 약속을 정리한 각서 수준은 아니었다.
“……이게 다 뭐야?”
서율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두꺼운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가짜 연인 대행 계약서. 네가 원하는 결과를 내려면 말보다 문서가 낫겠지. 서로 어디까지 할지 미리 적어둔 거야.”
도현의 목소리는 사건의 쟁점을 정리하는 변호사처럼 차분하고 건조했다. 그는 만년필 뚜껑을 돌려 열며 서율의 앞으로 서류를 밀어주었다.
“우리가 어설프게 입을 맞췄다가 양가 부모나 업계 사람들에게 꼬리를 잡히면, 네 부모는 바로 연극이라고 몰아붙일 거야. 그러면 정략결혼 압박은 더 거세져. 내 이름까지 걸린 일인 만큼 빈틈없는 합의가 필요해.”
서율은 빠르게 목차를 훑어내렸다. 전문적인 법률 용어로 빼곡하게 채워진 수십 개의 조항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조항이 왜 이렇게 많아? 그냥 사람들에게 사귄다고 말하고 가끔 파티에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한서율.”
도현이 나직하게 서율의 이름을 불렀다. 안경을 벗은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서율의 시선을 집요하게 옭아맸다.
“너를 정략결혼 시장에 팔아넘기려는 네 부모님과 그 뒷배들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들은 우리가 진짜로 깊은 관계인지 확인하려고 뒷조사를 하고, 집과 회사에 남은 생활 흔적까지 뒤질 거야. 어설픈 연기로는 단 일주일도 못 버텨.”
도현의 논리는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미리 대비하라고 한 일은 늘 문제가 생기기 전에 끝나 있었다. 서율은 그 익숙한 정확성을 신뢰했다.
“핵심 조항만 짚어줄게.”
도현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서류의 몇몇 조항을 짚어나갔다.
“제3조, 계약 기간 중 타인과의 사적 만남이나 소개팅, 맞선 등 일체의 이성 접촉을 금한다. 위반 시 대외적 신뢰 파기를 방지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사생활 통제권을 전면 위임한다.”
“이건 당연하지.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날 리가 없잖아.”
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말려 올라갔다.
“제7조, 대외적 연기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주위의 의심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주거를 통합한다. 또한 자연스러운 연인 간의 스킨십을 위해 주 3회 이상의 신체적 접촉 훈련을 진행한다.”
“잠깐, 동거? 게다가 스킨십 훈련이라니……?”
서율이 당황하여 서류를 쥔 손가락을 움츠렸다. 그러자 도현이 굳은 얼굴로 서율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율아, 카메라 앞이나 파티장에서 손 하나 잡는 것도 굳어 있는 연인을 누가 진짜라고 믿겠어? 15년 동안 친구로 지낸 우리가 하루아침에 연인처럼 보이기 위해선 철저한 트레이닝이 필수야. 싫다면 지금 관둬도 좋아. 난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
도현은 당장이라도 서류를 회수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서율의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밝힌 ‘아버지’ 세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벌써 맞선남 집안에서 연락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서율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여기서 물러서면 부모가 다시 그 맞선 자리로 밀어 넣을 게 뻔했다.
“아니야! 사인할게.”
서율은 망설임을 집어던지고 도현의 손에서 묵직한 만년필을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제9조는?”
“기간 만료 전까지는 쌍방의 서면 합의 없이 해지할 수 없다는 표준 조항이야. 서로의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한 거니까 신경 쓸 것 없어.”
도현은 ‘표준’이라는 말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서율은 제9조 아래 작은 글씨로 붙은 ‘단독 해지 불가’와 ‘6개월 자동 갱신’을 눈으로 훑고도 뜻을 끝까지 따져 묻지 못했다. 휴대전화는 계속 진동했고, 도현은 재촉하지 않는 얼굴로 기다렸다. 서율은 맨 뒷장 서명란에 이름을 적다가 마지막 획 앞에서 잠깐 멈췄다.
[을: 한서율]
마지막 획이 마르기도 전에 도현이 만년필을 받아 들었다. 붉은 인주를 묻힌 인장을 두 사람의 이름 아래에 눌렀다가 천천히 떼어냈다. 선명한 도장이 남았다.
서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도현은 더 이상 난처하거나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차분히 정리해 개인 금고에 넣더니, 서율의 턱을 가볍게 쥐어 올려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닿아오는 손가락의 온도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서명 끝났어, 서율아.”
도현의 입가에 협상에서 원하던 답을 받아낸 사람의 미소가 번졌다. 서율이 알던 친구의 표정은 아니었다.
“오늘 밤부터 내 펜트하우스로 짐 옮겨. 이제 넌 한 발자국도 내 시야 밖으로 못 나가.”
결혼식이 끝난 밤, 펜트하우스 침실에는 옥상에서 가져온 흰 꽃 몇 송이만 놓여 있었다.서율은 무거운 귀걸이를 빼 화장대 위에 내려놓고 베일을 풀었다. 거울 속으로 도현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턱시도 재킷은 벗었지만 셔츠 단추는 여전히 목 끝까지 단정했다.“새 조항 이야기해 봐.”서율이 먼저 꺼내자 도현이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진짜로 써왔어?”“검토를 받아야 하니까.”서율은 종이를 펼쳤다. 제목은 거창했다.[영구 독소조항]제1조. 한서율은 평생 차도현의 품을 1초도 벗어날 수 없다.제2조. 차도현도 한서율이 부르면 즉시 돌아온다.제3조. 문을 잠그거나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위약금. 그날 안에 먼저 사과하고, 화해할 때까지 같은 식탁에 앉아 있을 것.서율은 끝까지 읽은 뒤 웃음을 참지 못했다.종이 아래에는 서명란이 두 개 있었지만 인장 칸은 없었다. 도현은 만년필도, 붉은 인주도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연필 한 자루를 옆에 놓아두었다. 언제든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위약금이 영원한 사랑 아니었어?”“청구 기준이 너무 불명확하잖아.”“끝까지 변호사답네.”“최종 문구는 네가 정해.”서율은 도현이 놓아둔 연필을 집었다. 제1조의 ‘한서율’ 앞에 줄을 긋고 ‘두 사람은’이라고 고쳤다. 이어 ‘차도현의 품’을 ‘서로의 품’으로 바꿨다.[두 사람은 평생 서로의 품을 1초도 벗어날 수 없다.]“이러면 물 마시러도 못 가는데?”도현이 묻자 서율이 제3조를 가리켰다.“제3조가 있잖아. 물 마실 때 막으면 바로 위반이야.”“법률 해석이 훌륭하네.”“변호사 남편한테 배웠지.”서율은 위약금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단, 사랑은 위약금이 아니다. 매일 마음 가는 만큼 줄 것.]도현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마음에 안 들어?”“너무 마음에 들어서.”도현은 서율이 보는 앞에서 종이를 접어 침대 옆 서랍 첫 칸에 넣었다. 서랍은 닫지 않았다. 서율이 손을 뻗으면 바로 꺼낼 수 있는 자리였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계절이 바뀐 뒤, 펜트하우스 옥상 가든에서 작은 결혼식이 열렸다. 도현은 처음에 호텔 전체를 빌리겠다고 했고, 서율은 하객 명단부터 줄였다.준비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여러 번 부딪쳤다. 도현은 경호 동선을 세 겹으로 짰고, 서율은 하객이 결혼식보다 보안 검색을 더 오래 하겠다며 절반을 지웠다. 도현이 신부 대기실 앞에 변호사 두 명을 세우려 하자 서율은 그들을 축의대 담당으로 돌려보냈다. 도현이 세운 계획에서 서율이 절반을 지우면, 둘은 남은 절반을 다시 함께 짰다.결국 초대된 사람은 루미나 동료와 가까운 친구들, 세륜에서 도현을 오래 지켜본 몇 명뿐이었다. 양가의 체면을 위한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맑은 겨울 하늘 아래 투명 캐노피가 옥상 바람을 막고, 난방기 사이로 흰 꽃과 짙은 초록 잎이 버진 로드를 따라 이어졌다. 서율은 장식이 과하지 않은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베일을 정리하던 팀원이 감탄했다.“팀장님, 진짜 예뻐요. 그런데 차 변호사님 아까부터 입구만 보고 있던데요? 도망갈까 봐 그러는 사람처럼.”“이제 도망가도 쫓아오지 말라고 교육 끝냈어.”서율이 웃자 팀원도 따라 웃었다.문이 열리고 음악이 시작됐다. 서율은 누구의 손에 이끌리지 않고 혼자 걸었다. 부모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한다는 의미로 정한 입장이었다.버진 로드 끝에서 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턱시도 차림이었지만 표정은 전혀 정돈되지 않았다. 눈가가 벌써 붉었다.서율이 앞에 서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잡아도 돼?”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졌다. 서율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오늘은 물어보지 않아도 됐는데.”“습관이 됐어.”주례는 없었다. 두 사람이 직접 쓴 서약을 서로 읽었다.도현이 먼저 종이를 펼쳤다.“나 차도현은 겁이 나도 당신 앞을 막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을 계약서 뒤에 숨기지 않고, 질투하면 질투한다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먼저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돌아오고
다음 날 오전, 두 사람은 서초구청 가족관계등록 창구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서율은 가방에서 혼인신고서를 직접 꺼냈다. 증인 서명은 서율이 부탁한 대학 동기와 도현이 부탁한 로펌 동료에게 각각 받아두었다. 담당 공무원이 서류를 확인하는 동안 도현은 법정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있었다.“두 분 신분증 확인하겠습니다.”절차는 놀랄 만큼 평범했다. 도현이 그토록 집착했던 ‘법적 관계’는 화려한 인장도 긴 계약서도 없이,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의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담당 공무원이 증인 서명과 주소, 빠진 기재사항이 없는지 차례로 확인했다. 처리 완료 안내는 문자로 갈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서율이 몇 가지 절차를 묻는 동안 도현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예전의 도현이었다면 ‘같은 주소’라는 문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겠지만, 지금은 서율이 질문을 마칠 때까지 끼어들지 않았다.“접수하시겠습니까?”공무원의 마지막 확인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서율이 먼저 답했다.“네.”도현은 반 박자 뒤 같은 대답을 했다. 화려한 선언도, 법률 용어도 없었다. 몇 가지 확인 질문과 서명, 접수 도장이 전부였다.접수증을 받은 서율이 창구에서 일어나자 도현이 물었다.“실감 나?”“아직. 너는?”“접수됐다는 문장을 열 번쯤 읽고 싶어.”“또 조항 만들 생각 하지 마.”“참고 있어.”구청을 나선 두 사람은 건물 앞 계단에서 잠시 멈췄다. 서율이 먼저 손을 내밀자 도현이 손가락을 맞물렸다. 둘은 근처 작은 식당으로 가 늦은 아침을 먹었다. 도현은 샴페인이나 호텔을 예약하지 않았다. 서율이 중요한 날일수록 평범한 밥을 먹고 싶다고 한 말을 기억한 것이다.회사로 돌아가기 전, 서율은 접수증을 반으로 접어 도현의 지갑에 넣었다.“이건 네가 가져.”“괜찮아?”“응. 계약서처럼 숨기지만 않으면.”도현이 지갑을 닫으며 웃었다.그날 저녁 펜트하우스에는 촛불도 꽃도 없었다.서율은 회사에서 받은 축하 케이크 상자를 식
두 달 가까이 흘러, 초가을 비가 통창을 잔잔하게 두드리던 저녁이었다.서율은 퇴근 직전 도현에게서 짧은 메시지를 받았다.[오늘 저녁, 집에서 식사해도 될까? 준비하고 싶은 게 있어.]예전의 도현이라면 이미 모든 일정을 정해놓고 통보했을 것이다. 서율은 회의를 마친 뒤에야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했다.[좋아. 조금 늦게 도착해.]펜트하우스 다이닝 룸에는 과한 장식 대신 작은 촛불과 흰 리시안셔스가 놓여 있었다. 서율이 좋아한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꽃이었다. 도현은 짙은 그레이 슈트 차림으로 테이블 곁에 서 있었다. 평소 법정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펴고 있었다.“긴장했어?”서율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묻자 도현이 솔직하게 답했다.“많이.”“무슨 잘못을 또 했길래?”“아직은 안 했어.”도현은 의자를 빼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평범한 이야기가 오갔다. 서율의 신규 프로젝트, 도현이 맡은 항소심, 한성엔지니어링 구조조정 진행 상황. 디저트가 치워진 뒤에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율은 테이블 아래에서 도현의 구두 끝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봤다. 준비한 말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풀이하는 버릇이었다. 계약서를 내밀던 날의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만이 보이는 긴장이었다.도현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대신 서율과 같은 눈높이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작은 벨벳 상자와 서류 봉투를 꺼냈다.“서율아. 먼저 말할 게 있어.”“응.”“이 서류는 네가 오늘 사인하지 않아도 되고, 사인한 뒤에도 제출 전까지 언제든 없던 일로 할 수 있어.”그가 봉투에서 혼인신고서를 꺼냈다. 증인란과 주소란은 비어 있었고, 도현의 이름만 배우자 칸 한쪽에 적혀 있었다.“구청에 내기 전에는 아무 효력 없어. 내일 바로 제출하지 않아도 되고, 네가 원하는 만큼 보관해도 돼.”서율은 서류보다 도현의 설명을 먼저 들었다.“계약서 아닌 거 확실해?”“조항 없어.”“자동 갱신도?”“혼인은 갱신하는 제도가
그날 밤 도현은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루미나 정문에 도착했다.회의 정리가 길어져 서율은 약속보다 5분 늦게 내려왔다. 도현은 차 문을 열어주면서도 재촉하지 않았다. 넥타이 없는 셔츠 차림이 아침보다 조금 흐트러져 보였다.“내 넥타이는?”“펜트하우스에 가면 돌려줄게.”“위약벌은?”“시간 지켰으니까 면제.”가벼운 대화가 자연스러워진 것이 서율은 새삼 신기했다.“그러니까 도망치지 말고 배워.”“네가 선생님이야?”“수업료 비싸.”“얼마인데?”서율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솔직함. 하루도 밀리면 연체료 붙어.”도현이 처음으로 편안하게 웃었다.도현은 웃은 뒤에도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서율은 조수석에 앉아 그 얼굴을 잠깐 더 봤다.조수석 수납함에는 지난주 서율이 직접 가져다 둔 립밤과 충전 케이블이 있었다. 도현은 그녀가 오늘 누구와 점심을 먹었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신호를 기다리며 말했다.“저녁은 먹었어?”“아직. 팀 회의가 길어졌어.”“집에 가서 같이 먹을까?”서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펜트하우스로 잡았다.펜트하우스에 도착한 뒤 서율은 아침에 빼앗은 넥타이를 침대 위에 던졌다.“가져가.”도현은 넥타이 대신 서율을 바라봤다.“오늘은 내가 주도권을 가져도 돼?”“먼저 물었으니까 생각해 볼게.”서율이 장난스럽게 한 걸음 물러서자 그가 기다렸다. 예전 같으면 거리를 단숨에 없앴을 텐데,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서율은 결국 웃으며 팔을 벌렸다.“와.”도현이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 그날의 입맞춤과 체온은 뜨거웠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서율이 이끌면 따라오고, 멈추면 같이 멈췄다.한참 뒤 두 사람은 흐트러진 침구 사이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서율은 도현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차분히 빗었다. 그의 얼굴은 서율의 어깨 가까이에 묻혀 있었다.“도현아.”“응.”“요즘 너무 얌전해서 오히려 불안해.”도현이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이야?”“참는 걸 또 쌓
한성엔지니어링은 외부 회계법인의 실사를 받아들이고, 한 대표는 구조조정 기간 동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서율이 선임한 변호사는 도현이 넘긴 채권 자료에서 누락된 항목이 없다고 확인했다.도현은 약속을 지켰다. 다만 처음 며칠은 새로 정한 거리마저 법률가답게 수치로 정리하려 들었다.“어디까지 매번 물어야 하지?”도현이 진지하게 묻자 서율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걸 수치로 정리하려는 습관부터 고쳐.”“알겠습니다.”첫 주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 질문이 왔다.[저녁 같이 먹자고 해도 돼?] [손 잡아도 돼?] [회사 앞으로 가도 돼?]셋째 날, 서율은 마지막 메시지에 답했다.[오늘은 야근. 오지 말고 네 저녁 먼저 먹어.]도현은 이유를 캐묻지 않고 [알겠어]라고만 보냈다. 서율도 회의가 길어진 이유와 예상 종료 시각을 뒤늦게 덧붙였다. 둘 다 통보와 잠수를 줄이고, 필요한 말은 제때 건네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출근 시각을 정하지 않았고, 휴대전화를 보지 않았으며, 회사 앞에 오기 전에는 반드시 메시지로 물었다. 처음 며칠은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워 서율이 먼저 답답해질 정도였다.그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도현은 마스터 베드룸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서율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반듯한 네이비 슈트와 은테 안경,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손길. 계약서를 내밀던 날과 똑같은 모습인데도 지금은 긴장보다 장난기가 먼저 올라왔다.“오늘 저녁 일정 있어?”서율이 묻자 도현이 거울 너머로 시선을 맞췄다.“저녁까지 의뢰인 미팅. 이후에는 없어.”“그럼 나 데리러 올래?”도현의 손이 넥타이 매듭에서 멈췄다.“가도 돼?”“내가 물어봤잖아.”“정문 앞? 지하 주차장?”“정문.”도현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려는 순간 서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도현은 가까워지는 서율을 보면서도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 기다리는 습관이 조금씩 몸에 배어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서율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