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청담동 최고급 레지던스 45층 펜트하우스.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자 커다란 통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서율의 눈에는 풍경보다 먼저 색이 들어왔다. 회색 대리석, 검은 가죽, 흰 벽. 세 가지 색만 허용한 듯한 거실에는 쿠션 하나도 비스듬히 놓여 있지 않았다. 차도현이 사람과 사건을 정리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네 짐은 드레스룸 안쪽 비워둔 칸에 넣으면 돼.”
도현은 슈트 재킷을 벗어 거실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서율은 캐리어를 끌며 복도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100평이 훌쩍 넘는 구조인 만큼 침실이 최소 3개는 있을 터였다. 손님용 침실에 짐을 풀고 당분간 도현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낼 생각이었다.
두 번째 게스트룸까지 열어본 순간, 가구가 덜 들어온 게 아니라 일부러 비워둔 공간이라는 걸 알았다. 방 2개에는 침대나 침구 대신 붙박이장과 책상만 놓여 있었다. 불을 켜고 구석구석 둘러보아도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공간은 오직 복도 끝의 마스터 베드룸 하나뿐이었다.
“……도현아.”
서율이 마스터 베드룸 문가에 선 채 굳은 얼굴로 도현을 불렀다.
도현은 얼음을 띄운 위스키 잔을 들고 복도 끝까지 왔다. 서율이 어느 문부터 확인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방이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다른 방들에 침대가 하나도 없어. 가구 배치가 덜 된 거야?”
“아니. 일부러 침대를 들이지 않았어. 처음부터 네가 들어올 가능성까지 생각해 둔 집이니까.”
도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다. 얼음이 부딪히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목울대가 매끄럽게 오르내렸다.
“그럼 난 어디서 자? 설마 소파에서 자라는 건 아닐 테고.”
“저기 있는 킹사이즈 침대에서 자면 되지. 성인 두 명이 누워도 공간이 넉넉해.”
도현의 턱 끝이 마스터 베드룸 중앙에 놓인 넓은 킹사이즈 침대를 가리켰다.
서율은 침대와 도현을 번갈아 봤다. 15년 동안 친구로 지냈어도 한 침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잠든 동안까지 같은 공간을 허용하라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한 침대를 쓰는 건 선을 넘었잖아. 우린 가짜 연애일 뿐이고, 난 당연히 각방을 쓸 줄 알았어.”
서율이 격앙된 목소리로 항의하자, 도현이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탁-’
잔이 대리석 테이블에 닿자 얼음이 한 번 부딪쳤다. 도현은 서율이 물러나는 만큼 거리를 좁혔다. 표정에서 남아 있던 여유가 지워졌다.
“서율아. 계약서 제7조, 주거 통합 조항 기억 안 나?”
“주거 통합이라고 했지, 언제 한 침대에서 살을 맞대고 자자고 했어?”
“가짜 연애가 들통나는 가장 흔한 경로가 뭔지 알아? 고용인들의 입과 어긋난 생활 흔적이야.”
도현이 서율의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섰다. 그에게서 풍기는 쌉싸름한 우디 향과 가까워진 체온이 서율의 호흡을 짧게 만들었다.
“내일부터 가사도우미와 비서가 이 집을 드나들 거야. 방마다 생활 흔적이 따로 남아 있으면 바로 눈치채겠지. 네 부모님 귀에도 들어갈 거고. 두 사람이 각방을 쓰는 쇼윈도 관계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침대까지 같이 쓰는 건……”
“침구와 수건, 옷장 같은 생활 흔적이 한곳에 있어야 해. 그래야 각방을 쓴다는 말을 막을 수 있어.”
도현은 서율의 뺨을 스치듯 손을 뻗어 그녀의 뒤편 벽을 짚었다. 서율은 도현의 단단한 가슴팍과 차가운 벽 사이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도현은 감정이 아니라 증거를 설명하는 변호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선만은 침대가 아니라 서율에게 고정돼 있었다.
“15년 동안 날 봐왔으면서도, 내가 네 의사까지 무시할 사람으로 보여?”
도현의 낮은 음성이 귓가를 날카롭게 긁어내렸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누워, 서율아. 계약상 필요한 절차인 건 맞아. 하지만 네가 정말 싫다고 하면 손대진 않아. 대신 부모님을 속일 다른 방법은 네가 제시해.”
그의 손끝이 서율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며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끝이 닿은 피부가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서율은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 말이 배려인지, 답을 정해둔 압박인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은 벽에서 팔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선 뒤 오른편 협탁의 물건을 전부 치웠다.
비워진 협탁에는 충전 케이블과 새 물컵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서율은 그 자리가 오늘 급히 만든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침대 한쪽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배정돼 있었다.
서율은 침대 위 장식 쿠션을 가운데에 길게 놓았다.
“오늘은 이 선 넘지 마.”
도현은 쿠션과 서율을 번갈아 보다가 오른쪽 끝으로 물러났다.
“알겠어. 네가 먼저 치우기 전에는.”
도현이 내민 합의서에는 채권 행사 제한 조항이 적혀 있었다.한성엔지니어링에 대한 추심, 담보 처분, 경영권 관련 의결은 독립 수탁자의 심사를 거치며, 한서율의 서면 동의 없이는 실행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탁 변호사 선임권도 서율에게 있었다.서율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언제 만들었어?”“오늘 새벽.”“내가 말한 뒤에?”“그래. 네 선택을 내가 대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서율은 마지막 페이지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서명란도, 수탁자 이름도 공란이었다. 도현의 단독 해지권이나 우회 조항도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독립 검토를 받을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이건 내가 고른 변호사에게 검토받고 결정할게.”“그렇게 해.”도현은 서류를 바로 거둬 서율에게 건넸다.한 대표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다 못해 소리쳤다.“지금 장난하나? 자네가 우리 채권을 샀으면 당장 자금부터 넣어야지!”도현의 시선이 차갑게 돌아갔다.“제가 왜 무상으로 경영 실패를 메워야 합니까?”“서율이와 결혼할 생각이라며. 사위가 될 사람이 처가를 살리는 게 당연하지!”“서율 씨와의 관계를 거래 조건으로 삼지 않겠습니다.”도현의 답은 단호했다.“회사를 살릴 방법은 있습니다. 대표이사 사임, 사주 일가의 개인 자산 출연, 외부 구조조정 책임자 선임, 회계 장부 전면 공개.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면 일정 기간 추심을 유예하고 회생 절차를 지원하겠습니다.”“직원 임금과 협력업체 대금은 운영자금에서 우선 지급하도록 별도 관리하고, 사주 일가의 배당과 가지급금 회수는 중단합니다. 이 조건은 서율 씨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바뀌지 않습니다.”서율은 그 마지막 문장을 확인하듯 도현을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한 대표가 헛웃음을 쳤다.“내 회사를 내놓으라는 말이잖아.”“직원 수백 명을 살리고 싶다면 대표 자리보다 회사가 먼저겠죠.”“이게 전부 네 계략이었군. 내 딸을 차지하려고 회사를 집어삼킨 거야!”도현의 턱이 굳었다. 서율은
서율의 손에 밀려난 한 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아버지 손을 쳐?”“제 팔을 잡으려고 하셨잖아요.”서율은 도현보다 반걸음 앞에 섰다. 무릎은 떨렸지만 발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저는 집에 가지 않아요. 이 이사와도 결혼하지 않고, 회사 빚 때문에 제 인생을 넘기지도 않을 거예요.”어머니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네가 철없이 굴어서 대일물산이 저 지경이 됐잖니! 어제까지만 해도 혼사만 성사되면 다 해결될 일이었어.”“횡령과 비자금 때문에 압수수색을 받은 게 왜 제 탓이에요?”어머니는 말없이 서율의 옷차림과 흐트러진 머리칼을 훑었다.“밤새 여기 있었니? 결혼도 안 한 처녀가 남자 집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서율의 얼굴이 굳었다.“제 사생활로 모욕하지 마세요. 제가 어디서 누구와 지내는지는 성인인 제 결정이에요.”도현의 턱 근육이 움직였지만 그는 끼어들지 않았다. 서율이 직접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차 변호사가 일을 키웠으니까 그렇지!”서율은 옆에 선 도현을 잠깐 바라봤다. 그가 사건을 미리 준비한 방식에는 여전히 화가 났다. 그러나 대일물산의 범죄와 부모의 선택까지 그의 책임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도현이 고발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드러날 일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제게 그 집안 남자를 만나라고 한 건 사실이잖아요.”한 대표의 얼굴이 붉어졌다.“다 너 잘되라고 한 일이야! 집안이 무너지면 네가 지금처럼 회사나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제 회사는 아버지 회사가 아니에요. 저는 제 월급으로 살 수 있고, 제가 만든 경력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네 월급으로 180억을 막을 수 있냐?”도현의 시선이 한 대표에게 고정됐다. 서율은 ‘180억’이라는 숫자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한 대표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대일물산 쪽 자금이 막히면서 오늘 오후 2시까지 180억을 못 넣으면 한성엔지니어링은 최종 부도야. 직원들 수백 명이 길바닥에 나앉는다고. 네가 책임질 거야?”가족,
암막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침대 끝을 가늘게 비췄다.서율은 익숙한 비누 향 속에서 눈을 떴다. 도현의 팔은 자신의 허리 위가 아니라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밤새 품에 안고 싶었을 텐데도, 그녀가 잠든 뒤 마음대로 끌어당기지 않은 모양이었다.서율이 몸을 돌리자 도현은 이미 깨어 있었다.“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조금 전부터.”“그건 감시 아니야?”도현의 얼굴이 굳었다가 서율의 입꼬리를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다.“미안해. 다음부터는 눈 감고 있겠다.”“농담이야.”서율은 손을 뻗어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겼다. 안경 없는 얼굴은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15년 동안 봐온 익숙한 얼굴인데도 관계가 달라지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후회해?”서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배신감이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안 해. 하지만 오늘부터 다 괜찮아진 건 아니야.”“알아.”“내가 화낼 때 변호사처럼 반박하지 마.”“노력…… 아니, 안 할게.”말을 고쳐 잡는 모습에 서율이 작게 웃었다.도현의 눈빛이 그 웃음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손을 뻗기 전 한 번 더 물었다.“안아도 돼?”“응.”그제야 도현이 서율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전날까지 숨통을 조이던 힘과 달리, 조금만 움직이면 빠져나갈 수 있는 포옹이었다.“이렇게 안는 게 더 좋네.”서율이 중얼거리자 도현의 턱이 머리 위에 닿았다.“나는 네가 못 나가게 잡는 게 안심된다고 생각했어.”“지금은?”“나갔다가도 돌아올 수 있다는 걸 믿어보려고.”서율은 그의 셔츠 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손끝에 힘을 주면 도현은 더 가까이 왔고, 풀면 그대로 멈췄다. 그 단순한 반응이 전날까지와 달랐다.“믿는 건 계약보다 오래 걸려.”“그래도 하겠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평온은 낯설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침대 옆 탁자에는 전날 도현이 해제한 권한 목록과 서율의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서율은 화면
도현이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를 걸지는 않았다.서율은 그 작은 차이를 확인한 뒤 소파 앞에 섰다. 찢어진 계약서 조각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었다.“내가 안 나간다고 해서 용서했다는 뜻은 아니야.”“알아.”“다시 시작한다면 규칙은 내가 정해.”도현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법률 상담을 앞둔 사람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말해.”“첫째, 내 연락과 위치를 몰래 확인하지 말 것. 둘째, 내 일과 인간관계에 개입하지 말 것. 셋째, 나한테 닿기 전에 내가 싫어하는지 확인할 것.”“전부 지키겠다.”“넷째.”도현이 긴장한 채 기다렸다. 서율은 손가락으로 찢어진 계약서 봉투를 가리켰다.“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그날 안에 말할 것. 침묵으로 벌주거나 상대가 알아서 눈치채길 기다리지 말 것.”“알겠어.”“나도 지킬게.”서율은 도현을 똑바로 봤다.“불안하면 계약서를 만들지 말고 말로 해. 네가 무섭다고, 질투 난다고, 떠날까 봐 겁난다고.”도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그게 제일 어렵겠지만 해볼게.”“노력한다는 말 말고.”“하겠다.”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의 어깨에 걸려 있던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이제 네 차례야.”“뭐가?”“내게 원하는 걸 물어봐.”도현의 시선이 서율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올라왔다.“지금 네게 입 맞춰도 돼?”도현은 짧은 대답을 기다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계약과 위약벌을 앞세우던 남자가 아무 장치도 없이 서율의 말만 기다리는 모습은 낯설었다.서율이 한 걸음 다가갔다.“돼.”도현은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손등으로 서율의 뺨을 쓸고, 그녀가 피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숙였다.입술이 닿았다.처음에는 숨결만 섞일 만큼 가벼웠다. 서율이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기자 입맞춤이 조금 깊어졌다. 뜨거운 체온과 익숙한 우디 향이 밀려왔지만, 이번에는 벽도 조항도 없었다. 서율은 원하면 언제든 물러설 수 있었다.그 사실이 오히려 발을 붙들었다.도현의 손이
도현은 계약서를 두 손으로 펼쳤다.첫 장에는 ‘가짜 연인 대행 표준계약서’라는 제목이 반듯하게 찍혀 있었다. 그 아래로 제3조, 제7조, 제9조가 이어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전문 용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문장들이 이제는 노골적인 욕망처럼 보였다.“잠깐.”서율이 손을 뻗자 도현이 멈췄다.“찢기 전에 말해. 이 계약서 말고도 사본이 몇 개야?”“개인 암호화 저장소에 파일 하나, 금고에 보관용 사본 하나. 파일은 방금 삭제했고, 저장소 삭제 기록과 금고 사본은 내일 네가 고른 변호사 앞에서 확인하겠다.”“공증이나 별도 인증은 받았어?”“아니. 네가 서명한 뒤에도 외부 절차는 밟지 않았어.”“왜?”도현의 시선이 종이 위로 떨어졌다.“효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제3자가 문구를 보면 바로 문제 삼았을 거야.”서율은 허탈하게 웃었다.“결국 나 하나 속이려고 만든 무대였네.”“그래.”도현은 변명 없이 인정한 뒤 계약서 첫 장을 찢었다.찌익.깨끗한 종이가 가운데서 갈라지는 소리가 거실에 길게 울렸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율의 서명이 찍힌 마지막 장까지 한 장씩 잘게 찢었다. 급하게 구기거나 분노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쌓은 덫을 스스로 해체하듯, 조항과 서명과 인장을 차례로 없앴다.종이 조각이 유리 테이블 위에 쌓였다.서율은 그중 자신의 이름이 반쪽만 남은 조각을 집었다. 서명 당시의 다급함이 손끝에 되살아났다. 그녀는 조각을 다시 내려놓고 투명한 봉투를 가져와 전부 담았다.
“19살 봄, 네가 벚꽃 아래서 다른 애한테 고백받던 날이었어.”도현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말을 이었다.“네가 거절하고 내 옆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딸기우유를 마셨지. 그때 처음 알았어.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장면을 나는 견딜 수 없다는 걸.”서율은 그날을 기억했다. 도현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고, 딸기우유 빨대를 괜히 구겨놓았다.“그래서 고백을 안 했어?”“친구로 남으면 적어도 계속 볼 수 있으니까.”도현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비겁했지. 네가 소개팅을 할 때는 상대를 알아봤고, 위험한 소문이 있는 사람은 네 친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끊어냈어. 네 회사에 들어가려던 투자사 중 평판이 나쁜 곳도 막았고.”“사진학과 선배 말고는 안전한 사람에게도 손댄 적 없어?”“연락을 끊게 만든 사람은 그 한 명이 전부야. 하지만 너 모르게 알아본 사람은 더 있어.”“명단은?”“네가 쓰라고 한 목록에 전부 적었어. 조사 의뢰 내역과 원자료도 네가 확인하게 넘기겠다.”서율은 그의 말을 기억해 두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내 일까지 건드렸어?”“루미나의 결정에는 손대지 않았어. 네 실력으로 얻은 자리라는 걸 아니까. 대신 네게 손해를 끼칠 사람만 뒤에서 조사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는데?”“알면 네가 나를 경계할 테니까.”서율은 입술을 다물었다. 도현은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관계의 절반을 몰래 차지해왔다.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방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