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전 7시, 거실 커튼은 정확히 절반만 열려 있었다.
서율은 밤새 침대 가장자리에 붙어 잔 탓에 굳은 목을 주무르며 나왔다. 도현은 이미 짙은 회색 슈트를 갖춰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타이의 매듭도, 태블릿 옆에 놓인 커피잔의 각도도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
“일어났어?”
“네 침대가 생각보다 좁더라.”
“킹사이즈인데.”
“네 어깨가 넓으니까 그렇지.”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율은 밤새 그가 쿠션 경계를 넘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새벽에 한 번 눈을 떴을 때도 도현은 오른쪽 끝에 누워 있었고, 손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지키겠다고 한 선은 실제로 지켰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말로는 자신을 원한다고 하면서 행동은 기다릴 줄 아는 남자였다.
서율이 드레스룸으로 향하려 하자 그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오늘 저녁 한영그룹 창립기념 파티, 기억하지?”
서율의 발이 멎었다. 부모와 이 이사 쪽 사람들이 모두 오는 자리였다.
“네 옆에서 웃어주면 되는 거 아니야?”
“손도 제대로 못 잡으면서?”
“누가 못 잡는대?”
도현은 소파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아. 손부터 확인하자.”
“확인?”
“제7조 신체 접촉 훈련.”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
“다른 이름이 필요하면 네가 정해.”
도현은 손바닥을 펼쳐 서율 앞에 내놓았다. 억지로 잡아끌지 않고 기다렸다. 서율은 그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손끝을 올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천천히 사이로 들어왔다. 어깨동무나 악수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손바닥 전체가 맞닿자 열이 손목 안쪽으로 번졌다.
“잠깐. 너무 세.”
그의 힘이 즉시 풀렸다.
“이 정도?”
“……응.”
“기억해. 파티장에서는 네 손이 먼저 굳으면 들킨다.”
“내가 긴장한 걸 누가 그렇게 자세히 봐?”
“나는 봐.”
대답이 너무 빨라 서율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의 엄지 관절을 한 번 쓸었다.
도현은 손을 든 채 몸을 반쯤 돌렸다.
“걸을 때도 해보자. 팔짱을 끼면 네 보폭이 짧아져.”
“디자인 팀장한테 걷는 법까지 가르치려고?”
“공간을 보는 눈과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건 다르니까.”
서율은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도현은 그녀가 평소 걷는 속도에 맞춰 거실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허리에 손을 놓기 전에는 눈으로 먼저 물었고, 서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바닥을 얹었다.
“손 위치가 너무 낮아.”
즉시 허리 위쪽으로 올라갔다.
“여기?”
“응. 파티에서도 딱 거기까지.”
“기억하지.”
그의 손은 허리 위쪽에서 멈췄다. 손가락 하나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다음은 시선.”
그가 몸을 가까이 했다. 서율의 어깨가 저절로 굳었다.
“입 맞출 거야?”
“직전까지만. 닿지는 않아.”
“내가 멈추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도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의 숨이 입술에 닿았다. 서율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려다 버텼다.
“나 봐.”
은테 안경 너머의 눈은 카메라를 속이는 법보다 서율의 반응을 더 세밀하게 읽고 있었다. 숨이 짧아질 때마다 그도 멈췄고, 서율이 고개를 아주 조금 들면 같은 만큼만 다가왔다.
“도현아…… 이건 연기 같지 않아.”
“연기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으니까.”
서율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깍지를 풀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도현의 시선이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오늘 밤은 이보다 더 가까워질 수도 있어.”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도현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정해.”
도현은 손등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파티장에서 말하기 곤란하면 이렇게 해. 두 번 두드리면 바로 손을 뗄게.”
“계약서에는 없는 조항이네.”
“지금 추가됐어. 네가 만든 조항으로.”
서율도 그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려봤다. 도현은 약속을 시험받는 순간처럼 곧바로 손을 풀었다.
“반응은 빠르네.”
“네 신호니까.”
서율은 제 손등에 남은 체온을 엄지로 문질렀다. 카메라 앞 연기를 배우는 자리라기보다, 15년 동안 익숙했던 거리를 새로 재는 기분이었다.
그는 입술을 끝내 닿게 하지 않은 채 물러났다. 맞잡았던 손도 서율이 다시 올릴 때까지 먼저 잡지 않았다.
서율은 손바닥에 남은 열을 감추듯 손가락을 접었다.
“대신 한 가지만 기억해.”
도현이 태블릿을 다시 들며 말했다.
“오늘 밤 누가 보고 있든, 불안하면 다른 데 말고 나를 봐.”
“왜?”
도현은 태블릿 화면을 켜지 않은 채 답했다.
“네가 불안한 얼굴로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싫으니까.”
“그건 훈련이 아니라 질투잖아.”
“알아.”
서율은 방금 배운 신호를 되새기듯 태블릿을 든 그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도현의 시선이 손끝으로 내려갔다.
“그럼 오늘 밤에는 내 신호부터 봐.”
“그러겠다.”
도현은 태블릿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네가 놓으라고 하기 전까진, 손 안 놓을 거고.”
도현이 내민 합의서에는 채권 행사 제한 조항이 적혀 있었다.한성엔지니어링에 대한 추심, 담보 처분, 경영권 관련 의결은 독립 수탁자의 심사를 거치며, 한서율의 서면 동의 없이는 실행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탁 변호사 선임권도 서율에게 있었다.서율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언제 만들었어?”“오늘 새벽.”“내가 말한 뒤에?”“그래. 네 선택을 내가 대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서율은 마지막 페이지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서명란도, 수탁자 이름도 공란이었다. 도현의 단독 해지권이나 우회 조항도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독립 검토를 받을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이건 내가 고른 변호사에게 검토받고 결정할게.”“그렇게 해.”도현은 서류를 바로 거둬 서율에게 건넸다.한 대표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다 못해 소리쳤다.“지금 장난하나? 자네가 우리 채권을 샀으면 당장 자금부터 넣어야지!”도현의 시선이 차갑게 돌아갔다.“제가 왜 무상으로 경영 실패를 메워야 합니까?”“서율이와 결혼할 생각이라며. 사위가 될 사람이 처가를 살리는 게 당연하지!”“서율 씨와의 관계를 거래 조건으로 삼지 않겠습니다.”도현의 답은 단호했다.“회사를 살릴 방법은 있습니다. 대표이사 사임, 사주 일가의 개인 자산 출연, 외부 구조조정 책임자 선임, 회계 장부 전면 공개.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면 일정 기간 추심을 유예하고 회생 절차를 지원하겠습니다.”“직원 임금과 협력업체 대금은 운영자금에서 우선 지급하도록 별도 관리하고, 사주 일가의 배당과 가지급금 회수는 중단합니다. 이 조건은 서율 씨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바뀌지 않습니다.”서율은 그 마지막 문장을 확인하듯 도현을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한 대표가 헛웃음을 쳤다.“내 회사를 내놓으라는 말이잖아.”“직원 수백 명을 살리고 싶다면 대표 자리보다 회사가 먼저겠죠.”“이게 전부 네 계략이었군. 내 딸을 차지하려고 회사를 집어삼킨 거야!”도현의 턱이 굳었다. 서율은
서율의 손에 밀려난 한 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아버지 손을 쳐?”“제 팔을 잡으려고 하셨잖아요.”서율은 도현보다 반걸음 앞에 섰다. 무릎은 떨렸지만 발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저는 집에 가지 않아요. 이 이사와도 결혼하지 않고, 회사 빚 때문에 제 인생을 넘기지도 않을 거예요.”어머니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네가 철없이 굴어서 대일물산이 저 지경이 됐잖니! 어제까지만 해도 혼사만 성사되면 다 해결될 일이었어.”“횡령과 비자금 때문에 압수수색을 받은 게 왜 제 탓이에요?”어머니는 말없이 서율의 옷차림과 흐트러진 머리칼을 훑었다.“밤새 여기 있었니? 결혼도 안 한 처녀가 남자 집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서율의 얼굴이 굳었다.“제 사생활로 모욕하지 마세요. 제가 어디서 누구와 지내는지는 성인인 제 결정이에요.”도현의 턱 근육이 움직였지만 그는 끼어들지 않았다. 서율이 직접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차 변호사가 일을 키웠으니까 그렇지!”서율은 옆에 선 도현을 잠깐 바라봤다. 그가 사건을 미리 준비한 방식에는 여전히 화가 났다. 그러나 대일물산의 범죄와 부모의 선택까지 그의 책임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도현이 고발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드러날 일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제게 그 집안 남자를 만나라고 한 건 사실이잖아요.”한 대표의 얼굴이 붉어졌다.“다 너 잘되라고 한 일이야! 집안이 무너지면 네가 지금처럼 회사나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제 회사는 아버지 회사가 아니에요. 저는 제 월급으로 살 수 있고, 제가 만든 경력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네 월급으로 180억을 막을 수 있냐?”도현의 시선이 한 대표에게 고정됐다. 서율은 ‘180억’이라는 숫자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한 대표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대일물산 쪽 자금이 막히면서 오늘 오후 2시까지 180억을 못 넣으면 한성엔지니어링은 최종 부도야. 직원들 수백 명이 길바닥에 나앉는다고. 네가 책임질 거야?”가족,
암막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침대 끝을 가늘게 비췄다.서율은 익숙한 비누 향 속에서 눈을 떴다. 도현의 팔은 자신의 허리 위가 아니라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밤새 품에 안고 싶었을 텐데도, 그녀가 잠든 뒤 마음대로 끌어당기지 않은 모양이었다.서율이 몸을 돌리자 도현은 이미 깨어 있었다.“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조금 전부터.”“그건 감시 아니야?”도현의 얼굴이 굳었다가 서율의 입꼬리를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다.“미안해. 다음부터는 눈 감고 있겠다.”“농담이야.”서율은 손을 뻗어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겼다. 안경 없는 얼굴은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15년 동안 봐온 익숙한 얼굴인데도 관계가 달라지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후회해?”서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배신감이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안 해. 하지만 오늘부터 다 괜찮아진 건 아니야.”“알아.”“내가 화낼 때 변호사처럼 반박하지 마.”“노력…… 아니, 안 할게.”말을 고쳐 잡는 모습에 서율이 작게 웃었다.도현의 눈빛이 그 웃음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손을 뻗기 전 한 번 더 물었다.“안아도 돼?”“응.”그제야 도현이 서율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전날까지 숨통을 조이던 힘과 달리, 조금만 움직이면 빠져나갈 수 있는 포옹이었다.“이렇게 안는 게 더 좋네.”서율이 중얼거리자 도현의 턱이 머리 위에 닿았다.“나는 네가 못 나가게 잡는 게 안심된다고 생각했어.”“지금은?”“나갔다가도 돌아올 수 있다는 걸 믿어보려고.”서율은 그의 셔츠 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손끝에 힘을 주면 도현은 더 가까이 왔고, 풀면 그대로 멈췄다. 그 단순한 반응이 전날까지와 달랐다.“믿는 건 계약보다 오래 걸려.”“그래도 하겠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평온은 낯설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침대 옆 탁자에는 전날 도현이 해제한 권한 목록과 서율의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서율은 화면
도현이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를 걸지는 않았다.서율은 그 작은 차이를 확인한 뒤 소파 앞에 섰다. 찢어진 계약서 조각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었다.“내가 안 나간다고 해서 용서했다는 뜻은 아니야.”“알아.”“다시 시작한다면 규칙은 내가 정해.”도현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법률 상담을 앞둔 사람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말해.”“첫째, 내 연락과 위치를 몰래 확인하지 말 것. 둘째, 내 일과 인간관계에 개입하지 말 것. 셋째, 나한테 닿기 전에 내가 싫어하는지 확인할 것.”“전부 지키겠다.”“넷째.”도현이 긴장한 채 기다렸다. 서율은 손가락으로 찢어진 계약서 봉투를 가리켰다.“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그날 안에 말할 것. 침묵으로 벌주거나 상대가 알아서 눈치채길 기다리지 말 것.”“알겠어.”“나도 지킬게.”서율은 도현을 똑바로 봤다.“불안하면 계약서를 만들지 말고 말로 해. 네가 무섭다고, 질투 난다고, 떠날까 봐 겁난다고.”도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그게 제일 어렵겠지만 해볼게.”“노력한다는 말 말고.”“하겠다.”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의 어깨에 걸려 있던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이제 네 차례야.”“뭐가?”“내게 원하는 걸 물어봐.”도현의 시선이 서율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올라왔다.“지금 네게 입 맞춰도 돼?”도현은 짧은 대답을 기다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계약과 위약벌을 앞세우던 남자가 아무 장치도 없이 서율의 말만 기다리는 모습은 낯설었다.서율이 한 걸음 다가갔다.“돼.”도현은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손등으로 서율의 뺨을 쓸고, 그녀가 피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숙였다.입술이 닿았다.처음에는 숨결만 섞일 만큼 가벼웠다. 서율이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기자 입맞춤이 조금 깊어졌다. 뜨거운 체온과 익숙한 우디 향이 밀려왔지만, 이번에는 벽도 조항도 없었다. 서율은 원하면 언제든 물러설 수 있었다.그 사실이 오히려 발을 붙들었다.도현의 손이
도현은 계약서를 두 손으로 펼쳤다.첫 장에는 ‘가짜 연인 대행 표준계약서’라는 제목이 반듯하게 찍혀 있었다. 그 아래로 제3조, 제7조, 제9조가 이어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전문 용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문장들이 이제는 노골적인 욕망처럼 보였다.“잠깐.”서율이 손을 뻗자 도현이 멈췄다.“찢기 전에 말해. 이 계약서 말고도 사본이 몇 개야?”“개인 암호화 저장소에 파일 하나, 금고에 보관용 사본 하나. 파일은 방금 삭제했고, 저장소 삭제 기록과 금고 사본은 내일 네가 고른 변호사 앞에서 확인하겠다.”“공증이나 별도 인증은 받았어?”“아니. 네가 서명한 뒤에도 외부 절차는 밟지 않았어.”“왜?”도현의 시선이 종이 위로 떨어졌다.“효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제3자가 문구를 보면 바로 문제 삼았을 거야.”서율은 허탈하게 웃었다.“결국 나 하나 속이려고 만든 무대였네.”“그래.”도현은 변명 없이 인정한 뒤 계약서 첫 장을 찢었다.찌익.깨끗한 종이가 가운데서 갈라지는 소리가 거실에 길게 울렸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율의 서명이 찍힌 마지막 장까지 한 장씩 잘게 찢었다. 급하게 구기거나 분노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쌓은 덫을 스스로 해체하듯, 조항과 서명과 인장을 차례로 없앴다.종이 조각이 유리 테이블 위에 쌓였다.서율은 그중 자신의 이름이 반쪽만 남은 조각을 집었다. 서명 당시의 다급함이 손끝에 되살아났다. 그녀는 조각을 다시 내려놓고 투명한 봉투를 가져와 전부 담았다.
“19살 봄, 네가 벚꽃 아래서 다른 애한테 고백받던 날이었어.”도현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말을 이었다.“네가 거절하고 내 옆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딸기우유를 마셨지. 그때 처음 알았어.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장면을 나는 견딜 수 없다는 걸.”서율은 그날을 기억했다. 도현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고, 딸기우유 빨대를 괜히 구겨놓았다.“그래서 고백을 안 했어?”“친구로 남으면 적어도 계속 볼 수 있으니까.”도현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비겁했지. 네가 소개팅을 할 때는 상대를 알아봤고, 위험한 소문이 있는 사람은 네 친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끊어냈어. 네 회사에 들어가려던 투자사 중 평판이 나쁜 곳도 막았고.”“사진학과 선배 말고는 안전한 사람에게도 손댄 적 없어?”“연락을 끊게 만든 사람은 그 한 명이 전부야. 하지만 너 모르게 알아본 사람은 더 있어.”“명단은?”“네가 쓰라고 한 목록에 전부 적었어. 조사 의뢰 내역과 원자료도 네가 확인하게 넘기겠다.”서율은 그의 말을 기억해 두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내 일까지 건드렸어?”“루미나의 결정에는 손대지 않았어. 네 실력으로 얻은 자리라는 걸 아니까. 대신 네게 손해를 끼칠 사람만 뒤에서 조사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는데?”“알면 네가 나를 경계할 테니까.”서율은 입술을 다물었다. 도현은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관계의 절반을 몰래 차지해왔다.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방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