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매향의 손이 붉은 천을 받아 가자 문틈은 다시 좁아졌다.연화는 곧장 돌아서지 못한 채 등잔을 문턱 안으로 밀어 넣었다.“불이 필요하면 쓰시오.”매향이 등잔을 받아 들자 문이 닫혔고,이윽고 안에서는 물 끓는 소리와 약초를 찧는 소리가 번갈아 흘러나왔다.그사이 연화는 마당 한쪽에 남아 피 묻은 돌을 바라보았다.문 너머에서 이겸의 숨이 한 번 끊길 때마다 손끝이 움직였지만, 끝내 빗장에는 손대지 않았다.얼마 후 매향이 문을 열었다.이겸의 옆구리에는 새 붕대가 감겨 있었고, 매향의 소매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다.“오늘은 움직임을 줄이시오.”“상처가 붙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오?”“몸은 기다리지 않으면 썩소.”매향은 이겸을 문밖으로 내보낸 뒤 연화를 바라보었다.“치료는 끝났소.”그녀는 문을 닫았고 이번에는 빗장까지 걸었다.연화는 손에 남은 등잔 기름을 치맛자락에 문지른 뒤 집으로 돌아왔다.해가 지기 전까지 매향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러나 어둠이 담장 아래로 내려앉자 빗장이 풀렸고,매향은 낮에 받아 간 붉은 천을 문고리에 걸었다.마른 천이 바람을 받아 펴지는 순간, 골목에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하나씩 그쪽으로 향했다.매향은 누구에게도 까닭을 설명하지 않았다.다만 우물에서 물을 길어 돌아오던 이겸이 문 앞에 멈추자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피는 멎었소.”“그렇소.”“그러면 이제부터는 상처와 상관없는 일이오.”이겸은 붉은 천을 보다가 문 안의 매향에게 시선을 옮겼다.“내가 들어가기를 바라오?”“바라지 않았다면 걸지 않았소.”그는 곧장 문턱을 넘지 않았다.오히려 매향이 마음을 바꿀 시간을 남기듯 한 걸음 떨어져 기다렸다.매향은 그런 그를 오래 바라보더니 문을 조금 더 열었다.“치료받은 빚이라 생각한다면 돌아가시오.”“빚으로 들어가는 밤은 원하지 않소.”“그러면 들어오시오.”마침내 이겸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매향은 문을 닫으며 이겸의 도포를 벗겼다.이겸은 매향의 저고리를 거칠게 끌어올려 가슴을 드러내고,손
새벽이 밝기 전, 초희의 문이 먼저 열렸다.이겸은 어둠이 남은 골목으로 나왔고,초희는 문턱 안에 서서 그의 도포 깃에 붙은 붉은 실을 떼어 주었다.밤새 낮춰 둔 등잔은 아직 꺼지지 않았으며,마루에는 반쯤 비운 물그릇과 풀렸다 다시 감긴 실타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이겸이 옷깃을 여미다가 옆구리를 누르자 젖은 도포가 오래된 상처에 들러붙은 듯 얼굴이 잠시 굳었다.“상처가 벌어진 것이 아니오?”“조금 스친 것뿐이오.”초희가 한 걸음 다가가려 했으나 이겸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렸고,곧 골목을 건너 연화의 집 앞을 지나갔다.그의 발은 닫힌 문 앞에서 느려졌지만 멎지 않았다.연화는 창호에 얹었던 손을 거두었고, 초희 또한 맞은편의 그림자를 본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아침이 되자 연화는 염색할 무명 한 필을 안고 초희의 집을 찾았다.초희는 평소보다 늦게 빗장을 들었지만, 문이 열리자 피하지 않고 연화를 마주 보았다.머리와 옷고름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나 소매 끝에는 검은 실 한 가닥이 붙어 있었고,전날 문고리에 걸었던 붉은 댕기는 마루 한쪽에 펼쳐져 있었다.연화는 무명을 내밀었다.“장날 전에 물을 들여야 하오.”“사흘이면 되오.”초희가 천을 받는 순간 두 사람의 손끝이 스쳤으나,이번에는 어느 쪽도 급히 물러서지 않았다.“묻지 않을 것이오?”연화는 흐트러진 실타래를 집어 천천히 감았다.“그대가 스스로 댕기를 걸었고, 그대 손으로 문을 열었소. 내가 무엇을 묻겠소?”초희는 붉은 천을 집어 무명 위에 올려놓았다.“언니가 보는 앞에서 연 문이니 없던 일처럼 숨기지는 않겠소.”“숨겨야 할 까닭도 없소.”“그분에게 끌렸소.”초희의 말은 떨렸지만 흐려지지 않았다.“언니가 아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오라 했고, 문이 닫힌 뒤에도 돌려보내지 않았소.”연화가 실을 감던 손을 멈추자 초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미안하다는 말로 내 선택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소.”초희가 변명했다면 화를 낼 수 있었고, 제 탓이라며 울었다면 위로
아침을 깨운 것은 닭 울음이 아니라 대장간에서 울려 나온 망치 소리였다.연화는 이가 흔들리던 낫을 들고 골목을 건넜으나,처마에 걸린 이겸의 도포를 발견한 순간 걸음을 늦췄다.빗물은 거의 말라 있었지만 한쪽 소매에서는 아직 물방울이 떨어졌고,그 아래 놓인 대야에는 검은 흙물이 고여 있었다.연화가 문턱을 넘자 난실은 인사 대신 손부터 내밀었다.“낫 줘.”난실은 낫날을 살핀 뒤 모루 위에 올렸으며,망치가 내려앉을 때마다 불티가 두 사람 사이로 튀었다.연화의 숨이 미세하게 거칠어졌고,난실의 팔뚝에 돋은 굳은살과 망치질할 때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근육이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연화는 처마를 보지 않으려 했으나 난실의 머리끈이 손목에 감겨 있는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그 검은 천이 피부에 파고드는 자국이, 어젯밤 누군가의 손아귀에 거칠게 움켜쥐인 흔적처럼 느껴졌다.“금옥의 문은 열리지 않았소.”묻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그것이었다.난실은 망치를 멈추지 않았다.망치가 내려갈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무겁게 출렁이며,땀에 젖은 옷감이 피부에 달라붙는 소리가 은밀하게 들렸다.“알아.”“그러면 그 사람이 이곳으로 왔구려.”이번에는 망치가 허공에서 멎었다.난실은 달아오른 낫을 물에 담갔고,흰 김이 얼굴을 가렸다가 걷힌 뒤에야 연화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고,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적시는 순간적인 동작이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내가 문을 열었어.”연화가 입술을 다물자 난실은 굳은살 박인 손으로 모루 끝을 짚었다.그 손가락이 모루를 누르는 힘에, 어젯밤 누군가의 몸을 움켜쥐었던 힘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어젯밤만은 나도 기대고 싶었어. 그뿐이야.”“내게 설명할 까닭은 없소.”“그래. 그러니 네가 버려진 사람처럼 서 있을 까닭도 없어.”연화가 대꾸하려는 순간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다.이겸은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 채 나왔고,손목에는 난실의 검은 천이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그대 욕망에 죄를 묻는 것이 아니오.”빗물이 이겸의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렸고, 젖은 도포 자락은 다리에 무겁게 감겼다.그런데도 그는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연화만 바라보았다.“다만 그대를 다른 밤과 같은 마음으로 받고 싶지 않았소.”연화는 젖은 붉은 천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불에 그슬린 끝이 손바닥을 긁었으나 놓지 않았다.“그 말로 다른 여자들의 밤을 가볍게 만들지 마시오.”“가볍다 한 적 없소.”“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이미 나누고 있지 않소. 품어도 되는 여자와 품어서는 안 될 여자로.”이겸의 손이 들렸지만 연화의 뺨에 닿기 전에 멎었다.그가 거리를 지키자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열기가 더 선명해졌다.“그대를 모욕하려 한 것이 아니오.”“그러면 나를 귀하게 여기는 동안 다른 여자들은 무엇이 되오?”이겸은 곧장 답하지 못했다.빗소리는 처마 아래를 가득 채웠고, 그의 침묵은 그보다 무거웠다.연화는 그 침묵을 피하지 않았다.“내 욕망을 존중한다면서 그 욕망이 그대에게 닿는 순간만 물러서지 않소.그러니 그것은 나를 위한 절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을 지키기 위한 비겁함이오.”“연화.”“내 이름을 부른다고 답이 달라지지는 않소.”연화가 문을 닫자 빗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빗줄기를 갈랐다.그날 밤 이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그러나 연화는 등잔을 끄고도 잠들지 못했고,골목 끝에서 멎었다 이어지는 발소리를 하나씩 헤아렸다.첫 번째 발은 우물가를 돌아갔고, 두 번째는 월선의 담장 앞에서 잠시 느려졌다.마지막 발소리는 금옥의 집 쪽에서 끊겼다.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연화는 이불 끝만 거듭 접었다 폈다.그가 돌아오기를 바란 적 없다고 되뇌었으나, 문밖이 고요해질 때마다 가슴 한편이 더 비어 갔다.아침이 되자 진흙 위 발자국은 금옥의 담장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있었다.연화는 그것을 오래 보지 않으려 제 문 앞에 고인 빗물부터 쓸어 냈다.하지만 빗자루 끝이 돌틈을 긁을 때마다 발자국은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더 또렷해 보였다.
“그대는 내 선택도 놓을 수 있소?”붉은 천 끝에 붙은 불씨가 결을 타고 번졌다.이겸의 손이 들렸으나 문턱 앞에서 멎었고, 연화는 등잔 옆 물그릇을 바라보지 않았다.“불부터 끄시오.”“대답부터 하시오.”“놓고 싶지는 않소.”연화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그러면서도 빼앗지는 않겠소. 태울지 말지는 그대가 정하시오.”불길이 손끝 가까이 다가오자 연화는 천을 물그릇에 떨어뜨렸다.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잔불이 흔들렸고,젖은 붉은 천에서는 검게 탄 냄새가 올라왔다.이겸은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놓고 싶지 않으면서 내 선택은 따른다니, 그 두 말이 함께 설 수 있소?”“그대가 나를 택하지 않아도 막지 않겠다는 뜻이오.”“막지 않는다고 놓은 것은 아니지 않소.”연화는 물그릇 가장자리에 번진 붉은 물을 닦지 않았다.탄 조각이 물속에서 풀릴 때마다 색은 옅어졌으나 검은 끝은 그대로 남았다.그녀는 천을 꺼내려다 다시 잠기게 했고,이겸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두 손으로 건져 냈다.젖은 천을 문 안쪽에 펼치자 물이 문턱을 타고 골목으로 흘렀다.붉은 물이 돌틈에 고였다가 천천히 번졌다.연화는 그 자국이 골목 끝까지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에서 물러섰다.등잔에는 탄내가 오래 남아 있었다.새 빗장이 걸린 뒤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아침이 밝자 탄 자국은 붉은 천의 한쪽 귀를 검게 오므려 놓았다.연화는 잘라 내지 않고 마당 빨랫줄에 걸었다.밤새 물에 젖은 소매도 함께 널었고,월선은 빈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다 두 천을 번갈아 보았다.“태웠구먼.”“끝까지 태우지는 못했소.”“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부터 정해야겠네.”월선은 마루 끝에 놓인 방석을 털었다.먼지가 햇빛 속으로 일었다가 빈자리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문을 열면 누군가 다칠 것이고, 닫으면 그대가 다치오. 어느 쪽이 덜 나쁜지 골라야 하는 것이오?”“죄 없는 선택만 찾으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지.”“그러면 다치게 해도 된다는 말이오?”
“왜 그대가 기다리는 문은 늘 연화의 것이오?”옥련은 사람 하나 지날 틈을 손바닥 너비까지 좁힌 채 이겸의 대답을 기다렸다.맞은편 창호의 어둠이 그의 어깨 너머에 남아 있었고, 연화는 그 틈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그 문은 아직 나를 부르지 않았소.”옥련의 웃음이 멎었다가 더 환하게 번졌다.“먼저 연 문은 기억하고, 열리지 않은 문은 기다리는구려.”그녀는 붉은 댕기를 안으로 잡아당기고 문을 닫았다.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골목을 건넜고,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묵는 방으로 향하는 길은 연화의 집 앞을 지났으나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연화도 창호를 닫았지만 바느질함은 밤새 열린 채였다.닫힌 주막 문 아래로 등잔빛이 새어 나왔으나, 그 뒤로 주막 앞에 멎는 발소리는 없었다.이튿날 염색집 솥 아래에서는 젖은 장작이 연기를 토했다.초희는 쪽빛 천을 걷어 내고 두 밤 전 접어 쥔 붉은 댕기를 화덕 가까이 가져갔다.끝자락이 열기에 오그라들자 연화가 천의 반대편을 붙잡았다.“무엇을 하려는 것이오?”“태우면 다시 걸지 않을 것 같았소.”“태운다고 그대가 연 문까지 없어지지는 않소.”“없애려는 것이 아니오.”초희는 천을 놓지 않은 채 불길을 바라보았다.“또 열까 봐 그러는 것이오.”연화의 손등과 초희의 손등이 천 위에서 맞닿았다.초희는 먼저 손을 거두지 않았고, 연화도 댕기를 빼앗지 않았다.화덕의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간 뒤에야 초희가 천을 불에서 멀리 옮겼다.“그날 밤을 후회하오?”“내가 문을 연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소.”초희는 검게 오그라든 끝을 가위로 잘랐다.“다만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어도, 나를 지나 연화를 보는 순간까지 다시 견딜까 봐 두렵소.”잘린 붉은 조각이 연화의 치맛단 앞에 떨어졌다.그녀는 그것을 집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초희는 남은 천을 길게 찢어 젖은 쪽빛 천 묶음에 감았다.불에 그을린 조각만 화덕 앞에 남았다.한낮에 이겸이 염색을 마친 베 꾸러미를 옮기러 왔다.초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