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최종 입찰 PT가 열리는 그룹 본사 대형 이사회장.웅장한 마호가니 대리석 테이블 위로수많은 임원진과 자문 로펌 관계자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공기의 흐름마저 무겁게 가라앉은 이곳은,그룹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임원들과 보수적인 이사들이 모여치열한 득실을 따지는 살벌한 비즈니스의 장이었다.서지우 전무는 상석에 앉아 느긋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이사회장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그의 입꼬리는 묘한 기대감으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어제 그 맹독성 제안서로 자신을 골탕 먹였던 '문 독사'가오늘 이 살벌한 이사회장에서 과연 어떤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으로노련한 이 이사들을 휘어잡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잠시 후, 이사회장 대형 문이 열리고 태산 로펌의 자문 변호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그 선두에 선 것은 단연 문리안이었다.화려한 장식이나 과한 액세서리 대신,몸의 선을 팽팽하게 살려주는 깊고 단정한 딥블루 컬러의 맞춤 슈트 차림.귀밑으로 칼같이 떨어지는 시크한 칼단발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냉철한 눈빛은이사회장의 공기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그녀의 등장과 함께 이사회장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하지만 곧바로 보수적인 성향의 노년 이사들 몇 명이 콧방귀를 뀌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아니... 이번 M&A 자문 로펌으로 태산이 올라왔다기에 기대했더니, 변호사가 저렇게 파릇파릇한 젊은 여자였나?""나이가 아무리 많이 볼래도 이십댜 같은데... 스물 다섯? 스물여섯 남짓 되어 보이는데... 그룹의 사운이 걸린 이 대형 M&A 실무를 저렇게 연하고 경험 없는 여변호사가 대체 뭘 안다고 덤비는 거지? 원... 요즘 로펌들은 패기만 앞세워서 참..."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늙은 이사들의 콧방귀와 쯧쯧 차는 소리가이사회장 구석까지 고스란히 흘러들었다.신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편견 어린 시선을 던지는늙은 꼰대들의 치사하리만치 뻔뻔한 태도였다.상석에 앉아 있던 서지우 전무의 표
수아와 지혁의 셋째 서연희의 돌잔치가 끝나고 평화로운 주말이 지나간 월요일 아침.그룹 전무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유독 무거우면서도, 묘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서지우는 짐짓 엄청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비서를 바라보았다."김 비서, 이번 신규 사업 M&A 자문 법무법인 선정 건 말이야.""네, 전무님. 대형 로펌 몇 곳에서 이미 제안서를 올렸습니다만...""거기 말고. 법무법인 말이야. 그중에서도 문리안 변호사 팀. 그쪽으로 이번 자문 입찰을 정식으로 타진해 보라고 지시해.""네? 태산의 문 변호사님 말씀이십니까? 저번에 그...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소문난...""알아, 나도. 그러니까 더 확실하게 밀어붙여. 어서 접수해."김 비서가 물러나자마자, 서지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집무실 책상에 앉아턱을 괴고는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은 사내 냉혈한 전무라기보다는,좋아하는 장난감을 손에 넣기 직전의 아이 같았다.'그 독사, 오기만 해 봐라. 내 구역 안에서 아주 쥐락펴락 옴짝달싹 못 하게 해 줄 테니...'서지우의 머릿속에는 이미 문리안이 제 발로 전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자신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해 쩔쩔매는 달콤한 시나리오가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었다.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리안의 모습까지 상상하자저절로 입꼬리가 귀까지 치솟았다.한편, 로펌 파트너 변호사 집무실.문리안 변호사는 탁자에 놓인 서류 봉투 하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발신인은 다름 아닌 서지우.그 콧대 높은 서씨 가문 그룹의 전무이자,최근 들어 자꾸만 이성적인 방어벽을 흔들어대는 위험한 남자였다.제안 요청서(RFP)를 뜯어본 리안은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하…… 진짜 이 남자가 사람을 뭘로 보고."서지우의 의도는 뻔했다.공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핑계로 자신을 사내로 끌어들여어떻게든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얕은 속셈이그가 보낸 제안서 문구 구석
시간은 야속하리만큼 빠르게 흘렀다.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수아와 지완의 셋째 딸 연희의 첫 돌잔치 날이 찾아왔다.3년 전 쌍둥이들의 돌잔치가 열렸던 바로 그 웅장한 호텔 연회장.달라진 것이 있다면, 서지우의 위상과 외모였다.서른넷이 된 서지우는 이제 완벽하게 가문의 핵심 사업을 총괄하는 정식 전무이사가 되어 있었다.가볍게 미소 짓던 과거의 날라리 기질은 온데간데없이,딱 벌어진 어깨에 완벽하게 맞춤 제작된 세련된 다크 그레이 슈트,그리고 살짝 넘긴 머리 사이로 감돌아 흐르는 중후하고 성숙한 어른 남자의 아우라는연회장에 모인 수많은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어이쿠, 우리 서 전무님! 갈수록 인물이 사시네. 회사는 언제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셨고? 이제, 형 서지완 교수처럼 훌륭한 배우자만 찾으시면 되겠어요~!!"가문의 어르신들과 기업 대표들의 찬사가 이어졌지만,정작 지우의 눈은 연회장 입구 쪽을 향해 연신 얼씬거리고 있었다.'이상하네... 형수 말로는 오늘 귀국해서 바로 이쪽으로 온다고 했는데...'그때였다.연회장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며,장내의 모든 조명과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들어서는 한 여성이 있었다."어...?"서지우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이 슬쩍 흔들렸다.3년 전 어깨까지 늘어뜨렸던 긴 생머리도, 20대 특유의 수수한 옷차림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귓볼을 살짝 스치는 파격적이고 지적인 칼단발 숏컷 헤어스타일,군더더기 없이 완벽하게 떨어지는 핏의 딥 블루 컬러 슬림 슈트,높게 솟은 하이힐 소리가 또각, 또각 연회장에 명쾌하게 울려 퍼졌다.미국 뉴욕의 대형 로펌에서 수많은 거물급 사건을 승소로 이끌고,이번에 국내 최고 대형 로펌인 '태산'의 최연소 파트너 변호사로 파격 스카웃되어 귀국한스물여섯의 '문리안 변호사'였다.단정한 숏컷 사이로 드러난 또렷한 이목구비와 지적인 아우라는,과거의 앳된 석사생의 모습을 완벽하게 지워버린 완벽한 '커리어 우먼' 그 자체였다.비교적 어린 나이에
산후조리원 8층 특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갑던 공기는 부드러운 온기로 가득 채워졌다.침대 위에서 갓 태어난 셋째 '연희'를 안고 있던 수아와,그 옆에서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지완 교수가 문쪽을 돌아보았다."문리안...?! 너 진짜 미국에서 바로 날아온 거야?!"수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고,리안은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의 가슴 졸임은 싹 잊은 채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아에게 달려갔다.지우 역시 츤데레답게 투덜거리면서도 리안의 무거운 짐들과자신이 사 온 타르트 상자를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올려두었다.문제는 그 휴전 협정이 단 1시간도 채 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수아가 아기에게 수유를 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조리원 휴게실 소파에 앉은 지우와 리안, 그리고 지완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지우는 리안의 수수한 차림과 길게 늘어진 생머리를 흘끔거리며,자기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거 참, 아무리 급하게 귀국했어도 명색이 미국 로스쿨 석사생인데... 1년 전 그 도도하던 각은 어디 가고 웬 여대생 수련회 패션인지 모르겠네. 아까 로비에서 진심으로 여대생인 줄 알고 도와주려다 봉변당했잖아."리안의 눈썹이 팍 꿈틀했다.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자기 자켓을 깔아주고 차가운 손을 꼭 잡아주며체온을 나누어주던 그 든든한 '어른 남자'의 환상이 단 1초 만에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서지우 씨.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제가 고맙다고 아주 정중하게 인사까지 한 거... 지금, 깔끔하게 취소하겠습니다."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지우를 똑바로 노려보며 쏘아붙였다."일단, 제가 어떻게 입든 그건 제 자유고요. 그리고.. 산모 조리원에 조리를 도와주러 오면서 뾰족구두에 정장 입고 올 순 없잖아요? 사리분별 못 하고 생각없이 겉모습으로 사람 평가하는 그 가벼운 언행은 1년이 지나도 여전하시네요. 아까 엘리베이터에선 제법 어른스러운 척하더니, 문 열리자마자 다시 본색 드러내는 것 좀 봐
쌍둥이 연수와 연아의 돌잔치가 끝난 뒤, 문리안은 예정대로 미국으로 돌아갔다.자신의 특기인 '화려한 외모와 능글맞은 미소'로 접근했다가 제대로 망신만 당한 서지우는,리안이 떠난 테라스 유리문을 노려보며 분통을 터뜨렸더랬다."허! 스물넷? 고작 스물네살짜리가 어디서 서른둘한테 아저씨 취급에 방탕아 타령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안 넘어오는 여자가 없었는데!"지우는 자신이 성숙해졌다 자부했기에 그 모욕(?)을 잊을 수가 없었다.돌잔치장에서 톡 쏘는 독설을 날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문리안이라는 존재는,서지우의 일상에 생각보다 꽤 긴 잔상을 남겼다.‘독사 같은.. 어린 여자애가... 나한테 감히 방탕아 타령을 해?’처음 몇 달 동안은 억울함과 오기에 밤마다 이불을 킥킥 차며 입을 삐죽거렸지만,세월의 흐름이란 무서운 법이었다.서른둘의 지우는 교수로 지내는 형을 대신해 본가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맡아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고,머릿속에서 도도하게 굴던 스물넷 석사생의 잔영도 차츰 희미해져 갔다.그리고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수아가 가문의 축복 속에 셋째 딸 ‘연희’를 건강하게 출산했다.수아가 고급 산후조리원에 입원한 다음날 오후.지우는 형 지완의 부탁으로 수아가 먹고 싶다던 특제 수제 타르트 상자와셋째 조카를 위한 명품 배냇저고리 선물을 들고 조리원을 찾았다.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로비에 들어서던 지우는,수아가 머무는 특실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에 슬쩍 시선이 갔다.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윤기 나는 긴 생머리,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오버핏의 편안한 아이보리색 가디건과 넓은 슬랙스 팬츠.양손에는 미국에서부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듯한 영어가 가득 적힌건강보조식품과 아기 용품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어이쿠, 조리원 방문객이신가 본데..."지우는 예의 그 오지랖과 능글맞음이 발동해짐을 쏟을 듯 낑낑거리는 여자의 옆으로 스윽 다가갔다.긴 생머리에 편안한 옷차림 때문인지
그 어떤 고급 호텔의 웅장한 연회장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날이었다.서대감 집안의 소문난 츤데레 장남, 서지완 교수의 얼굴에는몇 달 전부터 보기 드문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바로 첫째와 둘째, 쌍둥이 연수와 연아의 돌잔치가 성대하게 열린 날이자—동시에 수아의 배 속에 셋째가 고이 뿌리를 내렸다는 기쁜 소식이온 가문에 전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아이고, 내 손주 녀석들이 판사봉이랑 청진기를 잡았구나! 가문의 경사네, 경사야!"평소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서대감마저 아이들의 돌잡이 결과에세상을 다 얻은 듯 껄껄 웃었고, 한 여사는 수아 곁을 붙다시피 하며 "얘 수아야, 너 또 임신 초기라는데 무리하면 큰일 난다. 어서 가서 좀 앉아 있어라"라며 사과 한 조각까지 깎아 입에 넣기 바빴다.그런 화기애애한 잔치 한복판에서, 서지완 교수의 동생 서지우는 연회장 한쪽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양주 잔을 설핏 흔들고 있었다.서지우는 예전처럼 매일 밤 여자를 바꾸고 클럽을 전전하던 가벼운 한량 방탕아가 아니었다.오는 여자는 절대 거절하지 않았고 가는 여자 또한 절대 잡지 않았던 나름 쿨하고 생각했던 그가,형 서지완이 목숨을 걸고 강수아를 지켜내며 진짜 '남자의 사랑'을 보여준 이후, 서지우 역시 형수를 가까이서 보며 여자는 한낱 장식품과 부속품, 대를 이어줄 도구로만 보던 눈이 변했다.강수아. 형수의 맑고 곧은 모습, 그리고 자녀와 남편을 위한 강단있는 모습까지..형수의 모든 면모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방탕한 모습을 청산하몀서 가문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살던 태도를 버리고, 이제는 제법 가문의 사업을 진지하게 배우며 한층 성숙해진 참이었다.하지만 수년 간 몸에 배어버린 특유의 능글맞음과 겉으로 틱틱거리는 '서씨 집안 내력의 츤데레 기질'까지 완벽히 세탁된 것은 아니었다."형수님은 아주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지. 아닌가 ...? 형님이 나라를 구하신건가? 아무튼 형님이 저렇게 팔불출 늑대로 개과천선할 줄
술을 마신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지완은 몸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이상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단순한 취기가 아니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뜨거운 불길이 뇌를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거친 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서지우. 술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지완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우의 덜미를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형, 미안. 근데 형을 위해서야.
“엄마, 대박 사건이라니까? 형이 여자한테 눈이 돌아갔어. 그것도 아주 제대로.” 서울 성북동의 거대한 저택, 서지우는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에게 흥분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지방의 한 한적한 카페 구석, 지우의 손에는 채원의 신상명세서와 조사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강수아, 스물둘. 지방 국립대 농업생명과학과 과수석. 부모 없이 홀로 키워준 이모의 교통사고 수술비를 대기 위해 잠시 밤거리로 흘러든 불쌍하고 올곧은 여자. 평생 얼음 조각 같던 형 서지욱이 매일 밤 노래방 구석에서 그 미련한 짓을 하
서지우는 제 친형인 서지완을 한 번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형은 가문의 완벽한 피조물이자 오차 없는 기계였다. 부모님조차 형을 자식이 아닌 가문의 간판으로 대했고, 지우 역시 늘 대단한 형의 그늘에 가려져 방탕한 둘째 도련님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가문에는 철저히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형 지완은 아주 어릴 적 앓았던 큰 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이성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 병으로 인해 아이를 갖기 힘든 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이 기를 쓰고 명문가 딸인 윤서희와 형을
서지완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자식을 학문의 도구로 여기는 엄격한 집안에서, 그는 늘 자를 잰 듯 완벽한 장남이어야 했다. 감정은 사치였고 이성은 법이었다. 서른넷이 되도록 그 어떤 여자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건 대단한 절제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흥미가 없었다. 심장이 뛰지 않으니 동요할 일도 없었다. 친구들의 등쌀에 밀려 이 유흥가 지하의 퀴퀴한 노래방에 앉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지완은 제 인생이 통째로 뒤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 새로 온 애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