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 2화. 없는 일로 합시다
“나를 보자마자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왜 내 과에 지원했지?”
한소이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윤재혁을 보고 도망치고 싶은 것과 일반외과에 지원한 건 별개의 문제였다.
사람은 무서웠지만 외과는 좋았다.
그걸 설명하려면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했고, 맞선 상대에게 자신의 의사 인생을 진지하게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윤재혁이었다.
청명대학교병원에서 전공의들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소문이 도는 남자.
그 앞에서 외과에 대한 열정을 말했다가 의학적 근거부터 물어보면 곤란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생각하지?”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이 뭔지 고민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답을 할 생각이었나?”
“맞선 자리에서는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맞춰 주는 게 예의라고 들었습니다.”
“방금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한 사람이?”
소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로는 이길 수 없었다.
아니, 말로 이겨도 문제였다.
이 사람에게 밉보이면 병원 생활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아직 레지던트 합격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이는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물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안에 물이 들어 있었다.
“교수님 때문은 아닙니다.”
“뭐가?”
“일반외과에 지원한 이유요.”
윤재혁은 대답을 기다렸다.
소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외과가 하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그건 모든 지원자가 하는 말이지.”
“그럼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네가 버틸 수 있다는 근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본인은 알 텐데.”
소이는 피식 웃을 뻔했다.
맞선 자리에서 자신의 지원 동기를 검증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물론 맞선도 많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지금까지 솔직하지 않았나?”
“상대적으로요.”
윤재혁이 등을 의자에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이는 메뉴판을 덮었다.
“저는 사람을 직접 살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다른 과는 사람을 안 살리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말은 정확히 해야지.”
벌써 피곤했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 아침마다 문장 교정을 받다가 출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지 않기로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소이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말했다.
“환자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판단하고, 필요한 순간에 손을 쓰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피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요.”
윤재혁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책임지는 의사.”
“네.”
“그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많지.”
“저도 압니다.”
“아는 것과 해내는 건 다르고.”
“그것도 압니다.”
“그럼 버틸 자신은?”
소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기는 쉬웠다.
하지만 인턴 생활만으로도 외과가 얼마나 고된 곳인지 충분히 봤다. 잠을 못 자고, 식사를 놓치고, 환자가 나빠지면 자기 잘못이 아니어도 밤새 기록을 다시 읽어야 했다.
버틸 자신이 있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윤재혁의 표정이 굳었다.
소이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차이가 있나?”
“많이 있습니다.”
“설명해 봐.”
“자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힘들어졌을 때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힘들 거라는 걸 알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예상 범위라는 뜻이죠.”
윤재혁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소이는 괜히 손끝을 말아 쥐었다.
말해 놓고 보니 그럴듯했지만 실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가 비웃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윤재혁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 음식이 나왔다.
직원이 접시를 내려놓는 동안 두 사람 사이의 대화도 잠시 끊겼다.
소이는 뜨거운 파스타를 포크로 말았다.
입맛은 사라졌지만 남기면 어머니에게 설명해야 했다. 맞선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밥도 못 먹었다고 하면 김정숙 여사는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질 사람이었다.
소이는 파스타를 한입 먹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맞은편에서는 윤재혁이 스테이크를 정확한 크기로 잘랐다. 칼을 쥔 손이 지나치게 익숙하고 안정적이었다.
저 손으로 사람의 배를 연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 봅니까?”
소이는 포크를 놓칠 뻔했다.
“안 봤습니다.”
“계속 손을 보고 있었는데.”
“그냥 칼을 잘 쓰시는 것 같아서요.”
말해 놓고 나서야 더 이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윤재혁의 시선이 접시 위의 나이프에서 소이의 얼굴로 올라왔다.
“외과 의사니까.”
“그러시겠죠.”
“평소에도 사람 손을 관찰합니까?”
“아닙니다.”
“내 손만?”
“교수님.”
“윤재혁 씨.”
“그렇게는 못 부릅니다.”
“병원 밖에서는 교수와 인턴이 아닙니다.”
“저한테는 맞습니다.”
“맞선 상대보다 교수인 게 편한가?”
“훨씬요.”
윤재혁이 짧게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환하게 웃은 것도 아니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 정도였는데, 소이는 잠시 말을 잊었다.
병원에서 본 윤재혁은 늘 차갑고 날카로웠다.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테이크를 잘랐다.
“병원에서도 계속 피할 겁니까?”
“제가 교수님을 왜 피합니까?”
“오늘만 세 번 도망치려고 했는데.”
“맞선 자리라 그랬습니다.”
“병원에서는?”
“교수님이 계신 방향으로 굳이 갈 필요가 없으면 반대편으로 가겠습니다.”
“그게 피하는 거지.”
“효율적인 동선입니다.”
윤재혁이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소이는 억울한 마음에 포크로 파스타를 세게 말았다. 면이 소스 밖으로 튀어 테이블보 위에 떨어졌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붉은 소스 자국으로 향했다.
소이는 냅킨을 집어 들었다.
“제가 닦겠습니다.”
“직원이 하겠지.”
“제가 흘렸으니까 제가 해야 합니다.”
“모든 걸 직접 책임지는군.”
소이의 손이 멈췄다.
조금 전 자신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셈이었다.
“이건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직접 붙잡고 있을 것 같은데.”
“저를 얼마나 보셨다고 그런 판단을 하십니까?”
“짧게 봐도 보이는 사람이 있어.”
소이는 반박하려다 그만뒀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습관을 들킨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맞선 상대가 아닌 교수라면 저런 관찰력이 장점일 수 있었다.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는 외과 의사.
그 밑에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윤재혁은 배울 점이 많은 교수일 수는 있어도 함께 일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식사가 절반쯤 끝났을 무렵, 소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일은 정말 없었던 일로 하는 겁니까?”
“아까 동의했습니다.”
“병원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실 거죠?”
“누구에게?”
“다른 교수님이나 전공의들한테요.”
윤재혁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가 인턴과 맞선을 봤다고 떠들고 다닐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대답하는군.”
“다만 서로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확실히 해 두려는 겁니다.”
“내 이해관계는 뭔데?”
“병원에서 놀림받으실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놀리지?”
“뒤에서요.”
윤재혁은 잠시 침묵했다.
소이는 자신의 말이 지나치게 솔직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낮게 물었다.
“평소에 내 뒤에서 무슨 말을 합니까?”
“저는 모릅니다.”
“방금 아는 사람처럼 말했는데.”
“추측입니다.”
“거짓말할 때 오른쪽 눈썹이 올라가는군.”
소이는 황급히 손으로 눈썹을 눌렀다.
윤재혁의 눈빛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뒤에서 하는 말보다 중요한 게 있나?”
“오늘 맞선이 알려지면 저한테도 곤란합니다.”
“특혜를 받았다는 소문?”
정확했다.
소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합격하지도 않았습니다. 괜한 말이 돌면 면접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사람들이 다른 이유를 붙일 겁니다.”
“합격하면 나 때문이고, 떨어지면 나에게 찍혔기 때문이라고 하겠지.”
“네.”
“그래서 아무도 몰라야 한다?”
“적어도 병원에서는요.”
윤재혁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없었던 일로 하죠.”
소이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이제야 정말 끝난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소이는 다시 긴장했다.
“무슨 조건입니까?”
“병원에서 아는 척하지 말 것.”
“그건 제가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사적인 연락도 하지 말 것.”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족들이 다시 자리를 만들더라도 거절할 것.”
“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윤재혁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다른 지원자와 똑같이 평가받을 겁니다.”
소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오히려 더 엄격하게 볼 수도 있고.”
“왜 더 엄격하게 보십니까?”
“오늘 이 자리를 봤으니까.”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관계 때문에 봐줬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방법이 많지 않지.”
“그렇다고 더 불리하게 평가하는 것도 특혜의 반대일 뿐입니다.”
윤재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소이는 뒤늦게 자신이 누구에게 따지고 있는지 떠올렸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말이었다.
“저는 교수님께 좋은 점수를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나쁜 점수를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 있나?”
“평가를 제대로 받겠다는 말입니다.”
“면접에서 그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이의 손끝이 멈췄다.
“면접에서요?”
윤재혁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소이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천천히 형태를 갖췄다.
“혹시 교수님도 이번 레지던트 면접에 들어오십니까?”
“원래 예정되어 있습니다.”
소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윤재혁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원자 한소이 씨를 평가하는 면접관으로.”
# 외전 5화. 이번에는 가족이 먼저입니다윤재혁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날.한소이는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지난번 윤재혁과 맞선을 봤던 곳과 같은 호텔이었다.처음에는 서로를 가장 빨리 잊고 싶어 했고, 두 번째에는 정식으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오늘은 양쪽 가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을 예정이었다.“왜 하필 여기예요.”소이는 로비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윤재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정확히는 약속 시간까지 이십칠 분이나 남아 있었으니 늦은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혼자 기다리고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어머니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교수와 전공의라는 관계를 문제 삼으면.나이 차이가 크다고 걱정하면.혹시 결혼 이야기를 너무 빨리 꺼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긴장하자 생각이 많아졌고, 생각이 많아지자 말하고 싶은 문장들이 머릿속에 쌓였다.“한소이 씨.”익숙한 목소리에 소이가 고개를 들었다.윤재혁이 검은 정장 차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그의 뒤에는 윤서진이 꽃다발을 들고 따라왔다.“왜 둘이 같이 와요?”“오빠가 아침부터 너무 긴장해서 감시하러 왔어요.”서진이 대신 대답했다.“제가 긴장했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넥타이 세 번 바꿨잖아.”소이는 윤재혁의 넥타이를 바라봤다.짙은 남색 바탕에 작은 무늬가 들어간 것이었다.“잘 골랐네요.”“첫 번째가 더 나았어.”서진의 말에 윤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그럼 그때 말했어야지.”“오빠가 물어봤어?”“네 의견이 필요해서 보여 준 거잖아.”“같이 결정해야지. 보여 주기만 하면 어떻게 알아?”소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재혁 씨도 당하네요.”“한소이 씨가 가르친 방식입니다.”그는 소이의 손에 들린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언제 왔습니까?”“방금요.”윤재혁의 시선이 얼굴 오른쪽으로 향했다.소이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눌렀다.“십 분 정도 됐어요.”“메시지는 왜 안
# 외전 4화. 남자 친구의 보호자 면담토요일 오후 네 시 오십 분.윤재혁은 한소이의 본가가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차를 세운 뒤 시동을 끄지 못했다.소이는 조수석에 앉아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도착했어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왜 안 내려요?”“준비 중입니다.”“마음의 준비요?”“네.”윤재혁은 룸미러로 자신의 넥타이를 확인했다.평소 병원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집을 나선 뒤 벌써 네 번째로 매듭을 만지고 있었다.소이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그만 만져요. 그러다 목 졸리겠어요.”“많이 이상합니까?”“넥타이는 안 이상해요.”“그럼요?”“재혁 씨가 너무 긴장했어요.”그는 부정하지 않았다.차량 뒷좌석에는 과일 바구니와 꽃, 견과류가 들어가지 않은 수제 양갱 세트가 놓여 있었다.처음에는 건강식품을 사겠다고 했고, 소이가 말렸다.그다음에는 한우를 준비하려 했고, 그것도 거절당했다.결국 김정숙이 좋아한다는 꽃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선물만 골랐다.그 과정에서 소이는 같은 말을 열 번 넘게 했다.“엄마 수술받는 거 아니에요.”그때마다 윤재혁은 같은 대답을 했다.“수술보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재혁 씨.”“네.”“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바로 잘못했다고 하지 마요.”“내가 잘못한 일이라면 인정해야 합니다.”“그건 맞는데, 우리 엄마는 질문하면서 답을 정해 놓는 사람이에요.”“한소이 씨와 비슷하군요.”소이의 눈이 가늘어졌다.“지금 들어가기 전에 싸울래요?”“아닙니다.”윤재혁은 바로 안전벨트를 풀었다.“가죠.”“도망 안 가고요?”“도망갈 생각 없습니다.”그가 뒷좌석의 선물을 챙겼다.소이는 차에서 내리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제가 옆에 있을게요.”윤재혁이 소이를 바라봤다.병원에서 환자 보호자에게 위험한 수술을 설명할 때도 흔들리지 않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네.”“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요
# 외전 3화. 맞선 주선자의 사후 관리한소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방바닥에 길게 번져 있었다.소이는 베개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더듬어 시간을 확인했다.오후 한 시 십이 분.“한 시?”그녀는 벌떡 일어나다가 이마를 감쌌다.밤샘 근무를 마치고 오전에 잠들었으니 오래 잔 것은 아니었다.문제는 오후 다섯 시가 마지막 입장 시간이었던 전시회였다.씻고 준비한 뒤 이동하면 늦지는 않겠지만, 식당 예약까지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했다.소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주방 쪽에서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들렸다.회색 티셔츠를 입은 윤재혁이 도마 앞에 서 있었다.식탁에는 달걀과 샐러드, 과일이 준비돼 있었다.소이는 주방 입구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뭐 해요?”윤재혁이 고개를 돌렸다.“깼습니까?”“네.”“몸은 괜찮고요?”“어깨가 조금 뻐근해요.”그의 시선이 즉시 소이의 어깨로 향했다.“어디가 불편합니까?”“밤새 일하고 소파에서 세 시간 자고, 여기서 또 잤으니 당연한 거예요.”“진통제 필요합니까?”“의사 말고 남자 친구처럼 물어봐요.”윤재혁은 칼을 내려놓고 소이에게 다가왔다.“많이 아픕니까?”“아니요.”“마사지해 줄까요?”소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해 본 적 있어요?”“해부학적 구조는 압니다.”“그건 믿음이 더 안 가는데요.”그의 손이 소이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닿았다.“여깁니까?”“조금 아래요.”윤재혁이 손가락으로 굳은 부위를 눌렀다.생각보다 정확한 위치였다.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소리를 냈다가 입을 다물었다.그의 손이 바로 멈췄다.“아픕니까?”“시원해서 그런 거예요.”“계속해도 됩니까?”“네.”소이는 그의 가슴 쪽으로 등을 기대었다.따뜻한 손이 목 아래부터 어깨를 천천히 눌렀다.“전시회 갈 수 있겠습니까?”“당연하죠.”“피곤하면 가지 않아도 됩니다.”“그 말 하면서 예약 시간 계속 확인했죠?”윤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소이
# 외전 2화. 잠만 자도 됩니까한소이가 눈을 떴을 때 휴게실 벽시계는 오전 여섯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삼십 분만 자겠다고 했는데 세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그녀는 무언가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윤재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한 손에는 논문이 들려 있었고, 다른 팔은 소이의 어깨가 흔들리지 않도록 등받이 위에 걸쳐져 있었다.“왜 안 깨웠어요?”잠긴 목소리가 나오자 윤재혁이 논문을 내려놓았다.“잘 자고 있어서요.”“팔 안 저렸어요?”“저렸습니다.”“그런데 왜 그대로 있었어요?”“깨우지 말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소이는 그의 오른팔을 붙잡았다.손끝이 차가웠고 손가락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이건 참는 게 아니라 말하기로 했잖아요.”“자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묻습니까?”“깨워서 물어보면 되죠.”“그럼 싫다고 했을 겁니까?”소이는 잠시 그의 어깨를 바라봤다.“조금만 더 자겠다고 했을 것 같아요.”“그래서 안 깨웠습니다.”“그게 또 혼자 판단한 거잖아요.”“이번 판단은 후회하지 않습니다.”소이는 그의 팔을 천천히 주물렀다.윤재혁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감각은 있어요?”“조금씩 돌아옵니다.”“의사면서 신경 눌리게 계속 있었어요?”“영구 손상이 생길 정도는 아닙니다.”“그걸 어떻게 확신해요?”“한소이 씨 머리가 생각보다 가볍습니다.”“생각보다?”소이가 손을 놓자 그가 바로 팔을 움직여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칭찬이었습니다.”“실패했어요.”“다시 하겠습니다.”“어떻게요?”윤재혁이 소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오래 기대고 있어도 좋았습니다.”화가 나 있던 마음이 너무 쉽게 풀렸다.소이는 그의 손을 떼어 내지 않은 채 물었다.“환자분은요?”“새벽 네 시 이후로 혈압 안정적입니다. 추적 검사에서도 급격한 변화는 없었고요.”“직접 확인했어요?”“한소이 씨 팀에 물었습니다.”소이는 즉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 외전 1화. 두 번째 데이트의 조건두 번째 데이트는 세 번이나 미뤄졌다.첫 번째는 한소이의 응급외과 당직이 길어졌고.두 번째는 윤재혁의 수술이 예상보다 늦게 끝났으며.세 번째는 약속 장소로 출발하기 직전, 소이가 맡은 환자에게 갑작스러운 복통이 발생했다.“이번 주도 어렵겠네요.”금요일 밤 열한 시.한소이는 의국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윤재혁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CT 확인했고 응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은 아닙니다. 밤새 경과를 봐야 할 것 같아요.”“그럼 병원에 남습니까?”“네.”소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왜 사과합니까?”“내일 아침부터 만나기로 했잖아요.”두 사람은 토요일 하루를 통째로 비워 두었다.오전에는 전시회를 보고, 점심은 소이가 고른 식당에서 먹고, 저녁에는 윤재혁의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수술 일정과 당직표를 몇 번이나 확인한 끝에 만든 계획이었다.“환자가 아픈 건 한소이 씨 잘못이 아닙니다.”“그래도 재혁 씨는 내일 휴일까지 바꿨잖아요.”“다음에 또 바꾸면 됩니다.”“실망 안 했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예전의 윤재혁이었다면 괜찮다고만 대답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싫은 것도 말하기로 했다.“실망했습니다.”소이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갔다.“역시 그렇죠?”“많이 기대했습니다.”“미안해요.”“하지만 소이가 환자를 두고 나오는 건 더 싫습니다.”윤재혁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러니까 실망한 것과 소이를 탓하는 것은 별개입니다.”소이는 말없이 휴대전화만 조금 세게 잡았다.이 사람은 여전히 정답처럼 말할 때가 있었다.다만 이제는 그 정답 안에 자신의 감정도 숨기지 않았다.“재혁 씨.”“네.”“병원으로 올래요?”“지금요?”“데이트는 못 해도 같이 야식은 먹을 수 있잖아요.”“근무 중 아닙니까?”“환자 검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에요. 삼십 분 정도는 괜찮습니다.”전화기 너머
# 60화. 맞선은 근무 외입니다 [본편완결]이정훈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수술 다음 날 오후였다.진정제를 줄이자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한소이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정훈 환자분,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환자의 눈이 힘겹게 열렸다.초점이 흔들리던 시선이 소이의 얼굴에 멈췄다.기관 삽관 때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는 말에는 약하게 반응했다.“수술은 끝났습니다.”소이는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설명했다.“배 안에서 출혈이 많았고 비장이 크게 손상돼 제거했습니다. 지금은 출혈이 멈췄고 혈압도 안정되고 있습니다.”이정훈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아내분과 아드님도 병원에 와 계십니다.”그 말을 듣자 환자의 눈가가 붉어졌다.손이 무언가를 찾듯 움직였다.소이는 그 손을 잡았다.“아드님도 무사히 집에 돌아갔습니다.”환자의 손가락이 소이의 손을 힘없이 눌렀다.“약속을 못 지킨 게 아니라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아드님도 알고 있습니다.”이정훈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모니터의 숫자는 안정적이었다.이번에는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가족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긴장을 놓은 얼굴이었다.중환자실 밖으로 나오자 보호자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남편이 깨어났습니까?”“간단한 지시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현재 수치가 유지되면 호흡관도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남학생은 고개를 숙인 채 소매로 눈을 닦았다.“아빠가 저 때문에 다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환자분께는 학생이 무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소이는 아이의 앞에 앉았다.“학생도 아버님을 만나면 꼭 말해 주세요. 사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요.”남학생이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아버님이 회복하시면 직접 말씀드리세요.”그날 저녁 이정훈은 호흡관을 제거했다.처음 나온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우리 아들은요?”침대 옆에 있던 아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