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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알레르기까지 아는 사이

Author: Rionha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26 19:23:18

# 9화. 알레르기까지 아는 사이

“내 눈치 보지 말고 환자부터.”

그 말을 남긴 윤재혁은 수술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한소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을 씻고 나온 사람들이 옆을 지나갔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잘했습니다.

다음에도 오늘처럼 판단하세요.

윤재혁에게 두 문장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슴 안쪽에 단단하게 뭉쳐 있던 것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소이는 양손으로 볼을 가볍게 눌렀다.

“정신 차리자.”

칭찬 한 번 받았다고 감동할 때가 아니었다.

재수술을 마친 환자는 중환자실로 올라가야 했고, 자신은 경과 기록을 정리해야 했다.

무엇보다 윤재혁은 칭찬보다 지적을 훨씬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잘했다고 내일도 잘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소이가 중환자실로 올라갔을 때 박민우가 막 도착해 있었다.

“수술 잘 끝났대?”

“네. 출혈 부위 잡았고 지금은 안정적입니다.”

“너 괜찮아?”

“제가 왜요?”

“얼굴이 하얘.”

소이는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피곤해서 그런가 봅니다.”

“윤 교수한테 혼났고?”

“아니요.”

“안 혼났어?”

박민우가 오히려 놀란 얼굴을 했다.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윤 교수가?”

“네.”

“직접?”

“그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칭찬하십니까?”

“가끔 그런 일도 없진 않은데.”

박민우는 소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오늘 무슨 날이지?”

“제가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런 뜻이 아니라 윤 교수가 입으로 잘했다고 하는 날이 흔치 않다는 뜻이야.”

그 말에 소이는 괜히 입꼬리를 눌렀다.

웃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박민우는 그런 소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좋냐?”

“뭐가요?”

“칭찬받아서.”

“누가 안 좋아합니까?”

“그렇긴 하지.”

박민우가 차트를 넘기며 덧붙였다.

“윤 교수한테 칭찬받으면 한 달은 버틸 수 있어. 대신 다음 칭찬까지 두 달 걸릴 수도 있고.”

소이는 곧장 현실로 돌아왔다.

“그럼 한 달 뒤부터는 뭘로 버팁니까?”

“카페인.”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틀리지 않았다.

이창수 환자의 경과를 정리하고 김복순 환자까지 확인했을 때는 새벽 세 시가 가까워졌다.

소이는 당직실 침대에 누웠다가 눈을 감은 지 십 분 만에 다시 호출을 받았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아침 회진이 끝난 뒤에야 교대자가 도착했다.

소이는 병원 로비를 빠져나오며 걸음을 멈췄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퇴근하는 자신만 다른 시간에 사는 기분이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일반외과 단체 대화방 알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중 가장 최근 메시지는 박민우가 보낸 것이었다.

[오늘 저녁 신입 환영 회식. 전원 참석.]

소이는 화면을 보며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상태로 집에 가면 잠든 뒤 저녁에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알람을 일곱 개 맞췄다.

그리고 저녁 여섯 시 사십 분.

소이는 마지막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눈을 떴다.

회식 장소는 병원 근처 고깃집이었다.

소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주인공이 제일 늦네.”

정유라가 옆자리를 비켜 주었다.

소이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알람을 못 들었습니다.”

“당직 다음 날인데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배하린이 물었다.

“너 괜찮아? 눈이 반밖에 안 떠졌는데.”

“다 보여.”

“지금 집게 대신 젓가락으로 고기 집고 있어.”

소이는 손을 내려다봤다.

정말 젓가락 두 개 사이에 생고기를 끼우고 있었다.

황급히 집게로 바꿔 들자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한소이 선생은 술 주지 마.”

박민우가 말했다.

“한 잔이면 테이블 밑에서 잘 것 같아.”

“안 잡니다.”

“지금도 자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소이는 물컵을 들었다.

주변에서는 잔이 오가고, 고기가 익는 냄새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신입 레지던트 환영 회식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선배들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교수들은 조금 늦게 합류했다.

오현석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몇 명의 교수들이 따라왔다.

마지막에 윤재혁이 나타나자 떠들썩하던 테이블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는 평소처럼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다.

“윤 교수도 왔네?”

오현석이 웃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신입 환영 회식인데 안 오면 또 무섭다고 할까 봐.”

윤재혁의 시선이 신입들이 앉은 테이블을 스쳤다.

소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그는 가장 끝자리에 앉았다.

소이는 괜히 물만 마셨다.

병원 밖이라고 해도 회식은 엄연히 근무의 연장이었다.

맞선 때처럼 사적인 말을 나눌 이유는 없었다.

고기가 익고 술잔이 몇 차례 돌자 분위기는 금세 풀어졌다.

오현석은 신입들에게 돌아가며 지원 이유를 물었다.

배하린은 복강경 수술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고 다른 동기는 가족 중 외과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소이 차례가 되자 박민우가 대신 말했다.

“한소이 선생은 윤 교수님이 무서워도 외과에 오고 싶어서 지원했답니다.”

소이가 그를 노려봤다.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비슷하게 말했잖아.”

“전혀 다릅니다.”

오현석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윤 교수가 무서워?”

모두의 시선이 소이에게 쏠렸다.

그중에는 윤재혁의 시선도 있었다.

소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존경합니다.”

“질문과 답이 다른데.”

“존경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윤재혁은 아무 말 없이 물잔만 들었다.

하지만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소이는 놓치지 않았다.

그때 직원이 새로운 반찬을 내려놓았다.

잘게 부순 땅콩이 뿌려진 냉채였다.

소이는 아무 생각 없이 젓가락을 뻗었다.

잠이 덜 깬 탓이었다.

젓가락 끝이 냉채에 닿기 직전, 맞은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먹지 마요.”

소이의 손이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윤재혁에게 향했다.

그는 소이가 아니라 접시를 보고 있었다.

“왜요?”

정유라가 대신 물었다.

윤재혁이 짧게 답했다.

“땅콩 들어갔습니다.”

소이의 눈이 접시 위로 떨어졌다.

그제야 잘게 부순 견과류가 보였다.

그녀는 땅콩을 먹으면 입안이 붓고 심하면 호흡이 불편해졌다.

아주 소량이라도 피해야 했다.

소이는 천천히 젓가락을 거뒀다.

“감사합니다.”

말을 하고 나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윤재혁이 자신의 알레르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병원 사람들은 몰랐다.

아니, 알아서는 안 됐다.

정유라가 윤재혁과 소이를 번갈아 봤다.

“교수님이 한소이 선생 알레르기도 아세요?”

소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번에는 커피였다.

이번에는 알레르기였다.

커피 취향은 우연히 봤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하지만 음식 알레르기는 달랐다.

맞선 자리에서 주문을 할 때 직원에게 땅콩이 들어간 소스를 빼 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윤재혁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박민우도 의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러게요. 저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소이는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병원 기록에 적어 놨습니다.”

정유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직원 건강 기록을 교수님이 왜 봐?”

“그게 아니라...”

말이 막혔다.

윤재혁은 여전히 태연했다.

“지난 회식 때 봤습니다.”

소이가 그를 바라봤다.

지난 회식이라니.

둘이 함께한 회식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난 회식이요?”

정유라가 곧바로 되물었다.

윤재혁의 시선이 소이에게로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자신도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색이 스쳤다.

소이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인턴 회식 때요.”

“윤 교수님이 인턴 회식에 왔었어?”

“잠깐 들르셨습니다.”

자신의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오른쪽 눈썹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소이는 애써 표정을 고정했다.

박민우가 윤재혁에게 물었다.

“교수님이 그런 것도 기억하십니까?”

윤재혁은 잠시 소이를 보다가 냉정하게 답했다.

“환자나 직원의 알레르기는 기억해야죠.”

그럴듯한 말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유라는 아니었다.

그녀는 말없이 소이의 오른쪽 눈썹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이는 눈썹에 힘을 주어 내렸다.

정유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때 윤재혁이 직원에게 새 접시를 요청했다.

“견과류 없는 걸로 바꿔 주세요.”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직원이 접시를 가져가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소이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잠시 후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정유라가 함께 따라 나왔다.

복도까지 나온 정유라는 소이의 팔을 붙잡았다.

“한소이 선생.”

“네.”

“윤 교수님하고 정말 아무 일도 없어?”

소이의 오른쪽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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