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돌아오고 양혁수는 무표정으로 안대를 외투 주머니에 숨겼다.“어디 다녀오신 거예요?”양혁수의 질문에 기사는 난처해하며 말했다.“오늘따라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왔습니다.”잘은 모르겠지만 허씨 가문 도우미가 내준 차를 마시고 갑자기 배가 끊어지게 아팠다.양혁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게 우연일 리는 없어. 누군가 수작을 부린 거지.’허예나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늘 낮은 자세로 보였지만 지금 보니 허현무 본처도 허예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사가 물었다.“추모식을 찾은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데 지금 바로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그래요.”기사가 문을 열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저기 가장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바로 허씨 가문의 장남인데 소문에 따르면 아주 음흉하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장사는 돈이 안 된다고 더러운 일만 골라서 한다고 해요.”양혁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아닌 다른 사람들처럼 정문으로 정원을 향했다. 그리고 방금 기사의 말을 곱씹으며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허예나는 작은 수작은 부려도 허씨 가문 장남 같은 사람에게 걸린다면 죽어도 자신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한 건지 알지 못할 것이다.다른 한편 저택 안에서.변여름이 드디어 돌아오자 허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금방 떠날 거니까 오빠가 가면 예나 씨도 나가세요. 괜히 마주치지 말고요.”“네. 알겠습니다.”변여름은 다시 작은 방으로 돌아가 창가에 기대 밖을 바라봤다. 감히 커튼을 완전히 열지는 못하고 작은 틈 사이로 밖을 훔쳐봤다.허예나는 이런 변여름을 힐끔대며 이상하게 생각했다.허예나와 변여름의 첫 만남은 사실 변여름의 납치로 시작되었다. 허예나는 이번엔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거액을 제시하며 거래하자고 했다.변여름은 돈을 건네며 한강시에서 가장 기세 높은 그 남자를 속이자고 했고 허예나는 속으로 변여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변태라고 생각했다.
허예나는 코너를 돌다가 가문의 도우미와 마주쳤고 자신을 부르는 그 호칭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다행히 허예나는 양혁수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몸을 숨겼다.다시 몸을 돌린 양혁수는 등 뒤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아가씨? 설마 방금 그 여자가?’‘허씨 가문은 정말 자식이 많구나.’양혁수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쩌면 배다른 자매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다면 허예나에게 약을 건네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때,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목감기약이에요?][그래.][방금 받았어요. 고마워요, 오빠.]양혁수는 안심하고 저택을 빠져나갔다.추모식은 온갖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고 소란스러운 걸 질색하는 양혁수는 이런 곳을 절대 스스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이유는 허예나에게 약을 건네주기 위함이며 허씨 가문 사람들에게 허예나에게 함부로 굴지 말라 경고하기 위함이었다.위층의 변여름은 약을 손에 쥐고 허예나가 건네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다가 허예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오빠가 예나 씨 얼굴 본 건 아니죠?”허예나는 미안한 마음에 말을 늘려놨다.”“양 대표님은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어요. 저를 가문 도우미로 착각해 약을 건네주라고 당부만 하셨어요.”변여름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의심을 했고 허예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애 달래듯 변여름을 달랬다.“걱정하지 마세요. 여름 씨가 저보다 백배 천배는 더 예쁘세요.”“예쁜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빠는 예쁜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요.”“여름 씨는 똑똑하잖아요. 예쁘고 똑똑한 여름 씨가 양 대표님께 가장 어울리는 짝이지요.”“...”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해주는 허예나에 변여름은 돈을 마구마구 퍼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래요.”변여름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고 안심한 허예나가 몰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피했다.허예나가 자리를 떠나고 변여름은 손에 쥔 약을 보물처럼 품에 꼭 껴안았다.변여름은 정말 약을
그날 밤, 변여름은 양씨 저택으로 돌아갔지만 양혁수를 만나지는 못했다.양혁수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사는 양혁수에게 변여름이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다.잠들기 전 변백호가 양혁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양혁수가 받기 전에 통화는 끊어졌다.양혁수가 다시 걸었으나 이번엔 변백호가 거절을 했다.[?][실수로 잘못 누른 거야.]양혁수는 그러려니 넘어갔고 핸드폰을 내려둔 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다른 한편 위층의 변여름은 바나나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한 손으로는 노트북의 거절 버튼을 눌러 변백호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별수 없어진 변백호는 메시지만 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절대 굽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변백호를 협박했다.[오빠, 자꾸 내 일에 끼어들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나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일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여름아, 내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혁수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변여름은 그 메시지를 조금 멈칫했다.변여름 역시 양혁수가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불같이 화를 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괜찮아. 난 오빠 동생이니까 죽이진 않겠지.][허.]‘이럴 때만 오빠다, 이거지?’남매는 한참 침묵했고 변백호가 다시 침묵을 깨트렸다.[한 달 시간 줄게. 더 이상 선 넘지 마.]변여름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되레 변백호를 이용하려 들었다.[혁수 오빠가 날 의심하면 꼭 먼저 알아차리고 미리 나한테 말해줘.]“...”참다못한 변백호는 핸드폰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변여름은 아주 덤덤하게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아 시원해.’괜히 시비를 거는 변백호를 처리하고 변여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오늘엔 양혁수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꽁냥꽁냥 연애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문자를 보내면 꼬박꼬박 답장은 왔다.변여름은 최근 2개월 동안의 메시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었다.오늘의 만남을 뒤로 변여름은 양혁수를 향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고
척 보아도 허현무의 본처와 아들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허예나 모녀에게는 겨우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앞으로도 왕래하며 지분으로 허예나를 묶어두는 것과, 둘째로는 대충 돈을 쥐여주고 연을 끊는 것이었다.그리고 허예나에게 그 큰돈을 챙겨주고 겨우 연을 끊는다는 건 사실 조금 비합리적이었다.허씨 가문 아들이 멍청해서 돈을 흥청망청 나눠준 거라면 몰라도 허현무 본처는 아주 돈을 밝히고 똑똑한 사람이었다.그래서 왠지 이 결정은 허씨 가문 모자가 내린 게 아닌 것 같았다.다른 한편, 연구실 근처.변여름은 허예나가 보낸 메시지를 통해 유산 분할을 확인했다.그 금액은 바로 변여름이 조종한 것이었다.변여름은 허예나가 멍청하게 당하는 건 싫었으나 또 다른 사람의 눈에 보기에도 큰 금액을 유산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큰 금액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고 의아하게 여긴 양혁수가 조사를 한다면 들통이 날 게 뻔했다.지금껏 양혁수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양지원의 ‘소개’로 주선된 만남이라 양혁수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허씨 가문 전체 유산 분할을 확인한 변여름은 자신의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은 자신의 논리대로 그 금액을 책정했지만 허씨 가문 모자가 어떤 사람인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허예나가 유산 받은 금액은 너무 눈에 띄었다.양혁수는 그동안 이 업계에 오랜 시간 발을 담그며 이런 이상한 낌새는 바로 눈치를 챌 것이다.그 생각을 하자 변여름은 짜증이 확 치솟았고 허예나의 메시지도 무시한 채로 연구실 근처를 걸었다.그때, 또 핸드폰이 진동했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였다.[어디야?]변여름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답장했다.[요양 센터에 있어요.][허씨 가문이 내쫓은 거야? 아니면 너랑 어머님이 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야?][스스로 나오겠다고 한 거예요. 엄마가 거길 불편해하셔서요.]변여름은 먼저 유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오빠, 저 아버
[그래도 두 달 동안 내가 해준 도시락이 입에 맞긴 했죠?][혹시, 앞으로도 계속 도시락 챙겨줘도 될까요?][이번 소개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변여름은 질문을 쏟아냈고 점점 더 솔직하고 직접적이었다.양혁수는 허예나의 손맛에 길들어진 것인지 쓴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도시락이 입에 맞긴 했나 보다 싶었다.계속 도시락을 받는 건 아무렴, 괜찮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소개팅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 상대를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게 말이나 되는가?앞으로라...양혁수는 계속 만남을 이어가려면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핸드폰이 툭 꺼져버렸다.확인해 보니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것이었다.‘뭐야? 배터리가 떨어진 것도 왜 몰랐지?’양혁수는 행여나 허예나가 자신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할까 봐 빠르게 충전기를 꽂고 노트북 앞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되어서 노트북으로 다시 문자 보내.]그러자 변여름은 뾰로통한 이모티콘을 보냈다.[오빠 지금 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러는 거죠? 배터리가 떨어졌다니 무슨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해요.]“...”[네 착각이야.][그래요, 그럼. 빨리 대답이나 해요.]“...”양혁수는 잠시 뜸을 들였을 뿐인데 상대는 또 재촉했다.[뭐야... 설마 노트북도 배터리가 다 떨어진 건가?]비꼬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양혁수는 바로 영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상대는 바로 연락을 끊었다.[뭐예요!][지금 대답할 테니 얼굴 보여줘.][오빠, 우린 소울메이트잖아요.][난 얼굴 안 보여주는 소울메이트 필요 없어.]변여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도 내가 못생긴 건 아니라 다행인 것 같긴 한데.’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대치 상태에 놓였다.변여름은 요즘 들어 더 불안해졌고 이 비밀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기 전에
“500자가 뭐 어려운가? 손 글씨로 써서 보낼게요.”양혁수는 아주 통쾌하게 대답했고 양지원도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리고 양혁수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그냥 그렇죠, 뭐.”“별일 없긴, 너 엄마가 바보인 줄 알아?”양지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날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서 뭘 한 건데?”“말했잖아요. 한강시에 급한 볼일이 있었다고.”“한강시에 볼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허씨 가문에 볼일이 있었던 거야?”‘쯧.’양혁수는 왠지 낯간지러운 마음에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 변명이라도 하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었다.“비서가 어디까지 말해줬는데요?”“뭘 또 비서가 말해줬다고 생각해? 나 아직 정정하고 내 옆에도 눈과 귀가 많아.”“그런데 왜 이제야 물어보세요?”양혁수는 사실 오랫동안 궁금했었다.“전에 소개팅 주선하면 세 날에 한 번씩 물어봤었잖아요.”양지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거야 네가 항상 소개팅에 무덤덤하니까 그렇지. 새로 사람 만나는 것도 너무 꺼리니까 나도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고 있었어.”양지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그 아이 나도 두 번 만나봤는데 참 온순하고 좋은 여자 같더라.”‘잘못 보셔도 한참 잘못 보신 거네요. 그렇게 온순하고 착한 건 모두 연기이고 사실 여우가 따로 없어요.’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또 무언가 떠올랐다.허예나는 양시연을 많이 닮았다. 양지원은 양혁수가 양시연을 향한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양혁수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부단히 노력했었다.그런데 왜 하필 양시연을 닮은 여자를 소개해 준 걸까?그 생각까지 마치자 양혁수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양지원의 말이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양지원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혁수야?”양혁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이번엔 꽤 마음이 잘 맞나보네. 앞으로도 잘 지내볼 생각인 거니?”양지원의 질문에 양혁수는 조금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사진 한 장 보
“허씨 가문의 딸이 참 괜찮더라. 너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한 번 진지하게 만나봐.”양지원은 차분히 인내하며 말했다.그녀의 본심은 양혁수에게 양시연이 머물던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그러나 양혁수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고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괜찮다고? 대체 어디가?’비서가 아직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의 음식이 다시 눈에 들어오자 그는 거슬려서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불편했다.양혁수는 두 달 동안 낯선 사람이 보낸 음식만 먹었다.만약 상대방이 음식에 무슨 짓을 했으면 그는 지금쯤 허현무와 함께 포커라도 칠 판이었다.안전 문제를 제쳐두고 그를 진짜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었다.이렇게 조금씩 다가오는 함정은 절대 어린 여자아이가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는 자신이 인터넷을 통해 접촉했고 그날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 진짜 허예나 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함정인지 알고 싶었다.물론 어느 쪽이든 양시연의 사진을 이용해 자신을 오도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악의적이었다.그가 감정을 가다듬고 양지원과의 통화를 끝낸 뒤 사무실은 죽음처럼 고요했다.잠시 후 양혁수는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멀리서 커피숍에서 정보를 찾고 있던 변여름은 심하게 재채기했다.그녀는 휴지를 뽑아 닦고 코를 살짝 문질렀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변여름은 이틀 후에 그를 만나야 했기에 아프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곧 집에 가서 약을 먹어야 한다고 결심했다.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계속 글을 썼다.모든 것이 평범해 보였다. 밤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양혁수는 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친오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변여름은 매우 예민해서 전화를 받자마자 예상했고 역시 변백호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양혁수가 문제를 발견했어. 그 사진이 허예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이 허점은 원래 변여름이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었고 양혁수가 발견했
양혁수는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지만 변여름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고 전하며 이런 상황은 오랫동안 없었다고 덧붙였다.그날 이후로 이틀 동안 그들은 통화를 하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허예나의 신분으로 아무렇지 않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는 여전히 답장했으며 말투에도 아무런 허점이 없었다.토요일 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변여름은 실험실 밖에 도착했을 때 전화를 받고 마음이 긴장되었고 마치 단두대의 칼이 떨어지려는 느낌이 들었다.“여보세요?”저쪽에서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기침 소리가 두 번 들렸다.변여름은 민감하게 그 소리를 포착하고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오빠, 감기 걸렸어?”잠시 후 저쪽에서 대답이 들렸다.“응. 조금.”잘 듣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에 담긴 차가운 냉정함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입을 열고 함정일 가능성이 있는 구덩이로 순순히 들어갔다.“어디에 있어요?”“회사에서 야근 중.”“집에 안 가세요?”“귀찮아. 오늘은 회사에서 자려고.”변여름은 다시 물었다.“저녁 먹었어요?”“아직.”변여름은 입술을 깨물며 가방끈을 쥐었다. 그 손길에선 미묘한 주저함과 망설임이 엿보였다.더 나아가면 그와 제대로 대화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했다.그녀가 말이 없자 양혁수는 오히려 먼저 물었다.“뭐 하고 있어?”그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물었고 변여름은 마치 그가 여자 친구에게 묻는 것처럼 착각했다.그녀의 심장은 두 번이나 쿵쾅거렸고 살짝 침을 삼켰다.“방금... 엄마랑 산책하고 왔어요.”“그러면 지금은 할 일 없어?”“...네.”“나한테 와. 같이 저녁 먹자.”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약속을 잡은 것이다.변여름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저는 지금...”“이 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보냈고 불도 다 꺼 놨어. 너를 볼 사람은 없을 거야. 너는 계속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어.”마지막 몇 마디를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