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과 연정훈의 냉전은 여 아주머니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처음에 여 아주머니는 무조건 양시연 편을 들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며칠이 지나도 연정훈이 전혀 화를 내지 않자 여 아주머니는 오히려 민망해졌다.여 아주머니는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처음에는 불평했지만, 점점 좋은 말들로 대화를 이어갔다.“제 생각엔 연정훈 씨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데 시연 씨가 좀 무심한 것 같아요. 아침 식사할 때도 표정이 안 좋고 연정훈 씨가 여러 번 말을 걸려고 해도 휴대폰만 보면서 눈길도 주지 않더라고요.”양시연은 그 말을 우연히 듣고 일부러 가볍게 기침했다.여 아주머니는 뒤를 돌아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양시연은 전화가 끊기자 일부러 질투하는 척하며 한숨을 쉬고 불평했다.“아주머니는 엄마 쪽 분인데 왜 외부인 좋은 말만 해요?”“외부인이라니요?”여 아주머니는 양시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그건 시연 씨의 남편이에요. 우리 집안 식구이죠!”양시연은 웃으며 들고 있던 차를 내려놓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아무 문제 없어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정말요?”“네. 그냥 정훈 씨를 살짝 놀리는 중이에요.”여 아주머니는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좋은 걸 배워야죠. 아씨처럼 남편을 괴롭히고...”양시연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엄마가 아빠를 어떻게 괴롭히는데요?”“에이. 그게 중점이 아니잖아요.”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부엌을 빠져나갔다.사실 그녀와 연정훈의 냉전은 진지한 것도 아니었고 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애들처럼 서로 삐쳐 있는 상태였다.연정훈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왜 양혁수 이야기만 나오면 민감해지고 긴장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전에 그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정훈이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벙어리처럼 입을 닫아버릴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양시연은 냉전을 좋아하지도
“연정훈 씨에게 삼계탕을 끓여주세요. 연정훈 씨가 돌아오면 아주머니께서 직접 가져다주세요.”양시연이 조용히 여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여 아주머니는 기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연정훈 씨를 생각하면서 앞에서 좀 웃어줘요. 연정훈 씨 답답해서 쓰러지겠어요.”“싫어요. 정훈 씨가 먼저 냉전 시작했잖아요.”여 아주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양시연의 입가에 살짝 번진 미소를 보고는 이 부부가 그저 서로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다지 심각한 갈등이 아니라 일상에 재미를 더하려는 정도였다.연정훈이 주차장에서 올라오자 양시연은 거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나비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나비는 기운차게 먹이를 먹으며 주위를 뛰어다녔다.둘 다 고집스러운 성격답게 연정훈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하.’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계단으로 향하려다가 여 아주머니가 불려 세워졌다.여 아주머니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특별히 삼계탕을 끓였어요. 한 그릇 드셔보세요!”연정훈은 여 아주머니에게는 늘 예의를 갖추었다. 장모님 댁에서 오래 함께한 식구였기에 괜한 감정을 상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의 양시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다가 그가 자신을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여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여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양시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 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어린아이 대하듯 탕을 각각 한 그릇씩 가져다주었다.연정훈에게 그릇을 건넬 때 여 아주머니는 사실 이 삼계탕이 양시연이 부탁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지만, 뒤에서 들려온 양시연의 가벼운 기침 소리에 말을 삼켰다.마침 연정훈이 고개를 들었다.여 아주머니는 양시연을 등지고 조용히 연정훈에게 다가가 그녀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씨가 끓이라고 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멍해졌다.여 아주
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을 살폈다.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전화를 받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간간이 차가운 대답만 내뱉으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겉으로는 업무 통화를 하는 듯 보였다.반대편에서 이승우는 갑작스럽게 엉뚱한 제안을 내놓았다.“간단하지 않아? 네가 양시연 씨한테 과감한 셀카 이미지를 보내봐. 시연 씨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지 않냐?”연정훈은 이마를 찌푸렸다.그의 첫 생각은 분명 양시연이 엔을 바로 차단할 거라는 것이었다.그러나 이승우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근데 혹시 시연 씨가 재빨리 캡처해서 저장이라도 하면? 그러면 너희가 온라인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거지. 은근히 짜릿하지 않아?”연정훈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끊는다.”“야야야!”이승우는 급히 웃으며 말렸다.“농담이지.농담. 왜 이렇게 진지해?”“진지하게 말하자면 네가 해봐. 보내고 나면 시연 씨는 바로 너를 차단할 거야. 그동안 유지해 온 냉철하고 전문적인 이미지가 느끼한 남자 이미지로 추락하겠지. 그러면 넌 앞으로 시연 씨 앞에서 연기할 필요도 없어지잖아. 숨어있던 가상 라이벌도 제거되고.”이승우의 마지막 한마디가 연정훈을 잠시 고민하게 했다.결국 그는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린 것 같은 심각한 분위기를 느꼈다.‘그러지 마. 아직 내 손에 오지도 않았다고.'양시연은 노트북을 품에 안고 연정훈의 움직임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연정훈은 서재로 향했다.양시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 중요한 일이 있나 싶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약 15분이 지나자 그녀의 화면이 갑자기 흔들렸다.양시연이 클릭하자 한 장의 이미지가 번쩍 떴다.이미지 속에는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셔츠의 목 부분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고 물잔을 든 손가락의 관절이 또렷하게 보였다. 컵이 그의 입술 가까이에 놓인 상태였고 날카롭고 뛰어난 턱선이 매끄럽게 드러나 있었다.물 마
서재에서.연정훈은 같은 자세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눈을 감고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여러 번 의심했다.‘양시연...’속으로 양시연의 이름을 되뇌며 좋아서 미소가 번지다가도 이내 이를 갈았다.‘진짜 당해낼 수가 없네. 내가 졌네. 양시연한테 완전히 넘어갔어.'연정훈은 잠깐 양시연이 자신이 엔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괴롭힌 게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곧바로 침실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엔인 척하며 사진을 찍었던 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서둘러 옷을 벗어 던졌다.옷을 벗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버렸다. 옷만이 아니라 물을 마셨던 컵조차 그대로 버렸다.그리고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안타깝게도 손은 잘라버릴 수 없네.’다행히 사진은 몇 초 만에 사라지는 플래시 이미지였고 양시연도 연정훈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몇 초만 더 있었어도 양시연은 알아봤을 수도 있다.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재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뒤에야 침실로 돌아갔다.침실에서 양시연은 일련의 일을 마무리한 뒤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인터넷 속 노련한 남자들에게 한 방 먹인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는 어린 여자애를 만만하게 보거나 함부로 아무에게나 치근덕대지 못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연정훈을 걱정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혹시 회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소리가 나자 양시연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연정훈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고 마음속으로 준비했다.양시연이 올린 게시물의 문구가 떠올라 연정훈의 가슴에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이 밀려왔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지만, 그의 눈빛은 설렘과 흔들림으로 가득했다.그가 침대 옆으로 다가갔을 때 방 안은 어두운 조명으로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다. 양시연은 조용히 자는 척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고 연정훈 쪽으로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똑바
화해의 첫걸음은 연정훈이 내민 말이었다.“오늘 저녁에 작은 모임이 있어. 같이 가자.”양시연은 속으로 살짝 기뻐하며 유치하게 연정훈이 먼저 말을 꺼낸 거로 생각했다.“어디에서 열려요?”“우리 외삼촌이 계신 민씨 가문에서.”양시연은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할머니 쪽 친척인가요?”“응. 그분들은 경인에 잘 안 계셔. 우리가 결혼해서 온 거야.”양시연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결혼 후 신부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서는 이런 풍습이 잘 지켜지지 않지만, 연씨 가문처럼 대가족을 중요시하는 가문에서는 이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양시연과 연정훈이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친척들은 며칠 동안은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약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예를 들어 연정훈 어머니의 친정 쪽인 표씨 가문에서는 이미 약속을 잡았지만, 그쪽에서는 배려심을 발휘해 날짜를 다음 달로 미뤘다. 새로 결혼한 부부의 신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민씨 가문은 조금 이상했다. 저녁 식사 초대는 양시연에게 직접 알리지 않고 연정훈에게만 급히 약속을 잡은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나랑 같이 가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해.”양시연은 죽을 한 숟가락 떠먹으며 그를 쳐다보지 않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어떤 사람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들이 저에게 눈치를 주죠.”연정훈은 어이없었다.“...”그는 이참에 변명하려 했지만,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훈 씨라고 한 적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연정훈은 침묵했다.“...”결국 그는 침묵을 택하고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양시연은 콧노래를 부르듯이 살짝 기분이 풀려 그가 준 반찬을 집어 먹었다.두 사람은 절반쯤 화해한 상태가 되었다.오후에는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관계는 평소처럼 정상적인 소통 상태로 돌아왔다.여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
민지연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양시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연정훈의 뒤로 몸을 숨긴 민지연은 또 나비의 목줄을 당겼다.이에 깜짝 놀라버린 나비가 상대를 확인하고 민지연과 민지연의 개를 향해 침을 뱉기 시작했다.민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개를 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연정훈을 향해 말했다.“정훈 오빠, 시연 언니가 키우는 알파카 엄청 사나워요!”‘허.’‘그래봤자 네가 키우는 개보다 더 사납겠어?’양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정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키우는 개가 나비를 놀라게 한 거야. 나비는 정말 착한 아이야.”민지연은 씩씩대며 자기 개를 변호했고 연정훈은 이런 민지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개 목줄이나 잘해.”명령 시조의 말은 짧지만 강했다.목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 협박한 것도 아니었는데 민지연은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알겠어요.”민지연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때, 저택에서 중년 부부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드디어 왔구나. 미리 준비하고 너희 둘만 기다리고 있었어.”연정훈이 ‘삼촌’, ‘숙모’라 호칭하며 인사를 했고 또 양시연을 소개했다.양시연도 기죽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양시연이 인사를 건네자 숙모 방미선은 바로 양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양시연과 과거 친분이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고 활기찬 나비를 보며 칭찬도 했다.“어머, 너무 예쁜 알파카네. 이렇게 예쁜 알파카는 이름이 뭐야?”“나비예요.”“이름 잘 지었네. 이름이 참 어울려.”양시연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고 옆으로 밀려난 민지연이 개 목줄을 잡고 입을 삐죽이는 걸 지켜봤다.삼촌 민병식은 연정훈과 나란히 정원으로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민지연에게 경고를 날렸다.“지연아, 랑이 목줄 꼭 쥐고 있어. 네 새언니 놀라게 하지 말고.”그러자 민지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양시연은 방미선의 손에 이끌려 정원으로 향했다.그리고 나비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개를 향해 침을 칵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방미선이 인상을 찌푸리며 민지연을 향해 한소리를 하더니 또 양시연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아이를 오냐오냐 키워서 얘가 버릇이 없어. 시연이 네가 이해해 줘.”“괜찮아요.”양시연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죠.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닌걸요.”민지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양시연이 만만하다고 느껴지자 민채영도 말을 얹었다.민채영의 동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양시연더러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양시연은 그저 말없이 디저트를 먹거나 차를 마시며 민채영의 말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민채영은 양시연이 자신의 말을 여겨듣지 않자 바로 얼굴을 구겼다.그러자 옆자리의 민지연이 잽싸게 말했다.“언니, 작은 엄마가 얘기 중이잖아요. 왜 대답을 안 해요?”양시연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자 민지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언니는 우리 정훈이 오빠랑 결혼한 게 다행인 줄 알아요. 집안 어른이 얘기 중인데 대꾸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도 어릴 땐 이런 문제로 참 많이 혼이 났어요.”“그러게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끔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훈 씨가 외동이라 철없이 태클 거는 시누이가 없거든요. 시어머니도 저를 많이 챙겨주시고 절대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거든요.”민채영과 민지연은 한순간에 말문이 막혔다.정신을 차린 민지연이 바로 대꾸하려고 하자 방미선이 먼저 눈치를 채고 얼굴을 굳혔다.“자꾸 랑이만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지 말고 위층으로 올라가 있어!”민지연은 사람들 앞에서 한 소리 듣자 바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려는 찰나 연정훈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여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방금까지 말을 쉬지 않고 하던 민채영도 조용해졌고 아예 단청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새로 생긴 프로젝트에 관해 얘기 중인데 너도
민지연은 양시연이 다른 사람을 불러 함께 알파카를 구조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한 변명을 미리 생각을 해 두었다. 아무도 본인이 알파카를 개울가로 밀어 넣는 걸 보지 못했으니 말만 잘하면 누구도 본인을 탓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양시연은 온몸이 젖도록 아무도 찾지 않고 홀로 알파카를 물 위로 끌어당겼다.민지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깜짝 놀라버린 아이들은 다른 어른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나비를 안아 들고 개울가 옆의 풀밭에서 거센 숨을 내쉬었다.“언니...”민지연의 부름에 양시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개울가에서 한참 실랑이하다 보니 머리는 물에 푹 젖어버렸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지만 눈빛만은 살벌했다.그 눈빛에 민지연은 심장이 철렁했다.“뭐, 뭐예요? 알파카 스스로 개울가에 빠졌고 난 구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양시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치맛자락의 물을 쭉 짜냈다.민지연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했다.그때, 양시연이 성큼성큼 민지연 쪽으로 걸어가더니 머리카락을 낚아채고 미친 것처럼 민지연의 머리를 개울가에 처박았다.민지연은 비명을 질렀다.옆의 나비도 꽥꽥 울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민지욱은 동생을 시켜 어른을 불러오게 하고 직접 양시연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민지욱은 바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고통을 참으며 민지연을 기어코 개울가에 빠뜨렸고 바로 몸을 돌려 남자아이의 옷깃을 잡고 함께 개울가에 넣어버렸다.나비는 큰 돌멩이 위로 서서 힘차게 발을 굴렀다.정원에서 뒤뜰까지 겨우 몇 걸음이면 도착할 거리였기에 사람들은 빠르게 이곳으로 몰려왔다.연정훈과 민병식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양시연이 민지욱을 개울가에 넣는 걸 보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민병식은 제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 그래서 바로 달려가 양시연을 밀어내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고 먼저 양시연의 앞을 막아섰다.“시연아!”양시연은 이제 힘에 부쳤고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