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주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홍연이 이렇게 할 줄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다.“공주님, 감사드립니다! 공주님, 제발 절 살려주십시오!”지안수는 서둘러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여기에 있는 이상 아무도 지안수 씨를 죽이지 못해요.”이홍연은 패기 넘치게 말했다.황실의 여섯째 공주이자 국주가 가장 아끼는 딸인 이홍연은 자신감이 넘쳤다.“감사합니다, 공주님!”지안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오늘 그는 틀림없이 죽을 거로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공주가 갑자기 나타났다.이때 다들 의아해했고 우상인 육도진 또한 답답해했다.그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공주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내각의 여덟 장로를 도우려고 하다니?그녀는 소꿉친구인 윤구주를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다들 매우 궁금해할 때 이홍연이 갑자기 윤구주에게 물었다.“윤구주, 왜 대낮부터 이렇게 많은 문벌 출신의 무인들을 죽인 거야? 그리고 왜 내각의 문부상서를 죽이려는 거지?”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윤구주에게로 향했다.육도진 우상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육도진은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공주가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윤구주는 이홍연의 질문을 듣더니 덤덤히 말했다.“죽어 마땅한 놈들이니까.”그 말에 이홍연으 크게 고함을 질렀다.“건방지군! 윤구주, 넌 화진의 구주 군신이자 우리 화진의 기둥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야!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상 넌 절대 아무도 죽일 수 없어!”이홍연의 말을 들은 윤구주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이홍연은 자신의 말에 윤구주가 화를 내길 바랐지만 윤구주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척 화가 났다.“윤구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이홍연은 잘못했다는 말을 할 때 눈이 벌겠다.아무도 이홍연이 말한 잘못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그들은 이홍연이 윤구주에게 사람을 죽인 잘못을 묻는 줄 알았다.“내가 잘못했다
이홍연이 슬픈 얼굴로 억울한 듯 말하자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마치 진짜 연인처럼 말이다.그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금위군뿐만 아니라 내각의 여덟 장로, 육도진 등 사람들 모두 넋이 나갔다.이건 원수가 아니라 애인이었다.“홍연아, 미안해. 그동안 고생 많았어.”그 말에 이홍연은 마음이 녹을 뻔했다.그녀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눈을 깜빡이면서 울며 말했다.“드디어 나한테 미안하다는 걸 인정한 거야? 그래도 양심은 있네!”윤구주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사실 윤구주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사랑했으나 그러한 마음은 반드시 숨겨야 했다.16년 전의 사건을 위해서라도, 강성에 있는 소채은을 위해서라도.윤구주는 소채은에게 미안할 짓을 할 수 없었다.“홍연아, 넌 오늘 일에 끼어들지 마. 문벌이 혼란을 야기했으니 난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 해. 문벌과 내각도 마찬가지야. 6년 전 난 말했었어. 감히 우리 화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전부 죽일 거라고. 오늘 그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거야.”이홍연은 입을 비죽이면서 말했다.“난 처음부터 끼어들 생각 없었어.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건 사실 너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어. 네가 나한테 대답만 해준다면 내가 이 나쁜 지안수 장로를 대신 죽여줄 수도 있어!”지안수는 어리둥절해졌다.공주가 너무 빨리 태도를 바꾸는 바람에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뒤에 있던 일곱 명의 내각 장로들도 전부 안색이 어두워졌다.이홍연은 과연 정말로 내각 장로들을 돕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걸까? 아니면 윤구주를 돕기 위해서 온 걸까?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일까?급작스럽게 변한 상황 때문에 내각 사람들은 전부 표정이 어두워졌다.물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이홍연은 화진의 여섯째 공주였기 때문이다.“내가 떠난 뒤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 거야?”이홍연은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윤구주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했다.윤구주는 길
이홍연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심지어 화진의 우상 육도진마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뻔했다.그 질문은 모든 남자에게 치명적이었다.그러한 질문에 윤구주는 당연히 침묵을 선택했다.“대답해! 대답하라고! 누굴 선택할 거야?”이홍연은 계속해 물었다.서울로 돌아온 뒤로 이홍연은 줄곧 대답을 원했고, 그래서 지금 윤구주에게 따져 물었다.내각의 여덟 장로들을 포함해 다들 윤구주만을 바라보았다.그들은 윤구주가 이홍연을 선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윤구주가 정말로 이홍연을 선택한다면 내각의 여덟 장로는 오늘 끝장날 테니 말이다.다른 사람들이었더라면 당연히 이홍연을 선택할 것이었다.이홍연은 화진의 여섯째 공주였고, 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윤구주와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고 그녀의 몸에서는 황가의 피가 흐르기도 했다.바보라고 해도 당연히 이홍연을 선택할 것이었다.그런데 윤구주가 이홍연을 선택할까?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앞의 아름다운 이홍연을 바라보았다.“정말로 내가 꼭 선택하기를 바라?”“그래. 오늘 넌 나에게 반드시 대답해 줘야 해. 난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 난 이미 10년 넘게 기다렸다고!”이홍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휴, 홍연아. 미안해!”윤구주가 드디어 대답했다.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이홍연을 포함한 모두가 그의 대답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이홍연은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고 곧 온몸이 언 것처럼 덜덜 떨렸다.“그 뜻은 그 여자를 선택한다는 거야?”이홍연은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움을 견디며 윤구주를 향해 물었다.윤구주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두려운지 고개를 숙였다.“윤구주, 이게 네가 내놓은 대답인 거야? 난 그렇게 오랜 시간 널 기다리면서 널 사랑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선택하겠다고? 그래, 그래, 그래!”‘그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던 이홍연은 갑자기 비참한 얼굴로 웃었다.그러더니 이내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표정을
잇달아 비명이 터졌다. 운이 좋지 않았던 금위군들은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민규현의 막강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다들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민규현, 감히 국령을 무시해? 여봐라, 저놈을 잡아!”은성구가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그는 오늘 일을 크게 키울수록 내각의 여덟 장로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황기 금위군이 이곳에서 많이 죽기를 바랐다.안타깝게도 황기 금위군은 은성구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그들이 다시 한번 나서려고 하자 갑자기 차가운 고함이 뒤에서 들려왔다.“다들 멈춰!”육도진 우상이 앞으로 나섰다.황기 금위군은 육도진 우상의 목소리를 듣고 전부 그 자리에 멈춰 섰다.“육도진 우상, 이제 무슨 뜻이죠?”은성구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육도진을 바라보았다.“제 뜻은 아주 간단해요. 오늘 제가 이는 한 아무도 소란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육도지은 카리스마 넘치게 대답했다.은성구는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렇다면 육도진 우상은 암부가 반역죄를 판결받았다는 걸 아나요? 그리고 이 민규현 지휘사는 공공연히 우리 죄 없는 금위군을 죽였어요. 육도진 우상은 법을 어기고 그들을 감싸려는 건가요?”“감싼다고요? 은성구 장로, 그 말씀은 틀리셨네요. 우선 암부가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하는데 국주님께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세요. 그러니까 암부에 정말로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이렇게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시면 안 되죠. 그리고 민규현 지휘사는 종3품 지휘사예요. 그리고 구주왕의 가장 훌륭한 부하기도 하죠. 그런데 은성구 장로는 우리 화진 구주왕이 가장 아끼는 부하를 잡으려고 했죠. 그게 죽음을 자초하는 게 아니면 뭐죠?”육도진은 아주 날카롭게 내각의 여덟 장로 중 수장인 은성구와 격렬한 설전을 벌였다.“육도진 우상은 말을 아주 잘하시네요. 하지만 한 가지 잊으신 게 있는 것 같네요. 이 구주왕은 이제 더 이상 우리 화진의 왕이 아니에요. 지금 화진의 왕의 성함은 문아름이
오늘 윤구주는 반드시 지안수를 죽이겠다고 했다.문벌이 서울에 모인 이유는, 마씨 일가까지 온 이유는 문부상서인 지안수의 계략 때문이었다. 그는 문벌, 세가와 연합하여 윤구주를 죽일 생각이었다.그런 그를 윤구주가 살려둘 리가 없었다.“그러면 난? 윤구주,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넌 절대 지안수 장로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해!”이때 이홍연이 갑자기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윤구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그는 윤구주가 밉고 또 화가 났다.그녀는 윤구주의 반대편에 서고 싶었다.그래야만 마음속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홍연아, 응석 부리지 마. 내가 너한테 미안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야.”윤구주는 한때 소꿉친구였던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하하, 내가 응석을 부린다고? 미안하지만 윤구주, 지금부터 난 너랑 아무 사이 아니야. 난 오늘 문부상서를 살리고야 말 거야. 오늘 아무도 문부상서를 죽일 수 없어! 여봐라, 지안수 장로를 나한테 데려와!”이홍연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녀의 곁에 있던 절정 실력의 내시 두 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그들은 지안수에게로 걸어갔다.“오늘 우리 형님이 죽이겠다고 했으니 이 사람을 지키는 사람은 내가 전부 죽여버릴 거야!”남궁서준이 장검을 검집에서 빼냈다.남궁서준의 온몸에서 검기가 치솟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절정의 고수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두 명의 절정 실력의 내시는 남궁서준에게 가로막히자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때 근처에 있던 내각의 여덟 장로는 악랄한 웃음을 드러냈다.공주가 그들의 편에 선다면 그들은 무서울 것 없었다.육도진은 이홍연이 갑자기 내각의 여덟 장로 편에 서자 참지 못하고 투덜댔다.‘역시 여자는 여자라니까. 살면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여자야!’“꼬맹아, 비켜주길 바라. 우리는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단다.”남궁서준이 절정 실력의 내시 두 명을 가로막자 그중 키가 크고 마른 내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나가고 싶다면
절정 삼중천 실력의 내시가 공격하려는 순간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당신에게 그럴 실력이 있을까?”그 말과 함께 공간마저 일그러뜨릴 듯한 막강한 기운이 윤구주의 몸에서 내뿜어지며 절정 삼중천 실력을 갖춘 내시에게로 향했다.내시는 순간 산이 몸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그는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곧 두 다리가 통제할 수 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결국 윤구주가 내뿜는 강한 기운에 그 내시는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아, 당신...”다른 내시는 그 광경을 보고 바로 손을 쓰려고 했는데 윤구주가 다시 한번 시선을 들었다.쿵!그 막강한 기운은 쿵 소리와 함께 다른 한 절정 실력의 내시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강해도 너무 강했다.겨우 기운뿐이었는데도 이홍연 곁에 있던 절정 내공의 강자 두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그 광경에 사람들은 단단히 겁을 먹었고 심지어 내각의 여덟 장로들의 안색도 잇달아 어두워졌다.“윤구주, 설마 나까지 죽이려는 거야?”이홍연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윤구주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실력이 강하지 않았다.고집스럽게 윤구주에게로 다가갈 때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윤구주의 기운 때문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이홍연이 다가오자 윤구주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기운을 회수했다.그는 당연히 어렸을 때 소꿉친구였던 이홍연을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홍연아, 왜 굳이 이러는 거야?”윤구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건 전부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윤구주, 난 네가 미워! 미워 죽겠어!”이홍연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오늘 지안수는 반드시 죽어. 넌 막을 수 없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윤구주는 말을 마친 뒤 오른손을 들었다. 무시무시한 지현이 총알보다도 더욱 빠르게 움직여서 문부상서 지안수의 미간을 꿰뚫었다.내각의 여덟 장로 중 한 명인 지안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었다.“정말로 지안수 장로를 죽였어?”내각대학사 은성구는 윤구
그러나 윤구주는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돌리면 참지 못할까 봐, 후회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결국 한숨을 내쉰 뒤 떠났다.윤구주가 그대로 떠나자 이홍연은 슬픈 얼굴로 그대로 주저앉았다....오늘의 전투가 드디어 끝났다.서남의 장씨 일가, 서울에 모인 다른 문벌들 모두 윤구주에게 살해당했다.심지어 제자백가 중 하나인 마씨 일가의 후손 마청운도 윤구주에게 살해당했다.그뿐만 아니라 윤구주는 내각의 여덟 장로 중 한 명인 문부상서도 죽였다.오늘 있었던 일 중 그 어떤 것도 모두 서울을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었다.윤구주는 그만큼 놀라운 일을 한 것이다.국방부, 이황전. 넓고 음산한 대전 안에는 남색 장포를 입은 내각대학사 은성구가 꼼짝하지 않고 대전 안에 서 있었다.그는 아주 중요한 사람을 기다리는 듯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이황왕께서 도착하셨습니다!”그 목소리와 함께 비단옷을 입은 문아름이 편전에서 걸어 나왔는데 그녀의 차림새는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경국지색의 미모에 요염한 몸매를 갖춘 그녀는 요물이 따로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미간에서 권력을 향한 갈망과 악랄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다.그녀가 바로 화진의 새로운 왕, 이황왕이었다.문아름이 대전에 모습을 드러내자 내각대학사 은성구는 곧바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이황왕을 뵙습니다!”문아름은 천천히 금색 의자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은성구 대학사, 오늘 왜 갑자기 절 찾아오신 거죠?”“저하, 태화루는 오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서남 장씨 일가와 문벌들 모두 윤구주에게 살해당했어요. 심지어 제자백가 중 하나인 마씨 일가의 후손 역시 살해당했습니다.”은성구가 보고를 올렸다.금색 의자에 앉아 있던 문아름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역시 내 예상대로였네요!”“저하?”은성구는 문아름의 말을 듣자 의아했다.사실 오늘 태화루의 일은 문씨 일가에서 계획한 것이었다
은성구는 문아름의 말에 넋이 나갔다.“저하, 하지만 그들은 전부 죽지 않았습니까?”문아름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죽었기 때문에 더 이용 가치가 있는 거죠!”말을 마친 뒤 문아름은 자리에서 살짝 일어났다.“은성구 대학사, 생각해 보세요. 천하의 문벌이 윤구주를 제압할 수 있을까요?”은성구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당시 화진 무도의 3대 서열이 힘을 합쳤음에도 윤구주가 곤륜에서 왕으로 등극하는 걸 막지 못했다.그런데 겨우 문벌 따위가 윤구주를 막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렇다면 세가는요?”문아름이 재차 물었다.“만약 제자백가 전부 똘똘 뭉쳐서 윤구주에게 대항한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백가의 저력은 문벌 따위와 비교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은성구가 말했다.은성구의 말을 들은 문아름은 웃었다.“맞는 말이에요. 내가 왜 마씨 일가의 후손을 초대했는지 알아요? 난 처음부터 그 사람을 죽으라고 보낸 거예요. 세가의 사람이 죽어야만 세가의 그 늙은 괴물들이 윤구주를 상대하겠다고 튀어나올 테니까요. 이제 내가 왜 그들을 총알받이라고 했는지 알겠죠?”그 말에 은성구는 순간 모든 의문이 풀렸다.그는 확실히 이해가 갔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문씨 일가가 계획한 일이었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오늘 태화루도, 내각의 여덟 장로도 모두 그녀의 계획에 이용당했을 뿐이다.그런 생각이 들자 은성구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저하, 하지만 오늘 지안수 장로마저 윤구주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문맥의 중추인 지안수는 은성구와 오랫동안 함께 조정에서 일했기에 은성구와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지안수가 윤구주의 손에 죽었다는 생각에 은성구는 분통이 터졌다.“잘된 일이죠. 지안수 장로가 죽었으니 내각의 나머지 일곱 장로들이 함께 국주에게 보고하여 윤구주를 상대하면 되잖아요!”문아름은 웃으며 말했다.은성구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저하, 저하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지만 국주님께서는 사실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