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주는 당연히 소채은을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바보야, 내가 왜 화를 내. 그런 생각하지 마.”소채은이 이를 듣더니 기쁜 표정으로 윤구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헤헤. 우리 구주가 화 안 낼 줄 알았어.”“근데 걱정하지 마. 내가 소씨 그룹 장사를 더 열심히 해서 스폰해 줄게. 우리 구주한테 말도 못할만큼 큰 별장 사서 안에서 살게 해줄게.”소채은의 말에 윤구주는 입꼬리가 올라갔다.둘은 그렇게 수다를 한참 더 떨다가 쇼핑하러 갔다.멀찌감치 숨어 있던 소청하는 윤구주가 소채은과 함께 떠나고 나서야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우뚝 솟은 용인 빌리지를 바라봤다.“빌어먹을!”“정말 빌어먹을!”“윤구주 그 거렁뱅이가 왜 여기 있어!”“아니야. 직장도 없는 병신이 어떻게 이렇게 번화한 별장 구역에 세 들어 살겠어?”소청하는 생각할 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는 걸음을 옮겨 용인 빌리지 아래로 향했다.고개를 들고 두눈을 크게 뜬채 용인 빌리지를 바라봤다.빌리지 위로 안개가 자욱이 껴 있었다.해가 중천인데 빌리지는 안개가 자욱했기에 빌리지가 어떤 상황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쯧쯧, 역시 강성시에서 제일 비싼 용인 빌리지야.”“빌리지 위로 낀 안개만 봐도 천국 같네.”소청하는 부러운 눈빛으로 용인 빌리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근데 윤구주 그 거렁뱅이는 용인 빌리지에 무슨 일로 왔지? 여기서 알바라도 하나? 아니면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나?”“안 되겠어. 조사해 봐야겠어.”“그 거렁뱅이 놈이 재벌인 척하면서 여기 산다고 거짓말하면서 내 딸한테 사기 치면 어떡해.”소청하는 이렇게 생각하며 위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걸음을 옮겨 산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산길을 밟자마자 주변에 낀 안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는 마치 산이 갈라지고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기세로 갑자기 사방에서 그를 향해 몰려왔다.천하회의 사람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인데 소청하 같은 일반인은 더 감당이
그녀는 두씨 집안의 두나희였다.이때 백경재가 기절한 소청하를 업고 산길로 걸어왔다.심심해서 대문 앞에 앉아있던 두나희는 백경재가 갑자기 사람을 업고 오자 눈동자가 커지더니 그쪽으로 달려갔다.“어르신, 뭐해요? 왜 시체를 업고 와요?”백경재는 두나희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기절한 소청하를 잡아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소청하는 저쪽에 널브러졌다.“망할 어르신, 내가 묻잖아요. 허구한 날 왜 시체를 업고 오냐고요?”두나희는 바닥에 던져져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소청하를 보고 그가 죽은 줄로 알았다.“어린애가 뭘 안다고.”“이런 돈과 권력밖에 모르는 쓰레기가 죽을 리가 있나? 그냥 저하가 배치한 운산대진에 놀라 쓰러진 거야.”백경재가 말했다.두나희는 궁금한지 앞으로 다가가 소청하의 상태를 살폈다.자세히 보니 소청하는 죽은 게 아니라 그냥 기절한 것이었다.“어르신, 지금 이렇게 쓰러졌는데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두나희가 물었다.“내가? 저 사람을?”“꿈도 꾸지 마.”“저 자식 눈에 돈밖에 없는 놈이야.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판에 내가 왜 구해?”백경재가 욕설을 퍼부었다.“왜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두나희는 백경재가 이 정도로 화를 내자 이유가 궁금해졌다.“미워하면 안 돼?”“눈에 돈밖에 없는 저 자식 채은 아가씨 아버지 되는 사람이야.”“이 빌어먹을 놈이 글쎄 우리 저하를 감히 얕잡아보는 것도 모자라 말끝마다 저하를 모욕하고 있어. 저하가 채은 아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저하가 착해서 그렇지 나 같았으면 진작에 죽여버렸어.”백경재가 말했다.뭐?“이 사람이 그 여우 같은 언니 아버지라고요? 그리고 감히 우리 구주 오빠를 욕보였다고요?”두나희가 이를 듣더니 펄쩍 뛰었다.“그래!”백경재가 대꾸했다.“이 빌어먹을 새끼가! 열 빡치네!”두나희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약간은 미쳐 있는 이 소녀는 원래도 윤구주가 소채은을 좋아하는 걸 질투하고 있었다.근데 소청하가 소채은의 아버지고 윤구
두나희가 진짜 소청하를 죽이려 들자 백경재는 어이가 없었다.백경재는 두나희가 미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든 해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됐어. 그만해. 정말 저 돈밖에 모르는 자식 죽였다가 저하가 영원히 너 상대하지 않을 수도 있어.”백경재가 얼른 말했다.두나희는 윤구주가 화낸다는 소리에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물었다.“진짜요?”“당연하지.”“그래요. 그럼 일단 살려두죠 뭐. 근데 혼 좀 내주는 건 괜찮잖아요?”두나희가 얍삽하게 웃으며 말했다.백경재는 기절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소청하를 힐끔 쳐다봤다.원래도 돈밖에 모르는 소청하를 역겨워하던 백경재라 두나희를 딱히 막지는 않았다.“숨만 붙여둬. 다른 건 상관 안 할게.”“아하하. 알겠어요. 나한테 맡겨요.”두나희는 겉보기에는 7, 8살밖에 안 되어 보였지만 실력은 무사의 경지와 다를 바 없었다.소녀는 작은 손을 들어 소청하의 다리를 잡더니 짐짝을 끌듯이 질질 어디론가 끌고 가 훈육했다.백경재는 실눈을 뜨고 웃었다.…점심.고급 승용차 몇 대가 용인 빌리지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건 강성시 제일 갑부 주세호였다.정갈한 슈트를 맞춰 입은 그의 뒤로 몇 명의 보디가드 외에 천하회의 노정연 등 사람이 따랐다.오늘 그는 특별히 천하회의 멤버들을 데리고 윤구주를 뵈러 온 것이다.절세의 노정연은 연보라색의 한복을 입고 있었고 그 뒤로는 귀선경지를 수련하는 마 선생과 대무사 서양이 따랐다.고개를 들어 용인 빌리지를 힐끔 보던 주세호가 말했다.“노정연 씨, 이쪽입니다. 저하는 빌리지에 있을 것입니다.”이렇게 말하더니 주세호는 걸음을 옮겨 용인 빌리지로 향하는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회장님, 잠시만요.”노정연이 갑자기 주세호를 불러세웠다.“왜 그러십니까?”주세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회장님, 이렇게 불쑥 찾아가도 괜찮겠죠? 무슨 일 없겠죠?”조금 겁이 나는 노정연이었다.저번에 윤구주를 미행했다가 하마터면 윤구주 손에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게다가 암부의 민도살
“어? 주 회장님이셨군요!”백경재는 주세호를 보더니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백 대사님, 안녕하세요!”주세호가 얼른 인사를 건넸다.“주 회장님, 오늘 어쩐 일로 이 용인 빌리지에 오신 거예요? 어? 이 자식들 천하회 사람들 아닌가요? 이 자식들은 왜 또 왔대요?”백경재는 주세호의 뒤에 노정연 등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백 대사님, 오해하지 마세요! 전 천하회 사람들을 데리고 저하를 뵈러 온 겁니다!”주세호가 서둘러 말했다.“저하를 뵈러 온 거라고요?”백경재는 천하회 사람들을 힐끗 보았다.“죄송합니다. 저하께서는 조금 전에 나가셔서 아마 당장은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다.”백경재가 솔직히 말했다.“괜찮습니다. 저희가 기다리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려도 괜찮습니다!”노정연이 서둘러 말했다.그녀는 오늘에도 허탕을 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백경재는 비록 천하회를 못마땅히 여겼지만 주세호와 윤구주가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그렇게 백경재는 주세호와 천하회 사람들을 데리고 산을 올라 윤구주를 기다렸다.주세호가 천하회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 오른 지 20분이 되지 않았을 때, 또 차 여러 대가 용인 빌리지에 도착했다.맨 앞에 있는 아우디 A6 여러 대 뒤로 검은색 승용차들이 따르고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가장 처음 아우디에서 내린 사람은 강성시 정계 인사들이었다.그중 시장 임기준이 선두에 섰고 그의 뒤로는 비서실장, 국회의원, 행정팀장 등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은 강성시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들로 저번에 제1교도소에 갇혔던 자들이었다.그들은 윤구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감사패를 들고 시장 임기준과 함께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그들은 윤구주가 목숨을 구해준 것에 감사하는 동시에 강성시 시민들의 안전을 지켜준 것에 감사했다.강성시 정치인들이 차에서 내리자 뒤에 줄지어 서 있던 승용차에서 암부 직원 30명가량이 내렸다.앞장선 사람은 당연하게도 암부 3대
민규현이 암부 사람들과 강성시 정계 인사들을 데리고 산에 오를 때, 백경재는 곧바로 운산대진의 파동 변화를 눈치챘다.“응? 빌어먹을, 왜 또 갑자기 산에 함부로 오르는 사람이 생긴 거야?”백경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산 아래쪽의 운무 파동을 바라보았다.이때 산 위에서 ‘쾅’하는 굉음이 들려왔고, 주위를 가득 메웠던 운무가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제기랄, 누군가 저하의 대진을 파괴한 건가? 어떤 놈이 이렇게 간 큰 짓을 저지른 건지 그 낯짝이나 한 번 봐야겠군!”굉음이 들려오자 백경재의 얼굴에서 경련이 일었다. 그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빠르게 산 아래로 향했다.용인 빌리지 입구에 있던 주세호와 천하회의 노정연 등 사람들 역시 산 아래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자 호기심이 일었다.‘누가 온 거지? 누가 윤구주의 운산대진을 파괴한 걸까?’구불구불한 산길 위, 호존 민규현이 홀로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자욱하게 낀 운무가 가까이 다가오려 할 때마다 민규현은 주먹으로 그것들을 흩어지게 했다.“어떤 쥐새끼가 감히 이곳에 난입한 것이냐?”민규현이 암부 사람들과 강성시의 정계 인사들을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을 때, 백경재의 분노에 찬 고함이 멀리서 들려왔다.“접니다!”민규현이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어라?’“민규현 지휘사님입니까?”그곳으로 날아간 백경재는 민규현을 보는 순간 기가 막혔다.“민규현 지휘사님이셨군요.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조금 전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주시죠!”백경재가 서둘러 사과했다.민규현은 백경재가 윤구주 곁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따지지 않고 물었다.“저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저하께서는 금방 외출하셔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그래요. 그러면 전 산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민규현은 말을 마친 뒤 성큼성큼 걸어갔다.백경재는 당연히 민규현을 막을 배짱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앞장서서 민규현을 안내했다.한참을 걷던
임기준은 며칠 전 제1교도소에서 판인국의 습격을 받았던 일을 죄다 얘기했고, 주세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깨달았다.강성시 정계 거물들은 오늘 윤구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옆에 있던 천하회 사람들은 강성시의 시장까지도 윤구주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을 보며 윤구주를 향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다.“천하회 사람들은 왜 또 온 거지?”민규현의 싸늘한 시선이 노정연과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 쪽으로 향했다.그 서늘한 위압감에 겁을 먹은 노정연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민규현 지휘사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윤구주 선생님을 뵙기 위해 온 것입니다.”“흥! 우리 저하를 귀찮게 할 생각은 아니고?”민규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닙니다. 민규현 지휘사님, 절대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는 단지 윤구주 선생님과 연을 맺고 싶은 것뿐입니다. 정말입니다!”노정연은 도와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주세호를 바라보았다.“민규현 지휘사님, 이분들은 정말로 그저 저하를 뵈러 온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데려온 것이니 탓하지는 말아주십시오!”이때 주세호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그러나 민규현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그는 차갑게 코웃음치며 말했다.“경고하는데 같잖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저하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이런 사람들은 그럴 자격도 없으니 말이에요.”민규현은 주세호를 나무라는 동시에 노정연 등 천하회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번듯한 서경 천하회를 이토록 업신여기다니?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반박 한 번 하지 못하고 그저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한편, 강성시 시장 임기준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앞으로 나섰다.“여러분들도 윤 선생님을 만나러 오신 거군요. 잘 됐습니다. 같이 기다리시죠!”그렇게 천하회 사람들은 묵묵히 구석 자리에 서 있었고, 주세호는 민규현이 데려온 암부 사람들과 함께 다른 쪽에 서 있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다. 주세호, 천하회, 암부, 강성시 정계 인사들이 다
윤구주는 용인 빌리지가 이렇게 북적북적할 줄은 몰랐다.민규현과 주세호뿐만 아니라 천하회와 강성시 정치인들까지 몰려들다니.윤구주는 주위를 쓱 둘러본 뒤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백경재가 서둘러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이자들이 저하를 뵙고 싶다고 해서요!”“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네.”말을 마친 뒤 백경재는 고개를 돌려 주세호와 민규현을 바라보았다.민규현이 첫 번째로 윤구주의 곁에 다가갔다.“저하, 이 정계 인사들이 뻔뻔하게도 꼭 저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요...!”말을 마친 뒤 민규현은 시장 임기준 등 사람들을 가리켰다.“윤 선생님, 절 기억하십니까?”임기준은 윤구주가 그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전 강성시 시장 임기준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비서실장이고 이쪽은 국회의원입니다. 저번에 윤 선생님께서 제1교도소에서 저희를 구해주신 적이 있습니다!”옆에 있던 비서실장과 국회의원은 서둘러 윤구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윤구주는 임기준의 말을 듣자 싱긋 웃어 보였다.“시장님이셨군요.”“네, 네! 저번에 제가 꼭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겠다고 해서 오늘 이렇게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임기준이 말했다.“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요.”“아뇨, 아닙니다! 전 그저 저희 강성시 시민들을 대표해서 윤 선생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은 겁니다. 만약 윤 선생님께서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강성은 그 판인국 놈들 손에 엉망진창이 됐을 겁니다.”윤구주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그들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고개를 돌리자 천하회의 노정연 등 사람들이 보였다.“음?”원피스를 입은 노정연은 윤구주의 눈빛에 지레 겁을 먹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윤 선생님, 혹시나 방해가 되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서경 천하회는 진심으로 윤 선생님과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 부디 저희 천하회에게 한 번만
소청하는 두나희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로 바닥에 누워있었다.그러다 한참이 지나 다시 깨어났다.“내,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소청하는 정신을 차린 뒤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보고 어리둥절해졌다.“아이고, 아파라!”몸을 살짝 움직이자 온몸의 뼈가 부러진 듯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특히 두 손과 두 다리는 밧줄로 묶여 있었다.“이럴 수가! 누가 날 묶은 거지?”소청하는 큰 충격을 받고 넋이 나갔다.“헤헤, 빌어먹을 놈. 드디어 깨어났네.”이때 목소리 하나가 소청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누구야?”소리를 들은 소청하는 흠칫 놀랐다.“나다!”두나희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소청하의 앞에 섰다.갑자기 나타난 7, 8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를 본 소청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넌 누구야? 왜 날 묶은 거야? 그리고 여긴 어디야? 빨리 날 풀어줘!”소청하는 어린 두나희를 보자 불같이 화를 냈다.“잘 들어. 난 두나희라고 해!” “두나희? 난 널 몰라. 얼른 이거 풀어!”소청하는 버둥거리면서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려고 했다.“날 모른다고? 하지만 난 개자식인 널 알고 있지! 네가 그 여우 새끼 아빠지?”두나희는 소청하를 향해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여우 새끼?”소청하는 기가 막혔다.“소씨 성을 가진 그 언니 말이야. 감히 모른다고 할 건 아니지?”두나희가 다시 한번 말했다.“너... 너 설마 채은이 보고 여우 새끼라고 한 거니?”소청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하, 이 개자식이. 드디어 인정하네! 맞아, 채은 언니가 바로 그 여우 새끼야! 채은 언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주 오빠에게 꼬리를 친 것도 모자라 몇 번이나 우리 오빠를 찾아왔어. 그러니까 여우 새끼지!”어린 여자아이가 소채은을 여우 새끼라 지칭하면서 윤구주의 이름까지 들먹이자 소청하는 어이가 없었다.“너, 너, 너 설마 그 윤구주랑 아는 사이니?”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두나희에게 물었다.“당연하지! 구주 오빠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