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호는 웃으면서 말했다.“저하를 위해서라면 소인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이 영감탱이가 진짜! 그만 딸랑대고 들어가요 좀! ”윤구주는 주세호를 욕했지만 카드는 받았다.“알았으니깐 이 카드는 일단 받을게요.”윤구주가 블랙카드를 쓰겠다고 하자 주세호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그리고 내가 SK그룹을 조사해 봐라는 건 어떻게 됐어요?”윤구주는 블랙카드를 넣으면서 물었다.주세호는 얼른 대답했다.“소인이 알아봤는데 지금 소씨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소천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SK그룹은 제약을 위주로 하고 있지만 요즘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지금은 엄중한 파산위기에 들이닥쳤다고 합니다.”윤구주는 턱을 만지면서 말했다.“그렇구나!”“세호 씨! 내가 세호 씨더러 SK그룹을 인수해라면 할 수 있겠어요?”“저하! 저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닙니까? 이런 자그마한 가족기업은 제가 하루에도 수십 개를 인수할 수 있죠!”윤구주는 주세호를 째려보았다.“저하, 그런데 왜 SK그룹에 흥미를 보이세요? 이미 다 죽어가는 기업 같은데.”주세호는 장사꾼으로서 무척 궁금해하였다.“그건 세호 씨가 신경 쓸 거 아니에요. 그냥 지금 빨리 SK그룹을 인수하기만 하세요. 그리고 인수한 다음 회사를 소채은 이름으로 넘겨주세요!”“네?”“소채은이 누군데요?”주세호는 너무 궁금하였지만 윤구주가 눈치를 주자 주세호는 더 묻지 않았다.“저하, 제가 또 도와드릴 것이 있나요?”주세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없어요! 이제 그만 가세요! 일 있으면 또 연락할게요!”윤구주는 손을 흔들며 주세호를 배웅해 주고 스카이 가든으로 돌아왔다.주세호는 90도 인사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 스카이 가든을 보면서 투덜거렸다.“저하가 사는 집이 이게 뭐야! 너무 허접한데. 이제 내가 꼭 스카이 부동산을 인수해 버릴 거야! 우리 저하를 이런 곳에 살게 하다니. 말도 안 돼!”한참을 투덜거린 후 주세호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떠났다.집으로 돌아온 윤구주는 어떻게 이 블랙카드를 소채은에게
그녀는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윤구주는 까망이와 놀고 있었다.소채은은 내려온 후 곧바로 윤구주를 향해 말했다.“구주야, 이리 와봐, 물어볼 게 있어.”윤구주가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러자 소채은은 주머니에서 한 장의 블랙카드와 봉투를 꺼냈다.“이게 뭐야?”윤구주는 블랙카드를 보자 서둘러 말했다.“이건 오늘 아침에 어떤 노인이 당신한테 보낸 거야. 또 이 카드에 돈이 있으니 먼저 쓰라면서 말이야! 그래서 나는 당신이 자는 틈을 타서 문틈에 쑤셔 넣은 거고.”“어떤 노인이 나한테 보낸 거라고?”그 말을 듣자 소채은은 조금 의아해하며 서둘러 물었다.“어떤 노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봤어?”그러자 윤구주는 제멋대로 지어내어 두루뭉술 둘러댔다.‘어이가 없네, 이른 아침에 누군가 나한테 블랙 카드를 보냈다고? 심지어 돈이 들어있는걸? 이게 무슨 장난이람?’“그럼 그 노인은 지금 어디에 있어?”소채은이 다시 물었다.“이미 일찍이 떠났는데?”손에 든 카드를 보며 소채은은 마구 의심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우 현실적이고 신중한 사람으로서 아침 일찍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돈을 건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그러나 소채은은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이윽고 그녀는 위층에서 옅은 화장을 한 후에, 액세서리 상자를 안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구주야, 우리 전당포로 가자.”“응? 전당포에는 왜 또 가?”“허튼소리 하지 마, 우리 지금 수중에 50만 원밖에 없거든? 어제 그 밥값도 안 되는 돈이라고, 그러니 전당포에 가서 물건을 좀 맡기고 돈을 바꿔야지, 안 그럼 어떻게 살려고 그래?”“하지만, 아침에 이미 어떤 노인이 돈을 줬잖아!”“주긴 뭘 줘! 구주야 혹시 바보야? 모르는 사람이 괜히 돈을 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러자 윤구주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누가 바보라고 그래!”하지만 결국 그는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가자, 구주야.”그렇게 소채은은 윤구주에게 액세서리 상자를 건네준
대어가 일식점의 사장을 보자 소채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사장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외상값을 드리려고요.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사장도 아주 좋은 사람이었는지라 선뜻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이윽고 그는 종업원에게 포스기와 결제 코드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그러나 소채은은 조금 전 전당포에서 현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온라인 지불을 할 수가 없었다.“사장님, 혹시 현금으로 결제 가능할까요?”그러자 사장이 흠칫하더니 이내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희 식당은 카드나 온라인 결제만 가능해서요!”이 말에 소채은이 난처해하던 그때, 윤구주가 나섰다.“채은아, 그럼 카드로 결제하면 되잖아!”‘카드? 무슨 카드?’윤구주의 말에 소채은은 잠시 얼떨떨해졌다.곧이어 대어가의 사장이 거들어 말했다.“이분 말씀이 맞습니다. 카드 결제가 가장 좋아요!”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포스기를 가져왔다.하지만 소채은은 안색이 순간 어둡게 변하더니 얼른 윤구주를 끌고 한쪽으로 향했다.“윤구주 바보야? 내 은행 카드는 모두 가족들 때문에 정지당했잖아! 지금 무슨 카드가 있다고 그래?!”“오늘 아침에 받은 그 카드 말이야!”“뭐? 낯선 노인이 준 그 블랙 카드 말이야?”“맞아!”소채은은 어이가 없었다.‘미친 거 아니야? 정말 낯선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나한테 돈을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러나 지금 대어가 일식점에서는 현금을 받지 않았고, 오직 카드나 온라인 결제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채은은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주세호가 보낸 블랙카드를 꺼내 식당 사장에게 건넸다.처음 카드를 받았을 때 사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카드를 긁으려는 순간, 그는 위에 있는 에르메스의 그림과 함께 새겨진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이건...?”사장은 견식이 넓은 사람이었다.이 카드를 몇 번 더 자세히 살펴보더니, 그의 두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카드 재질이 티타늄 합금 금속 재
“두 귀빈분께 죄송합니다, 전에는 저희 식당의 불찰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두 분을 대기실로 모실 테니 편히 쉬고 계시는 동안 저희가 이번 실수에 대한 보상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보상?’그 말을 듣고, 소채은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보상은 무슨 보상?”소채은이 의아해하며 답답해하자 윤구주가 피식 웃었다.“채은아, 우리는 일단 대기실로 가자고!”옆에 있던 사장은 그가 승낙하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굽혀 말했다.“두 분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곧이어 사장은 서둘러 소채은과 윤구주를 데리고 식당의 가장 호화로운 대기실에 도착했다.그런 다음, 사장은 또 웨이터더러 얼른 좋은 커피 두 잔을 내오라고 하고, 과일 쟁반에 간식을 많이 담아 왔다!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그는 공손하게 자리를 떴다.사장의 이런 행동에 소채은은 어리둥절해졌다.“구주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사장님이 왜 갑자기 이상해지신 거지?”하지만 윤구주는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 또 그들을 찾아왔다.다만, 이번에 그의 손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선물 세트가 하나 들려 있었고, 또한 소채은의 차 키도 들려 있었다.“귀하신 여사님, 죄송합니다. 어제는 저희가 뭘 모르고 여사님의 차를 담보로 받았네요. 보상의 의미로 어제의 식비는 모두 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여사님께서 저희 식당에 오신다면 가장 호화로운 룸, 가장 존귀한 자리에서 만찬을 즐기실 수 있으며, 동시에 모든 소비는 저희 식당이 부담할 것입니다!”“네?”소채은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이게 뭐야 대체! 나는 그냥 밥값 내러 왔을 뿐인데, 갑자기 면제해 주겠다고 하지를 않나, 심지어 앞으로 언제든 공짜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미쳤나 봐!’“사장님, 진심이세요? 어제 저희가 분명 외상 했었잖아요!”그러나 사장은 오히려 더욱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여사님, 정말 너무 겸손하십니다. 여사님께서 저희 식당에 오신다는 것만으로도
이 장면은 대어가 일식점의 종업원조차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사장님, 왜 저 사람들을 무료로 해주시는 거예요? 우리 대어가 일식점은 개업한 이래로 가장 귀한 VIP 손님조차에게도 이런 대우를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왜 우리 가게의 마스코트인 황금 고래까지 선물로 주세요?”그러자 사장이 말했다.“너희가 뭘 알아? 방금 그 두 사람은 우리 가게의 재물신이라고, 재물신!”“재물신이요?”종업원은 멍해지고 말았다.“그래! 하하, 잘 봐둬, 오늘부터 우리 식당은 아주 유명해질 테니까!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카드를 가진 귀한 손님이 우리 식당에 와서 밥을 먹는 다라, 이 일을 홍보하기만 하면 우리 식당은 수십억의 광고비를 절약한 거나 다름없다고! 부자야 부자, 이제 우리 가게는 돈방석에 앉을 거야!”사장은 미친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하지만 종업원들은 그 블랙카드가 무엇인지, 더욱이 조금 전 그 두 사람이 도대체 무슨 큰 인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대어가 일식점을 떠난 후에도 소채은은 아직 머리가 멍했다.자신의 차 안에 앉아서 손에 든 24K 황금 고래와 블랙카드를 힐끗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했다.한편 윤구주는 느긋하게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한참이 지나자, 소채은은 머리를 힘껏 젓더니 다시 자신을 꼬집었다.“구주 씨, 나 지금 이거 꿈꾸는 거지? 대어가 일식점의 사장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식비도 면제해 줘, 게다가 황금 고래도 줘... 이거 봐, 진짜 순금이라니까? 몇십억은 훨씬 넘을 가치라고!”소채은이 묵직한 황금 고래를 들어 올리면서 말하자 윤구주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들, 일 좀 할 줄 아네!”“일 좀 할 줄 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소채은은 이해하지 못했다.“이건... 잠시동안은 설명이 어려워! 그저 장사꾼은 절대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만 명심해.”그러자 소채은은 알듯 말 듯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일단 집에 가자!”“응!”그렇게 소채은은 자신의 미니 벤츠를 타
그녀의 비명을 듣고, 윤구주는 몸을 흠칫 떨더니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왜 그래?”소채은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주세호가 보낸 블랙 카드도 있었다.십여 초가 지나서야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구... 구주야... 빨리 와서 이것 좀 봐!”그가 다가가서 화면을 바라보니 안에는 블랙카드의 소개가 표시되어 있었다.“이, 이, 이 카드... 세계에서 가장 귀한 블랙카드래! 세상에, 이게 바로 그 전설적인 카드구나, 아무 조건도 없이 전 세계에서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카드 소지자는 각국의 정계 고위층, 즉 엄청난 자산가이자 유명인사들이고, 그 외에는 누구도 이 카드를 신청할 수 없대!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카드의 한도가 무제한이라는 거야!노트북 모니터를 가리키며 소채은은 잔뜩 놀라 멍하니 있었다.그녀는 이런 블랙카드를 본 적이 없지만, 이 카드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다.갑자기 자기 손에 쥐어있는 이 카드가 모니터에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보고 그녀는 얼떨떨해졌다.윤구주는 소채은이 이렇게 빨리 그 카드의 정체를 알아내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는 연신 코를 만지며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행동했다.“이 카드가 그런 거였어? 음~”“고작 그런 게 아니야. 구주야는 이런 카드 본 적 없지? 내가 설명해 줄게. 이 카드를 가진 사람은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가장 귀한 VIP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카드의 한도가 무제한이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긁을 수 있고, 몇 억을 긁어도 괜찮다는 거야!”소채은이 약간 흥분하며 말하자 윤구주도 곧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좋은 일 아니겠어? 채은아는 앞으로 다시 돈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잖아!”“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걱정이 사라졌다니, 나는 지금이 더 골치 아파졌는데.”윤구주는 그녀의 말이 전혀 이해 가지 않았다.“돈이 생겼는데 왜 더 골치가 아파?”그러자 소채은이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
“하지만 우리에겐...”우리에게는 블랙카드가 있지 않냐고 말하려 했지만, 윤구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소채은은 그의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다.“그 블랙카드 쓸 생각은 하지 마! 남의 돈을 나는 쓰지 않을 거고, 더욱이 원래 써서는 안 될 돈이야! 더군다나, 그 블랙카드는 출처도 불분명하고 심지어 누가 보낸 건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감히 쓸 수 있겠어?”윤구주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잠시 동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됐어,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가 봐, 나는 일자리를 찾아야겠으니.”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윤구주를 아래층으로 내쫓았다.아래층으로 쫓겨난 윤구주는 가슴이 답답해 났다.“주세호 씨한테 돈을 보내라고 한 건 잘못된 결정이었어! 그나저나 SK그룹 인수는 어떻게 됐나 몰라...”...소씨 저택.소채은이 윤구주를 따라 떠난 후로, SK 그룹은 진퇴양난의 길에 빠졌다.현재, 중해그룹은 SK그룹과의 협력을 완전히 중단했다.게다가 SK 제약공장은 이미 3개월째 직원들의 월급을 주지 못해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때문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이때, 거실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둘째야, 오늘부터 네 딸은 더 이상 소씨 가문 식구가 아니다. 우리 가족이 될 자격이 없어!”“나는 가주로서 지금 소채은의 소씨 가문 신분을 박탈한다. 앞으로 그 아이는 더 이상 소씨 성을 가질 수 없어. 더욱이 이 소씨 저택에는 한 발짝도 못 들일 거야!”이 말을 한 사람은 당연히 소씨 가문의 소천홍이다.그는 어두운 얼굴로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아 소청하를 향해 노발대발하고 있었다.“형님, 채은이는 그 남자한테 속은 겁니다. 우리가 굳이 이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소청하는 그가 용서해주기를 바랐다.“속였다? 허허, 지금 와서 그 비열한 딸을 지키려는 거야?”소천홍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네 딸이 그 자식을 시켜 성훈 도련님을 때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SK그룹이 지금과 같은 파산 상황에까지 이르렀
“아버지, 그 천한 계집애가 이제 소씨 가문에서 쫓겨났으니,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밀폐된 방 안에서 소진이 소천홍에게 물었다.그러자 소천홍이 피식 냉소했다.“이다음에는 둘째가 가지고 있는 SK그룹 주식을 전부 가져오기만 하면 돼!”“그런데 아버지, 지금 우리는 성훈 도련님께 미움을 산 상태잖아요. 설령 SK그룹의 주식을 전부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성훈 도련님하고 말할까요?”소진이 다시 물었다.“안심하거라. 성훈 도련님 쪽은 우리 잘못도 아니잖니. 게다가 그때 가서 중해 그룹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내가 방법을 강구해서 우리 SK그룹을 팔 수도 있고...”“팔아요? 아버지,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우리 회사는 해마다 적자인데, 누가 이런 부실한 기업을 사려 들겠어요...”그 말에 소천홍이 미간을 찌푸렸다.사실대로 말해서, 그는 현재의 SK 제약에 전혀 자신이 없었다.소진이 말한 대로 최근 몇 해 동안 SK는 적자가 매우 심했고 이미 3개월째 직원들 월급조차 미납한 상태였으니 말이다.현재의 SK 제약은 이미 완전히 생산이 중단된 상태이며, 직원들은 수시로 찾아와 독촉하고 있다.이 모든 것을 생각하니, 소천홍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바로 그때, 소씨 저택의 하인이 허둥지둥 뛰어 올라왔다. “주인님, 주인님!”하인이 당황한 표정을 하자 소천홍이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허둥지둥 뛰어오는 거야?”“DH그룹 사람이 왔습니다!”“뭐? DH 그룹?”이 네 글자를 듣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젠장, DH그룹은 왜 또 온 거야? 또 그 계집애를 찾는 건가?”지난번에 온 표태훈의 얼굴이 떠오르자 소천홍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주인님, 그 사람들은 아마 사업 때문에 온 것 같습니다.”“사업? 그럴 리가. 강성 제일의 기업이 어떻게 우리 SK그룹과 사업을 논할 수 있겠어?”그가 의아해하며 묻자 오히려 소진이 말했다.“아버지, 일단 우리 먼저 나가볼까요?”소천홍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끝내 승낙했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